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요한일서1:1-10

<題目>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序言>

  바울서신은 상당히 논리적입니다. 우찌무라는 로마서의 구조에 대해 "앞문이 있고 현관이 있고 내실이 있으며 뒷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는 그와 같은 논리적인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혀 논리가 없는 구조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교리적 설명과 그 교리에 따른 성도의 생활 원리를 교차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1-4절), 빛이신 하나님(5-7절), 빛 가운데 행하는 삶(8-10)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1-4절)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본 절은 '말씀'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말씀'(του λογου τηs ζωηs)은 '생명을 얻게 하는 말씀' '생명을 가져다 주는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요8:12, 6:35,48, 4:10,11, 계21:6, 22:1).

 

  ①예수님은 말씀으로 계셨던 분입니다.

 

  1절에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본 절에서 말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1:1,14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말씀'(λογοs)이 '육신'(σαρξ)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로고스(λογοs)는 흔히 하나님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공관복음(마,막,눅)과 요한복음의 차이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수신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의 수신자는 유대인이고 요한복음 수신자는 헬라인(그리이스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그리스도(메시야)를 보내 주시겠다고 한 예언을 알고 있고 그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그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 저자들은 예수님이 그 그리스도라는 사실만 증명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었다는 것을 족보를 통해 증명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다릅니다. 헬라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르고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도 모르고 유대인들에게 예언된 그리스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태초부터 하나님으로 계신 분이었다는 것을 언급하게 되는데 그들이 하나님(히.엘로힘, 헬.데오스)에 대한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신 그들이 사용한 로고스(λογοs)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을 지배한 사상은 헬라 철학이었는데 플라톤철학과 스토아철학에서는 로고스(λογοs)라는 단어를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 곧 절대자,  초절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 신앙 관념에서 보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로고스(λογοs)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λογοs) 곧 '말씀'은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하나님이 싸륵스(σαρξ)되었다는 것입니다. 싸륵스(σαρξ)는 육체, 육신, 몸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②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분입니다.

 

  1절에 예수님에 대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1-2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습니다. '태초'(αρχη)는 문자적으로 만물의 시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는데 여기의 태초와 본 절의 태초는 의미상 차이가 있습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으로 볼 수 있지만 본 절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 이전인 영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요한복음8:58-59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4,000년 전 사람인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가서5:2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함께'에 해당하는 전치사 프로스(προs)는 다른 전치사들(εν, παρα, μετα 등)과 달리 정적인 공존 보다는 동적인 공존을 강조하는 단어로서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과 유기적으로 공존했음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 의미로 볼 때 곧 하나님으로 계셨던 것입니다.

 

  ③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2절에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계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입니다 (요1:14). 빌립보서2:6-7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났을 때 그를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사7:14). 마태복음1:23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④요한은 그에 대해 직접 경험했습니다.

 

  1-2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으로 계신 분인데 그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직접 눈으로 보았고 귀로 그의 가르침을 들었고 손으로 그를 만져 보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배우고 사역을 같이 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죽은 후 부활하신 것도 목격하고 만져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직접 경험한 것을 전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복음인 것입니다.

 

  ⑤요한이 그 예수님에 대해 전하는 것은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3-4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전하는 요한과 듣는 수신자들과 사귐이 있게 하는데 있습니다. '사귐'으로 번역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는 흔히 '교제'로 번역됩니다. 이 교제는 성령의 은혜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롬15:27, 고전9:23, 고후13:13). 성령의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하나님 말씀 받아 누리는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요15:11). 그것은 사도행전 2,4장에 잘 나타납니다.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말씀을 깨달으면서 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한 믿음, 한 소망, 한 가치를 공유합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구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제의 본질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성령의 은혜 안에서 되어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적용으로 되어져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구원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2. 빛이신 하나님 (5-7절)

 

  초대교회에 가장 영향력을 미친 이단은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헬라어 그노시스(gnosis)에서 온 말인데 그노시스는 '지식' '인식' '깨달음'의 뜻입니다. 영지주의는 깨달음 곧 진리 지식을 터득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구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헬라철학은 이원론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원론은 모든 개념을 선과 악으로 나누었습니다. 신관에서도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고 선한 신은 영적인 것을 악한 신은 물질적인 것을 주관한다고 보았습니다. 영지주의는 이원론을 받아들여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나누어 영적인 것은 선하고 물질적인 것은 악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죄관에서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고 따라서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영적인 것을 따르기 위해 금욕주의로 흐르고 한편으로는 방탕주의로 흘렀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런 이론이 만연하여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타락시켰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이론을 차단하기 위해 변증적으로 본문의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①하나님은 빛이십니다.

 

   5절에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그에게 듣고 전하는 소식(η αγελια)은 하나님은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1절에서 언급한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내용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빛이라는 사실이며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여기에서 빛과 어둠을 대조적으로 나타내었습니다. 빛과 어둠은 성경에서 여러 상징으로 사용한 단어인데 여기에서 사용한 상징은 의와 죄입니다. 빛은 의를, 어둠은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빛으로서 의로운 분입니다. 죄가 없는 분이고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고 죄 가운데 있는 자를 멀리하는 분이고 죄 가운데 있는 자와는 교제를 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6절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말하면서 죄 가운데 있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인 것입니다. 실상은 진리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②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7절에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말은 죄를 떠나 의롭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떠나 옳게 살아가려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고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죄를 사해주신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적용하게 해 주십니다.

  


        3. 빛 가운데 행하는 삶 (8-10)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①죄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 속이는 자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은 죄를 회개하고 죄를 떠나는 것입니다. 8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고 했습니다. 만일 죄가 없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자입니다. 10절에도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죄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고 매일 삶 속에서 지은 죄를 회개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근거하여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확인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그 사실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다고 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해 주신 것을 부정하는 것이고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 것을 확인시켜 주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곧 죄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없다고 하지 말고 날마다 지은 죄를 찾아 회개해야 합니다.

 

  ②하나님은 죄를 자복하면 모든 죄를 사해 주십니다.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죄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셔서 곧 신실하셔서 죄를 회개할 때 사죄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반드시 이행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사하시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αφη)는 죄에 대한 책임을 없애 준다는 것이고 '깨끗하게'에 해당하는 카다리세(καθαριση)는 죄로 오염된 상태를 정화시켜 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해 주신 것을 근거로 우리가 죄사함 받았음을 느끼고 자유함을 누리게 합니다.

 

<結言>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은 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거나 한번 회개한 죄에 대해서는 다시 회개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은혜의 수단으로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 회개해야 합니다.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 주신 것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용서받았음을 인격적으로 느끼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용서를 받은 것을 확인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이 가까워지게 되고 심령이 정결하게 되고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구원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성화의 수단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