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전도서7:1-29
<題目> 하나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
<序言>
1-6장에서는 인생의 헛됨을 다각도로 증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만이 영원한 가치가 있는 삶임을 암시했습니다. 본 장에서부터는 허무한 인생 속에서도 나름대로 보람있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지혜로운 삶(1-14절), 인생의 한계와 최선(15-18절), 진정한 지혜에 대한 자각(19-29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지혜로운 삶 (1-14절)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1절).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하는 바 '좋은 이름'이란 그 사람에 대한 좋은 평탄이나 명성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인들은 자신이 좋은 명성을 얻고 그 이름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생각했습니다. '기름'은 감람나무(올리브) 열매에서 짠 기름을 말하는데 이는 식용, 등화용, 의료용, 향유용으로 다양하게 쓰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적 특성은 건조하기 때문에 몸에 발라 수분을 유지할 뿐 아니라 향기를 내는데 사용했습니다 (룻3:3, 삼하12:20, 시45:7-8, 암6:6). 그래서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는 것은 좋은 인격으로 사는 것이 좋은 기름을 바르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나오는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말도 그와 연관되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말은 좋은 인격으로 좋은 평판을 얻다가 죽는 것이 좋은 향기가 나는 기름을 바르는 것으로 살기 위해 출생하는 것보다 낫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되기 때문이므로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라고 했습니다 (2절). '초상집'은 장례식을 '잔칫집'은 결혼식을 상징합니다. 초상집에 가면 모든 사람이 그처럼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남은 짧은 기간에 죽음을 생각하며 바로 살려는 의지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 잔칫집에 가서 그냥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인생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4절). 지혜자는 얼마 안있으면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을 깊이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매자는 현재의 육체적 즐거움이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고 오늘에 즐기는 삶을 삽니다. 지혜자는 진지하게 생각하나 우매자는 충동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그의 관심이 초상집에 있고 우매한 사람은 그의 관심이 언제나 혼인집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므로 현재에 죽음을 생각하고 가치있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3절). '슬픔'은 개인적인 고난으로 인한 슬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그에 대한 애곡을 보고서 느끼는 숙연한 슬픔을 말합니다. '웃음'은 하나님이 주신 평안과 행복에서 오는 웃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인 쾌락을 들기는 데서 오는 공허한 웃음을 말합니다. '근심'은 인생에 유익을 주지 않는 지속적인 염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은 힘들지만 결국 인생에 유익을 가져오는 긍정적인 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치있는 삶을 살려면 오늘의 쾌락을 쫓아 살지 말고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에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말씀을 따라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90:12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고 했습니다.
5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6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7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5절). 우매한 자의 '노래'는 잔칫집에서 들리는 흥겨운 노래를 가리킬 수도 있고 (Michael A. Eaton), 아첨과 찬사 등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Seow -GNB, NEB). 우매자의 노랫소리를 들을 때는 기쁘고 즐겁고 상쾌하고 흥겨운 것 같으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그런 삶은 허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혜자의 책망은 당시에는 마음이 상할 수도 있으나 종국에는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가치있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6절).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가시나무나 그루터기나 보리대나 풀 등을 땔감으로 사용했습니다. 가시나무는 그 타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제대로 된 불 역할을 하지 못하고 곧 꺼집니다. 그처럼 우매자의 노래나 웃음이나 칭찬이나 찬사나 아부는 실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명의 지혜자에게 듣는 책망이 여러 우매자들의 찬사보다 나은 것입니다 (G.S.Ogden). 그리고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7절). 아무리 지혜롭고 명철하던 사람이라도 탐욕을 가지고 뇌물을 받으면 망하게 됩니다 (골3:5, 약1:14,15, 출23:8, 잠17:23).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라고 했습니다 (8-9절). 어떤 일을 시작만 거창하게 하고 도중에 그만두는 것보다는 어떤 일을 인내로 끝까지 마감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교만한'에 해당하는 '제바흐'(גבה)는 높이를 말하고 '참는'에 해당하는 '에레크'(ארך)는 길이를 말합니다. 높이 솟은 교만보다 길게 참는 인내가 더 낫다는 것입니다. 잠언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고, 야고보서1:19-20에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민20:12, 27:14, 벧전5:5). 잠언14:29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고 했습니다 (잠16:32). 우매자는 일을 할 때 시작만 거창하고 도중에 교만하고 쉽게 성을 잘 냅니다. 지혜자는 일을 할 때 신중하게 시작하고 도중에 힘들어도 인내로 견디고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10절). 지나간 세월이 현재 보다 낳았다고 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고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자들이 하는 말로서 우매자들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주하는 현실은 언제나 새로운 상황으로서 힘들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나약하여 현실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언제나 과거의 일을 미화하여 과거에 집착합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현재의 고통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합리화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과거 애굽 생활을 그리워 했습니다 (출16:3, 민11:5, 6:14-1-4).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건축할 때 과거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자들은 과거 성전을 생각하며 현재 성전의 초라함을 보고 통곡했습니다 (스3:12-13, 슥4:10). 그리스도인은 현재에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11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12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된다고 했습니다 (11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받은 가나안 땅은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물려졌습니다. 그 땅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매매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서 가장 귀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지혜는 그 유산처럼 귀한 것이라는 것이며 그것은 해 아래 사는 모든 자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혜의 그늘 아래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2절). 사람들은 돈을 가장 귀하게 생각합니다. 지혜 아래 있는 것은 그처럼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돈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사람을 살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인생이 얼마나 귀하고 성공되는 지를 말한 것입니다.
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펴겠느냐고 했습니다 (13절). 사람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가히 알 수 없으나 사람이 알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주목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굽게 한 것을 사람이 능히 펼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므로 그의 통치 아래 있는 인간은 그의 주권적 섭리의 역사에 거역하지 말고 순응해야 함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14절). 형통과 곤고는 인생에서 번갈아 오는데 둘 다 나름대로 용도가 있습니다. 형통은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을 돌리게 하고 곤고는 숙고와 회개를 통해 주권자인 하나님께 순종하게 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형통이 올지 곤고가 올지 알지 못하므로 형통이 오든 곤고가 오든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에 되어진 일이므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룻1:1-7, 단4:32-34, 눅15:11-21, 빌1:20, 4:12).
2. 인생의 한계와 최선 (15-18절)
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15절). 전도자는 자신이 과거에 경험해오면서 파악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의인은 장수의 복을 받고 악인은 단명의 저주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도자가 현실을 살펴볼 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의인이 일찍 죽고 악인이 장수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자 말라고 했습니다. 또한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고 기한 전에 죽으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16-17절). 죽음 앞에서는 어떤 삶이든 모두 일반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의로움이나 지혜로움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볼 때 다 같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 앞에서는 모두 무력하기가 매 일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18절). 의와 악, 지혜와 우매가 나름대로 의미들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것을 붙잡더라도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옳은 것과 그른 것, 지혜로운 것과 우매한 것이 있지만 그 어떤 것을 취한다고 해서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헛된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그 모순에서 벗어나 최선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진정한 지혜에 대한 자각 (19-29절)
19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21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22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10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한다고 했습니다 (18절). 앞서 지혜도 죽음 앞에 무력하다고 한 것을 보완하는 말로 생각됩니다. 지혜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나 여러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얻는 지혜는 인간이 갖는 힘이나 능력이나 권세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1절). 본 절 맨 앞에 '왜냐하면...'(For)를 의미하는 '키'(כי)가 있어서 '때문이로다'로 번역해서 본 절이 앞 절(19절)의 이유인 것으로 느껴지게 하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볼 때 본 절(20절)은 앞 절(19절)과 별개의 문장으로 생각되고 오히려 다음 절(21절)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 절 맨 앞에 있는 '키'(כי)는 '확실히'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온전한 의인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이 선을 행하기에 온전하지 못합니다.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살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때로 의로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도 때론 오류를 범하며 죄를 짓기도 합니다. 솔로몬도 열왕기상8:46에서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3:10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종이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도 가끔 다른 사람을 저주했다는 것을 자기 마음이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21-22절). '너를 저주하는 것을'과 '저주한'에 해당하는 기본형 '칼랄'(קלל)은 '불평하다' '비방하다' '악담하다' '흉보다' '조롱하다' '멸시하다' '저주하다' 등의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부패해 있습니다. 죄성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했고, 마가복음7:21-23에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기 좋아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험담하기를 좋아합니다. 잠18:8에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고 했습니다 (26:22). 남의 비밀을 누설하기도 좋아합니다. 잠언11:13에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고 했습니다 (20:19). 야고보서3:7-8에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에 대해 그렇게 한 것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지 알아보려면 흉악범을 찾아가 볼 필요가 없이 자기 자신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말에 있어서도 온전히 의로운 자가 없습니다. 야고보서3:2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과 관련하여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죄성의 지배를 받고 있고 각종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속 마음을 들으면 그 사람에 대해 실망하게 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말이 잘 들어오게 되고 그 말들 속에는 부정적인 말들도 많은데 그 말을 들으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셋째,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한 말을 들어도 그 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집착하며 상처를 받게 되고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방어기제(防禦機制)로 공격적인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그것은 관계와 일에 실패를 가져오게 됩니다. 야고보서3:5-6에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23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24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지혜자가 되려 했으나 지혜가 멀리했다고 했습니다 (23절). 본서의 기자인 솔로몬은 당대에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자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식물과 동물에 대해서도 아주 박식했고 3,000가지 잠언을 썼고 1,000여 곡의 노래를 지었습니다 (왕상4:29-34).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한 두 여인에 대한 재판 사건, 그리고 솔로몬 왕의 지혜를 듣기 위해 엄청난 양의 향료와 보화를 선물로 들고 찾아왔던 스바 여왕의 사건은 그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왕상3:16-28, 10:1-13). 솔로몬 왕은 자신이 가진 지혜를 이용하여 좀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고 결심하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지혜에 대한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들 특히 죽음과 관련된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진정한 지혜자가 될 없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으니 누가 능히 통달하겠느냐고 했습니다 (24절). '이미 있는 것'에 해당하는 '마 쉐하야'(שהיה מה)는 '무릇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솔로몬 왕은 지혜가 있다고 평가 받았고 자신도 더욱 지혜자가 되길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그 존재 이유, 그리고 그 존재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 등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 지혜를 발견하거나 얻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25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26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
27 전도자가 이르되 보라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28 내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고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 알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25절). 솔로몬은 참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한계를 시인하면서도 나름대로 가능한 선에서라도 지혜를 추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것의 어리석음과 우매함의 미친 짓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깨달은 것을 언급합니다.
첫째, 악한 여인은 죽음보다 더 쓴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올무의 그물 같고 손은 포승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26절). 여기에서 '여인'을 음녀와 같은 특정한 부류의 여인들을 말한다는 해석도 있으나 그보다는 솔로몬 왕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대다수의 여인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올무의 그물 같고 손이 포승같은 여인이라는 말은,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 집요하게 집중하는 심리와 빠져 나갈 수 없도록 주밀하게 실행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런 여인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라고 했습니다 (26절下). 하나님을 기쁘게 여겨 기쁘게 해 드리므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려는 자는 그런 여자를 멀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자는 그런 여자를 가까이 하므로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창3:6, 삿16:5-21).
둘째, 진정 신뢰할만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자신이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27절). 자기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1,000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았으나 그 모든 사람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28절). 자기 경험과 여러 증거들을 연구하여 얻은 것은 1,000여명의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1 사람 정도 밖에 없다는 것이고, 여인들 중에는 1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자를 말한다는 이들도 있고 (Leale, Eaton),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게 해 드리는 자를 말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Glenn). 하지만 그 보다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솔로몬 왕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도덕적 기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26절에서 여인들의 성격으로 언급한 내용들이 전혀 없는 진실한 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올바르게 지으셨지만 각자가 스스로 잘못된 길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들을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29절). 참으로 신뢰할만한 자가 거의 전무한 것은 사람이 모두 부패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옳은 사람으로 만들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타락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1:31, 6:5).
<結言>
근본적으로 아무리 지혜로워도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까지 알거나 해결할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와 섭리는 더욱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중심이 중요합니다 (시111:10, 잠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