성경강해

<聖經> 로마서14:1-23

<題目> 성도의 자유의 한계


<序言>

  당시 로마 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불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음식과 절기 문제로 분열현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문제를 아디아포라 문제로 보고 그런 문제에 있어서 서로 포용해야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아디아포라(αδιαφολα)'대수롭지 않은 것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의 뜻으로서, 하나님이 분명하게 명하지 않거나 금하지 않은 문제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계명처럼 어떤 사안에 대해 분명하게 명하거나 금한 내용이 있지만, 분명하게 명하거나 금하지 않은 내용도 있습니다. 또 모든 그리스도인이 중요하게 지켜야하는 교리적인 내용도 있지만, 각 그리스도인이 상황에 따라 양심대로 판단하여 지켜야하는 허용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것도 있고, 허용된 것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말아야할 진리문제도 있고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비진리 문제가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도 있고, 비본질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목적에 관한 문제도 있고, 방법에 관한 문제도 있습니다. 신학에서 전자는 '도그마'(δογμα)라고 하고, 후자는 '아디아포라'(αδιαφολα)라고 합니다. 아디아포라 문제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디아포라 문제에 얽매여 도그마 문제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아디아포라 문제에 대한 바울의 판단 원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가 됩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서로 비판하지 말 것에 대한 권면(1-4),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 제시(5-23)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서로 비판하지 말 것에 대한 권면 (1-4)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가 서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하고 했습니다. 1절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에 해당하는 피스티스’(πιστις)는 문자적으로 신뢰’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확신의 의미로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자는 어떠한 특정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확신이 약한 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 어떻게 행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그것을 먹어도 되는지 먹으면 안 되는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교인들 가운데는 이방인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도 있었고 유대인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지만 그중에는 복음으로 주어진 자유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이방세계의 우상숭배를 잘 알고 있어서 우상의 제물이 시장에 나온다는 것을 알고는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아예 시장의 고기를 먹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구약시대에 금했던 음식들을 먹지 않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도 그 습관을 따라 구약에서 금한 음식들을 먹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복음으로 주어진 자유에 관한 확신이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너희가는 믿음이 연약한 자에 반대되는 믿음이 강한 자를 가리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복음으로 주어진 자유에 관한 확신을 가지고 행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특정한 음식문제들에 있어서 자유함을 가진 자들입니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도 받아들이고 그들의 의견에 대해 논쟁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2절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어서 먹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연약하여 채소만 먹는 것이니 서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생활에서 실천하는데 있어서는 많이 달랐습니다. 대표적으로 음식문제와 절기문제였습니다. 음식문제는 동물(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 동물을 먹더라도 레위기 11장에서 금한 동물을 먹어도 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 고기를 먹더라도 피가 섞였거나 목매어 죽인 동물의 고기를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한 모든 고기를 먹더라도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대부분 우상에게 드려졌던 제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 포도주를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당시 포도주는 우상에게 드려졌던 헌주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도 있었습니다. 절기문제는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 등에서 어떤 날로 지켜야 하는지, 시간을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등의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히 음식문제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자유해서 모든 것을 먹었고 어떤 사람들은 얽매여서 채식만 먹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믿음을 따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3절에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음식문제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먹을 만한 믿음이 있어서 먹고 어떤 사람은 믿음이 연약해서 먹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은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구별하고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αυτον)3인칭 대표단수로서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 모두가 포함된 목적격 대명사입니다. 음식문제에 있어서 서로 상이한 입장에 있는 이들이 서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아야할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음식문제에 있어서 먹는 자이든지 먹지 않는 자이든 누구든지 간에 그를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먹는 자이든 먹지 않는 자이든지 하나님이 모두 용납하여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그 인격을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지만 (Vincent) 음식문제에 있어서도 두 관점의 사람들을 다 인정하여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먹는 자이든 먹지 않는 자이든 그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것이 되는 것임을 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것은 그들을 인정한 하나님이 틀렸다고 모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4절에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는 먹는 자이든지 먹지 않는 자이든지 서로를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인’(οικετης)은 종을 말하는데 노예가 아닌 집안의 가사를 돕는 하인을 말합니다. 하인은 그 집 주인에게 속한 자로서 하인에 대해 판단하거나 정죄할 권한은 그 주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은 하인이 주인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서 있는 것이나 관계가 비틀어져 깨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하인이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나 책망받은 것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권한은 주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인이 채용을 받거나 해고를 받든지, 칭찬을 받거나 책망을 받든지 하는 것은 주인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하인을 판단하고 정죄할 권한은 그 하인의 주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하인을 정죄하는 것은 그 주인에 대한 월권행위인 것입니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는 하인이 그 집에서 일을 하거나 인정을 받는 것은 주인이 그렇게 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하인을 판단할 권한은 그의 주인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남의 하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남의 하인과 그 주인과의 관계에 참견하는 것은 빈축을 사는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자기 소유라도 되는 것처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않는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Chrysostom).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는 먹는 자이든 먹지 않는 자이든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을 판단할 권능이 주께 있다는 뜻입니다. 곧 그들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먹는 자이든 먹지 않는 자이든 그들을 판단할 자는 그들의 본질적인 주인이신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에 해당하는 퀴리오스’(κυριος)는 문자적으로 주인’ ‘를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월권행위라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분명하게 명한 것은 '도그마'(δογμα)라 하고, 분명히 명하지 않은 것을 '아디아포라'(αδιαφολα)라고 합니다. 도그마는 진리문제로서 본질적인 문제이지만 아디아포라는 진리 문제가 아닌 것으로서 비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도그마 문제에 있어서는 철저하기 지키려해야 하지만 아디아포라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관용해야합니다. 과거 한국교회도 특히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교회는 도그마를 세우는 데에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아디아포라 문제에서까지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어서 초대교회에서 가진 단점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나름대로 깨달음이 있어서 신념을 가지고 실행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입니다

 

 

       2.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 제시 (5-23)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①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5-9).

 

  5절에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기 문제에서 어느 한 쪽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든 아니면 둘 다 같게 여기든 자기 마음으로 확정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은 정확히 어떤 날을 말하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안식일(주일과 구분)로 보는 사람도 있고 (Lenski), 금식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Denny). 분명한 것은 절기의 날짜이든 그 절기를 지키는 규례이든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일 것입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자기 마음의 이해나 판단이나 결정에 따라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곧 믿음의 분량대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6절에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날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에 속한 자인데 그들이 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함이니 그것으로 인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6절 하반절에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날 문제뿐 아니라 음식문제도 자기 마음에 확정한대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먹는 자는 믿음이 강한 자에 속한 자이고, ‘먹지 않는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에 속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이 먹는 것도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함이고, 먹지 않는 것도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함이니 그것으로 인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먹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함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고, 먹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디아포라 문제에 관한 것은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하나님을 위한 목적 하에 선택되어져야 하며 그런 목적에서 선택된 것이라면 존중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서로 정죄하므로 교회 공동체가 갈등과 분열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생활영역에서 하나님을 위한 기준과 목적을 가져야합니다. 7-8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살아도 안 되고 자기를 위해서 죽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죽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친히 피로 값을 주고 산 자들이기 때문에 주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구원하여 자녀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합니다 (고전6:19-20). 9절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바로 이를 위함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주관하는 주권자 곧 통치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Calvin). 전 인류뿐 아니라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주관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서 중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의 제 1문은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셨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신다. 실로 이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룬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맘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신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로이다" 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안 먹든지 어떤 날을 중히 여기든 주를 위해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마땅히 하나님이 우릴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합니다 (고전6:19-20).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죽는 것까지도 주를 위해 죽어야합니다. 빌립보서1:20-21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그리스도인이 중요하게 여겨야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에 아디아포라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택했다면 존중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비본질에 속한 문제들 때문에 서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상처를 주거나 공동체에 갈등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②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0-13).

 

  10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믿음이 강한 자를 비판했습니다. 서로 간에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때에는 행한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마태복음16:27"~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5: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20: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준엄한 심판을 생각하여 서로 비난하지 말고 관용해야합니다.

 

  11절에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45:23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의 인용입니다. '내가 살았노니'에 해당하는 조 에고’(Ζω εγω)에서 살았노니에 해당하는 ’(Ζω)자오’(ζαω)1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로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살았노니내가 항상 살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으로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최후심판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12절에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했습니다. 최후심판 때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 일을 직고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모두 은밀한 것까지도 다 들여다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한 일을 직접 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때가 되면 죽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히브리서9: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되면 누구든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하나도 숨김없이 자백하게 되고 자신의 죄를 직고(直告)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그 죄를 직고하게 되어 있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13절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부딪힐 것’(προσκομμα)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그루터기를 가리키고, ‘거칠 것’(σκανδαλον)은 걸려 빠지게 하는 덫이나 올가미나 함정을 가리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형제를 발에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구덩이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비판하므로 아디아포라에 관한 문제로 서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므로 상처를 받아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자칫 상처를 받게 하고 근심이 되게 하고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생각하여 언행이 다른 형제의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③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형제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4-15).


  14절에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는 속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스스로'에 해당하는 '헤아우투'(εαυτου)는 재귀대명사로서 '그것 자체'(itself)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주신 음식물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속된 것에 해당하는 코이노스’(κοινος)불결한 것’ ‘더렵혀진 것’ ‘거룩하지 못한 것등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먹도록 허락한 음식 그 자체는 어떤 것도 불결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4:4-5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음식물은 하나님이 선한 것으로 창조했고, 예수님께서도 음식물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으로 구약의 모든 의식적 불결에 대한 규례를 온전케 했기 때문입니다 (1:31, 7:15-23, 9:12).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율법이 지시하는 바를 완성했기 때문에 불결하다고 규정한 것들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10:9-16). 그래서 그것을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속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음식물에 대해 자유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전통적 습관이 있어서 구약에서 언급한 불결한 음식물들이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결한 음식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유하게 한 것만 생각하고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구약에서 금한 음식물을 가린다고 해서 비판하므로 그들을 근심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낱 음식물로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여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죄에 빠지게 하거나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5절에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음식으로 다른 그리스도인을 근심되게 하면 그에게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모욕한 것이 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적 죽음으로 구원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그리스도께서 구원한 대상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사랑으로 관용해야한다는 것입니다.

 

   ④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6-18).

 

  16절에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에 대해 믿음이 강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모두를 가리킨다고 생각됩니다 (Dunn, Sanday and Headlam). ‘선한 것5-8절의 내용을 감안하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위해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비방을 할 자들은 교회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염두에 둔 표현같습니다 (Liddon, Sanday and Headlam). 믿음이 강한 자이든 약한 자이든 서로 업신여기거나 비판을 하여 갈등과 분열이 생기면 불신앙인들이 비방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불신앙들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세운 나라로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한 하나님 나라는 지상에서 역사적으로 현재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택함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지도 아래서 사는 공동체와 그 활동 영역을 말합니다. 그래서 택함을 받은 백성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으면 그들 존재 자체가 하나님 나라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면 그 영향을 미치는 모든 생활영역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바울이 본절에서 의도하려는 하나님 나라는 교회 공동체일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이고,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배, 교제. 사역을 해나가면 그 영역이 모두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음식문제와 같은 아디아포라 문제를 세우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남 목포에 있는 어느 교회 장로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라도에는 결혼을 하면 결혼 선배들이 색동저고리 벗기 전에 잡아야한다는 말을 한답니다. 여자는 신혼여행 기간에 잡지 않으면 영원히 여자에게 잡혀서 산다는 말입니다. 장로님은 결혼할 때 그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신혼여행가서 아내에게 첫날밤에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들고 선서를 했다고 합니다. 첫째, 해준 대로 먹는다. 둘째. 버는 대로 가져다준다. 셋째. 하자는 대로 한다. 그래서 사는 동안 고민거리가 생기면 '당신이 알아서 해. 나는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게' 하고 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너무 행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힘든 사람은 아내였던 것입니다. 장로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걱정 안하고 자버리고 아내는 그 문제 때문에 밤새 고민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장로님은 당회를 해도 자기주장을 안 한다고 합니다. 그냥 목사님이 알아서 하라고 한답니다. 보통 남자들은 아내가 걱정하면 걱정하지 말라고 해놓고 자기는 뒤에서 밤새 걱정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보다 7년 빨리 죽는 것입니다. 본질에 관한 문제가 아닌 것은 포기하면 행복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17절 하반절에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는 도구와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음식물을 가리는 데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 외에는 없는데, 그것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5:22-23"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육체적 기질을 따라 아디아포라 문제로 서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과는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오직'(αλλα)이라는 말이 강조되었듯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은 그것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δικαιοσυνη)은 문자적으로 의로움’ ‘옮음의 뜻이고, ‘평강’(ειρηνη)평안’ ‘평강’ ‘평화의 뜻이고, ‘희락’(χαρα)기쁨’ ‘즐거움의 뜻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단어들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하여 사용합니다. ''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 구속을 계획하시고 실행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죽음과 지옥이 결정되었고 우리 스스로는 어떤 노력과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로 하여금 죄를 대속해 주시고 그 모든 결과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이 구속계획을 실행하므로 우리에게 주신 내용을 말합니다. 우리가 죄와 그 결과들로 인해 한 순간도 평안과 안식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시므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평강입니다. '희락'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실행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결과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주시므로 평안을 주셨는데 더 적극적으로 기쁨이 충만한 상태가 희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으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합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세운다는 자부심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평안함이 있고, 하나님이 선한 목적을 이루신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절에서 나타내려는 의도는 아디아포라 문제로 갈등하는 교회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는 구속을 이루신 하나님의 의나 구속의 결과로 성도에게 주어진 칭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디아포라 문제에서 서로 관용하므로 세워나가는 선행의 도덕적 의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강'도 그런 맥락에서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은 내적 평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용하므로 공동체의 화평을 이루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희락'도 구속의 은혜를 경험함으로 인한 기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용하여 화평을 이룬 결과로서의 기쁨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18절에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가 아디아포라 문제에 있어서 서로 관용하여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⑤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9-21).

 

  19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고 했습니다.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추구한다고 했습니다. ‘화평의 일’(τα της ειρηνης)평화에 속한 일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교회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하는 일을 포괄적으로 한 말입니다. 화평의 일을 힘쓴다는 것은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서로 화합을 통해 조화를 이루므로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일’(τα της οικοδομης)건축하는 일에 속한 일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건축에 관련된 표현으로서 교회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쓴다는 말은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서로 갈등과 분열을 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20절에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은 하나님이 교회공동체를 세워나가시는 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말은 아디아포라에 속한 음식문제로 하나님이 세워나가시는 교회공동체를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만물이 다 깨끗하되라는 말은 하나님이 내신 음식물들은 근본적으로 다 깨끗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는 말은 어떤 음식을 먹는 것이 양심에 걸리는데도 그것을 먹는 자에게는 그것이 나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는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되는데도 그것을 먹으므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라는 것입니다.

 

  21절에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고기이든 포도주이든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하더라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기 위해 먹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에는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동물의 고기(11:8, 14:8)와 피를 제거하지 않는 고기나 목매어 잡은 고기(9:4, 12:6) 등을 먹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에는 시장에서 파는 고기나 포도주를 먹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고전8:13). 그것은 우상숭배에 사용했던 고기나 포도주가 시장에서 판매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하나의 음식물로 여겨 먹을 수 있을지라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 먹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어떤 보장된 자유도 제한하겠다는 자세는 휼륭한 자세인 것입니다. 아디아포라 문제에서 서로 차이점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10:23-24"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형제를 세우는 것이고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정신입니다.

 

  아디아포라 문제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도그마 문제를 너무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아디아포라 문제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그마 문제에서 고집을 부리는 것은 옳은 일로 인정하지만 아디아포라 문제에서까지 자기주장대로만 하려는 것은 의와 화평과 희락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필리핀에서 선교대회를 하면서 현지 사역자들이 기도제목을 내놓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가 필리핀에서 한국선교사들이 떠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교회 이름을 지어도 한국교회 이름 따서 짓고, 예배 형태나 교회 행정도 한국교회 형태로만 고집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신념만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방법에 있어서까지 선교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중국에서 중국 현지 선교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중국에 선교를 하는 어느 교회 목사님이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현지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한국목사가 중국선교사에게 "중국에 어떻게 선교를 해야 중국 선교가 잘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중국선교사가 "정말로 알고 싶어서 묻는 것입니까? 제가 사실대로 말해주길 원합니까?" 라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목사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중국 선교사가 "한국에서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를 하더라도 꼭 자기들 주장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현지에서 사역하는 분들이 볼 때는 오히려 방해꾼이 된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없는 모습들입니다. 우리의 주장과 우리가 원하는 방법대로만 하려 할 것이 아니라 대상을 존중하고 대상 편에서 대하는 심정을 가져야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15:4-32). 그것은 개체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공동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⑥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이 모두 죄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2-23).

 

  22절에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는 말은 음식을 자유로 먹는 믿음을 가진 자는 그것을 함부로 드러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만 잘 간직하고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음식에 대해 자유함을 가진 자는 그것을 함부로 드러낼 경우 그 음식에 대해 자유하지 못한 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 그 자유함을 드러내는 것을 가능한 한 삼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에 대해 가책이나 갈등이 없이 정죄하지 않는 자가 복되다는 의미입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함을 근거로 어떤 음식들에 대해 먹어도 된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내적 행복을 느낄 것인데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내적 경험으로만 간직하고 그 자유함을 연약한 자들 앞에서 주장하지는 않는 것이 그 연약한 자와 교회 공동체를 위해 좋은 것입니다.

 

  23절에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했습니다. ‘의심하고에 해당하는 디아크리노메노스’(διακρινομενος)의심하다’ ‘주저하다는 뜻을 가진 디아크리노’(διακρινω)의 현재분사형로서, 계속해서 어떤 것에 대해 이론(異論)을 가지고 갈등하면서 주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죄되었나니에 해당하는 카타케크리타이’(κατακεκριται)는 완료형으로서 이미 정죄받은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라는 말은 어떤 음식에 대해 먹어도 된다는 확신이 없이 갈등하면서 먹는 자는 이미 잘못된 행동을 한 것으로 정죄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주저하면서 먹은 자는 옳은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없이 행한 자이므로 이미 정죄된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복음에서 허락된 자유에 대한 확신을 말합니다. 의심하면서 먹은 것은 복음 안에 있는 자유함에 대한 바른 확신을 따라서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정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이 다 죄라고 했습니다. 바른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이 행하는 것은 다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結言>

  우리는 도그마 문제가 아닌 아디아포라 문제로 싸우지 말아야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 방법에 속한 문제, 비본질에 속한 문제에 집착하여 이기려 하지 말아야합니다. 집착하려면 중요한 문제, 목적에 속한 문제, 본질에 속한 문제에 집착해야합니다. 마태복음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고집 부리려거든 이것 때문에 고집 부리고 싸우려거든 이것 때문에 싸워야합니다. 마태복음5:38-42에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인권유린, 모욕감, 수치심, 물질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일은 포기하지 않아야합니다. 우리 영이 사는 일, 가정이 지켜지는 일, 교회가 세워지는 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포기하지 않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