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고린도전서13:1-13
<題目> 사랑의 찬가(讚歌)
<序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당시 헬라 사상의 영향으로 영을 숭배했고 많은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열광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은사들에 대해 자기들이 받은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특히 방언과 예언과 능력행함 등을 강조하므로 분쟁과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는가에 대해 다루었고,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라면 하나님의 뜻 곧 교회의 덕과 유익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었습니다. 이어서 영적 은사들을 사용할 수 제일 좋은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12:31). 곧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사랑의 중요성(1-3절), 사랑의 속성(4-7절), 사랑의 영속성(8-1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사랑의 중요성 (1-3절)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헬라어에서 사랑은 4가지가 있습니다. 스톨게(στοργη), 필리아(φιρια), 에로스(ερωs), 아가페(αγαπη)입니다. 스톨게는 동족적인 사랑, 필리아는 우정적인 사랑, 에로스는 이성적인 사랑,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도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 희생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요일4:8, 롬5:8).
바울은 모든 은사들이 아가페라는 근본정신에서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활용하고 직책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아가페 사랑을 근거해야 하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야 하고 그것이 배경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근본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3:35, 요일3:18). 그래서 바울은 사랑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무익하다는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되고 있었던 몇가지 은사들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①방언과 대조시켰습니다. 1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 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위해 하나님과만 통하는 언어입니다. '꽹과리'(κυμβαλον, cymbal)는 디오니소스(Dionysos)나 키벨레(Cybele) 신전 등 이름난 이방 종교 제례에서 신들을 깨우거나 악령을 추방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어떤 때는 사람의 감정을 흥분시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Barrett). 방언은 바울이 소유했던 은사이나(14:18), 고린도교인들처럼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방언은 현저하게 눈에 띄는 은사인 것은 사실이나 사랑의 실천이 없이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심지어는 이교도들이 축제 때 우상숭배를 위해 사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②예언이나 믿음에 대조시켰습니다. 2절에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 했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기본구원의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믿음이 아니라 은사적인 믿음으로서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므로 기적적 능력을 나타내는 믿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이나 믿음이나 직식 등의 은사를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14:1),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어 행하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동기가 없다면 그것은 외적 행위에 불과하가는 것입니다.
③구제나 희생이나 순교에 대조시켰습니다.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제나 희생이나 순교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가장 고상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고상하고 완벽한 행위라 해도 사랑이 없이 행한다면 진정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겉치레에 불과하며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바리새적인 행동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사나 행위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은사이든지 사랑을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2. 사랑의 속성 (4-7절)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1-3절까지는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따라오는 질문은 '사랑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말은 인간의 언어로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습니다. 단지 여러 각도에서 사랑의 성격을 파악하고 입체적으로 상상해 볼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영'(靈, πνευμα, spirit)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영적 활동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들을 살펴보므로 영을 이해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도 사랑의 본질을 묘사했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바탕으로 사랑의 성격을 시적으로 묘사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의 개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랑은 모두 아가페(αγαπη)라는 용어만 사용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에 속합니다. 요한일서4:7-9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로마서5:8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그 사랑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의 본질을 설명했다기 보다 사랑을 소유하고 사랑을 행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외적 행위를 설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천적 윤리를 더 강조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여야 합니다. 요한복음13:34-35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3:16-19에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고 했습니다.
①오래 참습니다. 4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길 기다립니다 (벧후3:8).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심은 일만달란트에 해당하는 죄를 용서하심과 같습니다 (마18:21-34).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비방하고 해하고 손해를 주더라도 격동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고 오래 참습니다.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오래 참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원수 갚은 것이 주께 있는 줄 알고 오래 참습니다 (롬12:19, 히10:30). 공산치하에 있을 때 공산당인 남편이 예수 믿는 아내를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밤새 구타를 했는데 그 아내는 새벽에 일어나 새벽기도 갔다 와서 그 남편을 위해 밥상을 잘 차려 드려 그 남편이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었다는 일화는 오래 참음에 대해 잘 설명해 줍니다.
②온유합니다. 4절에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분입니다 (마11:29).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복종하므로 하나님께 대해서도 온유했지만 사람에 대해서도 메시야적 행위를 제외하고는 온유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혈과 육으로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왼뺨을 치는 자에게 오른 뺨을 돌려 대고 5리를 가자는 자에게 10리를 가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고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마5:39-42). 원수가 목말라 할 때 마시게 하고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교훈은 온유함을 말합니다 (롬12:20). 이 사랑을 가진 자는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를 가집니다. 자신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천대하고 욕하고 손해를 주어도 온유해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롬12:21). 온유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소 뿔이 부러졌다는 말은 있어도 소 귀가 부러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치과 병원은 있어도 설과 병원은 없다는 말이 있고 죽을 때 이는 다 빠져도 혀는 남아 있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③시기하지 않습니다. 4절에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투기하지 않는다고 번역했었습니다.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투기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잘될 때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인정을 받을 때 그 사람을 낮추려는 심리입니다. 시기하는 것은 마귀의 성품이며 우리의 죄성입니다 (갈5:20). 우리 옛말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할 때부터 악령에게 조종을 받기 시작했고 다윗을 죽이려 했고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죽였습니다 (마27:18, 막15:10).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행17:5). 결국 시기한 것에서 출발하여 온갖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④자랑하지 않습니다. 4절에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아는 자, 그 분들이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아는 자는 부족한 자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만 자랑하고 자신을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 직접 부름을 받았고 영계에 들어가 신비한 내용을 들었고 사역에서 큰 능력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죄인 가운데 괴수인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려 했습니다 (빌1:20).
⑤교만하지 않습니다. 4절에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교만은 악령의 속성이고 우리의 죄성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잠18:20). 사울은 교만하여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발견한 자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과 속성과 사역을 알게 되면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달으면 자신이 얼마나 죄가 많은 자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깨달을수록 죄가 얼마나 많은 자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수록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벧전5:6). 그래서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티끌같은 자라고 했고, 욥은 벌레와 구더기같은 자라고 했고, 모세는 입술이 뻣뻣한 자라고 했고, 예레미야는 고자같은 자라고 했고,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했고, 베드로는 죄인이라고 했고, 바울은 죄인 가운데 괴수라고 했습니다 (딤전1:15). 그런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생각합니다 (빌2:3).
⑥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5절에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고 했습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버릇없이 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압니다. 그래서 자신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귀히 여기고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행위에 있어서 함부로 하지 않고 예의를 지킵니다. 심리에 있어서 수치심을 주지 않고 자존감을 세워 주며 부담을 주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며 힘들게 하지 않고 배려합니다. 자기 기준에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에 대한 통찰력 -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 공동체에 대한 섬김'이 신앙인격의 수준입니다. 목회자에 대해서도 목회 신념과 철학이 자기에게 맞지 않아도 존중하는 것이 목회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⑦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5절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자는 자기와 자기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거나 자기가 쓸 것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만 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기주의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유익을 구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마16:33). 바울도 예수님을 위해 결박되고 순교할 각오까지 했습니다 (행21:13, 빌2:17). 그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고전10:31). 둘째는 공동체의 유익을 구합니다. 바울은 본서에서 분쟁 문제이든, 우상의 제물 문제이든, 은사 문제이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이웃의 유익을 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을 생각하여 형제의 유익을 구합니다 (마19:19, 요일3:16). 바울은 형제가 배고플 때 자기가 배고팠고 형제가 추워 떨 때 자기가 추웠고 형제가 병들었을 때 자기가 병든 것처럼 여겨졌다고 했습니다 (고전12:26-27). 초대교회 때 유무상통한 정신은 그런 원리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행2:44, 4:32).
⑧성내지 않습니다. 5절에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행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무례히 행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성을 내지 않습니다. 성은 마음 속에 있는 분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으로서 악령의 특성이고 우리의 죄성이고 범죄자의 특성입니다 (엡4:31, 갈5:20). 가인은 분노하여 아벨을 죽였습니다 (창4:5).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분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잠15:27). 혹 분을 내었어도 해가 지도록 품지 말아야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습니다 (엡4:26-27). 성을 내려면 불의에 대해 내어야 하고 자기의 죄에 내어야 합니다.
⑨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5절에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는 자는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선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로마서8:5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고 했습니다. 로마서12:2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은 그 모양이라도 버립니다.
⑩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6절에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 거하려 하는 자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의를 행하기를 기뻐합니다. 로마서12:17에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습니다. 악한 것은 그 모양이라도 버립니다. 데살로니가전서5:22에 "악한 것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정결케 한 사건을 보면, 성전에서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는 자들을 쫓고 상을 둘러 엎었습니다. 바울도 바울서신서들을 보면 이단에 대해 엄히 경계했습니다. 요한도 요한서신서들을 보면 이단에 대해 엄히 경계했습니다.
⑪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6절에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가 많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요17:17, 엡4: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진리를 깨달은 것을 기뻐하고 진리를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고 진리를 세우는 것을 기뻐합니다. 진리가 아니면 떠납니다. 요한삼서1:8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진리를 싫어하고 사단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진리를 순종치 않습니다 (요8:44-45, 갈5:7).
⑫모든 것을 참습니다. 7절에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했습니다. 4절의 내용에서 말한 것은 노할 만한 일이 있어도 노하지 않고 참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를 당해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참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환난과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이 올 때에도 참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12:1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고 했고, 요한계시록13:10에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했고, 로마서8:35-36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⑬모든 것을 믿습니다. 7절에 "모든 것을 믿으며"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속성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로마서8:28에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고, 야고보서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신명기8:16에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했고, 예레미야29:11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⑭모든 것을 바랍니다. 7절에 "모든 것을 바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곳에서 누릴 영광과 상을 바랍니다 (요한계시록7:15-17,21, 21:26, 22:5). 빌립보서2:6-11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고, 마가복음10:29-30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고, 히브리서11:24-26에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고, 히브리서12:1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고 했습니다.
⑮모든 것을 견딥니다. 7절에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오는 모든 어려움을 견입니다. 바울의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였으나 하나님 교회를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했습니다 (고후11:23-29, 갈4:19). 마태복음16:24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고, 사도행전14:22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고 했고, 고린도전서4:2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고, 요한계시록2:10에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3. 사랑의 영속성 (8-13절)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은 사랑의 특성을 시적으로 묘사했는데 본문에서도 사랑의 절대적인 가치에 대해 시적으로 부각시키므로 절정에 이르게 했습니다. 사랑의 영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성령의 은사들과 대조시키며 그것들이 일시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나 사랑은 영원 무궁하다는 절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서 목적에 해당하므로 은사와 같은 수단과 다르다는 것이고, 그것은 종말론적인 상황에서 더욱 확연히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했는데, '떨어지지 아니하되'에 해당하는 핍테이(πιπτει)는 사라지기 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방언이나 예언이나 지식 같은 성령의 은사가 가치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보편적인 기독교 윤리 정신을 말할 때도 있고, 은사를 말할 때도 있고,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은사의 한 부분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에 해당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고 그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말씀, 은사, 사역 등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에 속하고 방언이나 예언이나 지식 등은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주신 은사에 속합니다. 곧 사랑이 목적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방언이나 예언이나 지식 등의 은사는 수단에 속합니다. 은사들 자체는 훌륭한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불완전하고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완전한 것이 올 때에는 폐해집니다. 대치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 의식이 그들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자 폐해진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9-10절에 보면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언과 같은 은사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엔 폐하게 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를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은 성경기록 완성 때인 A.D.95년으로 봅니다. 그래서 현재에 예언 같은 은사들은 그쳐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언이 이미 폐했다고 말한다면 8절에서 예언과 함께 언급한 방언이나 지식도 폐했다고 해야 합니다. 12장에 나오는 9가지 은사들이 모두 폐했다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방언이나 예언 등 신비적 은사에 대해서만 폐했다고 하고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 등의 은사에 대해서는 폐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해석임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예수님의 재림 때를 말합니다. '온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스(τελειοs)는 예정된 끝을 염두에 둔 완전함과 성숙함 곧 최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때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께서 재림하시고 성도가 부활하고 사단과 세상이 심판을 당할 때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입니다. 은사들은 사역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때에는 그런 은사들이 필요없게 됩니다.
12절에 보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거울'은 당시에 청동(구리) 같은 금속에 광을 내어 만든 거울(색경)로서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에 대해, 진리의 말씀에 대해, 사역에 대해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주께서 우리를 알듯이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11절에 보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렸을 때의 행습을 장성한 어른이 되면 버리게 됩니다. 현재에 사역을 위해 사용하는 은사들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자연히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이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의미에서 신앙이 신앙이 어렸을 때에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신앙이 장성하게 되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아직 영적으로 장성하지 못하여 신비적 은사들에 대해서만 중요하게 여기고 우월한 것으로 여기고 서로 당을 짓고 분열되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성숙해져서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서 살게 되면 그런 것들로 다툴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전3:1-3, 히5:12-14).
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소망은 하늘나라에 가면 없어지나 사랑은 계속 있겠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믿음과 소망이 하늘나라에서는 없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만일 믿음과 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사랑도 역시 없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사랑이라는 용어의 의미부터 알아야 합니다. 위에서 사랑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독교적 실천적 사랑을 말할 때도 있고 은사로서 사랑을 말할 때도 있고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사랑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 소망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인 동시에 (요일4:8), 믿음과 소망의 존립 근거가 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이 가져야 할 신앙적 덕목 중 하나가 아닙니다.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적 태도이지만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현시(顯示)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떤 덕목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結言>
바울은 사랑의 중요성과 속성과 영속성에 대해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사랑은 기독교인이 신앙적 덕목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거나 은사로서 가져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에 속한 것이라는 점을 전제해야 이해되는 말씀들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여 모든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모든 행위에 이 사랑을 근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당 문제나 우상의 제물 문제나 은사 문제를 다룰 때에 이 사랑이 근거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이 사랑을 근거하는 자가 성숙한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