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창세기32:1-32
<題目> 야곱의 얍복강 씨름
<序言>
야곱은 하란(밧단아람)에서 20년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브엘세바)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전 장에서는 라반의 추격이 있었지만 극적으로 화목하고 다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20년 전부터 생명을 노리던 형 에서가 마주 오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야곱은 그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게 절박하고도 끈질긴 기도를 하게 됩니다. 내용구조는 에서의 접근에 두려워하는 야곱(1-12절), 에서를 위한 야곱의 예물(13-20절), 생사를 건 야곱의 얍복강 기도(21-32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文>
1. 에서의 접근에 두려워하는 야곱 (1-12절)
①야곱이 길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1-2절).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은 분노로 추격하여 온 라반과 화평언약을 맺고 다시 출발했습니다. 야곱이 계속 고향을 향해 길을 가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사자(使者)'는 천사를 말합니다. 야곱이 그들을 볼 때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했습니다. '마하나임'(מהנים)은 '마하네'의 쌍수형으로서 '두 군대' '두 진영'(陣營)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아곱이 본 하나님의 군대의 진영이 두 진영이었는 모양입니다. 야곱은 많은 무리의 두 군대의 진(陣)을 본 것입니다.
야곱이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보았는지는 기록되지 않아서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롯처럼 천사가 비의적 현상으로 현현(顯現)한 것을 가시적(可視的)인 형태로 보았을 수도 있고 (18:2, 19:1), 전에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으로 가던 도중 벧엘에서 보았던 것처럼 혹은 라반이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도망쳐 나올 때 추격하던 라반이 보았던 것처럼 꿈으로 보았을 수도 있고 (28:12, 31:11), 엘리사처럼 영안(靈眼)을 통해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왕하6:17). 어쨌든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20년 전에 이미 벧엘에서 본적이 있었습니다 (28:12).
야곱이 20년 전에 고향 브엘세바에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채고 형이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고향을 떠나 밧단아람(하란)으로 갈 때였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까지의 거리는 약 700km나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거리입니다. 그 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가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무사히 도착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외삼촌이 맞아 줄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슬픔과 고독과 불안과 공포 속에서 홀로 가야 했습니다. 그러다 루스(벧엘)이라는 것에서 잠을 자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부터 하늘에까지 닿았고 그 위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구약을 아람어로 번역한 탈굼(Targum)판과 유대인 신학자인 랍비(Rabbis)들의 주석에 보면 확대해석이 되어있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쫓겨 외갓집으로 가는데 천사들이 보이지 않게 호위하며 갔습니다. 그러다 야곱이 잠들자 그 천사들이 야곱의 얼굴을 훔쳐보고 하나님의 어전에 않아 있는 야곱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후다닥 하늘 사다리를 내려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 어전에서 수종드는 동료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어전에 앉은 야곱의 형상을 보려면 빨리 내려와 땅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야곱의 얼굴을 보라고 합니다. 어전에서 수종 들던 천사들은 야곱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여 궁금한 차에 그런 말을 들고 사로 땅으로 내려가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무리의 천사들이 내려와 보고 올라가고 또 한 무리가 내려와 보고 올라가고 밤새도록 그렇게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아니지만 유대 신학에서 야곱이 꿈 가운데 본 환상을 그렇게 다루게 된 신학적 배경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의 관념은 야곱이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자로 약속 받은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에 참여할 자로 약속 받았습니다. 이는 비록 땅 위에서 쫓겨 유리 방황하는 현실에 놓여 있으나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이어지는 언약적 축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날 것을 담고 있습니다 (갈3:16).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복음1:51에서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할 구속자 역할을 할 자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요10:9, 14:13-14, 행4:12). 곧 벧엘에서 꿈속에 본 계시의 내용은 야곱이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언약적 축복의 주체라는 것을 알려 주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 떠날 때부터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어 함께 했고 앞으로도 함께 하여 지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20년 동안 지켜 주셨습니다. 20년이 지난 다음 밧단아람에서 도망해 나올 때 외삼촌 라반은 야곱이 도망한지 3일 뒤에 알고는 가신들과 친구들과 형제들로 추격대를 구성하여 추격했는데 야곱이 진치고 있던 길르앗 산까지 7일만에 따라 붙었습니다. 밧단아람에서 길르앗 산까지는 480km입니다. 낙타를 타고 추격하는데 하루에 70km를 추격한 것입니다. 서울에서 평택까지의 거리로서 얼마나 빠른 추격인지 모릅니다. 그가 얼마나 분노에 찼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라반은 야곱을 죽이거나 강제로 야곱과 딸들과 소유를 빼앗아 돌아올 기세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기 전날 밤에 꿈에 나타나 야곱을 해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므로 (31:34) 라반이 야곱을 해하지 않고 화평언약을 맺었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추격을 받았지만 서로 축복하며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더 큰 근심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20년 전부터 자기를 죽이려 했던 에서를 만나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는 일생에서 가장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밧단아람을 떠날 때보다 라반의 추격이 있을 때보다 큰 공포였을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날 것에 대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앞으로 내용에 나옵니다. 그래서 먼저 사자들을 보내어 먼저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있는 동안 많은 소유를 가지고 왔으니 먼저 형(주)에게 알리고 형의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고 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마주 온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형의 마음을 돌리게 하려고 형을 위한 예물을 앞서 보냅니다. 암염소 200 숫염소 20 암양 200 숫양 20 암낙타 30 암소40 황소 10 나귀 20마리를 보냅니다. 그리고 식솔들과 소유를 두 떼로 나누어 보냅니다. 만일 에서가 한 떼를 치면 한 떼는 살아 남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떼가 서로 사이를 두고 떠나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얍복강을 건너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환도뼈가 위골될 때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괜찮다고 해도 자기는 살려 준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합니다. 결국 환도뼈를 위골시켰는데도 축복해 주지 않으면 안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축복을 받고 갑니다. 결국 에서를 만나게 되는데 부둥켜안고 '형님을 만나니 주를 만난 것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 먼저 가고 자기는 뒤 따라 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따라가지 않고 숙곳으로 빠져서 살게 됩니다. 야곱이 얼마나 에서를 두려워했는지 알게 합니다.
하나님이 현재 야곱에게 그런 두려움이 있는 것을 아시고 마하나임에서 천사들을 보여 준 것입니다. 밧단아람에서부터 하나님의 군대인 천사들이 함께 했었고 고향에 돌아갈 때까지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적 축복을 가진 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이 항상 동행하시며 지키시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수1:5, 대상28:20, 마28:20, 요14:16, 15:26).
②야곱이 사자들을 자기 보다 앞서 보냈습니다 (3-5절).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야곱은 길르앗 산과 마하나님을 지나 에돔 들에 가까이 왔을 때 에서를 만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에서는 세일 땅 에돔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난 뒤 에서도 집을 떠나 요단강 동편 세일 땅 에돔 들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산지로서 사냥을 좋아하는 에서에게 적합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27:39). 야곱은 에돔 들에 가까웠을 때 사자(종)들을 에서에게 자기보다 앞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에서를 만나면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라 했습니다. 야곱이 에서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첫째는 에서를 '주'로 칭하고 자신을 '주의 종'으로 칭했습니다. 에서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어 자신에 대한 처분의 권한이 에서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라반과 함께 지금까지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라반의 집에 처음 계획과는 달리 오래 머물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많은 재산을 얻었으며 재산 상속권에 대해 관심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이런 사실을 미리 알리고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용서하여 너그럽게 받아 주길 바란다는 말입니다. 에서에게 환심을 사고 동정심을 얻기 위한 조치입니다.
③야곱이 사자들로부터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6-8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야곱이 앞서 에서에게 보낸 종들이 돌아와 보고를 했습니다. 종들이 에서를 만났는데 야곱을 만나기 위해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보낸 종들이 사명을 다하기도 전에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400명은 대부분 사냥에 능한 자들이었을 것이고 고대에 그러한 숫자는 상당한 군대규모의 숫자인 것입니다.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는 것은 야곱을 치기 위함이 아니라 야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32:4,12). 그런데 야곱은 그 보고를 듣고 에서가 자기에게 보복하기 위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종들은 에서를 만나러 가던 도중에 그런 행렬을 보고 당연히 야곱을 치기 위해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들은 야곱에게 그런 관점에서 보고를 했을 것이고 야곱도 그런 보고를 받으면서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일행과 소유를 두 때로 나누어 진행시켜야 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은 에서가 한 떼를 치면 한 떼는 도망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이 위험에 직면했을 때 가축을 몇 떼로 분산시켜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야곱이 다시 밧단아람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없이 선택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④야곱이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9-12절).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에서가 자기를 해하기 위해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생각에 식솔들과 소유들을 두 떼로 나누어 진행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두려움을 없애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첫째는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9절). 12절에서도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 때부터 언약을 주신 분으로서 자기에게도 그 언약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고 그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안약을 근거로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기도한 것입니다. 둘째는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고 했습니다 (10절). 브엘세바를 떠날 때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많은 소유를 얻게 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인데 하나님이 그 동안 함께 해 주셨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무능력한 자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셋째는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현실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야곱의 훌륭한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은 욕심이 많고 간사하고 인본주의적인 술수와 지혜를 잘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야곱은 에서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사신을 먼저 보내었지만 소용없었고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말을 듣고 식솔들과 소유를 두 떼로 나누었지만 두려움은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는 사람이나 재물이나 지혜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기억하고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합니다. 위기를 당할 때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기회인 줄 알고 (고후6:2),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시편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고, 예레미야33:3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2. 에서를 위한 야곱의 예물 (13-20절)
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16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야곱이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말을 들은 야곱은 에서에게 줄 예물을 선택했습니다. 암염소 200, 숫염소 20, 암양 200, 숫양 20, 젖 나는 낙타 30, 암소 40, 황소 10, 암나귀 20마리였습니다. 새끼들을 제외하고도 총 520마리였습니다. 그것들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에게 맡기고 종들로 하여금 각 떼로 거리를 두고 앞서 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가는 종에게 에서를 만나면 이것들은 야곱의 것으로서 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이라고 하고 야곱도 뒤에 있다고 하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가는 종에게도 그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이렇게 많은 예물을 준비한 것은 야곱의 감정을 녹이기 위함이고 여러 떼로 나누어 가게 한 것은 반복적으로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곱은 어떻게든지 에서의 마음을 돌려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 동안 평생 모아온 재물을 예물로 주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재물도 지혜도 야곱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야곱은 어떤 수단 방법도 쓸 데 없다는 것을 느낄 때 얍복 강 나루에서 필사적으로 기도합니다. 자기 힘과 능력과 지혜로도 안 된다고 생각할 때가 하나님을 만날 기회이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기회인 것입니다.
3. 생사를 건 야곱의 얍복강 기도 (21-32절)
①야곱이 얍복 강 나루에서 씨름을 했습니다 (21-25절).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야곱은 에서에게 줄 예물을 가진 종들을 미리 떠나 보냈습니다. 그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밤에 2아내와 2여종과 11아들과 1딸을 인도하여 얍복강 나루를 건넜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홀로 밤새도록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날이 새어가도록 야곱을 이기지 못하여 허벅지 관절(환도뼈)를 쳐서 관절이 어긋나게(위골) 했습니다. '얍복(Jabbok) 강'은 요단강의 지류로서 요단 들판에서 서쪽으로 흘러 갈릴리 호수와 사해 중간에 있는 요단강 에 합류하는 작은 강입니다. 이 강은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간헐천(間歇川)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강을 '와디 제르카'(Wadi Zerka)로 부릅니다. '씨름'은 야곱이 하나님을 대행하는 하나의 사자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모습을 표현한 말입니다. '허벅지 관절'은 넓적다리의 움푹 패인 곳을 가리킵니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는 것은 아마도 허벅지 관절이 엉덩이 골반에서 빠진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사건은 꿈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이거나 환상 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이거나 내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30절에서 야곱이 실제로 허벅지로 인해 절었다는 표현이나 호세아가 호세아12:3-4에서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고 한 것을 보면 실제 가시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입니다. 천사가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 씨름을 한 것입니다. 이를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렇게 보는 데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야곱은 그를 하나님으로 인식했습니다 (30절).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것은 야곱이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이 회개해야한다는 담판이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밤새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호12:4). 야곱은 절대절명의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지혜가 소용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린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려 주신다는 응답을 해주기 전에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9-12절).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응답받을 때까지 간구해야합니다. 다니엘이 21일 동안 작정하고 기도했듯이 (단10:2-3), 원한있는 과부가 매일 재판장에게 매달리듯이 (눅18:1-8) 매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록 친구를 인하여는 주지 않을지라도 강청함을 인하여는 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고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줄 자가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악한 부모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줄 아는데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눅11:8-13).
②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26-29절).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하나님의 사자가 날이 새어 갈 때 떠나려 했습니다. 야곱은 축복해 주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이름을 이제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을 축복하고 떠났습니다. '야곱'(יעקב)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 뜻입니다. 그가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와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스라엘'(ישראל)은 '하나님과 겨루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어 강하게 된 자'의 의미로 한 말입니다. 이름이 바뀐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유가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대에 이름을 지음 받은 자는 이름을 지어준 자의 소유임을 나타냅니다.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치가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인격에 대한 표입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인격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물질과 사람과 지혜를 의지하던 가치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뀐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승리자로 바뀐 것은 하나님을 이겼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에서에게서 건져 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인데 하나님이 에서로부터 살게 해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을 준 것입니다.
③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했습니다 (30-32절).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장소를 브니엘이라 했습니다. '브니엘'(פניאל)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대면했지만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죄인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출33:20, 34:20, 사6:5). 야곱이 생명을 보전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체험하고 곳에 대한 고백입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어긋난 허벅다리로 인해 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 일을 생각하면서 짐승의 허벅지 힘줄은 먹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언약적으로 볼 때 언약적 계대의 중심에 있는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힘들었습니다. 그 원인 중에 하나는 역기능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상처를 받아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요인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편집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27~33장에 보면 야곱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유다 지방 브엘세바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삭이고 어머니는 리브가이고 형은 에서였습니다. 형 에서는 사냥을 좋아하고 야곱은 집안일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형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는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와서 “아버지께서 네 형에게 죽기 전에 장자의 축복을 해 주겠다고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하는구나. 그러니 염소새끼 두 마리를 잡아 오너라 내가 그것으로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줄테니 네가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가서 에서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거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가 나이 많아 눈이 어둡기는 하지만 형 에서는 털이 많고 나는 매끈매끈한데 아버지가 나를 만져보면 금방 발각되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건데요”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자기가 다 알아서 할테니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어머니 말대로 염소새끼를 잡아다 주니 어머니가 별미를 만들고 가죽 털을 목과 손에 입히고 에서의 옷을 입혀서 아버지에게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 들어가 자신을 에서라고 속였습니다. 아버지는 음성을 의심하면서도 옷의 향취를 맡고 목과 손의 털을 만져보고는 에서로 속아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이 장자가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챈 것입니다. 형은 뒤늦게 사냥해온 형은 자기 축복을 빼앗긴 것을 알고 분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와서 말했습니다. “네가 형의 장자 축복을 가로챈 것 때문에 네 형이 분해하는구나. 아버지가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아버지만 죽으면 너를 죽이겠다고 한다는구나. 그러니 네 형 분노가 풀리기까지 네가 외갓집에 가 있거라. 형의 분노가 풀리면 내가 사람을 보낼테니 그때 돌아오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버지에게는 아내를 구하러 간다고 하면서 외갓집이 있는 하란의 밧단아람으로 떠났습니다. 밧단아람에 도착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양을 길러주면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20년 동안 사는 동안 외삼촌의 두 딸들을 아내로 얻어 자녀들을 낳았고 종들과 낙타와 나귀와 소와 양 떼를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야곱이 자기들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아 재물을 모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외삼촌의 안색을 보니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에 아내들과 자녀들과 종들과 가축들을 데리고 고향을 행해 도망했습니다. 야곱이 고향 땅으로 내려오다가 당시 형 에서가 있던 세일 땅 에돔 지방에 가까이 왔습니다. 야곱은 자기 앞서 종들을 형 에서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에서를 만나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20년 전 사건과 관련하여 자기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으니 아버지 재산의 상속권에 대해서는 주장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자기 재산을 나누어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낸 종들이 돌아와 보고를 했습니다. 자기들이 야곱의 심부름으로 에서를 만났는데 그가 지금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서는 야곱이 많은 식솔과 가축 떼를 데리고 온다는 것을 알고 보호해 주기 위해 그 많은 사람을 이끌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창33:4.12). 그러나 야곱은 형 에서가 20년 전 일 때문에 자기와 식속을 치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오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심히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창세기32:11에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식솔들과 가축들을 형에서가 치면 한 떼라도 살아남게 하기 위해 두 떼로 나누어 보냅니다. 그러면서 그들 앞서 종들을 미리 보내면서 에서에게 줄 선물로 양 220마리, 염소 220마리, 소 50마리, 낙타 30마리, 나귀 30마리를 보냈습니다. 형 에서가 예물을 받고 자기를 대하면 자기를 받아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들과 함께 가지 못하고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씨름하듯이 기도를 하고 허벅지 관절을 얻어맞고야 기도를 마쳤습니다. 아침에 절면서 마주 오는 에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달려와 맞이하면서 안고 목을 어긋 맞추고 입을 맞추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에서가 이제 가자고 하면서 자신들이 동행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형 에서는 야곱에게 보복하려거나 빼앗거나 죽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20년 전 일 때문에 형 에서가 자기를 해치려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에게서 살아남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한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에서의 손에서 구해달라고 밤새 매달린 것입니다.
편집 현상은 자신과 타인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편집(編輯)은 어떤 글이나 음악이나 영상들을 만들 때 구성하는 작업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편집(偏執)은 자신의 치우친 생각을 고집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치우친 생각을 확신하여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편집 성향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현상이 깊어지면 편집증이 되기도 합니다. 편집증(偏執症)은 자신의 치우친 생각을 고집하는 병적 증세를 말합니다 (치우칠 편, 잡을 집. 증세 증). 편집증(偏執症)은 '파라노이아'(paranoia)라고 합니다. 이는 그리스어 παρανοια에서 온 합성어인데 이는 ‘곁의 마음’ ‘바깥 마음’을 가리키는 말로 정신 이상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편집증은 체계적 망상으로 나타나는 정신 이상을 말합니다. 곧 체계화된 망상이 상황을 지배하는 정신 질환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이는 타인의 행동에 대해 오해하고 타인이 자기를 공격하려 한다고 믿고 자기 방어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처리하기 힘든 문제들을 다른 대상에게 투사해서 그 대상자가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흔한 현상은 타인의 행동이나 말, 몸짓, 손짓 등을 자신에 대한 고의적인 무시나 비웃음이나 경멸 등으로 오해하는 것인데 이런 경향이 심해지면 특정 대상자들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믿고 행동합니다.
편집증의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내적 문제를 다른 대상에 투사합니다. 투사(projection)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문제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외부의 다른 대상에게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정신과 입원 병동의 한 의사가 지나가던 남자 환자와 살짝 부딪혔습니다. 그를 돌아본 환자의 얼굴에는 분노와 불안이 뒤섞여 있었는데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야"라고 항변하듯이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환자는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까? 그 남자는 자신 안에 있는 동성애적 충동이 의식의 영역으로 올라오려고 한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고 따라서 의식 안으로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충동과 그것에 대한 인식을 외부의 인물인 정신과 의사에게 투사한 것입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생각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을 외부의 인물인 정신과 의사에게서 강요된 것이라 믿은 것입니다. 자신의 음란한 성적 감정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특정 무리들을 성적으로 문란한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다른 대상을 의심하고 경계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수군거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다고 쉽게 가정하고 단정합니다. 이런 경우 자신이 투시의 은사가 있는 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당시 신학생들이 부러워하는 성경강해서를 출판하는 편집실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 때 남자 신학생 가운데서 편집실에 근무했던 사람은 현재 미국에서 목회하는 윤 목사님 하고 저하고 둘이었습니다. 근데 신학교 후배로 들어온 신학생 가운데 김 아무개가 있었습니다. 학교는 후배였지만 나이는 저희보다 많았습니다. 그는 저희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잘 모르면 물어 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윤 목사님과 제가 자기의 밥에 몰래 독약을 탄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당시에 저희는 그런 터무니없는 말에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저는 그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셋째, 망상적인 확신을 갖습니다. 미국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외계인이 인류를 점령하려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 세력이 사람들에게 마이크로 칩을 심어 인류를 조종하려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 백신에 마이크로칩을 넣어 조종하려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그 주장을 믿어 그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공산주의 만들려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망상(妄想)이며 확증편향(確證偏向)입니다. 이런 경우 자신이 분별력이 있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줄 압니다. 오래 전에 안성 공도에 사는 자매가 우리 교회가 있는 동네에서 몇 달 동안 산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 동네에 사는 동안에 우리 교회에 출석하다가 공도로 다시 갔습니다. 그는 당시에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유승준과 자주 대화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와 결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유승준 뿐 아니라 당시 가수들과 자주 만나 대화를 한다고 했고 당시 이름 있는 가수들이 자기를 따른다고 했고 자신이 그들의 잘못을 책망해주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은 서울에 갔다 온다고 했습니다. 서울에 왜 가느냐고 물었더니 유승준이 자기보고 만나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진짜 유승준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유승준은 그를 모르고 있고 만나자고 한 적도 없습니다. 넷째, 다른 대상에게 물리적 행동을 합니다. 자신이 가진 취약성이나 욕망을 투사하여 대상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경멸하고 증오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투사의 대상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하여 자기의 방어 기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비방하고 심지어는 물리적 해를 가하기도 합니다.
편집증의 결과는 비참합니다. 편집성향을 가지면 자기도 평생 고통스럽고 다른 사람에게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32-34장에 보면 야곱도 에서는 자기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는데 자신은 20년 전에 사건 때문에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형에게 줄 선물을 보내고 식솔과 가축 떼를 두 떼로 나누고 하나님께 에서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밤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를 만났을 때 형은 안고 입을 맞추며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동행해 줄 것이니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야곱은 아직도 의심을 거두지 못하여 마음에 부담이 되어 식솔과 가축이 지친 것을 핑계로 쉬었다가 가겠다고 하면서 호의를 거절합니다. 그리고는 숙곳을 거쳐 세겜으로 갔습니다. 세겜에서 정착해 사는 동안 세겜 성 추장 아들에게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습니다. 세겜 성 추장 아들이 디나와 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하자 아들들이 그것을 미끼로 세겜 성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세겜 성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아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그 틈을 타서 아들들이 세겜 성으로 가 그들을 모두 죽이고 약탈을 했습니다. 야곱은 세겜성 주변 고을 사람들이 모두 보복하기 위해 치러 올 것을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주변 족속들이 공격해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세겜 성을 급하게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상처받은 사람과 사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편집증의 원인은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은 과거에 받은 상처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받은 상처를 처리하지 못하고 계속 생각하면 부정적인 체계가 생기고 그 부정적인 체계가 망상체계를 만듭니다. 편집증(paranoia)을 다른 말로 집착증(monomania)라고 하기도 합니다. 한 가지에 집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사람과 사건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거나 분석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면에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처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면에서 구체화되고 체계화되고 사실화되는 것을 허용하지 말고 그 생각을 중단하고 거부하고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야곱이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기 위해 4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언약은 근거하며 에서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창32:10-11). 밤새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며 살려주실 것을 약속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다’는 뜻)이라 하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창세기32:28-29에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요구를 들어주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형 에서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실제로 에서는 야곱을 만났을 때 증오감이나 적대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환대와 감격의 행동을 보였습니다. 세겜성에서 아들들이 세겜성 남자들을 도륙하고 약탈했을 때 야곱은 주변 족속들이 치러올 줄 알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 자기를 만났던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창35:1). 하나님이 사면 주변 족속들을 떨게 하여 추격하는 자가 없게 했습니다. 창세기35:5에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했습니다 (창35:6-7).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면의 부정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여전히 고통스럽고 불행한 생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의지를 가지고 부정적인 생각을 중단하는 훈련을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마음을 평안케 해주실 것이고 미래에 대한 희생이 있도록 섭리해 주실 것입니다 (요14:27). 출애굽기15:26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했고, 말라기4:2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했습니다.
<結言>
야곱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 구하므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새로운 인생을 출발했습니다. 위기 때에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고 하나님을 매달릴 때 응답받게 되고 응답받을 때 가치관이 바뀝니다. 아브람도 아브라함으로, 사래도 사라로, 야곱도 이스라엘로, 게바도 베드로로, 사울도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이름이 바뀌어야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경험적으로 만난 체험으로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야합니다. 새로운 가치와 목표가 생겨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