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창세기35:1-27

<題目>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


<序言>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20년 동안 하란의 밧단아람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라반의 추격 문제와 에서의 보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 평안을 찾게 되자 요단강 동편 얍복 강 위에 있는 숙곳에서 살다가 다시 요단강을 건너 요단강 서편에 있는 세겜으로 가서 땅을 매입하고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으로 떠날 때 하나님을 만나서 서원한 곳인 벧엘로 가서 단을 쌓고 (28:20-22), 하나님이 명령하신 고향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31:3). 그런데 그는 세겜에 안주하려 했습니다. 그 곳에서 딸 디나가 세겜성 추장에게 강간을 당하고 자기 아들들이 세겜 성 남자들을 살육하고 약탈했습니다. 그로 인해 가나안 족속들이 모여 공격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는 명령을 하게 되고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게 됩니다. 내용구조는 야곱의 신앙 개혁(1-5), 야곱의 벧엘신앙 회복(6-15),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 출생(16-20), 르우벤의 근친상간(21-22), 야곱의 12아들과 이삭의 죽음(23-29)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文>

       1. 야곱의 신앙 개혁 (1-5)

 

   ①하나님이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1).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하란의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면서 자신이 서원한 벧엘과 하나님이 명령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었습니다 (28:20-22, 31:3). 그런데 에서의 복수 문제가 해결되고 평안해 지자 숙곳에서 머물다가 세겜에 땅을 사고 정착했었습니다. 그런데 세겜 성에서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아들들이 세겜성 남자들을 살육하고 약탈했습니다 (34:1-3, 25-29). 그로 인하여 히위 족속이었던 세겜 사람들을 위해 주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야곱을 칠 위기에 있었습니다. 야곱은 온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멸망하게 되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34:30).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벧엘'(Bethel)은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으로 피난 가는 길에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사닥다리 계시를 보여주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한 언약을 이루어 주겠다고 하고,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함께하여 지켜주겠다고 한 곳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고 그곳을 성전이 되게 하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곳입니다. 곧 벧엘은 환난 때에 하나님을 만난 장소로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받고 헌신을 맹세한 곳입니다. 인생에서 참으로 힘들 때 하나님이 만나주신 곳이고 가장 헌신적인 고백을 한 장소입니다 (28:10-22).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켜서 자녀와 소유의 복을 주고 라반의 추격과 에서의 보복을 막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세겜에 안주하다가 환난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야곱에게 그 약속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의 신앙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 하나님을 만나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에 대한 목적과 동행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서원했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디서 언제 무엇을 하다가 신앙이 떨어졌는지 회개하고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2:1-5).

 

   ②야곱이 벧엘로 올라갈 준비를 했습니다 (2-4).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 모든 집안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환난 날에 응답하시고 모든 길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기 위해 벧엘로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벧엘로 올라가기 위한 준비로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장신구들을 버리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두 이상 신상과 장신구들을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세겜을 떠났습니다.

 

  첫째, 이방 신상을 버렸습니다. 야곱에세 속한 사람들은 이방 신상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은 하란의 밧단아람에서 도망 나올 때 드라빔을 가지고 나왔고 (31:19), 야곱이 하란의 밧단아람에서 얻은 종들이 우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30:43),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성에서 노략한 것들 중에도 우상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34:29). 야곱은 그 동안 집안 사람들에게 우상이 있고 그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그 동안 묵인하고 있다가 이번에 그것들을 다 청산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뿐 아니라 집안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려는 결단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므로 우상을 가진 상태로는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우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가장 미워하십니다 (20:3-6, 15:29, 고전10:14-21, 2:20). 그것들을 버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왕하22:8, 23;4-20). 우리에게는 우상적인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딤전6:10, 딤후3:4, 3:19, 3:5, 삼상15:23).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더 영향 받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환난에서 건져줄 알고 욕심을 부리고 고집을 부리며 그것들만 좇아 살았습니다. 그 우상을 버려야합니다. 그것을 가지고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둘째, 장신구를 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몸에 부착하는 온갖 장신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귀고리였습니다. 그 장신구들은 우상적인 것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장신구들을 하고 다니는 것은 육체적 허영을 드러내기 위함이고 세속적인 사치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야곱은 그 동안 거짓과 속임과 정욕과 탐욕과 미움과 증오로 살았습니다. 얍복강 나루에서의 기도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그 집안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이 있었습니다. 디나가 히위 족속의 여자들을 보기 위해 나갔다가 강간을 당한 것, 시므온과 레위가 할례를 이용하여 세겜성 남자들을 다 살육한 것, 다른 아들들이 세겜 성에서 여인들과 자식들을 사로잡고 소유들을 약탈한 것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런 세상적인 가치와 풍습에 젖어 살던 데서 돌이켜 하나님께 정결한 마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결단을 보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육신의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육신의 즐거움과 육신의 일만 도모하며 살았습니다. 육신의 욕망과 허영과 사치와 향락을 드러내며 살았습니다. 세속적인 관념으로 살던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그러기 정욕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버려야합니다 (1:13,15-16, 4:17, 8:44, 벧전1:14-15).

 

  셋째, 의복을 바꾸어 입었습니다. 당시 의복은 하란이나 세겜 사람들의 형태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풍습과 습관에 맞는 모양이었을 것이고 야곱과 함께 한 사람들도 그와 같은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젠 이방 풍속에 젖어 살던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 풍속 습관을 좇아 살았습니다. 세속적인 목적과 가치와 방법으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세상적인 생활방식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15:5-6, 1:8, 3:3-4, 13:12-14, 3:16).

 

   ③야곱이 세겜을 떠나자 추격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5).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이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로 이방 신상과 장신구를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옷을 갈아 있고 세겜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야곱의 일행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야곱이 주변 족속들이 공격해 올 것을 심히 두려워했는데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여 좇는 자가 아무도 없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였으므로'(ויהי חתת אלהים על הערים אשר סביבתיהם)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두려움이 성읍들 위에 임하였다' 입니다. 하나님이 조성한 신적 공포심이 성읍 온 사람에게 임하여 퍼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아들들이 세겜성을 살육하였기 때문에 히위 족속과 동맹관계에 있는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모여 치러 올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더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 공포는 생각지 않을 때에 임한 재앙이나 전쟁 때 느끼는 공포감을 느끼고 일종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함께 하여 세겜 성을 쳤다고 생각하고 자기들도 세겜성을 친 야곱 족속이 칠까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야곱이 실제로 강해서가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습의 결단을 보이니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삼상14:15, 왕하7:6-7, 2:24, 5:1). 우리가 환난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나 상황을 극복하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돌아가야합니다.

 

 

       2. 야곱의 벧엘신앙 회복 (6-15)

 

   ①야곱이 벧엘에 이르러 제단을 쌓았습니다 (6-7).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야곱이 세겜에서 식솔들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했습니다. '엘벧엘'(אל בית אל)'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부른 것은 형의 낯을 피해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으로 갈 때 '루스'라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꿈에 사닥다리 계시를 보여주고 하나님이 언약을 근거한 축복을 해준 곳이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해준 곳입니다.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을 만나 장소라는 의미에서 '벧엘'이라고 했습니다. '벧엘'(בית אל)'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그 벧엘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 후 '엘벧엘'이라고 했습니다. 벧엘에서 만났던 하나님이 밧단아람과 숙곳과 세겜을 거치는 30년 동안 그 약속대로 축복해주시고 동행해주시고 지켜주기고 것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②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습니다 (8).

 

  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이삭의 아내는 리브가(Rebekah)였고 리브가의 여종은 드보라(Deborah)였습니다. 그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의 이름을 알론바굿이라고 불렀습니다. '알론바굿'(אלון בכות)'눈물의 상수리나무' '통곡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드보라의 죽음에 대해 야곱이 대단히 슬퍼한 것 같습니다. 리브가와 드보라는 원래 하란의 밧단아람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브엘세바에 있던 이삭에게 시집을 갈 때 드보라도 종으로 함께 딸려 왔었습니다. 그는 평생 이삭의 집에서 리브가를 도왔고 야곱에게 유모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벧엘에 있을 때 야곱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떻게 다시 야곱에게 합류하여 야곱과 함께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리브가가 야곱의 소식을 위해 드보라를 야곱에게 보냈을 수도 있고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가 죽은 후에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드보라를 데려갔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으로서는 자기를 길러 주고 어머니처럼 대해 주던 드보라의 죽음은 큰 슬픔을 주었을 것입니다.

 

  성경이 족장과 족장의 아내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성경이 이 리브가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드보라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 언급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입니다. 첫째, 리브가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여 야곱으로 하여금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게 한 자였습니다. 그는 에서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을 보자 야곱을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의 밧단아람으로 도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에서의 분노가 풀리면 사람을 보내어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27:45). 결국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20, 숙곳과 세겜에서 10, 모두 30년이 지나서야 돌아왔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보낸 이후 평생을 보지 못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야곱을 돌아오게 하고 싶었겠지만 에서의 분노가 풀리지 않았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연고로 리브가는 평생에 마음에 고통을 가지고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징벌입니다 (Rendsburg).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 성경이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우상숭배 등 범죄한 왕들의 이름을 제외시키고 (1:6-16; 아하시야왕, 요아스왕, 아마샤왕, 여호아하스왕, 여호야김왕, 시드기야왕 빠짐) 이스라엘 지파에서 사탄의 이미지가 있는 지파는 제외시킨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7:5-8; 단지파 빠짐). 둘째는 드보라의 죽음과 장사는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드보라는 여성이면서도 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인 리브가의 죽음과 장사도 언급하지 않는 상황에서 드보라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서는 기록했습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가진 이삭의 가정을 성실히 섬겼고 언약을 이어받은 야곱의 가정을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언약의 가정에서 2대에 걸쳐 모든 일을 성실히 헌신적으로 하므로 하나님이 언약의 가속을 이어 가는 데에 일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충성스러웠기 때문에 리브가가 빠진 자리에 대신 기록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 족보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여인들이 들어갔습니다 (1:2-6; 다말, 라합, , 밧세바-우리야의 아내).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이적으로 큰 사역을 가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세워 놓은 환경에서 성실히 살아가면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자리와 위치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③하나님이 야곱에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9-15).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14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하란의 밧단아람에서 돌아와 벧엘에서 제단을 쌓을 때에 하나님이 축복해 주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떠나자 그곳에 돌 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붓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을 '벧엘'이라 했습니다. 야곱은 30년 전에 세운 돌기둥 자리에 (28:18) 돌 기둥을 다시 세웠습니다. 돌기둥은 신성한 기념물이었습니다. 전제물은 포도주나 기름을 드리는 예물로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상징합니다 (2:17, 딤후4:6).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30년 전에도 같은 고백을 했었는데 또 한 번 고백하므로 더욱 분명한 확신에 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축복해준 축복의 내용은 이전에 벧엘과 브니엘에서 준 것을 요약하여 반복한 형태입니다 (28:13-15, 32:28). 이 축복은 야곱의 새로운 출발을 격려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첫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셨습니다. 이는 인격과 삶에 대한 축복입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은 자'이고 '이스라엘''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라는 의미입니다. 고대에 이름은 그 특성과 관련있게 짓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바꾼 것은 인격과 삶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전에는 거짓과 술수와 오만과 증오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과거를 청산하고 진실하게 살게 될 것을 축복한 것입니다. 전에는 육신적이고도 세속적이고도 우상적인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언약 중심으로 살게 될 것을 축복한 것입니다. 둘째, 총회와 왕들이 그에게서 나올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말씀하시고 그에게서 한 백성이 나와 한 총회를 이루고 그의 허리에서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손에 대한 축복입니다. 자손이 많아지고 왕들이 나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5년 후 70명이 애굽으로 들어가 430년 만에 장정만 60만 명으로 불어나고 다윗과 솔로몬 같은 왕이 나오므로 성취되었습니다.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므로 성취되었습니다. 셋째, 조상에게 준 땅을 줄 것이라 했습니다. 이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야곱에게 주고 그 후손에게도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땅에 대한 축복입니다. 조상에게 약속한 땅에 대한 언약을 후대에까지 계속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에서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살았던 것을 회개할 때에 하나님이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제 다시 숙곳과 세겜에서 10년 동안 살았던 것 회개할 때에 또 다시 더욱 구체적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밧단아람에서 살던 것을 얍복 강에서 청산했지만 곧장 벧엘로 오지 않고 세겜에서 살다가 딸이 강간당하고 아들들이 살인과 약탈을 하게 되고 주변 족속이 모여 칠 위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장신구들을 버리고 의복을 갈아입고 벧엘로 올라올 때에 사면 고을들을 두렵게 하여 추격하지 못하게 했고 벧엘에 도착했을 때에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바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아브함과 사라도 마찬가지였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16-19).

 

 

       3.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 출생 (16-20)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야곱이 벧엘을 떠나 헤브론으로 가는 도중에 라헬이 에브랏에서 난산을 하고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그 이름을 베냐민이라 했습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 죽게 되었고 야곱은 그를 에브랏에서 장사하고 묘비를 세웠습니다. '에브랏'(אפרתה)'비옥한 지역'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베들레헴이 들어 있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라헬이 난산을 하고 죽은 것은 그가 초산한 후 17년이나 지난 50세나 되는 나이었고 오랜 여행기간 동안 몸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입입니다. 라헬이 난산하여 아들 이름을 '베노니'라고 했는데 '베노니'(בן אוני)'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를 '베냐민'이라고 했는데 '베냐민'(בנימין)'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이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아들을 낳을 때 고통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아들 출생으로 인하여 죽을 것을 생각하고 그렇게 지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그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한 것은 사랑하는 라헬을 통해 낳은 아들이 요셉 하나 밖에 없었는데 두 번째 아들을 얻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의 출생으로 인해 아들의 수가 완전수인 12명이 되었다는 점에게 그 아들의 출생으로 인해 큰 힘을 얻었기에 그렇게 지은 것일 것입니다. 베냐민의 출생으로 라헬은 고통을 당하면서 슬픔의 요인으로 생각했지만 야곱은 위로를 얻으면서 오히려 기쁨의 요인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현상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인 것입니다. 인생에서 모든 상황은 좋지 않은 관점으로 볼 수도 있고 좋은 관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시각의 차이가 절망하게도 하고 희망을 가지게도 합니다.

 


       4. 르우벤의 근친상간 (21-22)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야곱이 에브랏에서 라헬을 장사한 후 다시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습니다. 그 곳에서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하였습니다. '에델'(עדר)'가축 떼'를 말하는 단어로서 '에델 망대'는 가축 떼의 망루'라는 뜻입니다. 그곳은 목자들이 가축 떼를 돌보고 지키기 위해 세운 망루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을 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그럴 경우 두 남녀를 모두 죽이게 했습니다 (18:8, 20:11, 27:20). 이는 아버지 야곱의 권위를 짓밟는 일이었고 야곱은 큰 수치를 느끼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르우벤이 이런 일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르우벤 본능적인 욕구 때문입니다. 르우벤의 야성적인 성격과 본능적인 욕망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 야곱이 라헬만 사랑하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레아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라헬만 사랑하고 그 아들 요셉만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라헬이 죽은 후 다시 라헬의 여종 출신이었던 빌하만 사랑할 것을 염려하여 그를 범했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 야곱으로부터 가장권을 빼앗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가진 가족에 대한 통제권이나 재산을 관리하는 재산권 등 가정권을 빼앗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12아들 중 장자로서 아버지 야곱의 나이가 많아지자 그 권한에 대해 염려했을 것입니다. 르우벤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 야곱도 차남으로서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사람이고 자기 말고도 다른 이복 형제들이 많았고 야곱이 라헬의 아들인 요셉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 야곱이 그 권한을 누구에게 넘겨 줄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이 다른 형제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기 전에 장자의 권한을 확실히 하기 위해 아버지의 첩인 빌하를 범한 것입니다. 당시 이방 풍속습관에 의하면 아버지가 죽을 경우 아버지의 권한을 위임받을 자가 아버지의 첩을 취하므로 아버지의 후계자 권한을 갖게 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상2:20-22에 보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으로 있을 때 솔로몬왕의 어머니 밧세바가 솔로몬왕에게 청했습니다. 솔로몬왕의 형 아도니아에게 수넴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주라는 것입니다. 아비삭은 솔로몬왕의 아버지 다윗의 첩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왕은 어찌 형 아도니아를 위해 아비삭을 구하느냐고 하면서 차라리 형 아도니아를 위해 왕위로 구하시지 그러냐고 했습니다. 솔로몬왕은 어머니 밧세바가 형 아도니아에게 아버지 다윗의 첩이었던 아비삭을 아내로 주라는 청원을 왕위를 주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아버지인 야곱은 르우벤의 행위가 충격을 받고 상처를 받고 수치가 되고 분노할 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 힘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속내는 그가 죽기 전에 12아들을 축복할 때 나타납니다. 49:4"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7:5-9에 보면, 사도 요한도 성령의 감동으로 인 받은 수를 기록하면서 12지파를 기록했는데 르우벤지파가 장자지파였기 때문에 제일 먼저 기록되어야 하지만 유다지파가 가장 먼저 기록되고 르우벤지파가 뒤로 물러났습니다. 이것을 보면 르우벤의 행위는 야곱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옳지 못했습니다. 르우벤은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잘못으로 인해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신분, 위치, 재능, 환경 등의 조건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5. 야곱의 12아들과 이삭의 죽음 (23-29)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5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6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7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8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야곱의 아들들은 12명이었습니다. 레아에게서 낳은 아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 6명이었고,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 요셉과 베냐민 2, 레아의 종 실바에게서 낳은 아들 갓과 아셀 2, 라헬의 여종 빌하에게서 낳은 단과 납달리 2명이었습니다. 딸 디나가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아들 12명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란의 밧단아람에서 낳았습니다. 베냐민은 밧단아람에서 헤브론으로 돌아오던 중 벧엘을 지나 가나안 땅인 에브랏(베들레헴)에서 낳았지만 모두 헤브론에 도착하기 전이었는고로 밧단아람에서 낳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있는 헤브론에 도착하여 아버지 이삭을 만났습니다. '헤브론'(Hebron)'기럇아르바'(Kiriath-arba)라고 하기도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을 떠날 때는 헤브론보다 남쪽에 있는 브엘세바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하란의 밧단아람으로 떠난 후 이삭이 헤브론으로 이주했습니다 (13:18, 23:2). 그래서 야곱이 헤브론에 도착하여 이삭을 만난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지 30년 만에 만난 것입니다. 그 후에 이삭은 180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곱을 어머니 리브가는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아버지 이삭은 보고 죽은 것입니다.

 

<結言>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밧단아람으로 간지 30년 만에 다시 아버지가 있는 헤브론으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은 그 기간 동안 신앙의 면모를 보일 때도 있었지만 불신앙의 모습을 보일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때마다 야곱의 행동에 관여하셔서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고 마침내 돌아오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자녀 12명을 낳게 하고 많은 소유를 얻게 하므로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을 성취시켰습니다. 이것이 자신이 선택한 자에게 변함없이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속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