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고린도전서12:1-31

<題目> 성령의 은사에 대한 교훈

 

<序言>

  1~10장까지는 개인의 신앙생활에 중점을 둔 반면 11~14장까지는 공동체적인 문제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11장에서는 여자가 교회 예배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 성찬에 관한 문제를, 12~14장까지는 영적 은사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 12장은 성령의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초대교회의 특징대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거기에는 참된 것도 있었으나 거짓된 것들도 있었습니다. 자칭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어떤 이들은 분쟁과 대립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어떤 은사가 더 중요한가'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 하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설명함으로서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영적 은사들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바로잡고, 은사 문제로 생기는 개인적 교만과 우월주의와 부나주의를 경계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분별 기준 (1-3절), 은사의 다양성 (4-11절), 은사의 일체성 (12-27절), 직책의 다양성 (28-31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분별 기준 (1-3절)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신령한 것 곧 은사에 대해 바로 알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제기한 성령의 은사문제는 헬라의 신비 종교에 배경을 두고 있었습니다. 헬라 이방 예언자들은 무아지경이나 황홀경 상태에서 그들의 제의(祭儀)를 거행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 이방인으로 있을 때 그들에게 미혹되어 헛된 우상에게 끌려갔었습니다. 이교도들이 끌고 들어가는 대상인 우상은 아무 생명력도 없고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헛된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분별력을 상실하고 그 우상을 좇아갔고 그 결과는 비참했었습니다.

 

  한편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저주할 자' 혹은 '저주받은 자'로 여깁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주(主)로 여깁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주로 고백하는 것은 베드로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마태복음16:16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3절). 성령이 아니면 예수를 믿을 수도 없고 시인할 수도 없고 고백할 수도 없습니다. 은사는 악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경우도 있고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은사의 출처를 분별할 때는 첫째,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지에 대한 여부로 해야 합니다. 만일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악령의 역사입니다 (갈1:16, 고후11:4). 둘째, 성경 말씀에 맞는지에 대한 여부로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언제나 진리의 말씀으로 역사하고 말씀 안에서 역사하고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요15:26, 16:13).

 


       2. 은사의 다양성 (4-11절)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① 은사는 종류가 다양합니다.

 

  은사의 종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은사'의 헬라어 '카리스마'(χαρισμα)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주신 기능들을 말합니다. 본문 고린도전서12:8-10에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 방언, 방언 통역, 9가지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실천적 능력을 말합니다.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가르치는 이지적 능력을 말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롬8:17). 이는 구원적인 믿음과 구별되며 고난과 난관을 돌파해 나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병 고침'은 질병을 고치는 능력을 말합니다 (행3:1-10). 복음을 효과있게 하기 위해 각 질병을 고치는 능력입니다. '능력 행함'은 병 고침 외에 여러 이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말합니다 (행5:1-11, 13:8-12, 고후12:12).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 앞 일에 대해 예고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행19:6, 20:23). '영들 분별'은 악령의 교훈과 역사를 분별하는 능력과 (요일4:1) 숨은 죄악을 판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행5:1-11). '방언'은 영적인 교제를 위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고전14:14-15). 방언은 말(γλωσα)을 의미라는 용어로 성경에는 외국어 방언,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새 방언이 나옵니다 (행2:1-4, 고전14:14-15, 막16:17). '방언 통역'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통역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고전14:6). 공중예배의 덕을 위해 필요한 은사입니다. 그 외에도 로마서12:6에는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함, 구제함, 다스림, 긍휼 베풂, 7가지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당시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은사로서 주로 신비적인 은사들이 나타나고 있고, 로마서는 로마교회를 중심한 것으로서 주로 인격적인 은사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은사는 시대적 지역별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오늘날은 사역이 더욱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다양한 은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다양한 은사들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육적 은사입니다. 지식, 지혜, 교수, 권면, 지도 등입니다. '지식'은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체계화시켜 정리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깨달은 하나님 말씀을 생활에 효과있게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교수'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지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입니다. '권면'은 상처받은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독촉하므로 마음의 안정과 열의를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지도'는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목표를 설정하고 다른 사람이 그 목표를 자발적으로 달성하도록 이끄는 능력입니다. 여기에는 그 일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획하고 조정하는 능력을 포함합니다. 둘째는 봉사적 은사입니다. 섬김, 대접, 구제 등입니다. '섬김'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과업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부분을 알고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여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능력입니다. '대접'은 숙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하는 능력입니다. '구제'는 물질을 선한 일에 희사하고 선용하는 능력입니다. 헌금, 자선, 긍휼의 은사를 포함합니다. 셋째는 능력적 은사입니다. 믿음, 전도, 기도, 예언, 방언, 통역 영분별, 신유, 축사, 기적 등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확신과 추진력을 가지고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전도'는 복음을 명확하고 균형있게 전하여 결신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기도의 응답과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아 미래의 일을 예고하는 능력입니다. 현실적인 상황에 필요한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능력을 포함합니다. '방언'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에는 사적인 방언과 공적인 방언이 있습니다. '통역'은 방언을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꾸어 전달하는 능력입니다. 이는 공적인 방언기도에 필요합니다. '영 분별'은 영적인 역사와 은사의 출처를 분별하여 가려내는 능력입니다. '신유'는 자연적 원리를 초월하여 병을 고치는 능력입니다. '축사'는 예수님의 이름과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에 섭리에 맞추어 기적과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는 능력입니다.

 

  ②은사는 계발해야 합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χαρισμα, a gifts)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의 유익과 교회 공동체의 사역적 유익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사모해야 합니다. 은사는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므로 사모해야 합니다. 둘째,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이 땅에 보낼 때는 사명을 염주에 준 은사를 잠재시켰습니다. 그 잠재된 은사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은사의 분류에서 교육적 은사와 봉사적 은사와 능력적 은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격적 요소 가운데 지성이 발달한 사람은 교육적 은사가 있을 가능성이 많고, 감정이 발달한 사람은 봉사적 은사가 있을 가능성이 많고, 의지가 발달한 사람은 능력적 은사가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은사의 분류에서 한 부류에 속한 은사들은 연이어 나타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셋째, 계발해야 합니다. 은사가 일시적으로 초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점진적으로 훈련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이 사모하는 은사나 공동체의 필요한 요구가 느껴지거나 사역에서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 있으면 실행하여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넷째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됩니다. 공동체 지도자의 허락 하에 활용하고 다듬어야 합니다. 다섯째 절제하기도 해야 합니다. 은사는 궁극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사역을 위해 주는 것이므로 사역에 덕이 되지 않거나 손해가 되거나 부정적인 반응이 일어날 때는 중단할 수 있어야 하고 공동체의 지도자가 금할 때는 중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계발하지 않은 만 못할 때가 있습니다.    

 

   ③은사는 성령이 주신 것입니다.

 

  은사의 주체와 출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6절에 보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은사'의 헬라어 '카리스마'(χαρισμα)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주신 기능들을 말합니다. '직분'의 헬라어 '디아코니아'(διακονια)는 '섬김' '봉사' '직책'을 말합니다. '사역'의 헬라어 '엔엘게마'(ενεργημα)는 '일' '활동'을 말합니다. 직책이 주어지면 그에 따른 사역이 있고 사역이 있으면 그에 따른 기능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직책과 사역과 기능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성령을 통해 원하시는 대로 주시는 것입니다. 11절에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직책과 일과 은사를 받았든지 다른 사람보다 우월감을 가지거나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열등감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베드로전서4:10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④은사는 유익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주시는 것인데 그것은 유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7절에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개인적인 목적과 교회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에베소서4:12에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개인적인 유익을 줍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했고 사용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달은 자가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면 하나님신앙에 대한 흔들림이 없게 되고 사역에 대한 열정과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경험은 결국 신앙자세의 변화와 신앙 성장에 도움을 줍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적 유익을 가져오지 않는 은사는 출처가 잘못되었거나 잘못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유익을 줍니다. 교회 공동체는 한 주로 신앙고백을 하고 한 하나님을 섬기며 한 성령으로 사역을 합니다. 성령은 주의 몸된 교회 전체가 잘되게 하기 위해 사역을 위한 은사를 주십니다. 성령은 공동체 전체 사역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모든 일원에게 똑같은 은사를 주지 않고 골고루 다양하게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력관계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27절). 그리고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사역에서 서로 경쟁심을 가지거나 그로 인하여 시험에 들어 분쟁하는 것은 그런 점들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손해가 되는 사역과 은사는 재점검해야 합니다. 기준을 자기에게 두지 말고 교회에 두어야 합니다 (28-31절, 14:1-33).

 

  ⑤은사는 분별해야 합니다.

 

  은사는 악령이 주는 경우도 있고 성령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이 주신 은사라도 도중에 죄성에 이용당하거나 악령들에 이용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개인적인 신앙이나 교회 공동체의 사역에 유익이 되지 않고 막대한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계발하거나 활용하면서도 늘 분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첫째 예수를 주라 시인하지 않는 자는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얻는 교훈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다른 예수, 다른 복음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영이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는 영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고전12:3, 요일2:22, 요이1:7, 갈1:16, 고후11:4). 둘째, 성경말씀에 위배되는 경우는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은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고 말씀 안에서 역사하고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는 영입니다 (요15:26, 16:13). 성경교리에 어긋나는 교훈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셋째,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않는 경우는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이 은사를 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덕이 되지 않거나 손해를 주는 은사는 성령이 주지 않았거나 성령이 주었다 할지라도 자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므로 중단해야 합니다 (고전12:7). 넷째, 개인적인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은사는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가 나타날 수로 신앙적으로 감사하고 겸손해지고 긍정적이어집니다. 만일 은사가 나타나므로 불평과 불만 등 부정적인 사고와 언사가 나타나고 우월감에 빠져 교만해지는 경우는 성령이 주지 않았거나 성령이 주신 것이라 해도 잘못 활용하고 있는 거십니다. 반대로 열등감에 빠져 시험에 드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12:11, 벧전4:10).

 


       3. 은사의 일체성 (12-27절)

 

  ①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골1:18). 장로교회의 정치원리 중 가장 첫번째 원리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살아야 합니다. 공동체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예배하고 교제하고 봉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악령의 역사에 방임해도 안되고 인본주의가 주장하게 해서도 안됩니다. 사람의 욕심이 지배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②교회 공동체는 한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세례'의 헬라어 '밥티죠'(βαπτιζω)는 '씻는다' '깨끗게 한다' '정결케한다'는 뜻이다. 성령세례는 성령의 내주로 죄 씻음을 받는 것 말합니다. 성령세례를 언제 받느냐 신학적 논란이 있습니다. 곧 예수를 믿어 중생할 때냐 아니면 예수를 믿어 중생한 다음이냐 하는 논쟁이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오순절 신학자들 간에 대립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세례는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에 일어납니다. 예수를 믿어서 중생할 때에 성령이 믿는 자 속에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성령세례를 믿은 후에 다시 받아야 한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에서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행2:1-4), 사마리아에서의 성령강림 사건(행8:4-25), 고넬료 가정에서의 성령강림 사건(행10:44-48, 11:1-18), 에베소에서의 성령강림 사건(행19:1-7)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건의 내용은 요엘2:28-32과 누가복음3:16과 사도행전1:5의 예언 성취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구약의 예언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교회의 확장과 종말의 심판이라는 구속역사의 선상에 들어 있는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곧 위의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들은 성령세례를 언제 받는지를 알려 주는 구절이라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내용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본문의 내용이 과거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 개개인에게 있어서 성령세례의 체험이 믿을 때에 이루어지는 단회적인 사건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전3:16). 그 체험은 회심과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때는 잠재의식 가운데 일어나며 결과적인 현상을 통해서 느낄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3:3-8, 고전12:3, 롬8:15). 믿을 때에 한번 들어오신 성령은 믿는 자 속에서 떠나지 않고 내주하십니다 (고후1:22, 5:5, 엡4:30, 롬8:9).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하고 신앙적 열의가 생기게 하고 사역에 필요한 은사들을 알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에서 한 성령으로 예수를 믿었고 구원을 받았고 직책을 맡았고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한 몸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신성분이 다르다고 해서 하나가 되지 못하면 안됩니다.  

 

  ③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몸에는 각 지체들이 있습니다. 각 지체들이 한 몸이라는 사실은 몇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 모든 지체가 몸 전체를 위해야 합니다. 각 지체들은 한 몸에 붙어 있습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각 지체들은 몸을 위해야 지체들도 살 수 있습니다. 몸 전체가 잘되지 못하면 지체들도 죽게 됩니다. 둘째, 각 지체가 자기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지체는 각기 다른 존재입니다. 모두 같은 기능을 가진 지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만이 할 수 있는 기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각 지체가 자기 역할을 잘 해야 몸 전체가 살고 자신이 살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지체가 자기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결국 자기도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다른 지체를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귀한 역할을 하는 지체도 있고 천한 역할을 하는 지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지체가 몸이 사는 데에 필요한 위치에 세우고 필요한 기능을 부여했습니다. 모든 지체에게 귀천은 없습니다. 우등하거나 열등한 개념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가치면에서 불필요한 지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눈썹이나 손톱이나 맹장 등이 무익한 지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눈썹이 없으면 빗물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손톱이 없으면 물건을 들을 때 힘을 쓸 수 없고 맹장이 없으면 대장의 균이 올라오는 것과 온도순화를 할 수 없습니다. 넷째, 연약한 지체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족하거나 약한 지체는 더욱 감싸 주어야 합니다. 뇌나 내장 계통은 약하기 때문에 감싸 줍니다. 그 지체들을 보호해 주지 않으면 그 지체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들도 죽게 됩니다. 아무리 미천한 지체 같을지라도 귀히 여기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몸이 잘되고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귀히 여겼고 죄인 세리를 귀히 여겼고 엽전 두푼을 연보한 과부를 칭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은사도 없고 지식도 없고 병들고 가난한 자라도 필요한 지체로서 한 몸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4. 직책의 다양성 (28-31절)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8-11절에서 은사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 방언, 방언 통역, 9가지였습니다. 로마서12:6에서는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함, 구제함, 다스림, 긍휼 베풂, 7가지였습니다. 은사는 그 외에도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양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은사들에 따른 직책과 직분들도 있습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을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자, 돕는 자, 다스리는 자, 방언을 말하는 자 등입니다. 성령께서 개인적 유익뿐 아니라 교회적 목적에 따라 은사와 직책을 주셨습니다. 은사와 직책은 교회 전체가 잘되게 하기 위해 주셨기 때문에 각기 다른 은사와 직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은사와 직책을 부러워 하거나 열등감에 빠지지 말고 각자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따라 하나님이 세우신 위치에서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벧전4:10). 사람 보기에 작고 약하게 보이는 자리라도 그 위치에서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 사명을 가진 자도 있으나 사렙다 과부나 수넴 여인 같은 사명을 가진 자도 있습니다. 사도 사명을 가진 자도 있지만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드린 어린아이 같은 사명을 가진 자도 있습니다. 어떤 사명을 받았든지 그 위치에서 충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께 인정받는 기준은 사명과 은사와 사역과 직책의 크기가 아니라 충성도입니다 (마25:14-30).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더욱 큰 은사'는 예언을 가리킵니다. 14:1에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신비적 은사 특히 방언을 가장 높은 은사로 여겨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성령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교회를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방언은 예언에 비해 덕을 세우지 못하는 측면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14:1에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하면서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여 예언의 우월성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덕을 세운다는 관점 때문이었습니다 (14:39). 좀더 넓게 보면 '말씀'을 '예언의 말씀' 혹은 '예언'이라고 했다는 점에서(계1:3. 딤전1:18) 말씀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깨닫게 하고 개인적 인격이 자라나게 하고 삶이 변하게 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게 합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길'은 사랑입니다 (14:1). 본 절을 이어서 13장에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제시합니다. 이는 모든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랑의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은사 활용이 사랑없이 행한다면 오히려 생명을 죽이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활용하여 사역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자세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안됩니다.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안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안됩니다.

 

<結言>

  바울은 은사와 직책에 대해 말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한 몸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이어서 그 은사를 활용하여 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길로 인도하겠다고 말하고 이어지는 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헬라어에서 사랑은 스톨게(στοργη), 필리아(φιρια), 에로스(ερωs), 아가페(αγαπη)가 있는데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도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조건이나 대가, 반응이나 결과를 바라지 않고 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사건으로 충분히 증명됩니다 (요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