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로마서15:1-33
<題目> 이방인들을 향한 메시지
<序言>
12장부터 본장까지는 구원받은 성도의 생활에 대해 계속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14장에서 성도의 교회생활에 대해 언급했는데 본장의 앞부분에서는 그에 이어 서로 용납할 것을 권면하였고 뒷부분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내용구조는 서로 용납할 것에 대한 권면(1-13절), 바울의 복음 전파관(14-21절),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22-33절)으로 되어있습니다.
<本論>
1. 서로 용납할 것에 대한 권면 (1-13절)
로마서 1-11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이 받은 구원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구원은 조건 없는 선택에 의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것이고, 성령님의 효과적인 적용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구원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12장부터는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로 그 큰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본장도 그 중의 하나로서,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0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①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1-2절).
1절에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나온 '믿음'은 헬라어 원문에 나오지 않은 단어이지만 (Οφειλομεν δε ημεις οι δυνατοι τα ασθενηματα των αδυνατων βασταζειν), 14장에서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관용해야할 것을 말해왔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의미상으로 집어넣은 것 같습니다. 14장에서 ‘믿음’은 복음으로 인한 자유함에 대한 확신에 대한 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온 믿음도 그런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 점에서 ‘강한 자’는 복음으로 인한 자유함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음식에 대해 자유함으로 대하는 자를 가리키고 ‘약한 자’는 복음으로 인한 자유함에 대해 확신이 없어서 음식에 대해 자유하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한 자는 복음을 받아들여 구약의 의식적 규례에 대해 자유한 자들이고, 약한 자는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아직 구약의 의식적 규례에 얽매여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곧 강한 자는 음식을 먹는 자이고 약한 자는 음식을 먹지 않는 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의 기뻐하는 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담당하고'에 해당하는 '바스타제인'(βασταζειν)은 '영접하고' '참고' '견디고' '지고'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의 연약한 부분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적극적으로 대신 떠맡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자기의 약점으로 여기고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6:2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했습니다 (눅14:27).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남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 남이 자기 짐을 져주기를 바라지 자신이 남의 짐을 대신 져주려 하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결혼의 조건을 물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결혼을 하기 때문에 다툼이 잦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싸울 때마다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속았다고 말합니다. 연애할 땐 그런 줄 몰랐는데 결혼하고 보니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고 말합니다. 그건 상대방이 속인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잘못 안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연애할 때처럼 자기를 이해하고 잘해줄 수 있습니까? 연애할 때는 마음을 사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지만 결혼해서는 이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데 어떻게 결혼해서도 고급 레스토랑에서 외식하고 고급 브랜드 옷 사주고 꽃 백송이 사주고 아이스크림 안에다가 반지 숨겨서 먹게 하고 그럽니까? 연애할 때 술 먹고 주정하면 받아주지 누가 결혼해서 그런 꼴을 좋게 봐줍니까? 실제 삶에 들어가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래 사람이 그런데 자기가 미련해서 깨닫지 못하고는 속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좋다고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볼 때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이해해주지 않고 남이 이해해 주길 바라는데, 남들이 왜 자기를 이해해 줍니까? 자신이 남을 이해하고 남의 짐을 담당하려해야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 성숙한 자가 먼저 희생해야합니다.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집에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싸우면 누구를 혼냅니까? 자잘못을 가리기보다는 큰 애를 혼냅니다. 큰놈이 더 이해할만하고 포용할만하도록 성숙했기 때문에 큰놈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 바른 깨달음을 가진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런 의식을 가져야합니다. 첫째,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아야합니다. 1절에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자기만을 생각하여 믿음이 연약한 자를 무시한다면 믿음이 연약한 자는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한 자는 항상 자신이 기쁜 쪽으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바로 알고 있는 것만 생각하고 자기의 믿음 있는 것을 확인 내지는 증명하기 위해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이웃을 기쁘게 해야합니다. 2절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고 했습니다. 이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권면에 대한 긍정적인 권고입니다. 이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비위를 맞추라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원하는 바를 모조건 따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Hodge). 다른 사람의 영적 각성과 성장을 위한 것이라면 자기가 희생해서라도 포용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한과 권리를 제한하고 연약한 자의 약점을 잘 감당해 주어야합니다. 셋째,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합니다. 2절에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적 유익을 위해 희생하는 목표는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데 있습니다. 여기에서 '선'이란 자신의 기쁨이 아닌 연약한 자의 약점을 더 생각하는 내적 가치를 말하고 '덕'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외적 행동을 말합니다. 그것들은 자기의 의를 세우거나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거나 연약한 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들이 아닙니다. 오직 연약한 자의 영적 유익을 위한 가치들입니다.
약한 자도 한 몸입니다 (엡2:20-22, 4:15-16). 몸의 각 지체는 유기적인 연합체로서 연약한 지체에 궐이 생기면 강한 지체도 고통을 받고 몸 전체가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의 지체 중 연약한 지체는 대부분 내장입니다. 특히 간, 쓸개, 심장 등은 내부에 있는 것들인데 그것들은 갈비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지체일수록 보호해주어야 몸 전체가 사는 것입니다. 미인은 얼굴이 예뻐야 합니다. 그러나 목 없는 여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미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는 많은 지체가 서로 협력해야합니다. 달리기는 무엇으로 합니까? 다리로 합니다. 그러나 눈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권투는 무엇으로 합니까? 팔로 합니다. 그러나 눈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눈이 봐야 됩니다. 그래서 권투는 눈으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권투 연습을 할 때는 코치들이 맞을 때도 눈을 뜨고 맞으라고 소리를 질러댑니다. 뿐만 아니라 다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권투는 팔로 하지 않고 발로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세계 헤비급 선수 가운데 죠지 포멘(George E. Foreman)이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먹이 셉니다. 한 번 맞으면 KO패를 당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가 도전을 했습니다. 그는 발이 빠른 선수입니다. 스텝이 좋다는 말입니다. 모두 포멘이 이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리가 이겼습니다. 포멘이 아무리 주먹이 세도 그가 치면 알리는 벌써 뒤로 물러나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자신이 잘 되려면 연약한 지체의 도움이 있어야합니다.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아내나 자녀 문제에 걸려 낙마하는 경우를 많이 보지 않습니까? 연약한 지체도 존재론적으로나 관계론적으로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강한 지체는 약한 지체의 약점을 담당해 주어야하는 것입니다.
②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3-7절).
앞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에 대한 예로 근거를 들고 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연약한 자를 기쁘게 하는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들었습니다. 3절에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직면한 모든 문제를 친히 경험하시고 그에 대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택하신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빌립보서2:5-8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생애에서 항상 자기의 유익을 위해 행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구원할 대상자들의 유익을 위해 행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있었고, 그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했습니다. 요한복음4:34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요6:39, 8:29). 예수님은 자기에게 고난과 죽음이 올 것을 알고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 뜻을 좇았습니다.
3절 하반절의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는 시편69:9에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의 인용입니다. 시편69편은 이른바 고난의 시로서, 그리스도가 박해로 수난을 당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좇으려는 열심 때문에 까닭 없이 미움을 당하고, 부당한 것을 요구받고 비방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로인해 깊은 수렁에 빠지고 큰물이 덮친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견디느라 심히 피곤하고 그 고통으로 인한 부르짖음으로 목이 마르고 눈이 쇠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해와 중상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이해해주지 않고 환영해주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멸시와 천대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를 졌습니다. 불평과 원망과 원통과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우리의 짐을 졌습니다. 이사야53:6-7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인내로 참고 견뎠으며 연약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연약한 자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5-7절에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위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뜻을 가지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서로 받아들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려는 같은 생각과 같은 심정과 같은 고백으로 서로 관용하여 도와야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구제헌금으로 10만원이 들어와서 구제해야 한다고 하면 1년이 걸린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것도 1년 후에 당사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1만원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서로 누구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회의하면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싸우느라고 1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회의할 때마다 밥 사먹고 커피 마시고 하는 비용으로 9만 원을 쓰고 1만원만 남아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연약한 자를 도우려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4절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들은 성도들을 교훈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딤후3:16). 곧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가지신 목적을 이루는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내와 위로입니다. '인내'는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데 있어서 많은 희생과 고난이 따릅니다. 약한 자를 돕는 것은 한두 번으로 되지 않습니다. 희생적 도움을 인지하지 못하기도 하고 힘이 없어서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담당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아픔이 따르게 되는데 그 처절한 아픔 속에서도 견디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위로'는 지지하고 격려하고 기쁨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가 자신에 대한 자세라면, 위로는 대상자에 대한 자세입니다. 연약한 자를 돕는다는 것은 그의 약점에 대해 위로하고 격려하여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약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근거로 위로하고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과 목적과 섭리를 근거로 격려해야합니다. 그럴 때 약한 자도 소망 가운데 확신을 가지고 내적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내와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5절에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그의 수없는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자격을 이룰 때까지 30년을 기다렸습니다 (창12:1-3). 벧엘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시고 그의 수없는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격을 이룰 때까지 20년을 참았습니다 (창28:14-15). 요셉에게 비전을 주시고 그의 수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20년을 기다렸습니다 (창37:5-7). 그리고 하나님은 또한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자기 사람들이 죄와 실수와 잘못으로 인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을 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 아내를 누이라 속이므로 위기를 당했을 때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 위로해주셨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과 외삼촌을 속이므로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이 섭리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요셉이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해서 위기를 당했을 때 섭리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내와 위로의 창시자이고 그것들을 은사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 인내와 위로는 성령님을 통해 전달됩니다. '위로'에 해당하는 '파라클레시스'(παρακλησις)는 어원이 성령님의 별명인 ‘보혜사’(保惠師)의 원어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와 같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인내하고 위로하시는 것을 친히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것들을 알게 하여 우릴 위로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16:13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였고, 요한복음15:26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요14:26). 뿐만 아니라 직접 그 위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로마서8:26-27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롬5:3-5).
③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8-13절).
8절에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할례’(割禮)는 이스라엘 백성(유대인) 가운데 남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8일째에 양피를 베는 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참여한다는 표로 받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추종자’로 번역된 ‘디아코노스’(διακονος)은 ‘시중드는 사람’(종, 집사, 목사)이란 뜻을 가진 단어인데,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도 적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는 할례에 대한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혈통으로 나서 할례를 받고 대속을 이루시므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시켰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성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궁극적으로 그의 후손 가운데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를 보내주어 그를 통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었습니다 (창12:1-3, 17:1-8, 갈3:16).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증명하기 위해 친히 그 언약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신 효과를 가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 그대로 실현되므로 그 약속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입증된 것입니다.
9절에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앞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해 할례의 수종자가 된 목적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8절). 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긍휼을 베풀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9절 하반절에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편18: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의 인용입니다. 이는 다윗왕이 주변국들을 정복한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왕은 그 경험 속에서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게 될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10절에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고 했습니다. 이는 신명기32:43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의 인용입니다. 이는 모세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절 내용으로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11절에도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편117:1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의 인용입니다. 이 내용의 배경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12절에도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의 인용입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가 나서 그를 통해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찬양할 것을 예언한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에게 주신 언약을 성취하셨고 이방인들에 대한 예언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구약시대부터 말씀하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의 소망이 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이 되신 분입니다.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그 믿음 안에서 그 구원의 소망을 가질 뿐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의 기쁨과 평강을 얻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죽어 영원히 지옥 형벌 가운데 놓인 자를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그 믿음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얻게 하고 평강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로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시적인 결과를 기대하지 않아야합니다. 직접적인 보상과 증거가 나타나는 일이라면 믿음이 동원될 필요가 없습니다. 일에 대한 결과가 짧은 기간에 나타난 것이라면 소망이 동원될 필요가 없습니다. 일에 대한 성패가 우리에게 달렸다면 성령님의 능력이 동원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약한 자의 짐을 감당하는 데는 우리가 원하는 가시적 변화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릴 택하여 부르고 구원하시되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요3:16). 우리는 우리가 신자된 삶을 사므로 세상이 변하고 그 영향이 모두에게 미쳐 그 좋은 환경이 내게 보상해주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나 세례요한이 그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리고 큰일을 하리라는 기대를 가지지 않아야합니다. 다윗은 시편131:1에서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우린 신앙생활을 크고 기이한 일을 하려합니다. 꼭 기드온이나 드보라 같이 일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명과 은사 차원이지, 일반으로 행할 성도의 신앙생활은 아닙니다. 에녹같이 그냥 자녀를 낳아 기르고 밭을 갈고 맷돌을 가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24:40-41, 창5:21-24). 교회와 가정에서 져야할 짐을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혼생활을 하면 부부싸움을 하기 마련입니다. 결혼 안 하면 그런 싸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했다면 그 싸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싸움은 짐을 몇 대 몇으로 지느냐는 싸움입니다. 그 싸움은 5:5로 하자는 합리적인 싸움은 아닙니다. 사람은 그렇게 공평하게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전부 상대방에게 지라는 요구를 하는 싸움입니다. 그러다가 반복된 싸움 속에서 5:5로 합니다. 그러다 오랜 세월 싸우고 나서 6:4, 7:3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7하고 상대방이 3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시어머니와 며느리, 목사와 교인 사이도 같은 원리입니다. 그 일에 재주와 능력과 지위와 학식이 필요한 것 아닙니다. 누구나 동일하게 당하는 어려운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여 짐을 대신 져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연약한 사람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25:31-40).
2. 바울의 복음 전파관 (14-21절)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14-15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라고 했습니다. 로마교회는 복음의 자유함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와 확신이 없는 자들 간에 아디아포라(αδιαφολα)에 속한 음식문제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선함이 가득하고 지식이 차서 서로 권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앞에 바로 하려는 정신이 있고 바른 진리를 깨달음이 있어서 서로 잘못된 것에 대해 훈계와 권면과 권고를 해줄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더욱 온전해지도록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려는 것입니다.
16절에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게 하신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원래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의 재가를 받아 각처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예루살렘으로 체포해오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하게 되었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행9:15, 26:14-19). 바울은 그 소명에 대해 이방인들을 성령님 안에서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적 직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처럼 바울은 영적으로 자신이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적 위치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곧 자신이 소명을 받은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받게 할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게 하므로 하나님이 받으시기 합당한 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복음전도 명령과 상통하는 의식입니다. 마태복음28:19-20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17-19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 것에 대해 자랑할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전도에서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열매가 효과적으로 맺힌 것은 말(설교)과 행위(사역)에서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기사'는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말하고, '표적'은 기사에 영적인 상징성이 있는 기적을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전파 사역의 열매가 성령님의 역사로 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려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역이 자기의 말과 행위가 아닌 표적과 기사로, 자기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나타냈습니다 (행19:11-12, 10:25, 14:12-15, 고전2:1-5). 자신의 모든 사역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친히 일하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19절 하반절에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과 다메섹과 아라비아와 안디옥에서 시작하여 3차례에 걸쳐 소아시아와 유럽지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13-21장). 그것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일루리곤'(Illyricum)은 공식명칭으로는 일루리아(Illyria)로서 '달마디아'(Dalmatia)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딤후4:10). 그곳은 지금의 그리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있는 아드리아해의 동쪽연안 마게도냐에 인접해 있는 지역입니다. 그 지역은 바울이 3차에 걸쳐 선교여행을 한 지역 중 가장 서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아마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에 그 지역을 방문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행20:1-2). 그 지역을 거론 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넓은 그리고 잘 알지 못하는 지역에까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편만하게 전하였노라'에 해당하는 기본형 '플레로오'(πληροω)는 '가득차게 하다' '완성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로서 부족한 것을 완성해갔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입니다. 곧 바울이 빠진 지역이나 빠진 사람이 없이 모든 지역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전한 지역이 꽉 차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다 전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 지역에서 비교적 중심이 되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그 지역의 회심자들에게 교회를 맡겨 그들로 하여금 주변 지역들에까지 지속적으로 전하게 한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입니다.
20절에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다고 했고, 그것은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복음전도의 사역에서 지침으로 삼고 있는 원칙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복음전도관의 윤리적 수준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다른 전도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전도 사역은 복음을 전하므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영적 성장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마28:19-20). 그것은 마치 터를 닦고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고전3:10). 그런데 바울은 다른 전도자가 수고하여 터를 닦아 놓은 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전도자가 복음전도 사역을 한 곳에서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1절에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52: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의 70인역(LXX) 인용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전하려 한 것입니다.
바울이 3차례에 걸쳐서 전도여행을 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Illyricum)까지 했습니다 (19절). 그런데 그 사역을 하면서 자신이 신념으로 가지고 있는 철칙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을 지을 때는 터를 닦고 그 위에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누가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닦아 놓았는데 그 다른 사람이 닦아놓은 터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을 한 것일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전도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해놓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남이 닦아놓은 터 위에 집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다른 사람이 이미 복음을 전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긴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첫째, 사역의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복음전도 사역의 핵심은 예수의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그 복음을 듣게 하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는 데 있습니다 (21절). 그런데 다른 복음전도 사역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면 복음전도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복음이 땅 끝까지 속히 전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역자들이 사역하지 않는 곳에 가서 사역을 해야 효율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전도의 효율성을 위해 이미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사역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사역관이 자기가 아닌 복음 자체를 위한 정신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둘째, 사역자의 동질성을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복음전도 사역자들은 모두가 다 주의 일을 하는 한 동역자들입니다. 다른 사역자가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른 사역자의 수고를 가로채는 것이고, 다른 사역자가 가르치는 대상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른 사역자의 수고를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역자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사역자의 공적과 영광까지 독식하겠다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사역에서 도적질과 같은 행위입니다. 그런 행위는 동역자를 상처받게 하고 사역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고 좌절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동역자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역자가 사역하고 있는 곳에서는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사역관이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를 존중하는 정신인 것입니다.
셋째, 공동체의 통일성을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역자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역자들이 수고하여 이룬 공동체도 주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역자가 이미 이루어놓은 공동체 일원들에게 가르치게 되면 그 사역자의 리더쉽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역자와 일원들 사이가 서원하게 되고 때론 갈등과 대립과 분열이 일어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역자들의 수고를 가로채서 자신의 사역을 이루려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공동체에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됩니다. 곧 주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나라를 파괴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자신이 주의 일을 하는데 열심을 냈을지라도 그것은 열심을 낸 만큼 주의 나라를 더 파괴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사람이 이루어놓은 공동체의 일원들을 가르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인 공동체를 온전케 하려는 정신입니다.
남의 터 위에 건축을 하는 것은 쉽습니다. 사역에서 쉽게 빠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역자들이 남의 터 위에 건축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른 사역자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바울은 사도행전23:1에서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했습니다. 사역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숙지해야할 철학입니다. 자기의 이익과 영광보다 하나님 앞에서 양심대로 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겨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해 사는 자의 가치인 것입니다.
3.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 (22-33절)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①최종적으로 서바나에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22-23절)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곳은 고린도입니다. 고린도에서 3개월 있는 동안 로마교회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여행은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1차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시작하여 실루기아와 구브로와 버가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서, 주로 갈라디아와 소아시아(트뤼키예) 지역이었습니다. 2차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시작하여 르스드라와 드로아와 빌립보와 베뢰아와 아덴과 겐그리아와 에베소와 가이사랴 등 주로 마게도냐와 아가야(그리스) 지역이었습니다. 3차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시작하여 에베소와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와 일루리곤과 드로와 등 주로 1,2차 때 다녔던 지역들이었습니다. 그리고 3차 이후 예루살렘에서 로마행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는 3차인 고린도에 머물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아직 로마행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였습니다.
22-23절에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13). 하지만 로마교회에 방문하는 일이 늦어졌습니다. 그것은 로마교회에 가려던 것이 여러 번 막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라는 표현은 이제는 고린도교회에서 할 사역을 다 마쳤다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으로 보아 로마교회에 방문하려 했으나 로마에 가려던 일이 여러 번 막혀서 가지 못했다는 말은 이전 선교여행에서 복음전도 사역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바울은 그 동안 1,2,3차를 통해 소아시아(튀르키예)와 아가야(그리스) 지방의 주요 도시에서 복음을 다 전했기 때문에 이제 로마(이탈리아)를 거쳐 서바나(스페인)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23절 하반절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라고 했고, 28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고 했습니다. '서바나'(Spain)는 구약에 욥기1:3에 나오는 다시스 지역으로서 지금의 스페인 지역입니다. 스페인은 유럽대륙의 가장 서쪽에 있어서 당시 세계관에서는 세상 끝으로 생각하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실제로 스페인까지 갔는지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스페인까지 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A.D.1세기 말의 교부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가 쓴 '고린도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The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 보면 '바울은 온 세상에 의를 가르쳤으며 그가 서방의 끝에 도달했을 때 통치자들 앞에서 증거하였으며 이와 같이 하여 이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내용만 본다면 '서방의 끝'은 당시 서바나(스페인)을 가리키기 때문에 (행19:21-22) 바울이 서바나(스페인)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바울은 인생을 주님이 명령한 전도사명을 다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마태복음28:19-20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고, 사도행전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②서바나에 가기 전에 로마에 들리기를 원했다고 했습니다 (24절).
24절에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최종 전도여행지인 서바나를 가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려는 계획을 가졌습니다. 서바나는 지금의 스페인이고, 로마는 지금의 이탈리아 수도입니다. '로마'(Rome)는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당시 세계의 군사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세계에 복음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을 선교기지로 삼아서 서바나까지 가려했던 것입니다. 로마교회에 들러서 지내는 동안 교인들의 믿음생활에 대해 들어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푼 은혜를 확인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신령한 은혜를 주어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해주고, 그런 교제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땅 끝 전도를 위한 선교계획에 동참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11-13). 1-3차 선교여행에서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선교베이스가 되었던 것처럼 서바나 선교에도 지원할 수 있는 선교베이스가 필요했기 때문에 로마교회가 선교파송을 해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사역에서 교회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 선교사역을 하려 한 것입니다. (J. Murray).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열정을 가진 것처럼 로마 교인들도 같은 의식을 가지고 협력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후서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습니다.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것은 전혀 새롭게 창조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말인 ‘중생’(重生)은 헬라어로 '게겐네시아'(γεγενεσια) '아나겐나오'(αναγεναω)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지만 '크티조'(κτιζω)라는 용어를 쓰기도 합니다. 크티조는 ‘창조하다’는 뜻입니다. 인성이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것처럼 새로운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갖은 난관 속에서도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는 속성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속성, 성품,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속성을 따라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세속적 시각에서 보면 희생과 고난이지만 영적 속성으로 보면 자유와 기쁨입니다. 수영을 할 때 양복을 벗는 것과 같고, 등산을 할 때 구두를 벗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희생이 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인 우리 속성에 맞는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그 복된 일에 정상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③당시는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했습니다 (25-29절).
25-26절에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최종적으로 서바나에 선교를 가기 위해 로마를 들를 계획을 가졌지만 당장에는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게도냐와 아가야(그리스) 지방에 있는 성도들이 예루살렘(이스라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 연보를 했기 때문에 그것을 전달해주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기근과 핍박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평안과 부요 가운데 있는 이방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도울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교회들에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구제헌금을 할 것을 권면했고 이방교회들은 기쁨으로 헌금을 했습니다.
27절에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에서 유럽지역에 있는 이방교회들에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구제헌금을 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것은 이방교회가 유대교회에 대한 빚을 갚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서 예루살렘에서 구속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여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 예루살렘교회의 전도사역으로 인하여 안디옥교회가 생기고 안디옥교회의 선교사 파송으로 인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 되고 많은 이방교회들이 생겼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방교회들은 예루살렘교회에 복음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영적인 것을 받은 자는 육적인 것으로 보답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28-29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서바나까지 갈 계획을 가지고 로마를 그 서바나 선교의 기지로 삼기위해 로마에 가려했습니다. 그런데 로마로 곧장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들렀다가 가려 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교회들에서 거둔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그 일을 다른 사역자들에게 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바울은 자신이 직접 가서 이방교회에서 나타난 선교사역의 열매를 보고하고 (행21:18-20), 하나님 말씀이 성취된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11:1, 42:1, 60:3, 행1:8). 그래서 예루살렘교회가 이방교회를 인정하고 서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교회에서 거둔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속히 전해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이방교회가 모체인 예루살렘교회로 인하여 복음의 은혜를 입었으므로 예루살렘교회가 환난을 당했을 때 이방교회가 물질로 돕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루살렘교회는 이방교회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방교회가 성령님의 역사로 확장된 것을 직접 보고하므로 예루살렘교회가 이방교회들을 동일한 하나님 나라로 인식하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거둔 헌금을 가지고 속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고, 성령의 감동에 이끌려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을 가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그 사명을 다한 다음 곧 좋은 결과를 확인한 다음에 로마에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밀레도에 도착했을 때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설교할 때 했던 내용은 그가 그 사명을 얼마나 귀한 것으로 여겼는지 알게 해줍니다. 사도행전20:22-24에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로에 이르러 제자들 집에 머물 때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행21:4).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전도자 빌립 집사 집에 들어가 머물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아가보라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자기 수족에 매고 성령님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가이사랴 사람들은 그 예언을 듣고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사도행전21:13에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노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도 중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될 것을 예감하고 가지 못하게 했으나 바울은 주님의 사명으로 알고 갔습니다. 그들과 바울은 감동받은 것에 대한 해석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환난과 결박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가지 않아야 한다는 해석을 한 것이고 바울은 환난과 결박이 있을 것이기 죽을 각오를 하고 가야 한다는 해석을 한 것입니다. 하여간 바울이 기도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따라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절대적인 사명으로 느꼈는지 알 수 있으며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열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④예루살렘에 가는 일이 잘되도록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30-33절).
3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님의 사랑으로 로마 교인들에게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힘을 같이하여 자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헌금을 전달하는 일이 잘되어 그 일을 잘 마치고 로마에 갈 수 있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환난과 결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로마 교인들이 기도해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행20:22-24, 21:4,13).
첫째, 유대에서 순종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31절에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전 유대지역에는 바울을 대적하여 죽이려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행9:29-30, 20:3, 21:13, 20:24), 그들로부터 해를 당하지 않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 성도들이 바울이 섬기는 일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31절 하반절에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방 선교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행15:5, 21:20-21). 그런 점에서 그들 바울이 전한 이방교회의 헌금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선한 의도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셋째는 기쁨으로 로마에 가서 함께 쉬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32절에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목적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져서 기쁨으로 로마에 방문하여 쉴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사역이 좋은 열매를 맺힌 것을 확인할 때 로마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교제할 수 있고 그것이 전정한 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 자신이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사실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 부탁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바울이 믿음과 능력이 있는 사역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은 자신은 쓰임만 받을 뿐이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사역에서 하나님이 돕지 않으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고린도후서1:8-10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과거에 경험했듯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에 가는 일도 하나님이 해주셔야 되는 줄 알고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찌하여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17:20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고, 마가복음9:29에는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금식이라고 나온 곳도 있습니다. 믿음, 기도, 금식 등으로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들이 어떤 결과를 얻어내는 방법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고 기도하고 금식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싫은 것을 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서4:3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기도와 금식의 공통점은 그것을 하는 자가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상자에게 의뢰하는 행위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 부탁은 특별한 사람의 기도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줍니다.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은 하나님이 믿음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의 기도만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에 능력 있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그 사람의 기도만 더 잘 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의 기도는 누구의 기도든지 들어주십니다. 히브리서4:16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고, 요한복음14:14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했습니다 (히4:16, 요15:7 16:23, 약1:5). 세속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특별한 것만 좋아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들 가운데 가치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석은 귀하기 때문에 가치 있게 생각하지만, 공기는 흔하기 때문에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보석보다 공기가 더 가치있는 것 아닙니까? 외모를 보더라도 눈이 크면 좋게 평가하고 눈이 작으면 안 좋게 평가합니다. 눈의 크기만 보지 눈의 밝기는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이 큰 것보다 눈이 밝은 것이 더 나은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보편적인 기능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셋째, 기도 부탁은 합심하여 해주는 중보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바울은 자기 혼자 기도하지 않고 로마 교인들이 함께 기도해주기를 부탁한 것은 여러사람이 합심하여 해주는 중보기도의 힘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하는 기도는 큰 힘을 발휘합니다. 때로는 기도자들이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던 기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헤롯왕(헤롯대왕의 손자 아그립바 1세)이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략적 목적으로 예루살렘교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고 급기야 야고보를 처형하기까지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중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세베대의 아들 요한의 동생)가 처형되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헤롯왕은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체포하여 투옥시켰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을 4명씩 4조를 지키게 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에 백성들 앞에 끌어내어 처형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은 야고보의 처형에 이어 베드로도 투옥되어 처형 위기에 빠지게 되자 모여서 기도를 했습니다. 베드로의 투옥이 기회의 위기로 인식하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함께 기도를 한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이 베드로를 백성들 앞에서 처형하기 위해 감옥에서 이끌어내려는 전날 밤에 여느 날과 다름없이 쇠사슬에 묶인 베드로 좌우편에 2명의 군사가 함께 잤고 2명의 군사는 밖에서 옥문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의 옆구리를 찔러 깨웠고 쇠사슬이 저절로 풀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옷을 입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생시인지 환상인지 분간이 안 갔습니다. 베드로는 천사를 따라 시내로 통하는 쇠문에 이르자 옥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한 거리를 지나자 천사는 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그때서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구해준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교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마가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리자 로데라는 여자아이가 나왔습니다. 그 아이는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듣고 문을 여는 것을 잊은 채 들어가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서있다고 했습니다. 모인 교인들은 그 아이에게 미쳤다고 했고, 아이가 참말이라고 힘써 말하자 그러면 그의 천사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2:15에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계속 문을 두드리자 그들이 베드로인 것을 확인하고 놀랐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조차도 기도내용이 이루어지자 믿지 못했을 정도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합심하여 하는 중보기도의 위력인 것입니다.
사도행전21~28장의 내용을 보면 바울은 이후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위기를 만난 사건으로 시작작하여 로마까지 가게 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유대인들이 적개심을 가지고 붙잡아 밖으로 끌어내고 죽이려했습니다. 소동이 일어나자 안토니오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천부장이 백부장과 군사들을 이끌고 나와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하여 체포해갔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헬라어로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을 말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는 본인이 원할 경우 로마 재판을 황제에게 가서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가이사랴에 있던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호송합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인 벨릭스 대신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오게 해달라고 청원하게 되는데 베스도는 유대인들이 도중에 매복해서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임을 알고 보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스도가 배와 선장과 선원과 식량과 호위군을 준비시켜 바울을 로마로 호송합니다. 결국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여 가이사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면서 복음을 변명하므로 복음이 황실의 고위직과 감옥의 고위직과 관련된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 복음을 받아들이는 기회가 됩니다. 로마에서의 복음전도는 전 세계에 복음이 빠르게 전파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볼 때 바울이 땅끝 서바나(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목적을 가지고 로마에 가려하는 계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환난과 결박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오히려 로마에 가는 수단으로 섭리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내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33절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평안과 평강과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그 하나님이 함께 계실 것을 축복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사역에 기도로 동참하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고, 또한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도로 동참해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반영된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結言>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최종적으로 서바나에 가야할 것을 밝히고 예루살렘에 헌금을 전달하는 사역을 마친 다음에 로마에 방문할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만 공동체적 중보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으면 원하는 사역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고후1:10-11).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