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역대상13:1-14

<題目> 다윗왕의 법궤 운반 1


<序言>

  역대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다윗 왕조의 계보(1-9장)와 다윗의 통치(10-29장)으로 나뉩니다. 본서의 2부에 해당하는 10-29장의 서두인 10장에서는 사울왕의 죽음, 11장에서는 다윗의 왕 됨, 11-12장에서는 다윗과 함께 한 용사들의 명단이 기록되었습니다. 본장 13장에서는 다윗왕이 하나님의 법궤를 이전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된 이후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수도로 삼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곧 다윗성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에서는 다윗이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블레셋을 정복하고 왕궁을 건립한 후에 법궤를 옮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하5~6장). 본 장의 내용구조는 하나님의 법궤 운반(1-8절), 법궤 운반의 실패(9-14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하나님의 법궤 운반 (1-8절)

 

  1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2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4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5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6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러한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았더라

  7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8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법궤(언약궤)는 2.5×1.5×1.5규빗(1.2×0.7×0.7m)의 크기로 조각목으로 만들어 정금을 입혔습니다. 위로 돌아가면서 금테를 둘렸고 양편에 두 금고리를 만들어 채(봉)를 꿰어 두게 했습니다. 열왕기상8:9과 역대하5:10에 보면 언약궤 안에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9:4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모세의 두 돌 비석(율법판)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만나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궤 안에 두라 하지 않고 궤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출16:33-34, 민17:10). 그런데도 히브리서에서 세 종류가 다 안에 있었다고 한 것은 사실 여부에 관심보다는 언약궤와 관련하여 표징으로 보관되었던 물건들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무엇을 예표하느냐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하여간 언약궤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표상이었습니다 (출25:21-22, 삼상4:7,22). 하나님의 법궤는 언약궤라고도 하는데 두 율법판이 들어 있었으며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이었습니다.

 

  법궤는 광야시대와 사사시대에 성막(회막)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 때에 아벡전투에서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블레셋 사람들이 레위인들이 많이 사는 유다 벧세메스로 돌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 뚜껑을 열어 보았다가 70(오만)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일로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를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가져가게 했습니다. 본문에는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5절). 그 곳은 원래 기브온 사람들의 성읍인 '바알라'(Baalah)였는데 유다 지파가 그 곳을 정복한 다음에 '유다의 바알라'는 의미로 바알레유다(Baale of Judah)라고 했습니다. 그 곳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후에 그 곳에는 기럇여아림산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곳을 기럇여아림(Kiriatjearim)이라고도 했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법궤를 가져와 기럇여아림산 중턱에 있는 '아비나답'(Abinadab) 집으로 옮겨 놓고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Eleazar)을 성별하여 법궤를 지키게 했습니다. 물론 엘리아살은 아들 웃사(Uzaa)와 아효(Ahio)도 그 일을 돕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법궤는 기럇여아림 산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 동안 있었습니다.

 

  다윗은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음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수도로 삼고 블레셋을 정복하고 왕궁을 건축하므로 나라가 안정되자 아비나답 집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온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곧 다윗성으로 옮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지휘관들과 의논을 하고 백성들에게 사울왕 때에 방치되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자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찬동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 사람을 보내어 모이게 했습니다. '시홀'(Shihor)은 이스라엘 남쪽 경계인 나일강을 지칭하는 말이고 (사23:3, 렘2:18) '하맛'(Hamath)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인 오론테스강 유역에 있는 성읍을 말합니다 (수13:5). 곧 '시홀 시내에서 하맛 어귀까지'라는 말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처럼 이스라엘 전역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모인 레위인들과 백성들을 모아 함께 아비나답 집에 있는 법궤를 새 수레에 실어 옮겼습니다. 엘리아살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수레를 몰았습니다. 다윗과 백성들은 온갖 악기들로 연주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부터 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20동안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왕도로 정하여 성을 쌓은 것도 언약궤를 모셔 올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평안해지자 언약궤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소원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나라를 더 강하게 하고 그 아들 솔로몬 때에 성전을 짓게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 마음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왕상8:15-21).    


  다윗왕은 그 동안 사울왕 때에 방치되어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모시고 자신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물으려 했고 백성들도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는 신앙이고 온 백성이 하나님 중심으로 생활을 하게 하려는 신앙입니다. 다윗은 그런 좋은 의도를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신하들과 의논하여 결정을 이끌어 냈고 온 백성들을 설득하여 온 백성이 함께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게 했습니다. 다윗의 건강한 지도력이 돋보이는 모습입니다. 또한 신하들과 백성들도 다윗의 옳은 의도와 결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오늘날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서도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을 해야 하고 그 일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모든 일원들의 호응과 동참을 이끌어 내고 일원들은 하나님 앞에 옳은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모습이 신앙공동체의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2. 법궤 운반의 실패 (9-14절)

 

  ①법궤 운반 중에 웃사가 죽었습니다.

 

  9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10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11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다윗이 노하여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12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13 다윗이 궤를 옮겨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메어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다윗이 법궤를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 아비나답 집에서 다윗성(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는데 30,000명의 군사가 호위하고 다윗과 백성들은 주악을 하며 뒤를 따랐습니다. 언약궤는 새 수레에 싣고 앞에서는 아비나답의 아들 아효는 앞에서 행하고 웃사는 뒤에서 행했습니다. 아마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오랫동안 있었기에 아비나답의 아들 아효와 웃사가 언약궤 옮기는 일을 책임지게 한 것 같습니다 (삼하6:6-8).   

 

  법궤가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었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기돈의 타작 마당'은 병행구절인 사무엘하6:6에서는 '나곤의 타작 마당'이라고 했습니다. '기돈'이나 '나곤'은 지역 이름이나 사람 이름 같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 생각됩니다 (Keil, Lange). '기돈'(כידון)은 '피괴' '재앙'이라는 뜻이고 '나곤'(נכון)은 '예비된' '충돌하는'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웃사를 친 장소라는 점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법를 끄는 소가 이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뛰므로 웃사가 법궤를 붙들었다고 했는데 '뛰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형 '사마트'(שמט)는 본래 '걸려 넘어질 뻔하다' '미끄러지다'의 의미로서 소들이 돌리에 걸려 넘어지려 하거나 미끄러져 비틀거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수레를 끄는 소들이 뛰므로 궤가 흔들렸고 뒤에 있던 웃사는 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궤를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은 법궤를 붙드는 웃사를 공격하여 찢었습니다. 웃사가 법궤를 붙들다가 징계를 받아 즉사하게 되자 다윗은 다윗자신과 웃사의 불찰로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궤 모시는 일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분노하고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고 했습니다. '베레스 웃사'(פרץ עזא)는 '웃사를 충돌하심''갑작스럽게 웃사를 치셨다' 라는 뜻입니다.

 

  궤를 옮기는 일에 실패한 것은 한마디로 율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13). 곧 소로 끌게 했기 때문이고, 수레에 실었기 때문이고, 궤를 만졌기 때문입니다. 민수기4:15에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민7:9). 출애굽기25:14에는 궤를 옮길 때 양편 고리에 채(pole)를 꿰어서 메라고 했습니다. 궤를 이동시킬 때는 반드시 사람이 채로 꿰어 어깨에 메어서 이동시켜야 하며 그것도 제사장 반열인 고핫 자손이 메어야 하며 누구도 만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궤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으로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촉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출25:21-22). 만일 그 법을 어길 경우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출19:12,22,24, 33:20). 다윗과 웃사가 율법을 어긴 것은 아마 사무엘이 죽은 이후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시행되지 못했고 다윗 스스로도 궤에 대한 율법에 정통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윗은 그저 궤를 옮기고자 하는 열정을 너무 커서 궤를 잘 모시려 하는 의도에서 단순한 생각으로 새 수레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신상을 운반할 때 일반적으로 수레를 이용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백성은 말씀을 떠나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유다 벧세메스로 이동시킬 때 새 수레에 싣고 암소 2마리로 끌고 가게 했습니다 (삼상6:10-11). 그런데 하나님이 섭리하여 아무 일도 없이 목적지에 잘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가 도착했을 때 그 궤를 열어 본 유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70명이나 즉사했습니다 (삼상6:19). 그리고 본문에서 다윗과 웃사는 궤를 새 수레에 실어 소로 끌게 하고 궤를 만졌을 때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하6:7). 블레셋 사람들은 택하지 않은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유기(遺棄)관점에서 용납된 것 같고 유다 사람들은 택한 선민들이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대노(大怒)하지 않으시나 자기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돼지는 잡아먹기 위해 살찌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도 남의 자녀가 잘못 나갈 때에 내버려 두지만 자기 자녀가 잘못 나갈 때는 근실히 징계합니다 (잠13:24). 하나님은 다른 백성이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땐 관망하시기도 하지만 자기 백성이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 징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 살면 안됩니다 (히12:8).    

 

  둘째, 목적도 중요하지만 방법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중심을 볼 때 다윗의 신앙적 열정이나 웃사의 열정 자체는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율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궤를 옮기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다윗이 궤를 새 수레에 실은 것이나 웃사가 흔들리는 궤를 붙잡으려 한 것이나 모두 하나님을 생각하는 열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방법이 잘못되어 실패한 것입니다. 교회사적으로 카톨릭 내에서 정화운동으로 익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창설했던 '예수종회'가 후에 실패로 돌아간 이유 가운데 하나도 '마키아벨리즘'(machiabellism)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곧 '목적이 가하면 방법도 가하다'는 사상 때문입니다. 목적도 좋아야 하지만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방법을 몰라서 실수했다고 해서 용납되지 않습니다. 옛말에 '양잿물은 모르고 먹어도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는 말씀대로 되지 않은 것은 그 공력이 다 불타고 맙니다 (고전3:12-15). 그러므로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1:3). 깨닫는 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아예 지키지도 못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촉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웃사가 흔들리는 궤를 붙잡으려 했던 것은 윤리적으로 볼 때 옳은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 벧세메스 사람들도 블레셋에서 돌아온 궤를 만지고 뚜껑을 열었다가 70명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상6:19). 그들은 궤가 블레셋에 있었기 때문에 법궤 안에 있는 율법판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려 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궤를 확인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이었습니다 (출25:21-22).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영광의 표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에 있는 동안에도 가는 곳마다 재앙을 내려 스스로 영광을 지켰습니다 (삼상5:1-12). 하나님은 자기 위엄과 영광을 스스로 지키고 드러내십니다. 사람이 윤리적 열심 때문에 그 주권을 관여하거나 침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시도록 사람들은 순종만해야 합니다. 더욱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에게 밭을 팔아 드린다고 해 놓고 절반만 드렸다가 베드로가 성령의 지시에 의해 책망하자 한 날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행5:1-11). 그것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아 서로 핍절한 사람이 없도록 자기 것을 내놓았고 바나바 밭을 드리므로 권위자라는 칭찬을 받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칭찬받고 싶은 욕망에서 밭을 드린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행4:33-37). 그것은 곧 성령의 역사로 되어진 것들을 보고 자신들도 인간적인 욕망을 성령의 역사로 가장하여 영광을 얻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침해한 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침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행12:23).  

 

 넷째, 사람들 보기에 좋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려 하는 목적이나 궤를 새 수레에 실어서 운반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최고로 대접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수레에 실은 것은 율법을 생각지 않은 처사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과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율법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면 결국 사람들 보기에 좋은 모습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할 때 말씀대로 하지 않고 사람 중심으로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대부분의 활동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했습니다. 구제, 기도, 금식 등을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해서 했습니다 (마6:1-18).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6:1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일반 생활에서 조차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살지 않아야 합니다.

 

  다섯째, 쉽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궤 실은 수레를 소로 끌게 한 것은 쉽게 운반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쉽게 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영혼이 성장하고 인격이 만들어지는 것은 빠른 시일에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과 많은 시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마16:24).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14:22). 옛말에 "털도 뽑지 않고 먹으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 사역에서도 쉽게 하려 해서는 안되고 일반 생활에서도 쉽게 하려는 정신은 버려야 합니다. 시편126:5-6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했습니다. 전도서11:6에서는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②법궤를 모신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다윗은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지 못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가게 했습니다. '오벧에돔'(Obededom)은 레위지파 고핫자손으로서 성소 문지기였습니다 (15:18,24, 26:4, 출6:16). 그를 가드 사람이라고 했는데 '가드 사람'(the Gittite)이라는 말은 단지파의 경내에 있던 레위인의 성읍 '가드 림몬'(Gath Rimmon) 출신이라는 말로서 오벧에돔이 가드 림몬에서 출생했음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수19:45, 21:20-24). 한편 하나님은 법궤가 오벧에돔에 3개월 동안 있는 동안 그의 가정과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구약적인 관념에서 복을 내렸다는 것은 건강과 자녀와 가축과 소산 등에 복을 내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이 쓰러지자 형장까지 가지 못하고 죽을 것을 염려하여 십자가를 군중 가운데 지켜 보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지웠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마27:32). 마가복음15:21에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했고, 로마서16:13에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두 구절에서 말한 '루포'가 동일 인물이라면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진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 구속을 알게 되었고 그의 아내도 그리스도를 믿어 바울이 '내 어머니'라고 할 정도로 바울에게 신앙적 영향을 준 사람이 되었고 그 아들 루포도 바울이 인정하는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업이 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을 도와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그 곳에 머물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행18:1-3,11). 후에 바울이 로마서16:3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하나님 일에 헌신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아합시대에 이스라엘에 흉년이 3년 6개월 동안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사르밧(사렙다) 과부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이르러 나무를 줍는 과부를 만나 물을 달라고 청하고 물을 가지러 갈 때에 다시 불러 떡을 한 덩이 달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떡이 없고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있다고 했고 그것으로 떡 한 덩이 만들어 자기와 아들이 먹고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여인에게 그것으로 작은 떡을 하나 만들어 자기에게 가져오고 나머지로 하나를 만들어 둘이 나누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엘리야의 말대로 했고 그 결과 그 여인의 가정에는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흉년 내내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살아나게 해 주셨습니다  (왕상17:1-24). 하나님의 사역을 헌신적으로 도운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이병규 목사님이 전쟁 때 이북에서 나와 부산에 피난 갔다가 전쟁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명륜동에서 이북 출신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그 할머니가 이 목사님을 자기 집 뒷 방을 내 주어 기거하게 했고 그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교회가 현재 명륜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아들이 목사님이 되었고 신앙과 인격이 훌륭한 분이 며느리로 들어왔습니다. 그 목사님 부부는 제가 잘 아는 분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기초 헬라어를 그 목사님께 배웠고 그 사모님과는 같이 근무를 해서 잘 압니다. 하나님의 일에 희생하는 가정은 반드시 복을 받게 됩니다.   

  

<結言>

  다윗이 평생 소원하는 바는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 곧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선한 중심에도 불구하고 1차 기시에는 실패하고 2차 시기에 성공하게 됩니다. 다윗이 1차에는 율법대로 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을 깨닫고 2차에는 율법대로 합니다. 결국 성공하자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 주시고 온 이스라엘에 주인이 되시기로 했다고 생각하고 체면을 생각지 않고 기뻐했습니다 (삼하6:20-23). 다윗은 하나님에 남다른 시각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