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고린도전서10:1-33
<題目> 이스라엘에 대한 전감
<序言>
바울은 8~9장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사도의 특권과 권리를 포기한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본 장에서는 고린도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자유방종으로 기울어져 범죄의 기회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 훈련이 필요함을 역설(力說)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들 예로 들어 고린도교인들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여 범죄할 경우 하나님의 축복에서 떠나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내용구조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전감(1-13절),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14-3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전감 (1-13절)
①이스라엘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고역 가운데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모세를 불러 그들을 인도해 냈습니다.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을 때 홍해를 갈라 물이 벽을 이루게 했고 그 가운데로 건너게 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40년 동안 어디로 행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었고, 먹을 것이 없어 주릴 때 하늘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먹게 해 주었고, 마실 것이 없어 목마를 때 반석(바위)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했습니다 (출14:29, 16:13, 35, 17:6, 민20:10). 하나님이 구원과 임재와 보호와 인도를 통한 특별한 은혜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특별한 기적적인 은혜는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어 사단과 좌와 죽음의 종 노릇하던 데서 구원하여 세례를 주고 말씀과 성령으로 영적 만족과 풍요를 주실 것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수와 떡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요6:35, 신8:3, 요4:14, 7:37-38). 고린도교인들은 영적인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고 세례를 받았고 말씀과 성령으로 영적으로 풍성함을 누린 자들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②이스라엘은 범죄하여 멸망했습니다.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아론을 위시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습니다 (출32:3-29). 둘째, 간음을 했습니다. 거짓선지자 발람의 꾀에 속아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을 했습니다 (민25:1-9). 셋째, 시험을 했습니다. 물이 없어 갈할 때 하나님이 자기들 가운데 계신지 안 계신지 시험을 했고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는지 안 이루어 주시는지 시험했습니다 (출17:1-7, 신6:16). 넷째, 원망을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주릴 때마다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출16:5-8, 민14:2, 21:4-6).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 결과는 무서웠습니다. 우상숭배 했을 때 3,000명이 죽었고 간음했을 때 23,000명이 죽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하고 간음하고 시험하고 원망한 죄로 말미암아 광야의 40년 기간 동안 모두 죽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새로 난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과 세례와 말씀과 성령 등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용하여 범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구속적 은혜를 받았어도 범죄하면 궁극적 구원은 상실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축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범죄하므로 멸망한 것을 전감 삼아 범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받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궁극적인 구원은 상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범죄하면 하나님의 축복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범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상숭배와 간음과 시험과 원망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고 지배받는 것을 따르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딤후3:4, 빌3:19, 골3:5, 삼상15:23).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간음과 같습니다 (마5:28, 약4:4).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과 말씀에 대해 회의를 품고 의심하고 항거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속한 환경들을 탓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요셉도 형제, 보디발 아내, 재판장, 술관원장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사울, 도비야, 아히도벨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가룟유다, 빌라도, 대제사장, 유다 백성들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③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시는 분입니다.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려는 목적을 가지시고 다른 민족에게 주지 않은 특별한 은혜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계시, 임재, 언약, 율법, 성전과 제사 제도를 주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이 광야에서 우상숭배, 간음, 시험, 원망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여 모두 죽게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보장받았을지라도 자유 방종하여 범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예수 믿어 구원을 보장받았으니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는 지식을 가지고 죄에 대해 담대하면 멸망하게 될 것이므로 삼가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이 행동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할 때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고 피곤하여 지치고 질병에 걸리고 대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떠나 범죄했습니다. 우상숭배와 음행과 시험과 원망의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모두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도 그런 죄에 빠지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본절 앞의 내용인 1-12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우상숭배와 음행과 시험과 원망으로 멸망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고린도교인들은 그것을 본보기로 해서 그 같은 죄에 빠지지 않기를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본절에 시험에 빠지지 않기를 권면한 것입니다. 13절上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GTS,GNT)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ος)는 영어성경들(KJV,NASB, NIV)에서 ‘템테이션’(temptation)으로 번역했듯이 우리 말 ‘유혹’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험은 유혹의 의미를 가진 시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유혹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이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의미를 가진 시험은 악령들인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이 합니다. 야고보서1:13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시험’도 유혹의 의미입니다 (πειρασμος, πειραζω -GTS,GNT, temptation, tempted –KJV,NASB,NIV). 하나님은 유혹하지도 않으시고 유혹을 받지도 않습니다. 요한계시록12:9에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고 했습니다.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이 온 세상에 방황하면서 온 세상을 미혹하여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들과 환경들을 이용하여 미혹하고 넘어지게 합니다. 예수님도 악령에게 유혹의 의미를 가진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4:1에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했는데 여기의 ‘시험’은 ‘유혹’의 의미입니다 (πειραζω, tempted –KJV,NASB,NIV).
그런데 그 같은 악령들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유혹(미혹)을 합니다. 욥기에 보면 당시에 욥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늘어전에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보았느냐고 하면서 욥만큼 경건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그에게 부자가 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소유물을 치면 하나님을 향해 욕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치도록 허락합니다. 욥기1:12에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악령들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만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악령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간계로 역사하지만 하나님은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그들의 방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성도에 대해 악령들은 미혹하여 넘어지게 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을 이용하여 성도에 대한 선한 목적을 완전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기에 악령들은 자기들의 뜻을 이루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나귀가 물이 마른 우물에 빠졌습니다. 나귀는 슬피 울었습니다. 주인은 구해줄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늙은 나귀도 쓸모없고 마른 우물도 쓸모없다고 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 우물을 파묻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각기 삽으로 흙을 파서 우물 안으로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나귀는 더욱 크게 소리 지르며 “살려 주세요. 제발 좀 살려 주세요!” 울부짖었습니다. 나귀는 우물 위에서 흙이 떨어질 때마다 피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흙더미 위로 올라와 우물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기 때문에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13절中에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미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πιστος)는 ‘믿을만한’ ‘신실한’ ‘진실한’ ‘확실한’ 등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언제나 선하고 하나님의 행위는 언제나 완전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결국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가지시고 섭리를 통해 그 목적이 완전하게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이 악령들에게 성도를 미혹하도록 허락한다 할지라도 성도가 아주 넘어져 실패하기까지는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에 대한 선한 목적을 가지셨고 그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때로 악령들의 미혹도 허락하게 되는데 성도들이 아주 실패하도록 미혹을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 대해 가진 선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만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십니다. 13절下에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유혹을 허락하신 것은 성도에 대한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야고보서1:2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시험’의 헬라어는 유혹의 의미인 시험입니다 (πειρασμος, temptations–KJV). 이어지는 야고보서1:3-4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그 목적을 두시고 유혹을 허락했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려 할 때는 피할 길을 내어 능히 감당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극복하려 하다가 성도가 가진 자체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을 땐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접할 때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을 주어 극복하게 해주기도 하십니다. 기도할 때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음과 확신을 주어 극복하게 해 주기도 하십니다. 사람을 보내주어 위로와 조언과 도움을 주어 극복하게 해 주기도 하십니다. 환경에 섭리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므로 극복하게 해 주기도 하십니다. 때론 초자연적인 역사로 극복하게 주기도 합니다.
모든 종류의 시험이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시험하다’ 혹은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된 단어는 구약성경에서는 히브리어 동사 '나사'(נסה)와 ‘빠한’(בחן), 명사 ‘마사’(מסה)에서 번역된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 동사 '페이라조'(πειραζω), 명사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ος)에서 번역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원어들은 한글성경에서는 모두 ‘시험하다’ 혹은 ‘시험’으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영어성경에서는 다양하게 번역했습니다. temptation(유혹), try(조사), test(평가), trial(시련), prove(증명)으로 번역했습니다. 물론 모든 영어성경에서 일관되게 한 가지 의미로만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일치된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유혹(temptation)의 의미가 있습니다. 유혹(미혹)은 악령들이 미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6:13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이라고 했는데 여기의 ‘시험’도 ‘유혹’의 의미입니다 (πειρασμος, temptation –KJV,NASB,NIV). 마태복음26:41에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했는데, 여기의 ‘시험’도 ‘유혹’의 의미입니다 (πειρασμος, temptation –KJV,NASB,NIV). 야고보서1:13에도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는데, 여기의 ‘시험’도 ‘유혹’의 의미입니다 (πειραζω, tempted-KJV,NASB,NIV). 야보고서1:14에도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했는데, 여기의 ‘시험’도 ‘유혹’의 의미입니다 (πειραζω, tempted–KJV,NASB,NIV),
둘째. 조사(try)의 의미가 있습니다. try는 시도나 노력의 의미도 있지만 조사의 의미도 있습니다. 조사는 하나님이 알아보기 위해 시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대하32:31에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시험’은 ‘조사’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נסה, try-KJV,NASB). 고린도전서3:13에도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시험’은 ‘조사’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πειραζω, try–KJV).
셋째, 평가(test)의 의미가 있습니다. 평가는 하나님이 알아보아 평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22:1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시험’은 ‘평가’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נסה, tested-NASB,NIV). 신명기8:16에도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시험’도 ‘평가’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נסה, test–NASB,NIV).
넷째, 시련(trial)의 의미가 있습니다. 시련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1:2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는데, 여기의 ‘시험’은 ‘시련’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πειρασμος, trials–NASB,NIV). 베드로전서1:6에도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고 했는데, 여기의 ‘시험’도 ‘시련’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πειρασμος, trials–NASB,NIV).
다섯째, 증명(prove)의 의미가 있습니다. 증명은 하나님이 믿음의 여부를 드러내어 확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명기33:8에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고 했는데, 여기의 ‘시험’은 ‘증명’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נסה, prove–KJV,NASB). 요한복음6:6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고 했는데, 여기의 ‘시험’도 ‘증명’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πειραζω, prove-KJV).
유혹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시험이라도 하나님의 목적은 성장시켜 사용하고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8:16, 렘29:11, 롬8:18, 히12:10-11, 약1:2-4, 벧전1:6-7). 그러므로 하나님이 감당할 시험만 주시고 최선을 다해도 감당할 수 없을 땐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십니다. 힘들 때 미혹되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성장시켜 영광을 얻게 하려는 목적으로 시험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도 감당할 수 없을 때는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모든 시험을 승리적으로 견뎌내야겠습니다.
2.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14-33절)
14절에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저주가 경고된 계명입니다 (출20:3-6, 고전10:1-10). 우상숭배는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을 섬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어떤 대상을 신적 대상으로 만들거나 그것에 절을 하거나 그것에 음식을 차리거나 그 음식을 먹는 행위입니다. 본문은 그 행위들 중에 그것에 차린 음식을 먹는 행위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행위를 우리는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고사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차린 음식이 우상의 제물입니다.
우상의 제물은 먹지 말아야 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디모데전서4:4-5과 로마서14:1-3을 근거로 주장합니다. 디모데전서4:4-5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 앞 절을 보면 결혼을 못하게 하고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금욕주의에 대한 말씀이지 우상의 제물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로마서14:3에는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앞 절을 보면 구약에서 금한 고기들을 말하는 것이지 우상의 제물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혹 우상의 제물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하나, 설사 우상의 제물에 관한 말씀이라 해도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의 의도는 교리화할 수 없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에 대해 교회의 성숙을 위해 믿음이 있는 자가 믿음이 약한 자를 포용해야 할 것에 대해 가르치려는 의도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5:28-29에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행15:19-20). 바울이 전도여행에서 유대인들이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를 할례를 걸었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마치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주를 이룬 예루살렘 공회에 참여하여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므로 개종의 조건으로 달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공회는 개종의 조건에 할례를 넣지 않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4가지 규례는 지켜야 한다고 결의하고 각 교회에 보냈고 교회들은 그 규례를 지켰습니다. 그 규례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이라고 했습니다. 그 규례는 사도들이 성령과 함께 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은 성령께서 원하는 것이고 사도들이 결정한 것이고 초대교회가 지킨 규례입니다.
요한계시록2:2에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 했고 이어지는 6절에는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소아시아 7교회에 대해 주님이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은 에베소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잘한 것 중 하나님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물리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은 당시 이단이었던 니골라당을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2:14에는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버가모교회에 하신 말씀인데 버가모교회가 거짓선지자 발람의 교훈을 받아들인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 가운데 하나는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2:20에도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이는 두아디라교회에 하신 말씀인데 두라디라교회는 이방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인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이세벨 교훈 가운데 하나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 발람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은 모두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교훈을 물리친 교회는 칭찬하고 용납한 교회는 책망했습니다. 주님도 그들과 그 행위를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계2:6).
①우상숭배에 참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우상의 제물을 먹는 행위는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행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모압왕 발락과 거짓선지자 발람의 궤계에 빠져 우상의 제물을 먹고 우상의 제단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로 많은 사람이 염병으로 죽었습니다 (민31:16). 제물을 먹는 자는 이미 제단에 참여한 자입니다. 제단에 참여한 자는 우상숭배에 참여한 자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이 제단에서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에 연합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상을 자신들의 삶을 주장하는 주(主)로 인정하며 그의 뜻을 따라 살며 인생의 가치를 그를 위해 사는 것에 두며 인생의 목적을 그에 대한 복종과 헌신에 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제물을 함께 먹는 자가 모두 그와 같은 한 가치와 목적을 위해 사는 공동체 일원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성찬식을 행합니다. 성찬식에는 예수님의 살을 기념하는 떡과 예수님의 피를 기념하는 즙을 먹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예수님과 연합되었음을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며 우리 삶의 주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을 인생의 가장 귀한 가치로 여기며 예수님께 복종하고 헌신하는 삶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참여하는 모든 일원들이 한 가치와 한 목적과 한 비전과 한 사역을 하는 한 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사하고 제물을 나누어 먹었던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레3:3, 6:26, 7:14-15). 그러므로 주의 성찬에 참여한 자가 우상의 제물에 참여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②귀신과 교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은 인간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금은동철목석에 불과합니다 (렘2:27, 고전8:4). 문제는 그 우상을 매체로 해서 배후에서 역사하는 귀신을 섬기고 귀신과 교제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조상을 숭배하는 것도 조상으로 가장한 귀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천국(낙원)이나 지옥(음부)에 가는 것이고 이 세상에 있지 못합니다. 무당의 굿이나 제사 때에 나오는 귀신은 조상의 혼령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인 악령입니다. 악령의 우두머리 사단은 유대 전승에 의하면 루시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선한 천사로 창조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책을 맡고 천사장이었습니다(겔28:13-15). 그러나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된 지위를 얻으려 했습니다 (유1:6, 벧후2:4). 그래서 자신을 따르는 수하의 천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사14:12-15, 겔28:17-18, 벧후2:4, 유1:6). 하나님은 미가엘 천사장과 그의 천사들로 하여금 제압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천상에서 쫓아냈습니다 (계12:8-9). 그들은 자신이 지옥에 던져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벧후5:8). 그들은 자신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크게 분내어 이 세상으로 내려와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 (계12:12, 엡2:2). 악령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난 이후 자기의 결국을 알고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한국 정신문화의 배경인 조상숭배를 이용하기 위해 조상으로 가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사나 제사행위는 귀신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제물을 먹는 자는 제단에 참여한 것이고 제단에 참여한 것은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행위는 귀신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한 자가 귀신의 잔에 참여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섬겨야 할 성도들이 귀신을 섬기며 귀신과 교제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③양심이 약한 자를 실족케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우상의 제물은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상품화된 것은 우상숭배와 관련이 없습니다 (25절). 그리고 불신자 집에 갔을 때도 내어 온 음식이 우상의 제물인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27절). 하지만 그것이 누가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하면 그 말하는 자와 그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28절). 만일 우상의 제물이라는 말을 듣고도 먹게 되면 그가 실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라면 믿음있는 자가 먹는 것에 대해 실족하게 됩니다. 또한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되는지 먹어도 되는지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라면 제물을 먹어도 되는 줄 알고 담대해 먹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우상의 제물을 먹던 습관을 가지고 있던 자는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앙양심을 누르고 먹게 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귀신과 우상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만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주장처럼 그런 지식이 있고 귀신과 우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면 그러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는 신앙양심이 더럽혀지고 우상숭배에 참여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은 그런 지식과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먹게 되면 연약한 자들을 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를 구원한 그리스도께 범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8:12-13).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그러므로 자신이 가진 지식, 자신이 가진 믿음, 자신의 양심만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다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덕을 더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1:5-7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바른 지식이 있고 높은 장성한 믿음이 있고 떳떳한 양심이 있더라도 연약한 사람을 생각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연약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그것이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확실한 지식과 믿음과 양심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야 합니다. 비록 음식을 먹는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목적과 사역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結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 모두 쓰러져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제외).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우상숭배를 하거나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우상과 우상의 제물을 멀리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우상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더 지배받는 것이고, 우상의 제물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양보하고 우상을 따라가므로 얻은 모든 유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주의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