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하박국1:1-17
<題目> 하박국의 호소
<序言>
B.C.7세기 초에 유다 사회는 심히 부패했었습니다. 악인은 득세하고 의인은 압제를 당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을 가지신 분이고 의로운 분이고 선하신 분으로서 어떻게 그런 상황을 방관하고 계시는지 의문을 자지고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 대해 갈대아군을 보내어 유다를 심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더 악한 족속을 통해 유다를 심판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다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용구조는 하박국의 첫 번째 질문(1-4절),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5-11절),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12-17절, 2:1)으로 되어있습니다.
<本論>
1. 하박국의 첫 번째 질문 (1-4절)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1절에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라고 했습니다. ‘하박국’(חבקוק)은 ‘포옹’ ‘껴안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자애로운 사랑으로 우리 영혼을 안으시는 하나님께, 그리고 신령한 지혜에 몰두하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잠4:8). 하박국 선지자는 레위자손의 후손으로서 성전에서 찬양을 드리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3:1에는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라는 표현이 나오고, 3:19에는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하박국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레위인 찬양대의 일원임을 암시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하박국은 유다의 18대 왕인 여호야김 당시 성전에서 찬양대원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레위인으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받아 본서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박국 당시 유다는 앗수르(Assyria)를 굴복시킨 신흥제국 바벨론(Babylonia)에 의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유다의 18대 왕이었던 여호야김(B.C.609-598년)은 전형적인 폭군이었습니다. 그는 애굽 왕 바로 느고(Necho)가 꼭두각시로 세운 왕으로서 (대하36:1-4), 바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자비하게 세금을 짜내어 바로에게 바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려고 화려한 궁전을 짓기 위해 백성들에게 착취를 자행하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하박국은 이처럼 유다가 이방 제국에 압제를 당하고 탐욕적인 통치자에게 의해 고통을 당하는 상황속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묵시로 받은’에 해당하는 ‘하자’(חזה)는 기본적으로 ‘바라보다’는 뜻인데, 하나님의 이상을 시각적인 환상으로 본 것을 의미합니다 (민24:4,26). ‘경고라’에 해당하는 기본형 ‘마사’(משא)는 ‘짐’ 혹은 ‘예언’을 뜻하는데, 영어성경에는 ‘짐’으로 번역한 곳도 있고 (burden –KJV), ‘신탁’으로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oracle –NASB, NIV, RSV). 신탁(神託)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그 뜻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짐으로 보는 경우는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로서 주어진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고, 신탁으로 보는 경우는 하나님 말씀을 소리높여 전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Bruce).
2절에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강포로 가득한 조국 유다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의 개입을 원하며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 까닭이 무엇인지에 질문을 한 것입니다. 유다 왕조가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하기 보다는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대한 탄식의 심정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침묵하지 마시고 하루빨리 부르짖음에 응답하셔서 유다에 고통이 사라지고 공의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절박한 심정을 드러낸 것입니다. ‘내가 외쳐도’에 해당하는 ‘에즈아크’(אזעק)는 미완료형으로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외친 것을 말합니다. 이는 얼마나 끊임없이 기도했는지 그리고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여줍니다. 이처럼 외침을 그치지 않는 것은 선지자의 영적 갈등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해주는 동시에 불의한 구조 속에서 고통을 겪는 의인들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애탔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는 말은 악한 지도자들로부터 폭압과 강포로부터 힘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왜 구해주시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불의한 압제자들로부터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건져달라는 탄원기도를 한 것입니다.
3절에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어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보게 하시느냐고 했습니다. ‘죄악’과 ‘패역’으로 번역된 ‘아웬’(און)과 ‘아말’(עמל)은 ‘악’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주로 ‘고생’ ‘고통’ ‘아픔’ 등의 뜻입니다. 이는 하박국 선지자가 견딜 수 없어하는 것이 압제자들의 악행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게 하시며’에 해당하는 기본형 ‘라아’(ראה)는 ‘주시하다’ ‘경험하다’ ‘인지하다’ 등의 뜻이고, ‘보게 하시나이까’에 해당하는 기본형 ‘나바트’(נבט)는 ‘주시하다’ ‘인지하다’ 등의 뜻입니다. 두 단어 다 공통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지켜본다는 뜻입니다. 도저히 지켜볼 수 없는 참상을 견디며 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그로 하여금 보게 하셨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곧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항의하는 의도를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겁탈’과 ‘강포’에 해당하는 ‘쉐드’(שד) ‘하마스’(חמס)는 폭력과 포악을 말하는데 쉐드는 폭력을 사용하여 강제로 물질을 빼앗는 것을 의미하고 하마스는 폭력을 사용하여 신체에 상해를 입히거나 목숨을 빼앗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권세를 가진 위정자들이 힘없는 백성들을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강탈하거나 노예로 팔거나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는 악랄한 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한 고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론’과 ‘분쟁’에 해당하는 ‘리브’(ריב)와 ‘마돈’(מדון)은 논쟁과 다툼을 말하는데, 리브는 공적인 법률적 다툼의 소송을 의미하고 마돈은 사적인 말다툼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회적으로 부패하여 서로 소송할 뿐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부패하여 서로 싸우는 일이 만연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선민에게 관용은 없고 서로가 투쟁만 일삼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탄식한 것입니다.
4절에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때문에’의 뜻을 가진 접속사 ‘키’(כי)가 중반절이 시작되는 ‘이는’ 앞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본절은 율법이 해이하여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는데 그것은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서 정의가 굽게 행해지기 때문이라는 구문입니다. ‘해이하고’에 해당하는 기본형 ‘푸그’(פוג)는 ‘느슨하다’ ‘중단되다’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해이하고’를 ‘무시되다’로 번역한 곳도 있고 (is gnored –NASB), ‘마비되다’로 해석한 곳도 있습니다 (is paralyzed –NIV). 그래서 율법이 해이해졌다는 말은 유다가 언약백성이 지켜야할 언약의 근간인 율법을 철저히 무시하고 외면하는 삶을 사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는 것이 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것은 악인들이 의인들을 에워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에워쌌다는 말은 많은 수의 군대가 소수의 군사를 포위하여 둘러싼 것을 표현하는 말로서 많은 악인들이 소수의 의인들을 둘러쌌다는 말입니다. 이는 악인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의인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음을 암묵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는 정의가 굽게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불의가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불의의 도구가 정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바르게 사용되어야 할 재판이 권력자들에 의해 불의를 사용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다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재력을 유지하려는 데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자정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사회의 불합리함을 목도할 때 하박국 선지자처럼 갈등과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시편37:1-2에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고 했습니다. 비록 응답이 없을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면서 기도해야합니다. 시편40:1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애가3:25-26에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 (5-11절)
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8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11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하박국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했습니다. 5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여러 나라를 보고 놀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나라’는 앗수르 세력을 꺾고 새롭게 등장한 신흥세력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여러 나라를 보고 놀랄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세우고 바벨론을 통해 다른 나라들을 멸망시키는 과정을 보고 놀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일으켜 유다를 심판할 것인데 그 전조로 바벨론이 일어나 열국을 파괴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이 한 가지 일을 행하겠다고 했는데 그 ‘한 가지 일’이 바로 바벨론을 일으켜 열국을 멸망시키고 유다도 멸망시킬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위기감을 가지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당시는 바벨론이 영향력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그만한 일을 일으킬 만큼 강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나라에 의해 멸망할 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6절에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라고 했습니다. '갈대아 사람'에 해당하는 '카세띰'(כשדים)은 앗수르 서판에 '칼두'(Kaldu)라고 불리는 나라입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옆 페르시아만과 바벨론 남단 중간에 위치한 나라이며 도시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 거민들은 소규모 농축업과 수렵으로 생활을 했고 앗수르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B.C.625년에 앗수르의 니느웨를 점령하여 갈대아 왕조를 창건했습니다 (Smith). 그 아들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에 이르러서는 바벨론(Babylonia)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IDB). 그런데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갈대아 사람들 곧 바벨론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납고 성급한 자들입니다. 6절에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고 했습니다. ‘사납고’에 해당하는 기본형 ‘마르’(מר)는 ‘쓴’ ‘괴로움’의 뜻으로 다른 대상에게 괴로움을 주는 자들임을 나타내는 말로서 잔혹하게 다루어 극도의 고통을 가져다주는 자들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급한’에 해당하는 기본형 ‘마하르’(מהר)는 ‘서두르다’ ‘빠르다’의 뜻으로 동작이 빠르고 민첩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바벨론 군사들은 잔혹한 기질을 가진 자들로서 민첩하여 전쟁에 능한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두렵고 무서운 자들입니다. 7절에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라고 했습니다. ‘두렵고’에 해당하는 기본형 ‘아욤’(אים)은 ‘놀라운’ ‘무시무시한’의 뜻으로 용맹스러움이나 잔인함으로 말미암은 공포감을 말합니다. ‘무서우며’에 해당하는 기본형 ‘야레’(ירא)는 ‘두렵다’ ‘경외하다’는 뜻으로 신적 존재처럼 매우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자들임을 의미합니다.
셋째,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로 말미암은 자들입니다. 7절에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라고 했습니다. ‘당당함’에 해당하는 기본형 ‘미쉬파트’(משפט)는 ‘판단’ ‘법’ ‘권리’ ‘특권’ 등의 뜻으로 자신들이 판단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곧 법이라는 위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엄’에 해당하는 ‘세에트’(שאת)는 ‘의기양양함’ ‘탁월’ ‘존엄’의 뜻으로 누구도 그 앞에서 권위를 내세울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가는 곳마다 모든 세상을 굴복시켜 누구도 그 권위에 대항할 수 없는 자들임을 나타냅니다. 곧 자기들 자체가 법이며 권위인 것입니다. 인간만사에 대한 법을 만들고 재판을 하는 탁월한 권위를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넷째, 표범과 이리와 독수리와 같은 자들입니다. 8절에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군사들 타는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이리보다 사납다고 했습니다. 표범은 성읍들을 엿보다가 나오는 사람들에게 빠르게 달려들어 찢어 죽이는 잔인한 동물입니다 (렘5:6). 이리는 한번 붙잡은 것을 결코 놓아주지 않고 물어뜯어 죽여 탐욕스럽게 배를 채우는 잔인한 동물입니다 (창49:27, 겔22:27). 특히 이리는 저녁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므로 더욱 두려운 동물입니다 (습3:3). 그래서 표범과 이리 같다는 표현은 바벨론 군대가 공격력에 있어서 신속하고 잔인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또한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독수리가 먹이를 발견하고 그것에 쏜살같이 돌진하여 그것을 낚아채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공격력에 있어서 신속한 기동력과 효과적인 정복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는 바벨론 군대가 주변 나라들을 얼마나 빠르게 효과있게 정복해나갈 것인지 알게 하는 묘사입니다.
다섯째, 강포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9절에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는 것은 강포를 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강포’에 해당하는 ‘하마스’(חמס)는 ‘포악’ ‘소득’ ‘잔인’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를 강한 군사력으로 공격하여 왕족과 귀족 등의 권세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들을 사로잡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포로로 사로잡아가는 사람들이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왕들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10절에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공격할 열국의 왕들과 방백들을 멸시하고 조소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열국의 통치자와 지도자들이 바벨론 군대의 공격을 방비하지만 바벨론 군대는 그들과 그들의 능력을 우습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그들을 정상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가학행위를 할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바벨론 군대는 유다를 멸망시킬 때 여호야긴 왕을 쇠사슬로 묶어 사로잡아가며 시드기야 왕은 보는 앞에서 아들들을 죽이고 그는 두 눈을 뽑아 쇠사슬로 묶어 사로잡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아무리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이라 할지라도 우습게 여기고 흉벽을 쌓아 점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흉벽’은 점령하고자 하는 성 앞에 흙으로 토둔을 쌓아 점령하려는 성과 높이를 같게 한 다음에 군사들이 성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공략방법입니다. 점령하지 못한 성이 없다는 바벨론 군대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일곱째, 자신들의 힘을 신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11절에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은 어떤 나라도 막을 수 없는 군대의 강력한 힘을 의지하여 신(神)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람같이 급히 몰아쳐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군사력만 믿고 지나치게 잔악행위를 일삼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강한 바람이 온 성읍을 휩쓸고 지나가듯이 바벨론 군대가 정복한 나라들의 성읍을 초토화시키고 주민들을 처참하게 살육하고 포로로 사로잡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권자들이 타락하고 일반 백성들도 타락했습니다. 온 사회가 율법을 무시하여 율법이 시행되지 않으므로 정의가 사라졌습니다. 그로인해 소수의 힘없는 의로운 자들은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런 유다의 상황을 목도하면서 고통이 컸으며 하나님이 빨리 개입하여 압제자들을 심판하고 의인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대답으로 갈대아 사람들 곧 바벨론 군대를 일으켜 유다를 심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 문단은 그 바벨론 군대가 어떤 나라도 막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능력으로 공격하여 점령하고 잔혹하게 살육하며 사로잡아갈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바른 심정으로 하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동시에, 아무리 선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계속적으로 악을 일삼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여 이방 세력을 통해 징계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28:49-50에 “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3.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 (12-17절)
12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15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의 타락을 보면서 유다에 율법이 해이해지고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왜 방관하시는지 질문했었습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바벨론을 일으켜 그들을 심판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에 대해 유다보다 악한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여 유다를 심판한다는 데 대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두 번째로 질문을 했습니다.
12절에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여호와’(יהוה)는 스스로 계신 자존자임을, ‘하나님’(אלהים)은 전능하신 분임을, ‘거룩한’(קדוש)은 죄와 불의로부터 구별되신 분임을, ‘만세 전부터 계신’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임을, ‘사망에 이르지’는 언약민을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나의’는 하박국 선지자 자신을 가리키는 동시에 선민 전체를 의식한 표현이이기도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에 대해 그같이 고백하는 것은 유다가 비록 타락하여 심판에 직면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언약관계에 있는 유다를 권능으로 보호하여 아주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는 믿음을 고백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고백을 한 다음에 반석이신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두셨고 경계하기 위해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언약민을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피난처되신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고 견책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다가 타락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여 선민을 응징하려는 것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13절에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과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신인동형론(神人同刑論 Anthropomorphism)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표현입니다. 눈이 정결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순순한 분으로서 의로운 것만 보시고 그 외의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찌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냐고 했습니다. ‘거짓된 자들’과 ‘악인’은 패악한 바벨론을 지칭하고 ‘의로운 사람’은 상대적으로 덜 악한 유다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패악한 바벨론이 선민인 유다를 멸망하게 하고 죽이려 하는 데 왜 방관하고 잠잠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방관하시며’(תביט)와 ‘잠잠하시나이까’(תחרים)는 미완료형으로서 한 순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패악한 바벨론이 선민인 유다를 유린하고 고통을 가하는 것에 대해 계속 침묵하는 것에 대해 도무지 낙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4절에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고 했습니다. ‘사람’은 선민인 유다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선민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한다는 말은 어부가 던진 그물에 무기력하게 포획되는 물고기처럼 유린당하고 사로잡힘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상태에 있게 하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선민이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에 같게 한다는 말은 새가 먹이로 쪼아 먹을 때 무기력하게 잡아먹히는 벌레처럼 보호자가 없어 죽임을 당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정복자인 바벨론이 선민인 유다를 멸망시켜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을 납득할 수 없어 의문을 가지고 질문한 것입니다.
15절에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고 했습니다. ‘낚시’와 ‘그물’과 ‘투망’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도구들입니다. 어부가 물고리를 잡고 기뻐하는 것처럼 바벨론이 정복전쟁으로 열국을 점령하여 유린하고 약탈하고 살육하고 사로잡고는 기뻐하며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16절에는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어부들이 풍어제를 드릴 때 어구들 앞에서 제의를 행합니다. 그처럼 바벨론이 정복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준 군사력을 신(神)처럼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이 땅과 노예와 탈취물이 풍성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어서 17절에는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은 다음에 그물을 떨어 물고기를 수집한 다음에 다시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집니다. 그처럼 바벨론이 열국을 연이어 정복하고 유린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런 바벨론이 유다까지 정복하여 유린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흉폭한 바벨론이 선민인 유다를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을 가지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범죄할 때 하나님이 이방 세력을 통해 징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징계를 받아야 마땅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한 택자를 악한 세력을 통해 징계하므로 우리가 그렇게까지 심한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반석이 되어 주셔서 징계는 할지언정 아주 망하게 하지 않는 분이며 징계를 통해 오히려 유익하게 하려 함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12:8-11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結言>
세계 대전 후에 전쟁의 잔악상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실까 하는 의문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았습니다. 우리도 현실 가운데서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의문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악인이 의인보다 잘되고 악인이 의인을 압제하는 상황을 볼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들을 볼 때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시행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권세와 부와 지식이 있는 사람이 힘없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특히 악인이 의인보다 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악인은 부요하고 건강하고 평안하나 의인은 가난하고 병들고 재난과 환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좌절하기 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인을 통해 의인을 연단시킨 다음에 궁극적으로는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예레미야51:24에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이 시온에서 모든 악을 행한 대로 내가 바벨론과 갈대아 모든 주민에게 갚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