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고린도전서11:1-34

<題目> 예배와 성찬에 대한 태도

 

<序言>

  전 장까지는 주로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본 장부터는 교회의 예배에 관한 질문에 답변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너울을 쓰지 않고 예배에 참여하는 문제, 성찬식에 관한 문제, 성령의 은사에 관한 문제에 대해 답변하고 있습니다. 본 장에서는 여자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할 때 너울을 쓰지 않고 참석하므로 교회 안팎의 물의와 비난을 받게 된 데 대해 성경적인 근거와 아울러 사회적인 전통을 들어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자유를 제한하며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도모하라는 교훈입니다. 내용구조는 예배에 대한 바른 태도 (1-16절), 성찬에 대한 바른 태도 (17-34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예배에 대한 바른 태도 (1-16절)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①남녀는 인권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평등합니다.

 

  모든 과거 고대,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이 남성에 비해 차별을 받아 왔습니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육체적인 힘이 강합니다. 정신적으로도 객관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통합적인 사고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남성이 공동체를 지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성은 상대적으로 여성을 차별해 왔습니다. 그런 사회를 경험한 사람은 여성의 비참함을 알기 때문에 여성 자신들도 아들을 낳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와 심리적 차이를 차별로 여긴 것입니다.  

 

  팔레스틴의 유대교 사회나 헬라 세계의 유대교에서는 여자들이 매우 낮은 지위에 있었고 그에 따른 압제와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나라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집안에서 활동했고 거의 은둔 생활을 하며 가족 이외의 관심사를 가져서는 안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권위가 하나님에 의해 남자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범사에 여자의 신분을 남자 보다 하위에 두고 순종을 하게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동양과 마찬가지로 남존여비(男尊女卑) 관습이 철저했습니다. 심지어는 여자는 족보에서는 뺐고 인구조사에서도 사람 수에 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제자들까지도 유대인의 습관이 있어서 사람 수를 셀 때에 여자와 어린아이는 제외시켰습니다.

 

  한국사회도 그런 범주에 갇혀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유교적 통념을 가지고 있어서 교회 안에서도 성경해석에서 여성을 폄하하고 사역에서 여성을 배제시켰습니다. 대부분 창세기 2-3장과 고린도전서 14장과 에베소서 5장과 베드로전서 3장 등을 근거로 '여자를 죄를 세상에 가져온 자이다' '여자를 남자에게 종속된 자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여성을 죄의 원인자로 말하거나 남성에게 종속된 위치에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었다고 한 것은 창조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지 아담과 하와의 주종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먼저 먹은 자가 하와라고 한 것은 상황 설명이지 결코 하와가 모든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온 범죄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것은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들어 책망하는 내용이지 교회 사역에서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인용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의도이지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 관계에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삶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기 보다는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해야 할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까지도 성경의 오해를 이용하여 여성을 인격적으로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남녀의 인격적 위치와 권리는 동등합니다. 바울은 남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차등이 없다고 했습니다. 11절에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동일하게 자기 형상대로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 동일하게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원하여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고  남자를 우등하게 만들거나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성정으로 만들었습니다. 다만 육체적 심리적 영적 특질을 서로 다르게 만드신 것은 서로 조화와 협력을 위함이지 결코 우열과 차등을 두기 위함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이 동일하게 구원사역에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구원 사역에 귀히 쓰신 예도 많고 심지어 사역적 지도자로 사용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미리암은 선지자였고, 드보라는 사사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같은 여인들이 예수님 사후에 예루살렘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도였다고 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브리스길라(브리스가)는 고린도교회를 세웠고, 루디아는 빌립보교회를 세웠고, 유오디아와 순두게도 빌립보교회의 리더였고, 뵈뵈는 겐그리아교회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동역자로 여겼습니다 (롬16:1,3,13, 빌4:2). 바울은 여자를 사역의 파트너로 여겼고 삶 전체의 파트너로 이해했습니다. 이 이해는 당시 사회에 하나의 큰 변화였고 혁명적 신학이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 자유인이나 종, 부자나 가난한 자, 학식 있는 자나 무식한 자, 남자나 여자 사이에 차별이 없이 하나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3:26-28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3:9-11에는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2:13에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성화를 이루고 성령의 은사를 받는데 있어서 차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든 여자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으므로 평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②여자들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덕을 세워야 합니다.

 

  당시 근동 지방의 여인들은 공적인 모임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야쉬막'이라는 너울을 썼습니다. 이는 남자에게 복종하는 표였으며 남자의 권위와 보호 아래 놓인 순결한 존재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래서 창기들 외에 대부분의 정숙한 여인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녔습니다. 안 쓰고 다니는 자는 남자들에게 관심을 끌 목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전통과 무관한 고린도지방의 자유주의자들과 여성의 자유를 부르짖는 자들은 '왜 더운 지방에서 여자만 너울을 쓰고 다녀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고린도교인중 일부 여인들은 이런 사조를 받아들여 통상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수건을 쓰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창녀들은 전에 행하던 습관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안 쓰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대두되었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해 전통을 무시하는 몰상식한 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것은 복음 전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여자들이 너울을 쓰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첫째, 3-13절에 보면 창조 질서에 근거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적 판단대로 '하나님→그리스도→남자→여자' 순서로 위치를 정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는 표로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창조 질서이며 천사들도 이를 처음부터 알고 있고 지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14-16절에 보면 인간의 본성에 근거했습니다. 남자가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여자가 긴 머리를 하는 것은 자랑이 된다고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2절에 보면 사회적 풍습에 근거했습니다. 당시 모든 교회의 여자는 너울을 쓰게 되어 있고 그것이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통용되는 사회적 관습과 전통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들이 그 시대의 전통과 관례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곧 유전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전(전승)은 초대교회의 교회 교육의 한 중요한 방편으로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 가르침에는 기독교 전반에 걸친 관례나 규범이나 교리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리스도인의 행동 훈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교회의 질서와 전통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한 유전들은 전도자나 교사들에 의해 전해졌으며 그 골자는 사도적 권위에 근거하여 전수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선배 신앙인들로부터 전해받은 유전을 가는 곳마다 전했습니다 (4:17, 7:17). 그래서 목회서신들에서 유전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딤전4:6, 딤후1:13-14, 2:2, 3:14, 4:3, 딛1:9, 2:1). 그리고 고린도교인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쳤고 그대로 따르는 자를 칭찬했습니다. 2절에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나 유전에 대한 근본정신 없이 외식으로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 진리마저 포기하고 문화권에 동화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 진리에 확고히 서 있는 자는 복음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유익과 덕과 화평을 위해 유전과 사회적 문화습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전도를 위해 세금 문제 등에서 당시 사회구조를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덕을 생각하여 양보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도 바울을 본받아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너울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쓰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당시 고린도교인들이 예배 때 여자가 너울을 쓰는 것이 옳은지 쓰지 않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쟁에 대한 문제 해결로 대답한 내용입니다. 결론적으로 여자는 너울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사회적 통념이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는 표로 머리를 길게 하고 너울을 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여자가 남자를 복종해야 한다는 교리를 가르치려는 의도가 아니고 진리 문제가 아닌 것에서는 교회의 유익과 덕을 위해 사회적 관습과 전통과 통념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은 고린도교회의 시대적 문화상황을 고려했듯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우리 상황을 고려하여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면한 내용을 문자에만 얽매여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자는 무조건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거나 여자는 너울을 쓰고 다녀야 한다는 논리를 세워서는 안됩니다.    

 


       2. 성찬에 대한 바른 태도 (17-34절)

 

  ①성찬에 대한 잘못된 참석을 책망했습니다.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성찬문제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파당이 나누어져 있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당시 헬라 사회에서는 친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식사를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만찬을 열기 위해 공동으로 기부금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 만찬을 '에바노스'(Evanos)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도 성도의 교제를 위해 교회에서 만찬을 했습니다. '아카페 밀'(Agape meal)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찬(聖餐)과 함께 애찬(愛餐)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교인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을 기념한 후에 모든 성도가 함께 그것으로 식사를 하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처음 의도는 주의 만찬을 기념하면서 부자들이 많은 음식을 싸와서 가난한 자와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자는 부자끼리만 먹고 가난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끼리 먹는 폐단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배불리 먹어 취하기까지 했고 가난한 자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심지어 부자들은 그 시간을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았고 가난한 자들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편당이 갈라졌습니다. 주께서 한 몸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만찬을 가지신 것인데 그들은 만찬 때문에 오히려 나누어지고 찢겨졌습니다. 그것은 성찬(Sacrament)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책망을 한 것입니다. 34절에는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 폐단 때문에 초대교회들은 A.D.412년에 카르타고 회의에서 폐지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당을 짓는 것은 육체의 일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갈5:20, 롬2:8). 교회는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서로 하나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②성찬에 대한 바른 의미를 밝혔습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성찬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성찬을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성찬에 대한 바른 의미를 밝혔습니다. 마태복음26:26-28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즙을 주면서 그것이 당신의 살과 피라고 하면서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의식으로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명령에 의해 성찬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과 잔을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려는 의미를 부여한 말씀으로서 상징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몸이 못 박혀 찔리고 피를 흘려 죽을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곧 예수님의 대속해 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연합할 것을 요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을 믿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죽으므로 그들의 죄를 대속하여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을 받아들이는 자는 죄 사함을 받아 죄로 인한 형벌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내어 줌’ 사상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사람들은 성찬식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기념하고 우리가 그에게 연합하여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전하는 행위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의식의 행위로 선포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성찬(聖餐)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속죄일에 두 염소를 성막에 데려다가 한 염소는 잡아서 피를 흘려 속죄소에 뿌리고 한 염소는 광야 무인지경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염소의 피는 죽음을 의미하며 그 죽음은 죄를 속하는 값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없어지되 또 다른 염소가 돌아오지 않듯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이었고 상징이었고 예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은 우리의 죄값으로 대신 죽으신 속죄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은 자는 속죄함을 얻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성찬식에서 떡과 즙을 먹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됨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주의 고난과 부활에 연합된 자들로서 실제로 상호내주를 통한 교제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해 주신 것에 대한 당연한 반응으로 그를 위해 살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한 교인들이 모두 주님의 한 몸에 속한 자들로서 새언약의 유기적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셔서 완전한 삶과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실 것을 대망하며 하나의 표징(Sign)으로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에게 주께서 성령으로 그와 같은 은혜를 느끼게 해 주십니다.


  성찬식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찬식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떡과 즙에 대한 개념도 달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화체설(化體說)설이 있습니다. 화체설은 토마스 나퀴나스의 결정적 역할로 로마 카톨릭의 정설이 되었습니다. 화체설은 예수님이 떡과 즙에 실재로 임하여 떡과 즙이 살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입니다. 둘째는 공재설(共在說)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주장으로서 떡과 즙은 그대로 있지만 예수님이 떡과 포도즙에 임한다는 주장입니다. 셋째는 기념설(記念說)이 있습니다. 기념설은 종교개혁자 쯔윙글리의 주장으로서 예수님이 떡과 즙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즙은 기념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넷째는 영적 임재설(靈的臨在說)입니다. 영적 임재설은 종교개혁자 칼빈의 주장으로서 예수님이 떡과 포도즙에 참여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임하신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오늘날 개혁교회가 정설로 받아들이는 설입니다.   


  ③성찬에 참여할 때 주의할 점을 밝혔습니다.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바울은 성찬의 바른 의미를 말한 다음에 성찬에 참여할 때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7절). 합당하지 않게 참여한다는 것은 성찬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하고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는 성찬의 의미와 가치를 바로 알고 참여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는 적어도 성찬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었다는 인식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영적 교제의 장입니다. 만일 성도들 간의 교제로만 생각하고 헬라인들의 관습처럼 즐거운 연회로 행하는 것은 주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한 자는 먼저 자기를 살피고 참여해야 합니다 (28절). 성찬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참여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29절). 여기에서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마(κριμα)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damnation-KJV, judgment-NASB,NIV). 이미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약하고 병들고 잠자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30절).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힘든 가운데 있는 것은 자신들을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찬을 애찬과 구별하지 못하고 육적인 교제로만 활용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히스기야왕 때에도 성례 가운데 하나인 유월절 규례를 어기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려 한 때가 있었습니다 (대하30:18-20).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는 것은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31-32절). 주께서 재림 때에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영원한 심판을 합니다. 그 때에 그들과 같이 영원한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징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잘못할 때에 아주 멸망하거나 영원한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바로 세우려고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징계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히12:6-13).

 

  그러니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33절).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살피고 서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성찬과 애찬을 구별하지 않았고 성찬을 하기 전에 시장한 자들이 먼저 먹고 취한 상태에서 성찬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찬을 행하고 그 다음에 애찬을 통해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혹 어떤 자들은 성찬을 허기를 채우고 즐기는 목적에 활용하기도 했는데 그러려면 자기 집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34절). 교회에서 하는 성찬은 육신의 허기를 채우거나 육신적 교제의 즐거움을 위해 활용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주께 범죄하는 것이 되고 성찬을 멸시하는 것이 되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結言>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공예배에서 여자가 쓰는 문제와 공예배에서 성찬식하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성찬식에서는 그 의미와 가치를 바로 알고 참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찬식은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 효과를 현재적으로 적용하는 의식입니다. 성찬식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현재적 교제라는 점을 인식하고 육신의 기회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