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전도서6:1-12

<題目> 세상적 풍요와 허무


<序言>   

  본 장은 사회 속에서 엿보여지는 여러 가지 불의와 부조리한 면들을 들어 해 아래 사는 인생들의 허무함을 다루는 4-6장의 마지막 장으로서, 역시 사회 속에서 보여지는 해로운 면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인간의 허무함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낙을 누리지 못하는 소유의 허무함(1-6절), 채워지지 않는 욕망(7-9절),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변론(10-12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낙을 누리지 못하는 소유의 허무함 (1-6절)  

 

  1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2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3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4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5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6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전도자는 해 아래서 한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으니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절).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에 해당하는 기본형 '라브'(רב)는 '충분한' '흔한' 등의 뜻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흔한 일이라는 의미로 해석함이 자연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이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병'에 해당하는 '와하리 라'(רע וחלי)는 아주 좋지 않은 재난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물과 부요와 존귀(영예)를 얻지 못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소수는 그것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처럼 나쁜 곤경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장수하고 비록 100명의 자녀를 낳았어도 그 영혼은 그런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고 하니 그것은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므로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고 했습니다 (3-5절). 사람들은 오래 살고 자녀가 많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살고 자녀를 많이 낳는다고 해서 행복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수하고 자녀가 많아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열조의 묘지에 안치되지 못할 정도로 비참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낙태된 자보다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낙태된 자'에 해당하는 기본형 '네펠'(נפל)은 '유산' '조산'의 뜻입니다. 햇빛을 보지 못한 채 나왔다가 가는 비참한 운명이기는 하지만 의식이 없이 태어났다가 가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자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유산된 자는 의식을 가져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인생의 재난이나 곤경이나 고통으로 인한 비참함을 느끼지 못한 채 안식에 들어갑니다. 이런 대조는 장수와 자녀가 있어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삶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말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전도자는 그가 비록 1,000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6절). 아무리 오랫동안 산다해도 결국 죽게 되고 음부(지옥)으로 가게 되는데 마음에 행복이 없다는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여 정직하게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누리며 사는 인생이 가장 선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5:18)

 


          2. 채워지지 않는 욕망 (7-9절)

 

  7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8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9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7절). '식욕'으로 번역된 '네페쉬'(נפש)는 '혼'을 말하는 데 이는 정신이나 심리 부분을 말합니다. 대부분 영역본에서는 '식욕' '욕망'으로 번역했습니다 (soul-NKJV, appetite-KJV,NASB,NIV). 사람이 모두 먹고 살기 위해 수고하지만 그 욕망은 다 채울 수 없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수고하지만 마음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다함이 없습니다. 잠언30:15에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고 했습니다. 거머리는 피를 빨아먹는 생물입니다. 거머리는 두 개의 강력한 흡입력을 가진 흡입관으로 다른 생물의 피를 한없이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평시에는 실날처럼 가느다란 몸으로 물을 헤엄쳐 다니지만 다른 생물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 먹을 때는 몸이 손가락처럼 굵어져 구를 정도가 됩니다. 거머리는 계속 '다' '다' 합니다. '다오'에 해당하는 '아하브'(יהב)는 '주다'(give)는 말입니다. 거머리는 피를 빨아먹으면서도 계속 더 먹으려 합니다. 거머리는 한없이 욕망을 채우는 속성을 나타내기에 알 맞는 생물입니다. 러시아에 1,000루블(Rub)만 내면 하루에 걸은 만큼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1,000루블은 러시아 화폐로서 지폐로 나와 있습니다. 한 농부가 그 소식을 듣고 그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모든 것이 소문대로였습니다. 단 한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밤을 지새우고 해가 뜨자 마자 출발했습니다. 내일이면 자기 땅이 될 것을 생각하며 성급히 걸으면서 말뚝을 박았습니다. 한참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엄청난 말뚝이 박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눈 앞에 놓인 땅을 보자 욕심이 더 생겨 힘껏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잠시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출발점으로부터 너무 멀리 갔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갈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그는 숨 쉴 틈없이 달렸습니다. 그러나 도착하자 마자 쓰러졌습니다. 그토록 탐하던 땅을 소유하는 순간 그렇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사람들이 그의 묘자리로 쓰기 위해 괭이로 6자의 땅을 팠습니다. 그 정도면 그를 묻기에 충분했습니다. 전도자는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며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8절). 아무리 지혜자라 해도 우매자와 마찬가지로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처신을 할 줄 아는 가난한 자, 곧 지혜를 가진 가난한 자라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지혜를 가졌다 하더라도 별다른 유익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그를 부유하게 할 수 있더라도 그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9절). '눈으로 보는 것'은 실제로 누리는 것을 말하고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נפש מהלך)은 욕망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적은 것일지라도 직접 경험하여 누리는 것이 욕망을 따라 방황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3.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변론 (10-12절)

 

  10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으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다고 했습니다 (10절).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대상의 존재와 특성을 규정한다는 의미로서 그것을 통제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없고 오래 전부터 그것들에 대해 알고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인간이 그 질서와 법칙에 따라 살아야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곧 헛된 인생 가운데서도 참된 행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며 살아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으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11절). '일들'의 히브리어 '데바림'(דברים)은 70인역(LXX)와 KJV역을 제외한 대부분 영역본들이 번역한대로 '말들'(λογοι, words)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11절은 10절에 이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반하는 말들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겠느냐고 했습니다 (12절). '그림자'는 낮에 잠깐 있다가 밤에는 사라지는 존재이며 근본적으로 실재가 아닌 허상의 존재입니다. 인생은 잠깐 사는 존재로서 그 기간도 헛된 삶인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인지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이 죽은 후에는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 줄 수없는 덧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없는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 말하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존재가 잠깐 살다가 가는 존재인데 하나님을 순종하며 사는 것이 가장 복된 인생인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結言>

  자연인으로서의 인생은 심히 짧습니다. 그 기간에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고하지만 욕망은 다 채울 수가 없고 더욱 더 많아질 뿐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 해도 그 욕망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있는 바를 족한 줄 알고 (딤전6:8, 빌4:11-13)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만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