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고린도전서8:1-13

<題目> 우상의 제물에 대한 태도

 

<序言>

  아가야 지방의 수도 고린도는 우상숭배가 성행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신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일이 필수적이었고 대부분의 모임이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시장에서 파는 고기도 모두 각종 신전에서 제물로 바쳤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전과 관련된 일에 참여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고립당해 생계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영지주의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한 대답을 했습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1-6절),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우상의 제물(7-13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本論>

       1.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 (1-6절)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우상(偶像)의 제물(祭物)은 하나님 아닌 다른 신에게 제사하기 위해 바친 음식을 말합니다. 당시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고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다른 신 곧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지식은 옳지 못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행하면 덕을 세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靈知主義者)들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Gnosticism)는 기독교 초대교회의 이단입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지식'(Gnosis; γνωσιs)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영적 지식을 터득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입교훈련을 통해 그 영적 지식을 터득하고 육체적 행위에 대해서는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도 같은 시각을 가졌습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만이 참 신인 것을 깨달아 안 사람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도 자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지식이 있는 자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괜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사상입니다. 참된 지식(γνωσιs)이란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는 동시에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살전1:9). 곧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사역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신4:39, 삼상2:12, 사1:3, 호4:6). 한마디로 참된 지식은 사랑 안에서 실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만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아니고 덕을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식만 가지고 먹으면 믿음이 약한 사람이 담대히 먹다가 양심이 더러워지고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만 괜찮다고 먹는 것은 형제를 죽이는 행위로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만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결국 자기 신앙도 죽고 다른 사람의 신앙도 죽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사람이 아픔 곳이 생기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서 아무 환자나 수술을 해서는 안됩니다. 열이 있는 환자는 수술하면 안됩니다. 쥐를 보면 돌로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쥐가 장독 뒤에 있을 때는 돌을 던지면 안됩니다. 빈대가 있으면 불로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빈대가 집안에 있을 때 불을 질러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덕을 세우는 것이 압니다 (10:23). 모든 사람에게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지식이 없이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도 있습니다 (7절). 만일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는 자가 자기 믿음만 생각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된다면 그런 지식이 없는 믿음없는 자가 양심의 담력을 얻어 제물을 먹습니다. 그 믿음없는 자는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신앙적 양심이 없어지고 우상숭배에 참여하게 되므로  결국 신앙적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10절). 그렇게 되면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결국 믿음 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멸망하게 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실천이 아닙니다. 그 지식이 오히려 자기 마음만 교만하게 하고 믿음 약한 형제로 양심이 상하게 하고 실족하게 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죄를 짓은 것이 됩니다 (11-12절).

 

  그래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고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은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13절). 바울은 믿음 약한 형제의 생명을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것이 형제를 피로 값 주고 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한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 것입니다. 10:23-24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고,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우상의 제물 (7-13절)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아야 하는 이유

 

  바울은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더라도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자들은 그 지식만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먹어도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근거로 드는 성구는 주로 디모데전서4:4-5과, 로마서14:1-3입니다. 디모데전서4:4-5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앞 절을 보면 결혼을 못하게 하고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금욕주의에 대한 말씀이지 우상의 제물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로마서14:3에는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앞 절을 보면 구약에서 금한 고기들을 말하는 것이지 우상의 제물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혹 우상의 제물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하나, 설사 우상의 제물에 관한 말씀이라 해도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의 의도는 교리화할 수 없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에 대해 교회의 성숙을 위해 믿음이 있는 자가 믿음이 약한 자를 포용해야 할 것에 대해 가르치려는 의도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①자기 양심이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7절에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은 먹는 사람의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더러워지면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믿음 생활을 바로하려면 깨끗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딤전3:9).

 

  ②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9-13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도 우상적인 습관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습관적으로 우상숭배와 관련된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믿음이 약하여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우상에게 드리는 제물로 알고 먹게 됩니다 (7절). 그런데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는 믿음 있는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면 그와 같은 지식이 없는 믿음 없는 자가 우상의 제물을 따라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우상을 섬기는 마음으로 담대히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는 자가 자기만 생각하고 먹는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이 믿음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③귀신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0:18에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10:20에는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는 우상의 제단에 참여하는 자이고 그들이 우상에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기 위해 성찬식을 행합니다. 공동예배에서 떡과 포도즙을 먹습니다. 그 떡과 포도즙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여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확신하고 참여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공동체라는 것을 확인하고 참여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을 살 것을 결단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상섬기는 사람들이 제단에서 제사하고 제물을 먹는 것은 그 우상과 교제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상과 하나되고 우상을 복종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상 섬기는 사람들이 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곧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고 귀신 섬기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찬에 참여한 자들이 귀신의 잔에 함께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10:16-17).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귀신 섬기는 일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0:21).

 

  ④사도들이 성령과 함께 정한 규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15:28-29에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행15:19-20). 바울이 전도여행에서 유대인들이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를 할례를 걸었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마치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주를 이룬 예루살렘 공회에 참여하여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므로 개종의 조건으로 달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공회는 개종의 조건에 할례를 넣지 않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4가지 규례는 지켜야 한다고 결의하고 각 교회에 보냈고 교회들은 그 규례를 지켰습니다. 그 규례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이라고 했습니다. 그 규례는 사도들이 성령과 함께 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은 성령께서 원하는 것이고 사도들이 결정한 것이고 초대교회가 지킨 규례입니다.  

 

  ⑤이단의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2:2에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 했고  이어지는 6절에는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소아시아 7교회에 대해 주님이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은 에베소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잘한 것 중 하나님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은 당시 이단이었던 니골라당을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2:14에는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버가모교회에 하신 말씀인데 버가모교회가 거짓선지자 발람의 교훈을 받아들인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가운데 하나는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2:20에도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이는 두아디라교회에 하신 말씀인데 두라디라교회는 이방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인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이세벨 교훈 가운데 하나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 발람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은 모두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교훈을 물리친 교회는 칭찬하고 용납한 교회는 책망했습니다. 주님도 그들과 그 행위를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계2:6).

 

  오늘날에도 우상의 제물은 여전히 먹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는 제사와 고사를 지낸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합니다. 8절에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르고 먹는 경우는 괜찮습니다. 또한 상품화된 것도 괜찮습니다. 상품화 된 것은 우상의 제물인지 알 수 없는데 상품화된 것에 대해서는 묻지 말고 먹어도 됩니다. 샘의 물, 들판의 곡식, 바다의 고기 등 보편화된 것은 누가 고사를 지냈다고 해도 우상의 제물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10:25에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불신자 집에 갔을 때도 우상의 제물인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그것이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하면 뱉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10:27-28절에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행위는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우상숭배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쓰러져 죽은 죄이고 (고전10:5-7),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간 죄입니다 (렘25:6-9).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가 주님께 버림받은 죄입니다 (계2:14,20). 우리는 이를 전감 삼아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는 3~4대까지 망하게 하고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는 1,000대까지 복을 주신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20:1-6).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하나님께 잘 보일 것인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귀신에게 잘 보일 것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를 아들로 삼아 천국에 가게 하고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실 하나님께 잘 보일 것인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역사하고 마침내 자기고 지옥 형벌에 들어갈 귀신에게 잘 보일 것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들을 대신 죽는 데까지 내어 주시고 행복을 주시기 위해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잘 보일 것인지, 우리에게 질병과 사고와 번민으로 고통을 가해서 속박하는 귀신에게 잘 보일 것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 추도식의 문제점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추도예배를 공식적으로 장려하는 교회도 있고 드물기는 하지만 절대 금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동을 일으키고 있는 듯 합니다. 즈음하여 성경적 이해를 위한 제시가 필요하고 그와 함께 현실적 적용을 위한 제안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A. 추도예배의 부당성
  첫째, 어원 자체가 비신앙적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추도(追悼)는 죽은 사람을 슬퍼하며 따른다(좇는다)는 뜻이고, 추모(追慕)는 죽은 사람을 사모하여 따른다는 뜻입니다. 추도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누구를 대상으로 드리든 그 어원의 의미는 죽은 사람과 죽은 혼령을 대상으로 애도하고 기리고 예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치다고 할지 모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의식을 베푸는 제사(祭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둘째, 예배학적 의미로 볼 때도 비신앙적입니다. 예배는 엎드림, 따름, 섬김, 경배 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4:10). 예배할 때는 우상적인 방법과 우상적인 태도와 우상적인 정신을 가지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출20:3-7). 추도예배는 죽은 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옳지 못합니다. 설사 하나님을 대상으로 드린다고 해도 어원적인 의미 자체가 잘못되었으므로 예배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습니다. 혹 살아 있는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드린다 할지라도 조상이 죽은 날을 택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제사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본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옳지 못합니다.
  셋째, 성경 말씀들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도 비신앙적입니다. 성경은 죽은 자를 위해 이교도처럼 슬퍼함을 금하고 있고 (레19:28, 신14:1, 겔24:17), 죽은 자에 대한 헌납을 금하고 있고 (신26:14), 죽은 자를 기념하는 것을 금하고 있고 (시31:12, 유1:9), 우상과 관련된 모든 종교적 행위를 금하고 있고 (출22:18, 신13:13-15, 레20:2,27), 우상적 종교 기념일을 폐하라고 했습니다 (골2:18,20-23, 벧전1:18). 성경의 문구적으로 추도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말은 없지만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이 추도예배를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려는 마음으로 연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B. 추도예배의 배후
  추도예배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추도예배에 대해 설명하기를, 추도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고, 살아 있는 유족을 위한 예배이고, 믿음 좋았던 부모의 신앙을 모본 삼기 위한 예배라고 할 것입니다. 비록 그런 좋은 의도를 가진 예배라고 해도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하더라도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범죄하는데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교회에서 법제화, 제도화, 의식화, 전통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습관이 있는 자 가운데 그와 같은 지식이 없는 자가 그것을 보면 담대히 먹게 되고 양심이 더러워질 뿐 아니라 멸망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전8:7,10-11).
  하나님께서 왜 모세의 시체를 없애려 했는지, 그리고 사단은 왜 그 일을 방해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34:6, 유1:9). 모세는 신정시대에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한 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낸 자였고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징계받을 때에 중보기도로 살게 해 주었던 자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게 되자 하나님은 천사를 시켜 모세의 시체를 없애게 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시체(무덤)을 두게 될 경우, 이스라엘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 기념할지라도 후대에 가서는 우상숭배의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가능성은 모세가 만든 놋뱀이 잘 보여 줍니다 (민21:4-9, 왕하18:4).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죄를 범하므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았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다 나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놋뱀을 성전에 보관해 오게 되었는데 그 놋뱀이 믿음없는 후대에 가서는 우상숭배의 도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선한 왕이었던 히스기야왕이 우상을 철폐하면서 그 놋뱀을 부수어 없앴습니다. 사단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런 점들입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는 우상숭배에 참여한 자들이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전10:18-20).

 

   C. 추도예배의 역사
  성경의 신앙적 인물들은 그 누구도 죽은 날을 기념하여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족장들이든 제사장들이든 선왕들이든 선지자들이든 사도들이든 말입니다. 그런 점을 이해하고 있는 미국의 청교도인들이나 한국의 초대교회들은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4차 총회에서도 추도예배를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추도예배를 허용하는 교회는 징계하기로 가결한 바 있습니다. 총회록 결의문에는 부모나 죽은 자를 위해 예배를 드리거나 초청하거나 제물을 차리는 것은 죄이며 죄라고 인정될 때 교회에서 치리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름대로 신실한 기독교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추도예배를 거부해 왔습니다.
  한국교회가 추도예배를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추도식(追悼式)을 국가적으로 거행한 다음부터라 생각됩니다. 그 이전에는 추도예배란 용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은 유교적 문화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교회에 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가문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가장 주된 이유는 조상과 부모도 몰라본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상 제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가정에서 쫓겨나는 며느리들이 많았습니다. 사후에 제사를 받는 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그들에게 제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제사 문제로 핍박받는 것도 큰 문제였으나 전도의 길이 막혔던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제사 문제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교회들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핍박받는 것을 줄여 주고 전도의 길을 넓히기 위해서 추도예배를 만든 것입니다. 이른바 제사를 기독교식으로 드려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목회자들이 추도예배 자체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교회들의 선택은 나름대로 가치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추도예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 안에서 제도화되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범죄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추도예배 날짜를 제사 날로 잡는 것, 음식에 고춧가루를 넣지 않는 것, 죽은 자의 사진을 걸어 놓는 것, 사진 앞에 향을 피우는 것, 사진 앞에서 절을 하는 것,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해 주는 것, 유족이 흰 옷을 입고 있는 것, 물론 교회마다 차이점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 추도예배를 처음 도입한 목회자들은 이런 형태로까지 변질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D. 추도예배에 대한 제안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적으로 추도예배는 성경적으로 옳지 않는 예배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전도의 효과를 생각하여 우상숭배의 형태를 띠지 않는 범위 안에서 특수하게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가정의 일원 모두가 기독교인이라면 추도예배는 드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구성원 중 일부만 기독교인인 경우에, 믿지 않는 가족이 제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혹은 믿지 않는 가족을 예배를 활용하여 전도하기 위해서라면 한시적으로 허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기독교식 제사 의 개념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하며 순수하게 예배와 애찬(음식 먹는 일)으로만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차츰 가정이 신앙화되어 가면서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술 담배를 끊지 못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한다는 사람에게 술 담배를 하면서라도 나오라고 전도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처음엔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신앙의 성숙도가 더해가면서 끊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데 모든 교회가 진리 수호를 위해 추도예배의 부당성을 과감히 가르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추도예배를 드리고 있는 성도들은 자신이 드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기본적으로 옳지 않다는 의식을 가져야 하고, 곧 끊어야 하겠다는 결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는 성도들은 추도예배를 드리는 자에 대해 함부로 정죄하기 보다는, 추도예배를 건전하게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신앙적 분별력을 가질 때까지 인내하면서 권면하는 자세를 가지기 바랍니다.

 

<結言>

  우상(偶像)은 하나님 외에 신적 대상으로 섬기는 모든 대상입니다.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들어 눈으로 보이는 것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눈에 안 보여도 하나님 위치에 둔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더 지배받는 것은 모두 우상적 존재입니다 (삼상15:23). 자기의 생각과 행동에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이 돈이든 지식이든 명예든 취미든 사람이든 우상적 존재입니다. 디모데전서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3:19에는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자기 속에 있는 욕망과 욕심과 탐심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3: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큰 우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상의 제물(祭物)은 우상숭배를 통해 얻은 모든 유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에 사용된 음식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과 신앙 양심을 양보하고 그에 어긋난 것을 행하므로 얻은 유익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의 제물과 같은 것입니다. 우상적 존재를 따르므로 얻은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과 자랑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우상의 제물과 같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