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고린도전서3:1-23

<題目> 하나님의 일

 

<序言>

  전 장에서는 고린도교회의 분쟁 원인이 사람의 지혜를 가지고 특정한 사람을 따르기 때문이므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와 그것을 알게 하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본 장에서는 고린도교인들의 분쟁을 미성숙으로 지적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내용 구조는 분쟁의 원인(1-9절), 사역의 원리와 방법(10-17절), 사역의 근원과 목적(18-23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분쟁의 원인 (1-9절)

 

   ①영적 미성숙 때문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전 장인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 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했고, 15절에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2장에서는 성령의 하시는 일을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 계획인 십자가 도를 받아 들일 수 없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를 구분하기 위해 '육에 속한 사람' '신령한 자'를 구분해 사용했습니다. 여기에서 '육(肉)에 속한 자'(ψυχκικοs, natural man)는 거듭나지 않은 자를 말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거듭나지 못하고 성령의 내주가 없는 자연인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용한 단어 ψυχη(프쉬케)는 흔히 인간의 본질적 구성요소를 말할 때 '혼'(혹은 영혼)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프쉬케는 사람 자체를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연인은 '영'의 활동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혼'의 활동만 있습니다. 그들을 대표하는 것은 혼의 활동인 육신의 생명 원리인 이성이나 감정 등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인을 프쉬케에 속한 사람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령(神靈)한 자'(πνευματικοs, spiritual man)는 거듭난 자를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성령의 내주가 있는 자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 πνευμα(프뉴마)는 '영'은 예수를 믿는 거듭난 자로서 성령이 내주한 자에게 사용한 단어입니다. 거듭난 자는 혼의 활동 외에도 영의 활동이 있습니다. 영의 활동은 하나님과의 교제, 말씀에 대한 직관, 신앙적 양심 등으로 확인됩니다. 거듭난 자는 영의 활동이 더 고등한 활동이기 때문에 프뉴마에 속한 사람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본 장인 3장 1절에서는 '신령한 자' '육신에 속한 자'로 구분했습니다. 여기에서 '신령(神靈)한 자'(πνευματικοs εστε, spiritual man)는 2장 15절에서는 거듭난 자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기본적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성령의 내주가 있는 자를 말하지만 단순히 거듭나 성령의 내주가 있는 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속성을 따르는 자를 의미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는 성숙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볼 때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육신(肉身)에 속한 자'(σαρκικοιs εστε, flesh man)도 기본적으로 거듭난 자를 말하는데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성령의 내주가 있는 자이지만 육적 속성을 따르는 자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미성숙자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σαρξ(싸륵스)는 육체를 구성하는 살, 뼈, 피부 등을 말합니다. 때로 죄성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이에 속한 자는 예수를 믿는 자이면서도 영적으로 자라지 못해서 여전히 영적 분별력이 없고 물질과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삽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KJV역에서는 '육욕적인'(carnal) 말로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대할 때 신령한 자를 대함 같이 대하지 않고 육신에 속한 자 같이 대했습니다. 곧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대할 때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먹이지 않았습니다. '젖'(γαλα, milk)은 액체 음식으로서 어린 아이가 소화하기 좋은 음식입니다. '밥'(βρωμα, meat-KJV)은 고체 음식으로서 육고기를 의미합니다. 딱딱한 음식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solid food-NASB,NIV). 어린아이는 소화할 수 있는 우유를 먹이고 소화할 수 없는 육고기를 먹이지 않습니다. 우유는 초보적인 진리를 비유한 것이고 육고기는 좀더 깊은 진리를 비유한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과거에 신앙적으로 어렸기 때문에 초보적으로 가르쳤고 지금도 그런다고 했습니다. 내용도 초보적인 것을 가르치고 방법도 초보적인 방법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아직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5:12-14에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젖을 먹고 장성한 자는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의로서 예수 그리스도 자체와 그의 사역에 나타납니다 (롬3:21). 영적으로 어린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진리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삶에 적용하지 못합니다. 기초적인 진리는 적용하나 좀더 신령한 진리는 적용하지 못합니다. 피상적인 의미는 적용하나 깊은 영적 의미는 적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장성한 자'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지각을 사용합니다. '지각'(αισθητηρια)은 인지 능력과 분별 능력을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깨닫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말하는 의미를 잘 깨닫는 것입니다. 둘째, 연단을 받습니다. '연단'(γεγυμνασμενα)은 훈련을 말합니다. '훈련하다(γυμναζω)의 수동태 완료분사로서 끊임없이 훈련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깨달은 말씀을 인격과 삶에 적용하려면 어려움이 따릅니다. 악령들이 방해하고 죄성이 방해하고 사람들이 방해하고 환경이 방해를 합니다. 말씀을 적용하려 하면 당연히 고통과 고난과 손해가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는 말씀을 적용합니다. 적용할 때 어려움보다 적용하는 것을 더 크게 생각하여 적용합니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실패할지라도 계속 도전합니다. 셋째, 선악을 분별합니다. 선악의 기준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장성한 자는 모든 상황에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무엇이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인지 분별하여 옳은 것을 선택합니다. 이 영적 분별력은 말씀을 깨달은 정도와 말씀을 적용하여 연단을 이룬 정도에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는 자는 모든 상황과 사안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고 선택이 다릅니다. 노아가 술 취해 벌거벗고 누웠을 때 그 아들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창9:20-23). 아브라함과 롯이 나누어질 때 가나안 땅과 소알 땅을 바라보는 반응이 달랐습니다 (창13:9-12).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비틀거릴 때 사람들과 베드로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행2:12-21).  

 

  우리는 좀더 자라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3:18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고 하였고, 에베소서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②육신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1:12). 시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와 분쟁의 원인은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3절). 바울은 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자' '육신에 속한 자'로 구분했습니다. 둘 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자로서 성령이 내주한 자들입니다. 그 중 '신령한 자'(πνευματικοs εστε, spiritual man)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서 거듭난 영의 속성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거듭난 영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 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σαρκικοιs εστε, flesh man)는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 육체의 욕망 곧 죄성을 따라 살려는 자를 말합니다. '육신'에 해당하는 원어 σαρξ(싸륵스)는 기본적으로 육체를 구성하는 살이나 뼈나 피부 등을 말하지만 바울은 죄성의 의미로 많이 사용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죄성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KJV)에서는 carnal(육욕적인)이란 말로 번역했습니다. 육체적 욕망의 의미로 해석한 것입니다. 본절 3절에서도 '육신의 속한 자'에서 '육신'(σαρξ)도 동일하게 carnal(육욕적인)로 번역했습니다.

 

  이 육체의 욕망인 죄성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죄적 성품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마가복음7:21-23에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5:19-21에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고 했습니다.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 등은 죄성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이런 성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죄적 욕망을 제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을 따라 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5:16-17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③사람을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린도교회에 시기와 분쟁이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에 속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사람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12에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람을 따라 파당이 형성되었는데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따라 파당을 형성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바울 자신과 아볼로를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의 밭이고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밭에서 일을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밭에 곡식을 심은 자이고 아볼로는 곡식에 물을 준 자라는 것입니다. 밭에 곡식을 심고 밭의 곡식에 물을 준 자는 바울과 아볼로이지만 밭의 곡식이 싹이 나고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곡식을 심은 바울이나 곡식에 물을 준 아볼로는 심부름꾼으로서 사역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고 하나님이 사역자를 보냈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아볼로가 가치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치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개척하여 세웠고 아볼로는 그 후임으로 와서 사역을 했습니다. 바울은 처음 복음을 전하여 기초를 세워 준 사역자이고 (행18:1-18) 아볼로는 복음 진리를 자세히 해석하여 논리적으로 가르친 사역자입니다 (행18:24, 19:1).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워 1년 6개월 동안 있었던 사도입니다. 바울파는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는 점에서 주로 이방인이 주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가 전한 복음을 듣고 개종하여 신앙을 가진 자들로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할 때 있었던 교인들이 다수를 차지했을 것입니다. 바울파는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지 않고 바울을 더 추종했습니다. 아볼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다음에 고린도교회에서 성경을 많이 가르친 사역자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성경과 학문과 웅변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행18:24-28, 딛3:13). 그런 점을 보면 그는 신학과 성경을 가르칠 때 철학과 수사학과 웅변술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지식층들은 그런 논리적, 수사학적, 감동적인 설교를 들으며 그를 바울의 순전한 복음전도 보다 우월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볼로파는 아볼로가 가르친 진리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아볼로를 추종했습니다.

 

  바울은 바울 자신이든 아볼로이든 하나님의 동역자(同役者)라는 것입니다 (9절). 심는 이와 물주는 이로서 한가지라는 것입니다 (8절). '한가지'(εν εισιν; one are)는 비슷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라는 것입니다. 단지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물을 주듯이 주께서 각각 주신 사명과 은사를 따라 일한 사역자(使役者)들이라는 것입니다 (5절). 사명과 은사와 사역은 다르지만 역할만 다를 뿐 동일하게 하나님이 보낸 사역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보낸 이가 하나님이고 목적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을 차등있게 생각하여 사역자를 중심으로 줄 서기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모두가 사역자를 존귀하게 여기되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이 지배 원리가 되어 하나님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역자 개개인을 따라 파당을 나누고 교회가 분열되는 것은 성숙한 것이 아니라 미성숙한 증거입니다.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속한 증거입니다.

 


       2. 사역의 원리와 방법 (10-17절)

 

   ①건축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사역을 했는지 건축 비유로 말하였습니다. 자신은 지혜로운 건축자로서 터를 잘 닦았다는 것입니다. 그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20에서도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 돌이 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을 머릿돌이라고 했습니다 (마21:42).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처음 사역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고린도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되게 했습니다. 2:1-2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 교리적인 터를 굳게 한 것입니다 (행4:11, 벧전2:6). 그래서 집의 기초가 잘 닦인 다음에는 그 위에 집을 짓듯이 바울 다음에 온 사역자는 바울이 닦아 놓은 교리적 기초 위에 성장을 위한 교훈적 말씀으로 가르치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다음에 온 사역자는 기초를 마련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 기초 위에 어떻게 사역을 할지 고민해야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는 신앙고백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마16:16).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아무리 집을 지을 때 아무리 좋은 재료로 잘 지어도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면 곧 쓰러지고 마는 것처럼 교회도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과 그로 인하여 얻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확신이 기초가 되어야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은 자들이고 지옥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로 결정하셨고 때가 되니 성령을 보내어 예수를 구주로 믿게 했습니다. 예수의 대속을 믿는 우리는 영이 중생과 칭의와 양자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성령이 내주하여 떠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 목적대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변함없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②건축의 재료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해야 합니다.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건축에 사용되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금, 은, 보석으로 지을 수도 있고 나무, 풀, 짚으로 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금, 은, 보석은 가치가 높고 오래 견딥니다. 나무, 풀, 짚은 가치가 낮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금, 은, 보석은 집에 불이 나도 그대로 있지만 나무, 풀, 짚은 불이 나면 타 없어지고 맙니다. 금, 은, 보석은 내용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기초한 진리의 말씀을 말하고 방법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1:18, 2:4), 나무, 풀, 짚은 내용에 있어서 세상적인 철학을 말하고 방법에 있어서 아름다운 말의 논리를 말합니다 (1:7, 갈4:9, 골2:8). 교회는 바른 말씀이 전해져야 하며 말씀대로 성장해야 합니다. 방법에 있어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져야 합니다.

 

  개인적인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표준이 성경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행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되지 못한 것을 쳐서 복종시키고 말씀을 이루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서 신앙 인격이 말씀대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③건축의 결과는 불에 타는 여부에 따라 결정됩니다.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집이 무엇으로 지어졌는지 불이 나 보면 다 압니다. 금, 은, 보석으로 지어진 집으로 그대로 있지만 나무, 풀, 짚으로 지어진 집은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 때에 금, 은, 보석으로 집은 지은 사람은 공적을 인정받아 상을 받고, 나무, 풀, 짚으로 지은 사람은 공적을 인정받지 못해 해를 받습니다. '공적'은 교회에 대한 평가를 말하고,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말하고,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집을 무엇으로 지었는지 집에 불이 나면 알 수 있듯이 교회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의 심판 때에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때에 말씀대로 성령에 의해 성장한 교회는 공적을 인정받아 영광과 칭찬과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철학적 논리나 방법으로 성장한 교회는 책망을 받게 되고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초하여 세워졌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얻은 구원처럼 수치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들이 다 같게 보이지만 주님 오실 때에는 평가가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참 교회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 말씀대로 세워져야지 세속적 사상이나 논리나 방법에 의해 세워져서는 안됩니다. 신본주의로 세워져야지 인본주의로 세워져서는 안됩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재림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공심판과 사심판입니다. 공심판은 예수를 믿은 여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보내는 심판입니다. 곧 믿음을 근거로 하는 심판입니다. 사심판은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간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판으로서 영광과 칭찬과 상급을 주기 위한 심판입니다. 곧 행위를 근거로 하는 심판입니다. 그 사심판은 인격에 관한 부분과 사역에 관한 부분이 있습니다. 인격에 관한 부분은 얼마나 말씀대로 살았느냐에 따라, 곧 얼마나 신앙이 성장하고 영이 자란 여부에 따라 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눅19:11-27). 사역에 관한 부분은 얼마나 사명을 감당했느냐, 사역에 충성했느냐에 따라 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25:14-30). 본문은 사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인격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런 자는 불가운데서 얻는 것 같은 구원을 얻을 뿐입니다 (15절). 불 가운데서 간신히 목숨만 건진 것 같이 기본 구원만 얻는다는 것입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벌거벗은 채로 있으니 수치를 당하는 당하는 구원입니다. 예수를 믿어 이미 얻은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데 구원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빌2:12).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천국에  가긴 했으나 말씀대로 만들어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영이 자라지도 못하고 신앙이 자라지도 못하고 인격이 자라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런 자는 구원은 얻었으나 영광과 상급과 칭찬이 없고 책망과 수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벌거벗은 구원이고 부끄러운 구원이고 해받는 구원인 것입니다. 또한 사역적으로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말씀대로 잘 감당한 자는 그에 따른 상급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감당하지 못한 자에게는 책망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실 때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기 위해 충성되어야 합니다 (고후5:3).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고전4:2).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앞 절들에서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불로 시험해 볼 때에 그 공적이 불타 구원은 받을지라도 해받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13-15절).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세워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엄중한 문책을 당하게 될 것을 경고한 말씀이었습니다. 본 절은 성전 은유로 좀더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전은 성령이 임재하시고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져 갑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고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심판하게 됩니다. 교회는 성전입니다. 교회가 분쟁 등 육에 속한 행동을 하는 것은 교회를 거룩하게 세우려는 성령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며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본주의적 의지가  주장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개인도 성전입니다. 6:19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에 들어오십니다. 그것을 '성령의 내주(內住)'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살아 계실 때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마28:20, 요14:16-17). 요한복음14:16-17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내주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모든 성도에게 있는 하나님의 보편적 임재 방식이며 대부분 잠재의식 가운데 일어나는 형상입니다 (회심과 동시인 경우는 예외). 이는 외적 체험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성령은 믿는 자 속에 들어와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경험 속에서 현상적으로 성령이 떠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범죄했을 때 성령께서 감동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1:14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했고, 야고보서4:5에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고 했고, 요한일서2:27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이 성령은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합니다. 예수를 믿도록 감동시킬 뿐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시인하게 합니다. 고린도전서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합니다. 갈라디아4:6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롬8:15). 말씀을 사모하고 깨닫게 하고 순종하게 합니다. 요한복음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벧후1:21).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합니다. 요한복음16:7-8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돕습니다. 로마서8:26-27에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사역을 돕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1:29에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도움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으로서 멸망받게 될 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마음의 평안과 감사와 기쁨이 있고, 은사가 나타나고, 인격적 열매가 맺히는 것 등의 현상은  성령이 이미 내주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눅5:8, 요일5:1, 고전12:3, 롬8:15, 고전1:18, 2:12-14, 엡5:19-21, 고전12:1, 갈5:22).

 

  그러므로 내주하시는 성령의 마음이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인격적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지성과 의지적인 면도 있지만 감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때로 근심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상처를 받으시면 교제를 하지 않으십니다 (사63:10, 행7:51, 행5:3-4, 히10:29, 마12:31-32, 살전5:19, 마2:31-32). 그러므로 그 분을 근심되게 하지 말라야 합니다. 에베소서4:30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9에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고 했습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슬퍼하게 하는 것이고 관계론적으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6:18-20에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않고 거룩하게 하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죄를 짓지 말고 작은 부분에서도 신앙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코리 텐 붐 여사의 부친 캐스퍼에 대한 일화입니다. 그는 시계 제조업자였습니다. 그는 은행에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은행 빚을 갚을 정도의 금액에 해당하는 시계를 사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 날 어느 손님이 찾아와 비싼 고급 시계를 구입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 전 자기가 이웃 그리스도인 시계점에서 비싼 시계를 하나 구입했는데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며 불평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캐스퍼는 그 시계를 보여 달라고 해서 내부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살펴보니 조금만 수리하면 되는 것이어서 그 자리에서 수리를 해 주며 그 시계는 정말 좋은 고급시계이고 이웃 시계 점포 주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시계를 받아들고 미안하다고 하며 자기가 산 시계를 반납했고 캐스퍼는 받은 돈을 다시 내어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코리가 손님이 나간 후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시계를 돌려주셨어요? 은행에 빚 갚을 존 때문에 오늘 기도까지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캐스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돈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내려 주신 돈이 아닌 것 같구나" 며칠 후 다른 손님이 와서 이전보다 더욱 비싼 최고급 시계를 사가서 은행에 돈을 다 갚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케스퍼는 하나님의 성전의 한 작은 부분으로 역할을 성실히 한 것입니다.

 


       3. 사역의 근원과 목적 (18-23절) 

 

  ①사역은 하나님의 지혜로 해야 합니다.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지혜에는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세상 지혜는 인간적인 목적과 방법과 노력과 원리와 제도 등의 특성들로 교회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택한 백성을 구원하여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하는 것은 잘될 것 같지만 스스로 자기 꾀에 빠지게 합니다. 그 결과가 공허하고 무익합니다. 분쟁을 일으킬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한 것은 안될 것 같아도 열매가 맺히고 유익하게 됩니다. 세상 지혜를 좇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지혜로 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어리석게 보십니다 (1:27-2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로 하는 것이 세상 지혜를 좇는 사람들에게 어리석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좇아야 합니다. 세상 지혜에 대해서는 미련한 자가 되는 편이 낫고 하나님께 대해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②사역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만물'은 모든 피조물을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롬8:17,32, 딤전6:17).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베드로) 같은 사역자들도 우리를 위해 보냄받은 자들입니다.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도 우리에게 속한 것입니다. 가시적인 세상이나 인간에게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생명이나 인간을 종식시키는 사망이나 모든 시간적인 흐름과 역사도 모두 우리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피조물이든지 인간의 역사든지 교회의 사역자든지 모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토하여 구원하고자 하는 택한 백성 곧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영원한 목적과 계획 안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목적으로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부여한 것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구속사역을 하였듯이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역을 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사역자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야 하고 만물들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목적하고 사람을 따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結言>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 전했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사역을 했습니다. 아볼로나 게바(베드로) 같은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지 못하고 사람이 사역자를 따라 당을 지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이루어 가는 우리가 깊이 적용해야 할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