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고린도전서14:1-40

<題目> 방언에 대한 교훈

 

<序言>

  12장은 성령의 9가지 은사에 대해 언급했고 13장에서는 그 은사들이 사랑을 근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14장은 방언 남용으로 무질서한 고린도교회를 바로잡기 위해 예언과 대조하면서 방언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신비적 은사 중 특히 방언을 다른 은사들보다 우월한 은사로 생각하고 방언을 무질서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바로잡으려고 예언과 비교하면서 방언이 결코 모든 은사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언이 실제로 방언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바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방언의 올바른 사용(1-25절), 교회의 덕과 질서를 위한 실천(26-40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방언의 올바른 사용 (1-25절)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사랑을 추구하라는 것은 13장의 내용을 언급한 것입니다. 12장에서 9가지 은사를 말하면서 13장에서는 그 모든 은사를 사용할 때에 사랑을 근거해야 하고 사랑이 배경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었습니다.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는 것은 12:31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 은사는 본 절에서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한 것처럼 예언을 말합니다. 예언은 방언에 비해 뜻이 전달되어 덕을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방언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점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 중에 방언만 지나치게 강조하였습니다. 방언을 하는 자는 교만했고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는 시기했습니다. 내적으로는 공중예배의 혼란과 외적으로는 불신자들로부터 비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언과 비교하면서 결코 방언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교회의 덕과 관련하여 예언이 더 나은 점을 들었습니다. 모든 은사가 13장에 나온 대로 사랑을 근거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방언보다 예언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언'을 근본주의 성향을 가진 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고, 디모데전서1:18에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1:3에는 '이 예언의 말씀'이라고 했고 디모데전서1:18에는 바울이 자신이 지도한 하나님 말씀을 '예언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언의 말씀'은 요한계시록이 예언의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는 뜻이지 결코 예언과 말씀을 동일시하여 예언이 말씀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도한 예언은 하나님 말씀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을 본 장에 나오는 예언을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 구절이 될 수 없습니다. 본 장은 12장에서부터 연결되는 내용으로서 12장에는 9가지 은사가 나왔는데 그 은사 중에 나오는 예언을 말합니다. 9가지 은사 중에는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언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 장에서 예언을 방언과 비교하고 나서 방언과 예언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실천 방안을 제시하는데, 29-31절에 보면 예언을 어떻게 하게 할 것인지를 말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방언처럼 은사 중에 하나로서 예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본 절의 예언은 보편적인 하나님 말씀이나 성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로서 예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의 목적은 사람에게 알아 듣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데 있습니다. '영'은 성령이 아니라 방언하는 자의 영을 말하고 '비밀'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방언하는 자의 의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Calvin).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의도는 방언은 예언처럼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아뢰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부터 나오는 대로 예언은 사람들에게 뜻을 알게 하여 듣는 이를 유익하게 하는 반면에 방언은 뜻을 알 수 없어서 듣는 이를 유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곧 예언은 교회 공동체에 덕을 세우지만 방언은 교회 공동체에 덕을 세우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1) 방언의 어의

  '방언'(方言)은 헬라어로 글로싸(γλωσσα)로서 '말' '언어' '발언'의 뜻입니다. 예를 들면 유대방언은 히브리어, 영국 방언은 영어, 한국 방언은 한국어(한글), 제주 방언은 제주도 사투리라 할 수 있습니다.  

 

   2) 방언의 종류

  ①외국어 방언이 있습니다 (행2:4). 사도행전2:4-13절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권능을 받고 방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고 듣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지방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말할 때 듣는 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각 나라에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διασπορα)들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와 우거하면서 제자들의 방언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들로서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그들은 셈어나 헬라어나 라틴어를 사용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의 말을 배운 자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했습니다. 제자들이 다른 언어를 배우지 않았으나 성령의 역사로 다른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은 자기들 언어로 말했지만 듣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로 자기들 언어로 들리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②새 방언이 있습니다 (막16:17). 마가복음16:17-18에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새 방언'은 이 곳에서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복음전도 사역을 할 때 나타날 방언을 염두에 두고 말 할 말씀일 것입니다. 이 방언은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모두 자기 언어로 말하고 듣지만 그 내용이 전혀 새로운 내용이 될 것을 말합니다. 표현상으로는 자기 나라 사람이 자기 나라 사람에게 자기 나라 말로 말하지만, 내용상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깨달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지식을 말할 때 전혀 새로운 내용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론할 때 듣는 이들이 전혀 새로운 내용을 들으므로 놀랐습니다 (마13:54, 막6:2).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할 때 듣는 이들이 피상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었을지라도 그 해석하는 내용이 전혀 새로운 내용이었습니다 (행4:13). 사도행전4:4-14에 보면 요한과 베드로가 병 고친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 공회원들에게 심문을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담대히 전했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요한과 베드로를 원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기탄없이 전함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사건은 부정적인 반응에 대한 놀람이지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이들이 전혀 새로운 내용을 듣게 되어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5:9에 나오는 '새 노래'의 의미도 지상에서 부르던 노래를 반영한 노래라 할지라도 천상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확신하고 부르는 노래는 새 노래입니다. 지상에서의 부르는 찬송과 비슷할지라도 그 내용이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노래인 것입니다. 지상에서도 그런 의미의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고 그 곳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고 애굽 추병들을 그 곳에 수장시킨 것을 목도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노래했습니다 (출15:1-18). 그 노래는 질적인 면에서 전혀 새로운 노래였을 것입니다.

  ③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있습니다 (고전12:10, 14:2). 성령께서 사역을 위해 주신 은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롬12:6-8, 엡4:7-13, 고전12:4-11). 고린도전서12:4-11에는 9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주로 신비적 은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입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지(知)적인 성향의 은사이고, 예언과 영 분별과 방언과 통역은 정(情)적인 성향의 은사이고, 믿음과 병 고침과 능력 행함은 의(意)지적인 성향의 은사입니다. 정적인 은사 중 방언이 있는데 이 방언은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서 하나님과 영으로 비밀을 말하며 교제하기 위해 주어진 은사입니다. 방언 은사는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방언의 내용을 자신이 아는 경우도 있고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방언은 여러 가지 은사 중 하나이기 때문에 성령받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방언도 다른 은사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교회 사역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가 그렇지만 방언도 덕을 세우면서 사용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이 방언을 다른 은사보다 우월한 은사로 여기는 측면이 있었고 무질서하게 사용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 이 방언의 단점을 예언과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 말했습니다 (고전14:1~40)

 

   3) 방언의 출처

  ①하나님께로부터 온 방언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방언이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사역을 위해 주신 은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주신 은사는 교만하지 않고 교회의 덕을 세우며 잘 활용하면 개인의 신앙 증진이나 교회 사역에 유익을 줍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 덕을 위해 통역을 세우라고 권면했습니다 (고전14:27).
  ②사단으로부터 온 방언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방언이든 악령의 영향으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방 종교에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 분별 은사가 있는 자는 분별할 수 있지만 은사자가 아니라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에게서 온 방언은 교훈(성경)과 열매(인격과 삶과 행동)로 알 수 있습니다. 방언하는 자가 교만하고 공동체에 대해 부정적이고 듣는 이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하고 좋지 않은 현상들이 일어나면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③자기로부터 온 방언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방언이든 배워서 가능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도 방언의 유익과 방언이 주어지는 원리를 배우서 연습하면 할 수 있습니다. 배워서 하는 방언은 유익할 수도 있고 불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혀 유익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인본주의적으로 배운다면 유익이 없을 것이고 성령 은사의 전이와 계발이라는 측면에서 배운다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예언도 방언처럼 원리를 배워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자기 마음에서 나온 생각(상)를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겔13:2).

 

   4) 방언의 단점 (무익성)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을 오용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덕에 있어서 예언보다 못한 면들을 지적하여 덕을 세우는데 집중해야 할 것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이 방언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린도교회가 방언 은사를 가장 우월하게 여기고 교회에서 무질서하게 사용하므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언에 대한 자제와 올바른 사용에 대해 권면하는 것입니다. 12:9-10에 방언도 성령께서 주신다고 했습니다. 본 장 5절에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다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18절에는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방언은 12:10에 나온 '각종 방언'에 해당하는 말로서 바울이 본 절에서 말하려는 의미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여러 종류를 말하는 동시에 외국어 방언이나 새 방언을 포함하고 있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39-40절에는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방언도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방언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은사로서 바로 사용하라고 한 것입니다. 곧 방언을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용(善用)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①자기의 인격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방언은 영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열매를 맺기 힘듭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발견하여 회개하기도 하고 바로 설 결심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이 점점 변하게 되고 그에 따라 행동도 변하게 됩니다. 방언으로 찬송하는 것과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도 같은 원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곧 방언은 전인격적인 변화에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물론 방언이 개인의 신앙에 전혀 유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게 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자신에게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여 확신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격적인 성장에는 별 도움을 주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②교회에 덕(德)을 세우지 못합니다.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방언은 예언에 비해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덕을 세우며'에 해당하는 오이코도멘(οικοδομην)은 건물을 세운다는 의미로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믿음과 변화와 성장의 도움을 주어 공동체 전체가 유기적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방언은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므로 공동체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반면 예언은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므로 공동체에 상당한 유익을 줍니다. 방언은 자기의 신앙에 유익을 주는 면이 있지만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면은 예언에 비해 약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다 방언하기를 원하지만 방언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통역의 은사를 가진 자에게 세워 통역을 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13절에도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 했습니다. 통역이 없으면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방언하는 자가 통역의 은사가 함께 있지 않거나 통역의 은사를 가진 자가 통역을 해 주지 않으면 도무지 방언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통역이 없을 때에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 유익을 되지 못하기 때문에 통역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피리'(αυλοs)는 입으로 대롱을 불어서 소리를 내는 관악기입니다. '거문고'(κιθαρα)는 손으로 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현악기입니다. 만일 피리와 거문고가 서로 고유의 음을 내지 못한다면 그 소리가 피리 소리인지 거문고 소리인지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전쟁에서 나팔수가 사용하는 나팔이 제 음을 내지 못한다면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듣는 군사들이 행동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혀도 분명한 발음을 하지 못한다면 듣는 사람이 말하는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지만 그 소리들이 분명한 소리를 내야합니다. 그와 같이 기도와 찬송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게 되면 듣는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는 자는 그들에게 외국인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물론 듣는 이들도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인'은 개역성경에서는 '야만(野蠻)'으로 번역했는데 개혁개정판에는 '외국인'으로 번역했습니다. '외국인'(βαρβαροs)은 문자적으로 '낯선' '이해될 수 없는'의 뜻입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생각하고 자기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야만인으로 보는 외적 판단은 언어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배경을 빙자하여 고린도교인들이 방언을 하면 듣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외국인으로 생각하게 되고 특히 헬라인들은 야만인으로 여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령은 은사들을 사모하되 덕을 세우는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아멘'(αμην)은 문자적으로 '확실하다' '신실하다' '진실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멘은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할 때에 응답형으로 사용했습니다. 만일 방언으로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아멘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방언으로 감사나 축복을 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를 하는 자는 방언으로 해도 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많은 방언을 많이 한 것을 감사하지만 교회에서 일만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도 했지만 외국어 방언을 했고 새 방언도 했습니다. 하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교회에 유익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은 말씀을 깨달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가르치는 것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방언이 전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유익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악'(τη κακια)은 의역하면 잘못된 생각을 의미하고 '지혜'(φρεσιν)는 옳은 생각을 의미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어린 아이 상태에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방언만을 가장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고 방언을 하는 자는 교만하고 방언하지 못하는 자를 무시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과 신앙만 자랑하는 이기심으로서 죄적 욕망에 해당하는 악입니다. 그런 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고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성숙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이방 전도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사야28:11-12의 인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언을 말하는 앗수르 사람들로 가르치게 할지라도 그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래 의도한 바는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은 데 대해 그들은 어떤 형태로도 가르치더라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이사야의 글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은사에 관한 것이 아니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이방 언어처럼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는 점만을 부각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예언과 방언을 믿지 않는 이방 사람들에 대한 반응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예언은 숨은 것들을 드러내어 회개하게 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나아가야할 바른 것들을 제시하여 교회가 바로 성장하게 하는 데 유익을 주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예언을 하면 믿지 않거나 믿음없는 자들이 책망과 판단을 받아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고 공동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방언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면이 있더라도 믿지 않는 자들이 듣게 되면 알아듣지 못하므로 미쳤다고 하면서 거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나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곧 방언은 이방인을 전도하는 데에 유익이 없고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방언은 예언과 비교할 때 인격적 성장에 있어서, 공동체의 성장에 있어서, 전도의 효과에 있어서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고 품위 있게 쓰게 하라고 했습니다 (39-40절). 방언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13절).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되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5절). 바울은 고린도교회 상황을 고려하여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하는 관점에서 방언의 폐단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상태에 있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20절).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12절).   

 


       2. 교회의 덕과 질서를 위한 실천 (26-40절)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린도교회는 공중 예배에서 은사들을 잘못 사용하므로 예배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예배는 오늘날 우리의 예배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찬송시-말씀 가르침-예언(계시)-방언과 통역 순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특히 공적인 예배 모임에서 문제가 많이 되었던 방언과 예언에 대해 덕을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듣는 이들에게 유익이 되고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유익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적인 예배에서 방언과 예언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게 됩니다.  

 

  ①방언(方言)에 대한 실천 교훈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여기에서 말하는 방언은 개인기도 때 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예배 때 하는 방언을 말합니다. 공적인 예배에서 있는 방언의 순서에서 방언을 어떻게 하게 할 것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모두 한꺼번에 하게 할 것이 아니라 두 세 사람 정도가 하게 하되 차례 차례 하게 하라는 것이고,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 중 한 사람이 택하여 통역을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을 때는 방언을 하지 말게 하고, 굳이 하려거든 개인기도 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개인기도 시간에 하는 방언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방언을 공적인 예배에서도 했는데 그 방언은 개인이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계시나 예언의 성격이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통역이 없다면 두 세 사람이 하는 방언을 통해 제시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인지 확신하기 어렵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내용이라 해도 예배 참여자들이 뜻을 알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에 개인이나 교회나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예배를 어지럽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은사가 그래야 하듯이 방언도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사용하고 그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의미가 없거나 어지럽게 한다면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예언(豫言)에 대한 실천 교훈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예언도 방언처럼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하게 하고, 영 분별 은사를 가진 자가 참여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을 차례대로 하고 있을 때 이를 분별하고 있는 다른 예언자에게 계시가 임하면 앞에 하던 예언자는 예언을 그치고 새로 계시가 임한 예언자의 예언을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뒤에 하는 예언자의 예언을 앞에 하는 예언자의 예언을 분별할 수도 있고 다른 관점에서 할 수도 있고 보충하여 연결된 내용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하는 자들의 예언은 예언을 분별하는 자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언(豫言)은 하나님의 뜻을 게시받아 전달하는 은사입니다 (창37:5-11, 렘9:11). 성경에 나오는 예언의 핵심적인 내용은 구속사적인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구약시대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이 핵심이었고 (사14:7, 54장),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마24:30, 행1:11). 그렇다고 해서 꼭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기 위해 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역에 필요한 정보를 알게 하기 위한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기름 붓고 세 가지를 예언했습니다. 셀사에서 두 사람을 만나 암나귀 소식을 들을 것, 다볼에서 세 사람을 만나 떡 두덩이를 받을 것, 블레셋 영문에서 예언하는 선지자들을 만나 예언을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기브아 산에서 선지자들을 만나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상10:1-13).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유럽 지역에서 연보를 거두어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밀레도에 도착하여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성령이 각 성에서 증거하길 예루살렘으로 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합니다 (행20:23-24). 도시를 지나오는 동안 그 같은 예언을 들은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언을 하는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행21:8-14). 본문 당시에도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고 개인의 세계를 보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예언들을 한 것입니다 (마18:15, 롬2:16, 약2:9). 근본주의자(根本主義者)들은 현재에는 예언의 은사가 그쳤다고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13:8-10에 보면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폐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성경기록 완성 때인 A.D.95년으로 보고 하나님이 그 이후로 폐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방언이나 예언이 그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8절에서 방언이나 예언과 함께 언급한 지식도 폐했다고 해야 합니다. 12장에 나오는 9가지 은사 가운데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도 폐했다고 해야 합니다. 실은 9가지 은사 모두를 폐했다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방언이나 예언 등 신비적 은사에 대해서만 폐했다고 하고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 등의 은사에 대해서는 폐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해석임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예수님의 재림 때를 말합니다. '온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스(τελειοs)는 예정된 끝을 염두에 둔 완전함과 성숙함 곧 최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때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께서 재림하시고  성도가 부활하고 사단과 세상이 심판을 당할 때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입니다. 은사들은 사역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때에는 그런 은사들이 필요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시대나 초대교회 때처럼 권위를 가지거나 활발하게 나타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사역을 위해 은사를 주시는데 전 시대를 걸쳐 동일하게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시효 적절하게 은사를 주십니다. 오늘날에는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 66권이 완성되었고 문화적 영향으로 교회 사역과 선교 사역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에 필요한 은사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어쨌든 바울이 예언의 은사에 대한 실천적 교훈을 준 것은 방언이나 예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에 따라 바로 사용하므로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9-40절에 보면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무질서'(ακαταστασιαs)는 어지러움, 혼란, 폭동 등의 뜻입니다. 이는 뒤에 이어지는 화평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입니다. '화평'(ειρηνηs)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질서있게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할 때도 그 속성을 반영시켰습니다. 우주와 만물들도 질서있게 만드셨습니다. 때로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을지라도 절대적인 질서 가운데 안정된 평화를 유지합니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로 섭리합니다. 유기적인 공동체가 때로 무질서한 것같이 보일지라도 질서있게 성장시켜 갑니다. 그런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할 때 평화가 깨집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에서 은사를 사용할 때 질서있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0절에 "모든 것을 품위있고 질서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옳은 것이라고 해서 다 행해서는 안됩니다. 절제하고 질서있게 사용하므로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유익이 되게 해야 합니다.

 

   ③여자들의 태도에 대한 실천 교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하나님의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속성이 화평(평화)의 하나님이기에 창조물도 질서있게 화평하게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질서있게 화평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질서있게 화평을 유지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여자들도 그와 같이 질서있게 화평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무엇을 배울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으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율법에 이른 것같이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여자가 남자를 순종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창3:16).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왜곡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무질서 가운데 혼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원인은 지금까지 말해왔듯이 예언이나 방언 등의 신비적 은사 문제가 컸습니다. 방언을 모든 은사 가운데 가장 우월한 은사로 여겼습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기했고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교만했습니다. 심지어 공적인 예배에서도 방언을 무질서하게 하므로 예배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또 한 원인은 여자들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여자들이 당시 사회적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게 된 점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집 밖에 나올 때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관례였고 예배 시간에도 수건을 썼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여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게 된 점을 들어 수건을 쓰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여인들은 예언이나 방언 등의 은사와 관련하여 자신들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예배를 중단시키기도 했고 기독교 진리 중 아디아포라에 속한 문제들이나 기독교 진리와 관계없는 질문을 하여 예배를 중단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는 사도 바울이 전한 기독교 진리까지 도전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 사회적 배경에서 여자는 남편을 순종하고 남편에게 배우는 관례를 적용하여 교회에서 교만한 행위로 예배를 어지럽게 하지 말고 질문할 것이 있으면 남편에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위한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되는 여자들에 대해 교회의 질서를 위해 자유를 자제해야 할 것 가르쳐 공동체의 덕을 세우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오늘날 본문의 말씀을 왜곡되게 이용하여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여성을 차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 고린도전서14:34-35뿐만 아니라 창세기2:21-22, 3:1-6, 에베소서5:22-24, 베드로전서3:1-2 등을 오해하여 '여자를 죄를 세상에 가져온 자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자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심지어는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시각 가운데 중요한 시각의 하나는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상황 속에서 보지 않고 성경 기록 당시 배경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배경은 대부분 20세기 전의 배경입니다. 거기에다가 구약은 유대적 배경이고 신약은 유대적 배경에 헬라적 배경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에서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지고 남자보다 먼저 죄를 지었다는 것은 여자가 남자의 종속물이라거나 범죄의 원인자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과정과 범죄의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것은 교회 사역에서 남자보다 앞설 수 없다거나 남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들어 교회의 질서와 덕을 위해 자제하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 관계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인용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삶의 원리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해야 할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여성의 위치를 남성과 동일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여성 가운데 선지자나 사사가 있었습니다. 미리암, 드보라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또 가장의 역할을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라합, 아비가일, 나오미 등입니다. 신약교회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리아, 루디아, 브리스길라 같은 사람입니다. 물론 특수한 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이 인권에 있어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말하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시 사회의 배경을 고려하여 공동체의 덕이나 불신자에 대한 덕을 위해 남성은 여성에게 관용하고 여성은 남성을 순종하는 것이 좋다는 권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배경을 보면 여성이 남성을 돕는 위치에 있는 것이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일의 효능에서도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성이 남성을 돕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남성과 여성은 그 특성이 육체적, 심리적으로 매우 다릅니다. 남성은 강하고 여성은 약합니다. 남성은 객관적 이성적 결과적 통합적 특성이 있는 반면 여성은 주관적 감정적 과정적 부분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른 특질들의 차이점을 감안해도 여성이 남성을 돕는 위치에 있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선지자'(προφητηs)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를 말하고 '신령한 자'(πνευματικοs)는 방언의 은사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은사자들 중에 예언이나 방언을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계시로 인해 교만해졌고 공동체 집회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그런 자들은 바울의 권면을 주님의 명령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의 권면의 내용과 의도를 알지 못한 자가 있다면 그는 주님에 대해 바로 아는 자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말하기를 금하지 말되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한 것은 방언도 성령께서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은사로 주신 것이므로 그것 자체를 부인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질서를 따라 바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언을 사모하라는 것은 예언이 방언에 비해 공동체의 덕 세우기 때문입니다.    

 

<結言>

  바울은 은사의 선용(善用)에 대해 말해왔습니다. 은사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12장에서는 공동체(몸) 전체가 잘되도록 하라는 권면이었고, 13장은 사랑이 배경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권면이었고, 14장에서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라는 권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신 은사는 어떤 종류이든 개인적 신앙에 유익을 주고 공동체 성장에 유익을 줍니다. 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해도 절제하기도 해고 양보하기도 해야 합니다.  10:23(6:12)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