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고린도전서15:1-58

<題目> 부활에 대한 교훈

 

<序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바울이 14-18절에서 말한대로 기독교리의 가장 기초석이며 중심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 존재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는 지상에 있을 때 하나님을 선포하고 그의 뜻과 사랑에 따라 자신이 겪어야 할 죽음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살리시리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사역을 증거하고 그가 참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요 자기는 아들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요5:18). 자신을 존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요14:9).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칭의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대제사장적 죽음이 받아들여짐을 가리키며 결국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죄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증거합니다 (롬4:25). 넷째, 그리스도 부활은 영생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은 죽음이 이 생의 종국이 아님을 증거합니다. 사망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참패당한 존재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 부활은 심판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는 지상에 있을 때 최종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 자신을 심판자로 주장했습니다. 부활은 심판의 날이 다가옴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17:31). 본 장은 그런 중요한 부활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 (1-11절), 성도 부활의 근거 (12-28절), 성도 부활의 증거 (29-34절), 성도 부활의 형상 (35-44절), 성도 부활의 의의 (45-58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 (1-11절)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과 내용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서 그것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1-2절). 본문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변증입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에 대한 부활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전9:4-5). 특히 유대교 분파인 사두개인들은 영혼의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행23:8). 헬라인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으면서도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특히 플라톤(Platon) 철학에서는 이데아(Ιδεα) 세계와 물질 세계의 이원화적 이론으로 육체는 악하고 멸절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러한 유대교적 사상과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생기게 되므로 복음의 중심이 무너질 위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복음 진리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이고 그것은 곧 육에 부활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3-4절, 사7:14, 53:5-6, 10-12, 시16:10). 예수님 스스로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가르쳤습니다. (막9:9-10, 요2:19-22, 마16:21, 17:22-23, 20:19, 27:63, 막9:9-10, 요2:19-22, 행3:18, 벧전2:24).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성경을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찔리심 (사53:4-5, 요19:1,5), 죄인들과 함께 봇 박히심 (사53:12, 요19:18), 군병들이 주의 옷을 얻고자 제비뽑음 (시22:18, 요19:24), 신포도주를 받으심 (시69:21, 요19:29), 뼈가 꺾이지 않음 (시34:20, 시19:33), 옆구리를 찔리심 (시22:16, 슥12:10, 요19:34), 부자의 요실에 장사됨 (사53:9, 요19:41) 등입니다. 이는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대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 일어난 것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또한 외부적 요인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사건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불신앙의 사람들과 신앙의 사람들이 그 배후에서 이용된 것입니다.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가사설(假死說), 도거설(盜去說), 허위설(虛僞說), 환상설(幻象說), 착오설(着誤說)등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이 세상에 머물면서 12차례에 걸쳐 부활체를 보여 주셨습니다. 게바(베드로)에게도 보여 주셨고 12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고 그 후에 500여명의 형제들에게도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죽었지만 대다수가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때인 주후 55년경 시점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이 야고보는 주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또한 사도들에게도 보이셨고 본서의 기록자인 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①빈 무덤이 증거해 줍니다 (눅23:1-3). 안식 후 첫날(주일) 새벽에 마리아를 중심한 여인들이 향품을 발라주기 위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아 두었던 돌이 굴려져 있었고 무덤 안에 들어가 보니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②예수님의 증언이 증거해 줍니다 (마28:8-10, 요20:11-18, 고전15:5-8).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무서움과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빨리 달음질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저희에게 나타나 "평안하뇨"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님 시체를 다른 데로 옮겨 두었거든 그 곳을 알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신 줄 알고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했습니다.

 

  ③천사들의 증언이 증거해 줍니다 (마28:5-8, 막16:6, 눅24:4-8).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시체가 없음으로 인하여 누가 훔쳐 간 줄 알고 근심하며 울고 있을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사람 모습)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말하고,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고 말하면서 예수께서 갈릴리에 게실 때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제 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④수의(壽衣)의 놓인 위치가 증거해 줍니다 (요20:3-7, 20, 27). 베드로가 여인들에게 무덤이 비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무덤 속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이 입었던 수의(세마포)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같이 놓이지 않고 따로 개켜져 있었습니다. '개켜 있더라'는 헬라어로 엔테튀리그메논(εντητυλιγμενον)으로서, 사용하기 전 상태처럼 둥그렇게 말린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세마포를 가지런히 개어 놓고 두건도 따로 개어 놓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⑤파수꾼들의 은폐 노력이 증거해 줍니다 (마28:11-15). 여인들이 무덤을 떠난 이후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은 성 중으로 들어가 대제사장에게 보고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파수꾼들로 무덤을 지키도록 했는데(제자들이 훔쳐 가지 못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무서워 도망해 온 파수꾼들의 보고를 듣고 장로들과 의논하고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파수꾼들에게 돈을 주며 "제자들이 밤에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고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말까지 오늘날까지(마태복음을 기록할 시점) 유대인들 사이에 두루 퍼져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⑥부활체의 현현(顯現) 사건들이 증거해 줍니다 (고전15:2-8). 예수님은 40일 동안 12차례에 걸쳐 부활체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막16:9, 요20:18, 28:9), 예루살렘에서 여인들에게 (마28:9, 눅24:10),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에게 (눅24:34, 고전15: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막16:12, 눅24:13-35), 예루살렘에서 10사도에게 (눅24:39, 요20:19 도마 없을 때), 예루살렘에서 11사도에게 (요20:26-29 도마 있을 때), 갈릴리 해변에서 7사도에게 (요21:1-22), 갈릴리 산에서 11사도에게 (마28:16, 막16:14), 갈릴리에서 500여 형제에게 (고전15:6), 예루살렘에서 주의 동생 야고보에게 (고전15:7), 감람산에서 승천할 때 사도들에게 (막16:19, 행1:3, 눅24:51),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에게 (행9:3-6, 고전15:8) 보여 주셨습니다.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기에게도 보여 주셨고 예수님을 본 자가 태반이나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때인 주후 55년경 시점).

 

  ⑦부활체를 목격자들의 변화가 증거해 줍니다 (눅24:52-53, 행4:19-20, 9:19-21). 부활한 예수님을 목격한 그들은 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했고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생명 내놓고 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는 예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공회원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결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행4:19-20). 결국 그들은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의 동생 야고보는 처음엔 주를 믿지 않았지만 후에는 예루살렘에서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요7:5, 행1:14). 바울도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으나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를 증거했고 마침내 순교까지 했습니다. 바울도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으나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를 증거했고 마침내 순교까지 했습니다 (행9:1-21).

 

  ⑧교회의 확장이 증거해 줍니다 (행2:32, 41-47, 3:15, 4:10, 20-37, 5:40-42). 부활체를 목격한 사도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할 때에 많은 무리가 은혜를 입어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사도들이 정해 준 규례를 생명 내놓고 지켰고 성전에 모여 기도하며 순전함으로 예전을 행했습니다. 사랑이 충만하여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도왔기 때문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태동한 교회가 오늘날엔 전 세계에 퍼져 교회가 없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행2:41-47, 4:33-37). 로마시대 황제들의 박해, 종교개혁기의 구라파에서 교황권의 박해, 영국 국교회 여왕의 박해,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히틀러, 소련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일본의 천황, 6.25전쟁 때 김일성 등 수없는 기독교인을 학살하고 교회를 잔해했습니다. 그래도 기독교는 없어지지 않고 가장 많은 곳에 전파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종교가 되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를 가도 호텔마다 성경책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런 기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영국의 사학자 토마스 아놀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 보다 완전하게 증명될 수 있는 사실들이 인류 역사 가운데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한때 영국의 무신론 자였던 리틀스톤경과 길버트웨스트는 예수님의 부활과 바울의 변화를 반증하기 위해 연구하다가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들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변호사 프랑크 모리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할 목적으로 "누가 돌을 움직였는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읽다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오히려 부활의 사실성을 철저히 변호하는 논리를 폈습니다.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현(顯現)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때문에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 대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자' '사도라 칭함을 감당하지 못할 자' 라고 했습니다 (8-9절). 에베소서3:8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1:15에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만삭(滿朔)되지 못하여 난 자'(εκτρωματι)는 문자적으로 유산이나 조산을 말하는데 바울의 의도는 자신이 유산된 자 같이 무가치한 존재임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부활체를 보기 전에는 스데반을 죽이고 성도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잔해한 자였음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라고 했는데, 이는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체를 목격한 이후에 나타난 모든 은혜를 말합니다. 그 은혜는 인격적인 부분과 직분과 사역적인 부분을 다 포함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구원받고, 사도가 되고,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고, 선교 사역에서 열매가 나타나는 것 등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나온 성품이나 능력이나 실력이나 노력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이 은혜로 역사하신 결과로 되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사도들이나 바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했다는 것이고 고린도교인들도 그것을 믿었습니다.

 


       2. 성도 부활의 근거 (12-28절)

 

  ①성도의 부활은 반드시 있습니다.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초대교회 때 성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행23:8, 딤후2:17-18).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그의 부활이 성도 부활의 근거와 원동력이 되어 성도들도 부활하게 됩니다. 만일 성도의 부활이 없다면 첫째, 모든 복음의 가르침은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둘째, 모든 복음 전도자들은 거짓말장이이며 또한 어리석은 자들이 됩니다. 셋째, 살아 있는 성도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죽은 성도들은 모두 지옥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셋째, 삶 자체의 이유와 목적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섯째, 구세주 자신이 중동지방의 어느 무덤에서 썩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일곱째, 기독교의 예식은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덟째,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은 어리석고 분별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아홉째,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 '케세라 세라'(될 대로 되라) 식의 관능적인 생활이 삶의 유일한 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②부활의 원리는 대표원리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1-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성도 부활의 근거가 된다는 논리가 전개되었습니다. 부활의 원리는 대표원리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온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함입니다 (창3:1-24). 로마서5:12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와 같이 한 사람의 범죄가 모든 사람을 죽게 하는 원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사람의 부활을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되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구약에 나오는 첫 열매의 의미와 같습니다. 추수 때 첫 곡식단을 먼저 하나님께 바친 것은 전체 수확물의 대표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물론 후에 거두어질 결실까지 암시합니다. 성도는 그러한 원리에 의해 부활하게 됩니다 (골1:18).

 

  ③부활의 시기는 주의 재림 때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성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입니다 (요5:28, 살전4:13-17, 고전15:51-52). 부활은 일반적으로 크게 나누면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둘째는 성도의 부활, 셋째는 불신자의 부활이 있습니다. 성도의 부활은 전전년기설 입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 자던 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죽은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살아 있는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 죽은 성도, 천년왕국 끝에 살아 있는 성도입니다 (마27:52-53, 살전4:16-17, 계20:4). 그 후에 천년왕국이 지난 다음에 불신자의 부활이 있습니다 (계20:4-6). 성도의 부활을 첫째부활이라고 하고 불신자의 부활을 둘째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부활했습니다. 그 다음은 그에게 붙은 자로서 믿음으로 연합한 성도들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24절에 나온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라는 말에 대해 오해가 있습니다. 앞 절 23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고 그 다음에 성도의 부활이 있다고 했고 그에 이어서 그 후에는 마지막이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신자의 부활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το τελοs (comes the end -KJV, NASB)는 세상 끝을 말하는 것이지 마지막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그 다음에는 마지막 날이 올 터인데"로 번역했습니다. 성도의 부활 후에 이 세상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마13:39, 계14:15). 그 때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고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입니다. 개별적으로 특수한 의미가 아닌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총망라한 말입니다.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시편110:1의 인용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할 때부터 하나님 나라를 다 이루실 때까지 악한 원수의 세력을 물리치는 일을 하시며 결국 재림 때에 모두 정복하게 됩니다. 그 때는 사망도 멸망받게 됩니다. 인격체로서 생명을 잃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죄와 공포와 절망으로 사람을 괴롭혔던 영향력을 잃고 더 이상 공포를 부과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복종시키기 사작했고 마침내 완전히 복종시키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복종하심(자발적인 비하)으로 만물의 질서를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완전한 지배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8:6에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8:18에는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부활에 대한 고백을 해야 하며 부활의 권능에 참여해야 하며 부활 신앙으로 담대히 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11:23-24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했고, 빌립보서3:10-11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고, 히브리서11:35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고 했습니다.

 


       3. 성도 부활의 증거 (29-34절)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죽은 자의 부활은 반드시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과 상황을 들어 험증하였습니다.

 

  ①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왜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29절). '죽은 자를 위하여'에서 '위하여'에 해당하는 휘페르(υπερ)는 '...위에' '...대신에'의 뜻입니다. '위에'는 장소적 의미를 가지고 '대신에'는 행위적 의미를 가집니다. 장소적 의미를 가진 다면 무덤이나 죽은 자 위에서 세례를 받는 것을 말하고 행위적 의미를 가진다면 죽은 사람을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둘 중 어떤 의미를 취하든지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을 받는 것은 동일합니다.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Chrysostom)에 의하면 당시에 그와 유사한 세례가 행해졌다고 합니다. 당시에 세례는 구원과 부활의 축복에 참여하는 보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자가 있으면 그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죽은 자를 침상 같은 곳에 눕혀 놓고 산 사람이 그 아래에 들어가서 눕는다고 합니다.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죽은 자 아래 누워 있는 산 사람에게 세례를 받겠는지 묻고 죽은 자 아래 누워 있던 산 사람이 세례를 받겠다고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죽은 자를 대신하여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를 베푸는 자가 세례를 베풀게 되고 그렇게 하면 죽은 자가 세례를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고 합니다. 당시 고린도교인들 가운데는 죽은 자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캐톨릭에서 행하는 종유례는 그와 비슷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배경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배경 하에서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주거나 받는 것은 죽은 자가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왜 그런 행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잘못된 배경을 이용하여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 모순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 나라에서 불신자들이 제사나 굿을 하는 것을 보면 불신자들도 영혼불멸과 내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반어적 표현으로 영혼과 내세가 없다면 왜 그들이 제사를 드리고 굿을 하겠느냐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교리적으로 잘못된 사상을 근거하여 부활교리를 증명했을 리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본문에 죽은 자를 위해 세례받는다는 말을 신앙이 죽은(어린) 자를 위해 고난받는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엡2:1, 눅12:50, 갈4:19). 그 주장도 생가해 볼만 합니다. 그런 주장으로 이해한다면 다음 구절들에서 나온 내용들과 맥이 연결되는 자연스러움이 있습니다.

 

  ②복음을 위해 희생적인 헌신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바울 자신과 동역자들이 왜 위험을 무릅쓰겠느냐는 것입니다 (30절). 고린도후서11:23-27에 보면 바울은 여러 번 죽을 뻔한 위험을 경험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고 하고 돌에 맞기도 하고 파선하여 일주야를 표류하기도 하였습니다.  강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여러 번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잠자지 못했습니다. 춥고 헐 벗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31절). 공동번역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로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극도의 위협을 당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은 어떤 자기의 현재적 유익이나 영광을 위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32절). 바울이 에베소에서 검투사처럼 맹수와 싸웠는데 그것은 돈을 벌려 하거나 명예를 얻으려 하는 등 인간적인 목적에서 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복음 전도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는다는 말을 신앙이 죽은 자들 위해 고난받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본문의 맹수와 싸웠다는 말을 맹수와 싸우는 것 같은 고난을 받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짐승과 싸우게 했겠는가 하는 점을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날마다 죽는다는 말을 자신을 쳐 복종시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9:27). 그런 해석도 생각해 볼만 합니다. 어쨌든 바울이 어떤 의미로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는데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런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역설한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외부적 조건을 보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율법적으로도 랍비에 해당했고 철학적으로도 소피스트들을 능가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며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산 것은 복음 전도를 위해서이고 복음 전도를 위해 인생을 바친 것은 성도의 부활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가장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어떤 좋은 삶과 바꿀 수 없는 가치있는 삶을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선교사나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 목회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큰 교회는 생각처럼 많지 않습니다. 몇 년 전 보고이기는 하지만 300명 이상의 교회는 4%밖에 안됩니다. 자립하는 교회는 30%밖에 안됩니다. 사례비 월 100만원 이상받는 교회는 50%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실 다른 직업을 가진 극빈자들은 국가 보조나 자선단체의 보조를 신청하기도 하지만 목회자들은 영광을 가리운다고 그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어떻게 자녀 양육하면서 제대로 살겠습니다. 그래서 힘든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새벽에 신문이나 우유도 배달하고 평일에 노동이나 운전을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목사가 된 사람은 최소한 대학원(연구원)까지 나와야 고시를 볼 수 있는데 대학과 대학원을 합치면 7년을 공부해야 합니다. 다른 분야에서 말하면 석사과정을 마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 이상 공부를 합니다. 어느 한 분야에서 그 정도 공부하고 한가지 일에 10~20년 투자하면 지금 목회자들처럼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렇게 삽니까? 복음 전도를 위함이 아닙니까? 내세와 부활이 없다면 그 길을 가겠습니까?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한 말 그대로인 것입니다.

 

   ③방탕하며 살겠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3절 하반절). 이사야22;13과 유사한 말씀입니다. 내세를 믿지 않거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이 전부이기 때문에 인생을 먹고 마시고 노는 데에 쏟습니다. 바울과 동역자들 역시 일생 고난을 겪으며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전도와 교회봉사와 인격성장과 생활절제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고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불상한 것입니다 (17절).

 

  그러므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했습니다 (33절).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고 쾌락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들의 사고와 품행과 생활은 단정하지 못하고 정결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내세와 부활을 소망하고 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앞에 옳게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세상적 목적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교제하게 되면 가치관과 세계관이 물질적, 정욕적, 세속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품행이나 삶의 방식이 같아지고 맙니다. 우리 옛말에도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34절). '깨어'(εκνηψατε)는 술 취한 상태에서 깨어라는 의미입니다. 분별력없이 그릇된 사람들과 교제하며 그릇된 사상과 주장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부인하므로 방탕하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를 행하는 것이고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권면을 한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어서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4절). 당시 헬라 철학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은 두 갈래의 성격을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금욕주의이고 하나는 쾌락주의입니다. 그들은 영은 거룩하고 육은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이 범죄해도 영은 더럽혀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은 절대로 범죄하지 않고 육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은 아무 것도 아니게 생각하여 방종의 삶을 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비밀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는 자는 내세나 부활을 부정하거나 이 세상을 쾌락주의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고 영원한 곳에서 그의 축복 속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4. 성도 부활의 형상 (35-45절)

 

  ①부활체의 형태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부활의 방법에 대해 비유로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종자)를 심어서 그 씨가 죽으므로 전혀 다른 식물의 형체가 나옵니다. 그와 같이 사람의 육체가 죽으면 전혀 새로운 부활체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전혀 다른 별개의 육체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성의 의미를 가지며 과거 육체에 대한 완성입니다. 그것은 씨를 심으면 같은 씨가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부활체는 기능적으로 보면 전의 육체와 전혀 다른 완전한 형체이지만 형태면서 보면 전의 육체의 음영을 띤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전혀 다른 부활체로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갑자기 나타나기도 했고 제자들이 문을 꼭 닫고 있었는데도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예수님이 그들과 음식을 먹기도 했고 못과 발의 못 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을 보여 주면서 만져 보라고 했습니다. 살았을 때의 몸인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요20:20,27, 눅24:39, 고전15:4-8).

 

  ②부활체의 영광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부활체의 영광은 각기 다릅니다. 땅에 속한 형체도 있고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의 형체가 있고 해와 달과 별의 형체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형체들이 각기 다르듯이 부활체의 영광도 다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다 부활합니다 (요5:28-29). 신자는 천국에 가고 불신자는 지옥에 갑니다 (마25:46, 계20:12-15, 22:5). 그 기준은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계20:5, 21:27). 신자는 천국에 가지만 그 영광과 상급과 칭찬이 다릅니다 (단12:3, 마5:19, 고후9:6). 고린도전서3:12-15에 보면 해받는 구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5:14-36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 각기 칭찬이 다릅니다. 신자가 천국에서 나타날 영광의 기준은 기념책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말3:16). 그것은 이 세상에서 행한 행위대로입니다 (마16:27, 고후5:10, 고전3:13). 그러므로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야 합니다 (벧전1:27). 곧 이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므나 비유) 사명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

 

  ③부활체의 성질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 육체는 한계성과 유한성을 가진 육체로서 생사병노와 욕정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이는 35절에서 사람이 부활하면 어떤 몸으로 부활하느냐? 썩을 몸이 어떻게 회복되느냐? 고 한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씨를 심어 그 시가 썩어지나 전혀 새로운 식물이 나온 것같이 육체도 전혀 다른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부활은 자연계시가 증거하고 과학이 증거하고 성경이 증거합니다 (요5:25, 6:39-40, 고전6:14, 고후4:14, 살전4:16). 부활을 안 믿는 자는 육체의 탐닉을 위해 살다가 썩어집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과거 지향적이며 현세주의적이지만 부활을 믿는 자는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12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그릇된 사람들은 성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의 부활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전9:4-5). 특히 유대교 분파인 사두개인들 영혼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행23:8), 후메네오와 빌레도 같은 사람도 부활이 없다고 그릇된 교훈을 유포하였습니다(딤후2:17-18). 헬라인들은 영혼불멸은 믿으면서도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특히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데아(Ιδεα) 세계와 물질 세계의 이원적 이론으로 육체는 악하여 멸절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이러한 유대교적 사상과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복음 중심의 진리가 무너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근거가 된다고 험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첫 열매로서 우리 부활에 대한 보증이 되는 동시에 우리 부활체에 대한 표본이 됩니다.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대표 원리에 있습니다 (21-24절).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이 범죄하므로 모든 인간이 범죄하게 되었고 아담이 죄값으로 죽은 것 같이 모든 인류가 죄로 죽게 되었습니다 (롬6:23).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죄값으로 죽을 때에 우리의 우리도 죽었고 그가 의로 말미암아 다시 사시므로 우리도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롬5:12). 그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제사로 드려진 곡식단과 같습니다. 곡식을 추수할 때에 첫 곡식단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 곡식단은 모든 수확물에 대한 대표성의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물론 후에 거두어질 결실까지 포함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의 관계는 그와 같은 원리에 있습니다 (골1:18).

 

  둘째, 자연 원리에 의해서도 증명됩니다 (35-38절). 밀 같은 곡식 알맹이가 땅에 썩어져 없어지나 다시 새로운 형체로 자라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형체를 그렇게 내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존재의 변화는 있으나 조재 자체가 소멸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도 썩어질 것이나 다시 전혀 새로운 형체로 부활하게 됩니다.

 

  셋째, 사도들과 참된 성도들의 삶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14, 17-19, 29-31절). 사도들과 참된 성도들은 전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세례(고난)을 받기도 하고 전 생애와 목숨까지 내놓기도 하는데, 그것은 부활이 믿어지기 때문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여러 일들이 확증을 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도 헛된 것이요, 복음 전도자는 거짓말장이요. 사역자들이 주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성도가 내세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모든 사람 가운데 가당 불쌍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 부활을 가능케 하는 실례들이 있습니다 (마27:52-5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근처에 장사되었던 구약 성도들 가운데 일부가 다시 살아나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 외에도 구약 시대에 사렙다 과부의 아들, 수넴 여인의 아들, 엘리사 뼈에 닿은 시체들이 부활했고 (왕상17:17-24,왕하4:32-35, 왕하13:20-21), 신약 시대에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 다비다(도르가), 유드고 등이 있습니다 (마9:23-25, 눅7:11-15, 요11:43-44, 행9:36,40, 20:9-12). 물론 이들은 회생에 해당되지만 우리에게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예견케 하는 실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지 않는 자들도 잠재적으로 부활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핍박자들은 성도가 부활할 것을 두려워 합니다. 일본에 선교사로 나가 있던 한 사역자가 일본 영토였던 루큐 군도 내의 아마쥬사라는 섬에서 거대한 맘모스 무덤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둥근 돌 위에 "여기 11,111명의 크리스챤의 머리가 누워 있다"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일본인들이 그 곳에 살고 있던 크리스챤들을 몰살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들의 머리와 몸이 따로 있었습니다. 크리스챤에게 끔찍한 살인을 자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활할 것을 확신하고 영광된 부활체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여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썩지 않고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40-44, 51-54절, 마22:30, 눅20:36, 요20:19,26).

 


       5. 성도 부활의 의의 (45-58절)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성도의 부활의 근거가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예증하기 위해 대표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아담에게 사망이 들어오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왔듯이 두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므로 그에게 붙은 사람에게 부활이 온다는 것입니다. 육의 몸을 대표하는 아담은 근본적으로 땅에 속한 자이지만 영의 몸을 대표하는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하늘에 속한 자오서 육의 몸을 입고 온 자입니다 (빌2:6-8). 현재는 흙에 속한 썩어진 육체를 입고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부활의 영광의 몸을 덧입을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45절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아담에 대해 적용한 생령살아있는 혼’ ‘살아있는 존재의 의미이고 (ψυχην ζωσαν, a living soul -KJV, NASB, a living being -NIV), 예수님에게 적용된 살려주는 영은 한글 개역 개정판의 의미대로 살려주는 영의 의미입니다 (πνευμα ζοωποιουν, a quickening spirit -KJV, a life-giving spirit -NASB, NIV). 여기에서도 아담에게 살아있는 혼혹은 살아있는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들을 보면 '아담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살게 하는 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육의 몸과 영의 몸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육의 몸이 먼저 있고 영의 몸이 나중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헬라 플라톤 철학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플라톤 철학에서는 신령한 존재가 먼저이고 불완전한 존재가 나중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이 있다면 영적 승귀로 보는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몸이 먼저 있고 둘째 아담에 속한 영의 몸이 나중이라는 것입니다. 44절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했고, 본절인 45절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 했고, 다음 절인 47절에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44절 앞에서 부활체의 성질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부활체는 신령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부활은 썩을 육체의 몸을 심어서 썩지 않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담 생명이 있었으나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 신령한 분으로서 그를 믿는 자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아담은 흙에서 온 자였기 때문에 생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서 오신 자로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흙에 속한 사람들이 아담처럼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담처럼 흙에 속한 자들로서 아담처럼 다 죽게 되지만 하늘에서 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령한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육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에게 속한 사람들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바울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흙에 속한 형상을 입고 있습니다. 아담의 형상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하여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당위성을 말한 것입니다. 육체의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으므로 부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①죽음에 대한 승리입니다.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마지막 때에 재림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됩니다. '순식간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토모(ατομω)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한의 시간을 말합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순식간에 산 자들이 변화됩니다. 사망을 이긴 것입니다.

 

  ②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사망(죽음)의 주변에는 질병과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사망과 질병과 고통은 죄  때문에 오는 결과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죄에 대해 정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6:23). 범죄한 인간은 율법의 정죄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죽음의 증후군들인 질병과 고난을 당하다가 마침내 죽게 됩니다. 평생 죽음의 증후군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다가 죽게 됩니다.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의 종 노릇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죽음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다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첫 열매로서 (20절) 우리의 부활의 근거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자도 그 안에서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 죄 문제가 해결되고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니 율법이 더 이상 정죄하지 못하고 죄의 권세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고 죽음이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김 주신 예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57절). 로마서7:24-25에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궁극적인 소망을 주신 것 감사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구속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도 죄와 죽음의 권세에 종 노릇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세력에 붙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부패성에 주장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結言>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수고한 대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의 몸을 위해 일하는 것은 하나도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말고 견고히 서서 믿음으로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