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고린도전서1:1-31

<題目> 분열에 대한 메세지

 

<序言>

  본서는 초대교회 특히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그것은 옛날 초대교회가 어떤 문제가 있었느냐는 역사적인 사실을 말해 줄 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들에 그러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를 줍니다. 바울은 본 장에서 영적혼란과 파쟁이 있었던 교회를 향해 문안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특정 지도자를 따라 형성된 교회의 분쟁을 다룹니다. 또한 교인들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분합니다. 곧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가져오는 십자가의 도를 강조합니다. 내용구조는 문안인사와 감사(1-9절), 분열에 대한 권면(10-17절),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18-25절), 하나님의 선택(26-31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문안인사와 감사 (1-9절)

 

   ①문안인사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서신의 기록자를 밝혔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기록한 자는 바울입니다. 바울이 형제 소스데네를 언급한 것은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그가 대필을 도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합니다. 소스데는 당시에 같은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으로서 바울에게 복음을 받아들여 바울을 따랐으며 유대인들이 바울을 갈리오 총독에게 송사했을 때 대신 매를 맞은 사람으로 보기도 합니다 (행18:12-17).

 

  바울은 기록자가 자신임을 밝히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소개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분이 사도임을 밝혔습니다. '사도'(使徒, αποστολοs)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 복음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원래 사도는 예수님이 복음 사역을 위해 직접 임명한 자를 가리켜 한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자신을 사도라고 말한 것입니다 (행9:1-9).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의해 이방 선교를 위해 부름받은 자였습니다 (행9:15). 바울이 자신을 밝히면서 사도임을 분명히 한 것은 고린도교회에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절, 9:1-12). 사학자 요세프스에 의하면 바울은 키가 작고 일자눈썹에 매부리코에 안짱다리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외모의 연약함 때문에 존중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 섰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 행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를 예수님께서 보낸 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권이 부정당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과 진리의 진정성이 없어지게 되고 자금 보내는 편지의 권위도 없어지기 때문에 사도권을 변호한 것입니다.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수신자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을 일차적으로 고린도에 있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볼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B.C.146년에 무미우스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B.C.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에 의해 복구되었고 아우구스도 황제 때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인 아가야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인구 60만에 이르는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무역과 상업 발달로 물질적인 번영이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영적 도덕적인 부분은 황폐화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신교를 숭배했고 생활은 음란했습니다.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여명의 매춘부가 있었습니다. '고린도화하다'는 말은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며 추악한 음행을 행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타락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문화적 배경에 있는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은 우상과 음행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생길 수 밖에 없었고 바울은 거기에 대답하게 됩니다.

 

  수신자를 밝히는 표현에서 바울의 교회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로 보는 것입니다. 성도(αγιοs)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예배하고 의지하는 자로 보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를 믿고 예수께 속한 자입니다. 교회(εκλησια)를 그 성도들의 단체로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낸 성도들의 유기적인 연합체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친히 세우신 것이고 거룩하게 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세우시고 유지시키고 성장시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가 영적으로 황폐하고 고린도교회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세우셨으니 친히 지켜 나가시고 온전케 해 나갈 것이라는 암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해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χαριs)는 문자적으로 대가없이 주는 선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값으로 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한 모든 것들은 값없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평강'(ειρηνη)은 문자적으로 평안 안식 평화 등을 말합니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평강은 단순히 싸움이 없는 소극적인 상태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와 번영과 행복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경험하면 평안과 만족과 안식이 있게 됩니다. 죄와 죽음(질병 고난 고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내세의 지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므로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진정한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또한 살아가면서 현재의 고난이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랑의 열정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목적을 가지시고 섭리하신 그 주권적 의지로 인도해 주실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면 평안이 옵니다.

 

   ②감사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교회에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첫째,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함을 감사했습니다 (5절). '언변'(λογω)은 교리 진리를 말하고, '지식'(γνωσε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사역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들을 지식을 말합니다 (빌3:8). 말씀을 깨닫고도 행치 않는 자는 깨닫지 못하고 행치 않는 자보다 책망이 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깨닫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많이 깨닫는 자일수록 행하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되고 그만큼 겸손해지고 그만큼 회개를 많이 하고 그만큼 성령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만큼 능력이 머물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결과적으로 그만큼 많이 행하게 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목회 사역자를 만나 바로 깨닫는 것이 복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6절). 바울이 4년 전에 고린도에 머물면서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고린도교회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그에 관한 지식이 풍성하게 된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좀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빌3:7-9).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과 그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도리를 굳게 잡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생활에 적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빌립보서3:10-11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고린도교인들에게 가르쳤는데 고린도교인들이 그에 대한 믿음을 굳게 했습니다.

 

  셋째,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나타난 것을 감사했습니다 (7절). '은사'(χαριs)는 신약성경에서 구원에 대해(롬5:15), 일반적인 은혜에 대해(롬11:29), 성령의 능력에 대해(고전12:4) 사용되었습니다. 문맥을 고려해 보면 고린도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에 관한 도리를 굳게 하였고 그 기초 위에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이 많이 나타난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12장에 보면 많은 성령의 신비적 은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신앙 인격이 성장하는 데에는 말씀을 깨닫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사역을 하는 데에는 성령의 은사들을 경험하고 계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사모한 것을 감사했습니다 (7-8절). 고린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신들의 생전에 있을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은 그의 재림 때에 그들이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을 뿐 아니라 그들이 생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기를 원하는 신앙을 가진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관심과 상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책망받을 것이 없는 자들이 되길 바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재림 때까지 견고히 붙들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빌립보서1:6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착한 일 곧 교회와 성도의 구원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고 이루어 가십니다. 비록 고난과 시련이 있더라도 그것까지도 온전케 해 나가시는데 이용하십니다. 야고보서1:3-4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8:28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9절). 하나님께서 고린도교인들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교제하게 하신 것을 칭송한 것입니다. '교제'(κοινωνια)는 연합과 교통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불러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므로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적 은혜에 참여하게 합니다. 우리도 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교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6:56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내주하시고 교제하십니다 (요14:16). 죄를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고 성령을 사모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가 더욱 풍성해집니다. 요한계시록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 교제를 기초로 하여 성도간의 교제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초되지 않는 교제는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성찬과 애찬처럼 타락하고 맙니다.

 


       2. 분열에 대한 권면 (10-17절)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바울은 글로에 집에 속한 사람으로부터 고린도교회가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권면을 하였습니다. '글로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여인으로서 고린도교회에 잘 알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Hodge). '글로에 집에 속한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속한 가족 중 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집에 속한 종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울에게 고린도교회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Grosheide). 그가 바울에게 전한 내용은 고린도교회가 서로 의견차이로 4분파로 나뉘어 분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쟁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들에 대한 선호 때문이었습니다.

 

   ①바울파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울에게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본서를 기록한 자로서 이방인의 사도라 부름을 받은 자이며 선교여행을 통해 고린도교회를 세워 1년 6개월 동안 있었던 사도입니다. 바울파는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는 점에서 주로 이방인이 주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가 전한 복음을 듣고 개종하여 신앙을 가진 자들로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할 때 있었던 교인들이 다수를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보다는 바울을 더 따랐습니다.

 

   ②아볼로파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볼로에게 속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본서3:16에서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한 것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다음에 아볼로는 고린도교회에서 성경을 많이 가르친 사역자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성경과 학문과 웅변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행18:24-28, 딛3:13). 그런 점을 보면 그는 신학과 성경을 가르칠 때 철학과 수사학과 웅변술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지식층들은 그런 논리적, 수사학적, 감동적인 설교를 들으며 그를 바울의 순전한 복음전도 보다 우월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③게바(베드로)파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게바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게바(κηφαs)는 히브리어의 아람어식 표현에 대한 헬라어 음역으로서 '바위' '반석'의 뜻입니다. 게바는 베드로의 별명입니다. 게바파는 주로 유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을 때 베드로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고 베드로가 순회 중에 고린도교회에서 가르칠 때 감동을 받은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수제자로서 그만이 진정한 사도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고, 그가 모체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가르침을 권위있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④그리스도파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파는 위에서 언급한 3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하고 그리스도의 명령만 따른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마 그리스도의 교훈을 들은 자들이 중심이 된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부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나 다른 사람들도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생각은 좋으나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고 자신들만 그리스도에 속했다고 하는 것도 다른 3당파와 다름 없는 것입니다 (고후10:7). 고린도후서10:7에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파당을 짓는 것도 옳지 못하다고 책망하지만 자신을 따라 짓는 것도 책망하였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자신을 믿어서 구원을 받거나 죄사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중심이 되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많게 하여 세력화 하기 위해 세례를 많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를 중요하게 여겼고 권위있는 동일한 사람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심으로 파당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파당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을 만들기 위해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수 곧 그리스보와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고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스보'는 사도행전18:8에 나타나는 회당장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가이오'는 로마서16:23에 나오는 고린도교회를 접대한 사람일 수도 있고, 요한삼서1:5-6에 나오는 나그네를 질 대접한 사람과 동일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Robertson). '스데바나 집 사람'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 식구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아가야에서 최초의 열매였고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있었던 자들입니다 (16:15-17).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성례인 세례를 자신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복음 전도 사역을 하는 목적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 전하는데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복음 전도 사역을 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 나타나게 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말의 지혜로 하면 자신이 나타나고 십자가의 도가 가리워지겠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지나치게 생각할 까봐서 간증도 제대로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고후12:6).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에 고린도 위에 있는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아덴은 헬라(그리이스)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곳의 사람들은 철학과 수사학 연구에 지나치게 몰두했습니다. 바울은 그 곳에서 철학자들과 공개 변론을 하므로 이겼습니다. 바울은 그 결과 많은 사람이 헬라 철학적 사고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줄 알았지만 한 두 사람 밖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고 고린도로 내려왔습니다.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과거를 전감 삼아 고린도에서는 사람의 아름다운 말로 하지 않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 전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2:1-5). 바울의 사역 정신은 자신을 나타내려 하거나 자신이 인기를 얻거나 자신을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내고 그만 따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당을 짓는 것도 옳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교회에서 출신, 학식, 의견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분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행위입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본서 12:27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당파를 지어 분쟁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행위입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엡4:3). 서로 달라도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 한 마음, 한 뜻, 한 말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는 손해와 멸시와 천대를 받더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고 그의 몸인 교회만 잘되게 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복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일이라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요4:34, 마26:39, 빌2:8). 실천적인 면에서는 그 겸손(비하)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빌2:1-8).

 


       3.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18-25절)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교회에는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지혜로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경륜과 섭리는 십자가 도에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도는 죄사함을 얻게 하고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는 능력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었던 죄인들이 다시 살고 영원히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영혼이 죽고 육체도 죽게 되었고 영원히 지옥에서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택한 백성의 죄값을 대신 치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죄가 없어지고 영혼이 다시 살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도'(헬.λογοs, 영.preaching-KJV, word-NASB, message-NIV)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 방법인 십자가 구속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영어 표현을 보면 내용의 선포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전도'(헬.κηρυγματοs, 영.preaching-KJV, message preached-NASB, preached-NIV)는 하나님의 구속에 관한 내용을 선포하는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 '도'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방법은 세상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이른바 지혜있고 총명있다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혜있는 자나 선비나 변론가들입니다. '지혜 있는 자'(σοφοs)는 이성과 논리로 진리를 알고 증명하려는 사람들로서 헬라(그리이스) 철학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선비'(γραμματευs)는 율법 연구와 교수로 진리를 나타내려는 자들로서 유대 서기관이나 율법사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변론가'(συζητητηs)는 변증법과 수사학으로 논리를 증명하려는 자들로서 헬라 웅변가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자들을, 유대인들은 율법사들을, 헬라파 유대인들은 웅변가들을 가장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들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는 이성과 논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므로 미련하게 여깁니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헬라인(이방인)들이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지 않고 세상 지혜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22절). '지혜'(헬.σοφιαν, 영.wisdom)는 삶에 대한 원리와 진리를 말합니다.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근거한 지혜가 아니라 세상 철학을 근거한 지혜입니다. 철학(한.哲學, 헬.φιλοσοφια, 영.philosophy)은 문자적으로 φιλια+σοφια로서 지혜를 사랑하는 것, 곧 지혜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철학에서는 이성과 논리에 맞는 명제를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합리적 사고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진리에 대한 기준은 지적 만족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 십자가 도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실패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이해되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성과 논리만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철학이 세상에서는 최고의 학문으로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골로새서2:8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표적만 구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22절). '표적'(헬.σημειον, 영.sign)은 기적을 통해 상징적 메세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으나 표적 자체만 추구하고 그 표적이 나타내는 표적성은 보지 못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자신이 사흘 밤낮을 땅 속에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12:38-40, 마16:1-4).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사흘 동안 있다가 부활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나가 생애를 통해 나타낸 표적성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나의 사건을 알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성전청결 사건을 일으킬 때 유대인들이 무슨 표적을 보일 것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무엇을 나타내려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다시 세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두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요2:18-21). 성전 청결 사건은 유대교가 성전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심판하고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진정한 성전 역할을 할 것을 표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표적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일으킨 다음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세와 같은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하늘로서 내려 준 떡을 먹은 자들도 죽었지만 자신이 주는 떡을 먹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그런 떡을 자기들에게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요6:30-36). 모세가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려 준 만나는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 구속을 이루므로 진정한 생명과 영생을 줄 것을 예언하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병이어 이적을 일으킨 것은 자신이 모세를 통해 예언된 자로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며 자신을 믿는 자가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될 것을 표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사건을 알면서도 그 표적성을 알지 못했고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면서도 그 표적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외적인 표적만 구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적 전통에 얽매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적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로 구원하는 방법이 이해되지도 않았고 믿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 도는 전통적 종교관에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외부적 행위 신학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와 선행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와 선택과 은혜에 있는 것입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추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추구했지만 바울은 십자가의 도만 전했습니다. 그것이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해 멸망할 자들은 십자가의 도를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였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했습니다 (24절). '부르심을 입은'(헬.κλητοιs, 영.called)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부르심이 복음의 초청에 의해 효과적으로 적용된 성도를 염두에 두고 한 표현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얻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로 이해됩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신분과 환경에 있든지 세상의 지혜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는 십자가 도를 믿지 못해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소명을 받은 자들은 십자가 도를 믿어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도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로움보다 지혜로운 것이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의 강함보다 강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뿐 아니라 일반 생활에서도 세상 지혜와 능력을 추구하지 말고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지혜를 능가하는 지혜로 사는 것이고 사람의 능력을 능가한 능력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은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였지만 그것이 지혜와 능력이었습니다.  

 


       4. 하나님의 선택 (26-31절)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부르심(召命, κλησιν, calling)에는 구원적 소명과 사역적 소명이 있습니다. 구원적 소명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받도록 죄인을 초청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위해 창세 전에 선택한 자를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행위를 말합니다. 사역적 소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시키기 위해 부르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역을 시키기 위해 선택한 자를 성령의 감동과 섭리로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도록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구원을 위한 부르심이든 사역을 위한 부르심이든 하나님의 부르심은 외부적으로 볼 때 지혜로운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습니다 (26절). '지혜로운 자'(σοφοι)는 철학적인 교육을 받은 자이고 '능한 자'(δυνατοι)는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자이고 '문벌 좋은 자'(ευγενειs)는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보편적으로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자들을 택하여 부르십니다. 그래서 지혜있는 자, 강한 자,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27-28절). 하나님은 세상에서 낮은 계급, 사회적 가치가 없고 기득권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 자, 기득권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받고 핍박과 차별과 설움을 받는 자들을 택하여 구원하고 사역자가 되게 하십니다 (마11:25). 야고보서2:5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했습니다. 종말론적으로도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고 새로운 나라가 임하게 하실 때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 세우십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기득권을 가진 높은 계층의 사람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십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 역사를 멸시하고 하나님의 일반적인 외적 초청을 거부한 그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과 부와 지위와 신분이 얼마나 가치없는 것인지, 그것으로 자랑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29절).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육체적 지식과 지혜와 능력과 부귀와 명예와 지위와 신분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부르심은 입은 자들도 자기들이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구원을 받거나 사역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의지와 경륜과 역사,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들 가운데는 사회적 신분이나 직업이나 교육 수준이 낮은 자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사역에 주역이 된 사람들 가운데는 죄인, 병자, 여자,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철학적으로나 신분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그와 연합되고 그와 교제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것은 예레미야9:23-24의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한 말씀을 이룬 것입니다. 예레미야9:23-24에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물질, 육체, 인격적으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고 하늘 나라를 보장받게 된 것은 우리에게 무슨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적 가치와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것들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5:10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結言>

  고린도교회는 분쟁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분쟁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모든 사안을 하나님의 방법인 하나님의 지혜로 보지 않고 인간의 방법인 인간의 지혜로 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지혜의 구원적 방법에 의해 운영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에서도 세상 지혜 육신의 지혜로 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원리로 살려고 해야 건강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