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고린도전서9:1-27
<題目> 자유에 대한 모범
<序言>
전 장에서는 바울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이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자신은 그것이 연약한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라면 영원히 먹지 않겠다는 결론으로 그리스도인의 권리와 자유를 절제하게 했습니다. 본 장에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사도권의 특권을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복음전파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말하고 교인들이 자신을 본받아 권리와 자유를 제한해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바울의 그런 사상은 11:1에 나오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내용이 절정입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권리와 자유에 대한 포기 (1-14절), 권리를 포기한 이유 (15-23절), 그리스도인의 경기 (24-27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권리와 자유에 대한 포기 (1-14절)
①바울은 사도적 자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당시에 바울의 사도권을 비난하는 거짓선지자들이 있었는데 고린도교인들도 그 비난에 동조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변명하고 있습니다. '사도'(使徒)는 주께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자이고, 그 능력은 고린도교회를 세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고린도후서12:12에는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②바울은 사도적 권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바울은 주께 보냄을 받은 사도로서 게바(베드로) 같은 사도들과 같이 사도적 권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첫째, 먹고 마실 권리가 있었습니다. 교회로부터 생활의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영적 양식을 제공하는 자로서 육적 양식을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복음전도 사역을 아내와 함께 했습니다. 바울도 그들처럼 결혼을 해서 아내와 함께 다닐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일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복음전도 사역을 하면서 장막(텐트)을 만드는 육체적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행18:3). 바울도 다른 사도들처럼 일하지 않고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아서 생활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③바울은 사도적 권리를 누릴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바울은 복음전도자가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아서 생활할 권리가 있다고 했는데 그 근거를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일반적인 예로 근거를 들었습니다 (7절). 통상적으로 보면 군대에서 복무하는 사람은 군대에서 숙식과 수당을 제공받습니다. 당시 군대는 징집제가 아니라 모병제의 상황이었습니다. 모병제 상황에서 자기 돈을 들여서 군 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이나 목장에서 일하는 일꾼들도 숙식과 급여를 받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자나 목장에서 일하는 자가 자기 돈을 들여서 봉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20:6). 둘째, 모세의 율법을 예로 근거를 들었습니다 (8-11절).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25:4).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소를 위함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 곧 사역자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밭을 가는 자나 곡식을 떠는 자나 모두 먹을 것을 얻을 소망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자는 마땅히 일을 시키는 자들로부터 먹을 것을 제공받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5:18에도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했고, 디모데후서2:6에도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신령한 것을 뿌렸으니 마땅히 육적인 것을 거두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고 영혼이 자라게 되었으니 그들로부터 육적인 생활비를 받는다고 해서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15:27에도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고, 갈라디아서6:6에도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성전 봉사자들의 예로 근거를 들었습니다 (13절). 성전 봉사자들은 성전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은 제단에 드려진 고기나 떡을 먹었으며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관리와 제사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세상일을 할 수 없었고 그러기에 백성들이 드린 것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민18:8-9, 신18:1-4, 레7:6,14, 10:12-15). 넷째, 예수님의 교훈을 예로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14절).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0:10에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했고, 누가복음10:5-7에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복음전도자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 먹을 것을 제공받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④바울은 사도적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은 주께 보냄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는 복음전도자로서 권리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는 선교사역의 초기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위에서 제시한 원리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신령한 일을 하는 자는 육신과 물질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관념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잘 받아 들여지고 바울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이 잘 세워지게 하기 위해 그 권리들을 포기한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해 포기한 것이고 복음의 효과를 위해 포기한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의 열매를 위해 포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복음전도의 대상자를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권리를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역이 잘되고 어떻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인지를 생가하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고전7:29-31).
2. 권리를 포기한 이유 (15-23절)
앞 대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리를 제시했고, 사도적 권리를 복음을 위해 철저히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 주므로 복음전도자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인격적인 면이나 사역적인 면이나 사도적 권위 면으로 보나 자랑할만한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출신성분(빌3:5-6), 선택(행9:1-9), 사역(고후11:23-30), 능력(고후12:11-12, 고전9:2)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로 대접받고 베드로나 요한처럼 교회의 장로로서 교회를 다스리고 교회에서 사례에 대한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13절, 민5:9). 그러나 바울은 그런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을지언정 대접을 받지 않으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가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글을 쓴 것은 대접을 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①복음이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이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권리를 포기한 것은 그의 자랑하는 것이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자랑하는 것은 복음, 십자가의 도입니다 (갈6:14).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훼방받지 않고 효과를 거두게 하기 위함입니다. 12절에서도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 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였어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상을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라면 상을 받을 만하지만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 붙들려 그에 의해 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리스도께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고 그 사명을 순종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 같아 불가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기에게 상이 있다면 그가 복음의 효과를 위해 권리를 포기한 것 자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복음의 효과를 위해서 조금도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는 것 자체를 받아야 할 보수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②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이 복음을 전하데 있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했습니다 (고후4:5).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자유한 사람이지만 (7:23), 복음의 효과를 거두는 일에 얽매여 종이 되려 한 것은 좀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빌2:6-8).
바울은 율법이 있는 유대인에게는 율법있는 자같이 되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되려 했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에 얽매이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처럼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 율법의 의식인 할례를 주기도 했고(디모데, 행16:2-3) 유대인의 성전 결례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행21:17-26). 하지만 이방인들은 율법에 대해 자유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바른 복음 진리를 세우기 위해 구약의 의식인 할례를 주지 않았고 (디도, 갈2:3), 안디옥에서는 이방인과 같이 먹기도 했습니다 (갈2:11-19). 곧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 같이 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강한 사람에게는 강한 사람에게 맞게 대했고 신앙이 약한 사람에게는 약한 사람에게 맞게 대했습니다 (8:10-13).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그런 이중적이 태도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바른 진리를 양보하거나 타협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받아 들여 권을 받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복음 전도자가 가져야 할 융통성을 잘 보여 준 것입니다. 진리 문제 아닌 아디아포라 문제 때문에 진정한 복음 진리를 거부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는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약한 자처럼 될 필요가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경기 (24-27절)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는 2년마다 이스미안(Isthmian) 경기가 열렸습니다. 이스미안 경기는 올리피안 경기와 파티안 경기와 네미안 경기와 함께 그리이스 4대 경기 중 하나님입니다. 그 경기들은 길이가 약 200m 정도 되는 운동장(Stadium)에서 열렸습니다. 바울은 그 경기들을 예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영적인 경주에 대해 말했습니다 (엡6:12).
①경기의 목적은 상을 얻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경기에서는 승리자에게 당위로 오르게 하여 월계수 나무 가지로 엮은 월계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그것은 큰 명예와 영예와 영광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경주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광을 얻는 것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구원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광과 칭찬과 존귀를 얻기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모든 지위와 학술과 보화를 버리고 능욕받고 고난받기를 즐거워 한 것도 이 상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히11:24-26). 바울이 각양 고난을 참고 세상의 출신 성분과 지위와 학식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사역을 한 것도 이 상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후11:24-27, 빌3:14, 딤후4:7-8).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한결같이 그것을 목적하여 살기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상을 얻는 것을 목적하고 살아야 합니다. 고대 경기에서 승리자 한 사람만이 월계관을 얻는 것처럼 한 사람만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심정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②경기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26절에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당시 육상 경기는 트랙(track) 끝에 사각 기둥으로 세워져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렸습니다. 달리기는 그 푯대를 목표로 해서 해야 합니다. 향방없는 달음박질을 한다면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신앙 경주는 그것이 성화에 관한 것이든 사역에 관한 것이든 예수 그리스도가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성화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하고 사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합니다 (히12:2, 빌2:7-10, 3:8-9, 계3:21).
③경기의 준비는 절제하는 것입니다.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했습니다. 당시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는 통상 10개월 동안 고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음식, 오락, 수면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절제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잠깐 있다가 시들어 버릴 월계관 그리고 죽을 때에 없어져 버릴 명예와 영광을 위해 그렇게 절제해야 했습니다. 썩어져 없어질 영광을 위해 그렇게 절제한 것입니다. 영원히 썩지 않을 영광을 얻기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은 더욱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④경기의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26하-27절에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했습니다. 복싱과 같은 격투기 경기에서는 싸우는 대상을 정확히 알고 그 대상의 약점을 가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싸움의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의 육체의 본성, 마음의 죄성을 가격하여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선한 욕망대로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마7:5, 막7:21-23, 갈5:19-21, 갈5:17, 벧전2:11, 갈5:16). 물욕과 정욕과 사욕을 다스리지 못하면 롯의 처와 삼손과 데마처럼 되고 맙니다 (창19:26, 삿16:19, 딤후4:10).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쇠로된 장갑인 세스투스(sestus)를 끼고 시합을 했는데 어느 한쪽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시합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적 욕망과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히12:4).
⑤경기의 방법은 법대로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2:5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모든 경기는 경기의 룰이 있습니다. 그 법칙을 어기면 실격당합니다.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대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경주의 법칙은 성경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심판 기준은 하나님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와 사역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삼상15:23, 미6:7-8, 요14:21, 요일5:3). 가인과 아벨의 제사 사건, 다윗의 법궤 옮기는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4:1-5, 삼하6:1-15). 열심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結言>
바울은 사도적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전도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절제는 사명을 다하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달음박질도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고 영광받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