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고린도전서2:1-16
<題目> 하나님의 지혜
<序言>
전 장에서는 고린도교회가 분쟁으로 파당이 생긴 원인을 하나님의 지혜로 하지 않고 인간의 지혜로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인 십자가 도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본 장에서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를 회상하면서 그 논증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는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인간의 방법과 수단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려 했습니다. 내용구조는 전도 사역에서의 결심 (1-5), 하나님의 구원 계획 (6-9절), 성령의 조명 (10-16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전도 사역에서의 결심 (1-5)
① 전도의 내용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의 전도여행은 3차에 걸쳐 있었습니다. 그 중 2차 전도여행은 시리아 지방-길리기아 지방-소아시아 지방-마게도냐 지방-아가야 지방으로 했습니다. 아가야 지방에는 아덴과 고린도가 있습니다. 그는 아덴을 거쳐 그 곳으로부터 80여km 떨어진 고린도에 내려와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전도를 했고 그 결과 고린도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행18:1-17).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이 마게도냐 지방의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고관 부인들이 많이 믿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동을 피웠고 바울이 유숙하던 야손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곳을 피하여 베뢰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 좋은 결과를 얻었는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그 곳까지 와서 방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가야 지방의 아덴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아덴(Athens)은 헬라(그리이스) 우상들이 많은 곳이고 하고 특히 헬라 철학이 발달한 곳입니다. 그 곳에는 에비구레오(Epicurus)와 스도이고(stoa)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에피큐러스 학파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에 둔 자들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인생의 중점을 인간의 정신과 이성과 논리에 둔 자들입니다. 바울은 시 중앙 광장에서 그 철학자들과 논쟁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의 논쟁에서 이겼습니다. 그 논쟁을 지켜본 사람들은 바울이 여러 이방신(神) 가운데 하나를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고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이 철학적 논쟁으로 철학자들 보다 뛰어남을 증명하기는 했지만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몇 사람 외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 전도에 실패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고린도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면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2절). 아덴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철학적 내용으로 증명하려 했다가 그것으로 영혼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 방법인 십자가 구속의 내용)만 전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고린도에서는 복음 전도 사역을 아덴에서의 실패를 전감 삼아 사람들이 추구하는 지식과 지혜의 내용을 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② 전도의 방법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마음이 심히 약해졌고 두려워 했고 떨었었습니다. 그것은 전에 우상과 철학이 성행한 아덴에서 복음을 철학적 논리로 전하려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또 동일한 방법으로 하다가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지방에도 우상이 많고 철학적 사변이 있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지역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과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 하려고 결심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운 방법인 철학과 변증학과 수사학과 웅변술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인 성령의 임재와 역사로 하기를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의 방법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영혼이 사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인간의 지혜의 방법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구속 내용을 전할 때 적용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전할 때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1:5에서도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 사역을 할 때 내용에 있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만 전하고 방법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으로 전하려 한 결과 하나님의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행 18장). 첫째, 로마에서 온 유대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그들과 함께 천막 꿰매는 일을 하면서 그들을 중심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동역자 마게도냐에 있던 실라와 디모데가 빌립보교회에서 보낸 선교금을 가지고 와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무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회당에서 설교를 하다가 쫓겨났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이방인 디도 유스고 집을 새로운 선교 센터로 주시므로 순수한 복음이 전해지게 하고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넷째, 회당장 그리스보를 개종시키므로 많은 유대인들을 얻을 수 잇는 기회가 열렸습니다 (행18:8). 다섯째, 유대인들이 바울을 총독 갈리오에게 고발했을 때 오히려 고린도 선교의 정당성을 입증받게 되었습니다. 여섯째,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전도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에 다양한 은사들이 주어져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인간이 지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철학적 내용을 전하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내용을 전하므로 되어지는 것이고, 인간의 철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방법에 의존하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철저하게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배격하고 신본주의(神本主義)를 추구해야 합니다. 내용이 하나님의 구속이 되어야 하고 방법이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의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구원 계획 (6-9절)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온전한 자'는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 성령을 받아 성령으로 깨우침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 지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므로 그를 믿는 자는 죄와 그 결과로 온 죽음에서 구원하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 계획은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만세'(αιων)는 '시대' '세상' '영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이 생기기도 전에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예정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1:20에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고 했습니다 (눅22:22, 행4:28).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계획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로 선택한 것도 창세 전에 예정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1:4-5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롬8:29-30, 행13:48).
그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구속 계획은 세상 지혜로 알 수 없습니다. 세상 통치자의 지혜로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3:17).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습니다 (9절). 이는 이사야64:4의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의 인용입니다.
3. 성령의 조명 (10-16절)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바울은 성령의 하시는 일을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 계획인 십자가 도를 받아 들일 수 없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를 구분하기 위해 '육에 속한 사람' '신령한 자'를 구분해 사용했습니다. 여기에서 '육(肉)에 속한 자'(ψυχκικοs, natural man)는 거듭나지 않은 자를 말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거듭나지 못하고 성령의 내주가 없는 자연인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용한 단어 ψυχη(프쉬케)는 흔히 인간의 본질적 구성요소를 말할 때 '혼'(혹은 영혼)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프쉬케는 사람 자체를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연인은 '영'의 활동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혼'의 활동만 있습니다. 그들을 대표하는 것은 혼의 활동인 육신의 생명 원리인 이성이나 감정 등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인을 프쉬케에 속한 사람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령(神靈)한 자'(πνευματικοs, spiritual man)는 거듭난 자를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성령의 내주가 있는 자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 πνευμα(프뉴마)는 '영'은 예수를 믿는 거듭난 자로서 성령이 내주한 자입니다. 거듭난 자는 혼의 활동 외에도 영의 활동이 있습니다. 영의 활동은 하나님과의 교제, 말씀에 대한 직관, 신앙적 양심 등으로 확인됩니다. 거듭난 자는 영의 활동이 더 고등한 활동이기 때문에 프뉴마에 속한 사람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사람의 일은 사람 속에 있는 영만이 압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는 사람의 영적 직관으로 가능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과 사역을 가장 잘 압니다. 특히 하나님의 구속계획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십자가 도는 가장 잘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것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기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성취 되도록 돕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증거하게 하고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들이 예수를 믿게 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 거듭나게 합니다 (요15:26, 고전12:3, 요3:5). 성령은 구속사역에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화 사역에도 역사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떠나지 않고 역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와 속성과 사역에 대해 좀더 알아 가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이기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하고 지키게 합니다. 신앙 인격이 성숙하게 합니다. 사역의 기능적 분량이 자라나게 합니다.
자연인들, 예수를 믿지 않은 자들, 육에 속한 자들은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영적인 것으로서 성령으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13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성령이 알게 하지 않으면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을 받아 들이고 믿고 누리게 됩니다. 15절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기준하고 성령의 감동을 기준하기 때문에 모든 기준이 영적입니다. 그 가치 기준과 판단이 영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 기준이 육적인 육에 속한 자연인들의 판단을 받는 수준이 아닙니다. 16절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40:13의 인용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알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 뜻을 알고 받아들이고 가르치게 됩니다.
<結言>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와 속성, 하나님의 구속 계획, 하나님의 사역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움으로 알고 받아들이고 동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그 일에 헌신하게 됨을 감사하는 동시에 더욱 충성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