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하박국 2:1-20
<題目> 하나님의 응답
<序言>
1장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 내에서 악인이 의인들을 압제하는 상황을 목도하고 하나님께서 어찌 그들을 보고만 계시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쳐 심판하신다는 계획을 말했습니다. 하박국은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친다는 대답을 듣고 다시 의문을 가지고 질문했습니다. 어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악한 바벨론을 들어 의로운 유다를 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흉악한 바벨론이 하나님을 섬기는 언약민인 유다를 치기를 마치 어부가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즐거워하듯이 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1:1-17). 그리고2장에서는 파수하는 성루에 올라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본장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내용구조는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1-4절), 다섯 가지 화(5-20절)로 되어있습니다.
<本論>
1.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 (1-4절)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유다의 18대 왕 여호여김(B.C.609-598년) 때에 유다는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심히 타락했습니다.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왕하23:37).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애굽왕(느고)에게 바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으로 수탈했습니다. 권세자들은 힘없는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노예로 팔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유다 사회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정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악인들이 득세하여 의인들을 압제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 곧 바벨론 군대를 불러 심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무섭고 사납고 두려운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기병은 표범보다 빠르고 독수리처럼 식물을 움키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리떼처럼 잔인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흉벽을 쌓아 점령하는 자들이고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사로잡아가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열왕들을 멸시하며 자신들의 군사력을 신(神)처럼 여기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5-11).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악을 차마 보지 못하는 분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바벨론 군대를 준비해두신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방 나라 군대가 선민을 압제하게 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었습니다. 흉악한 악인들이 의로운 사람들을 삼키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어부가 바다의 고기들을 그물로 잡고 기뻐하며 또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잡는 것처럼, 그들이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었습니다 (1:12-17). 하박국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과연 옳은지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대답을 듣기 위해 파수하는 성루에 올라서서 기다렸습니다 (2:1).
1절에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파수하는 곳’은 성벽에 높이 세워진 망루를 가리키는데 ‘성루’와 같은 곳으로 이해됩니다. 이곳은 성을 지키는 군사가 적의 침입을 살피는 곳인데 그곳은 소식을 가지고 오는 전령을 가장 먼저 보는 곳이기도 합니다 (삼하18:24-25). 하박국 선지자는 그곳에서 자기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묵시’(חזון)는 하나님이 환상이나 음성 등의 계시로 보여주신 이상을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판’(לוח)는 금속이나 돌이나 나무나 흙 등으로 된 글을 새길 수 있는 판을 가리킵니다. 묵시를 판에 명백히 새겨 기록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해준 말씀을 분명히 기록하여 하박국 선지자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보고 분명히 알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게 한 목적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에서 ‘달려가면서도’로 번역된 ‘레마안 야루츠’(למען ירוץ)는 직역하면 ‘달릴 수 있게’ ‘달리게 하기 위하여’이고, ‘읽을 수 있게 하라’로 번역된 ‘코레 보’(קורא בו)는 직역하면 ‘그것을 말하다’ ‘그것을 전하다’ ‘그것을 선포하다’입니다. 그래서 달려가면서도 잃게 하라는 말은 그것을 선포하여 전하는 자가 달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묵시를 판에 기록하여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하려는 말씀은 반드시 속히 이루어질 내용으로 빠르게 전해야 할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하는 자가 빨리 달려가 전할 수 있도록 판에 기록하라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는 하나님이 계시해주려는 말씀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말씀이며 속히 이루어질 말씀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빠르게 전해야 할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지시라 할 수 있습니다.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정한 때’는 하나님이 계시할 말씀이 이루어질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계시할 말씀은 하나님이 정한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종말이 속히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말’에 해당하는 ‘케츠’(קץ)는 ‘극단’ ‘끝’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정한 때를 의미합니다. 곧 바벨론이 멸망하는 때를 의미합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키겠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바벨론을 멸망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타락하므로 그들을 징계하기 위해 바벨론을 통해 침략하게 했으나 그들이 선민에 대해 지나치게 잔인하게 행했기 때문에 그 죄를 물어 반드시 심판하여 멸망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벨론(Babylonia)은 바사(Persia)에 의해 아주 멸망하고 맙니다. 그 때는 속히 이르고 거짓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멸망할 때는 늦어지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결코 늦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4절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에는 바벨론이 결국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심판받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습니다. ‘교만’은 스스로 높이고 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으로 번역한 ‘네페쉬(נפש)는 ’혼‘ ’영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음이 교만하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교만하다는 의미입니다. 바벨론이 근본적으로 교만하다는 것은 바벨론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기 스스로 가진 능력인 줄 알고 자기가 절대적 존재인줄 안다는 것입니다. ‘정직’에 해당하는 ‘야솨르’(ישר)가 기본형 ‘곧다’ ‘올바르다’의 뜻입니다. 바벨론이 정직하지 못하는 말은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곧 정복야욕으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되 지나치게 잔인하게 극악한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반절에 보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וצדיק באמונתו יחיה -BHS, ο δε δικαιος εκ πιστεως μου ζησεται -LXX). 이 구절은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많이 인용했고 (롬1:17, 갈3:11, 히10:38), 종교개혁자 루터(M.Luther)와 칼빈(J.Calvin)이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칭의(稱義) 교리를 가르치는데 사용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神稱義), 혹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구(以神得救)의 교리를 가르치는데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본절에서 말한 상황적 의미는 하나님 주시는 칭의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의로운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권고의 의미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유다를 궁극적으로 회복시킬 것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의인’은 유다 혹은 유다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의’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뻬에무나토’(באמונתו)는 70인역(LXX)에서 ‘에크 피스테오스 무’(εκ πιστεως μου)로 번역했습니다. 이는 직역하면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의 뜻입니다. 70인역은 유대 학자 70인이 구약의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입니다. 히브리어의 언어적 의미를 가장 잘 아는 유대 학자 70인이 이렇게 번역한 것은 그만큼 신뢰성이 있는 번역이라는 것입니다. 본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하박국에게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믿음’에 해당하는 ‘에무나’(אמונה)는 기본적으로 ‘성실’ ‘신실’ ‘안전’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실성(신실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해 가진 선한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성실하게 행하므로 완전하게 이루시는 성품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선택한 것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나라가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일을 게으르거나 잘못하지 않고 그 목적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해 그 목적을 성실히 이루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리라’에 해당하는 기본형 ‘하야’(חיה)는 ‘살다’ ‘회복하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살리라’는 말은 유다를 회복될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유다가 멸망하고 유다 백성이 사로잡혀가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유다를 회복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리라’에 해당하는 ‘이헤이에흐’(יחיה)는 미완료형입니다. 이는 유다 백성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반드시 회복시킬 뿐 아니라 오히려 계속해서 더욱 번영하게 해줄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곧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의해 반드시 회복될 것이고 계속해서 번영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여 본토가 황폐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사로잡혀갔지만 바사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사로잡혀간 유다 백성이 돌아오게 됩니다. 국권이 회복되고 성벽이 수축되고 성전이 건축되고 율법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완전히 회복되어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에 합당한 배경이 조성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게 할 목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어 대속하게 해주시고 성령님을 보내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구원사역에 대한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한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성실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그 선한 목적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잘못할 때 그 목적 때문에 바로 서게 하려고 징계도 하십니다. 비록 징계는 할지라도 반드시 회복시켜 더욱 온전하게 하십니다. 우리 생각에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라도 반드시 회복시켜 이전보다 더욱 잘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주권적인 목적을 가지시고 성실함으로 그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분임을 신뢰해야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해야합니다.
2. 바벨론의 죄들과 심판 예고 (5-20절)
5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6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7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8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9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0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12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3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15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6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17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19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 내에서 악인이 의인을 압제하는 상황을 두고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보고만 계실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군대를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박국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징계하는 것이 옳으냐고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바벨론에 대해 자기 욕망을 따라 지나치게 행한 죄를 물어 심판하겠다고 했습니다. 본 단원은 바벨론의 죄들을 지적하면서 반드시 심판할 것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①욕심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5-8절).
5절에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술을 즐긴다고 했습니다. 향락과 퇴폐를 상징하는 술을 흥청망청 마시며 술에 찌들어 산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은 하나님의 전 기명으로 술을 마시며 즐기기도 했습니다 (단5:1-3). 또한 그들은 거짓되고 교만하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군사력만 믿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행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 않고 스올처럼 자기 욕심을 넓힌다고 했습니다. ‘스올’(שאול)은 ‘죽음’ ‘무덤’ ‘음부’ ‘지옥’ 등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에서는 죽음이나 무덤의 의미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죽음이나 무덤은 제한이 없이 무한정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입니다. 그처럼 한없는 욕심을 가지고 다른 나라들을 정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은다고 했습니다. 죽음이 사람을 제한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족한 줄 모르고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땅을 차지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사로잡아간다는 것입니다.
6절에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라고 했습니다. ‘그 무리’는 바벨론에게 정복을 당해 고통을 받는 나라 혹은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탐욕으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한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인데, 그 때에 바벨론이 정복했던 피정복 나라 백성들이 바벨론에 대해 속담거리로 삼아 조롱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הוי)는 ‘오! 화로다’ ‘아! 슬프도다’의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될 것을 알리는 저주의 서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고 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약탈하는 일이 언제까지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또한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그 백성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는데 그것은 반드시 되갚아야 할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7절에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정복하여 압제했던 나라들이 군사를 일으켜 바벨론을 공격하여 약탈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8절에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살육하고 사람에게 폭력을 행했기 때문이 그들도 다른 나라에 의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②자기 집을 위해 부당한 이익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9-11절).
9절에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 높은 데 깃들이려 했다고 했습니다. 재앙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는 이유는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여 약탈과 살육과 사로잡음 등의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회개하고 돌이켜 악행을 중단해야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더 높은 성과 더 강한 군사력으로 피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단4:30). 그리고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했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약탈한 것이 어떤 대의나 선한 목적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들의 집을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벨론 왕가의 욕구와 탐욕을 채우기 위함임을 지적하는 것일 것입니다.
10절에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자기 집에 욕을 부른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살육하고 사로잡아갔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악한 왕이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벨론을 멸하여 왕가에 수치가 돌아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영혼’에 해당하는 ‘네페쉬’(נפש)는 혼, 영혼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생명, 사람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생명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네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에 해당하는 기본형 ‘하타’(חטא)는 ‘죄를 범하다’는 뜻도 있으나 ‘상실하다’는 의미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상실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벨론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살육하고 사로잡아간 것 때문에 주도적 역할을 한 그 왕가도 생명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고 했습니다. ‘돌’이나 ‘집’은 성이나 집을 건축하데 사용된 재료들입니다. ‘부르짖고’ ‘응답하리라’는 소리 지르고 입증한다는 말입니다. 본절은 바벨론이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여 약탈하고 파괴하고 살육하고 사로잡아갔는데 그들이 당한 고통과 그들이 가진 절규가 사무친 것에 대해 의인화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왕의 압제와 고역으로 탄식으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그 소리를 들으시고 신원한 일이 있습니다 (출2:23).
③강제노역으로 성읍을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12-14절).
12절에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벨론은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을 살육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나라 백성들을 사로잡아갔습니다. 바벨론은 그들을 노예로 부려서 성읍을 건설하고 성을 건축했습니다. 그래서 본절은 바벨론의 살육과 강제노역의 죄악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절에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정복당한 민족의 백성들을 강제노동으로 수고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지만 그것은 다 불탈 것이므로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벨론이 자기들의 영예를 드높이기 위해 피정복국 백성들을 강제노동으로 성읍을 건설하고 성을 건축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다 불타게 하여 그 노력을 헛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14절에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통해 하나님의 영예가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인정하는’에 해당하는 기본형 ‘야다’(ידע)는 ‘알다’는 뜻으로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악한 바벨론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를 물이 가득 채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11:9).
④다른 나라를 타락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15-17절).
15절에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했습니다. 술은 향락과 방탕에 빠지게 하는 매개체로서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은 타락을 조장하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시60:3, 75:8, 사51:17). 바벨론은 정복한 나라들에 부패한 문화를 전하여 부패에 빠지게 하여 멸망에 이르게 한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분노를’에 해당하는 ‘헤마테구 웨아프’(חמתך ואף)는 직역하면 ‘분노의 가죽부대’로 술을 담은 가죽부대에 독을 넣어 독주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은 다른 나라들에 독주를 마시게 하여 아주 취하게 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타락하게 한 것입니다. 그 하체를 드러내려 했다는 말은 바벨론이 독주에 취한 사람이 벌거벗고 누워있는 것처럼 다른 나라들이 부패하여 수치를 드러내게 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바벨론을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했습니다 (계17:5).
16절에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고 했습니다.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은 바벨론이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여 자기들의 문화에 동화되게 하는 것이 바벨론에게는 영광이 아니라 수치가 채워지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는 바벨론도 독주에 취하여 벗거벗고 누워 할례받지 않은 것을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할례’(割禮)는 이스라엘 백성이 남아가 태어난지 8일 만에 돌칼로 생식기 끝을 자르는 의식으로 언약백성이 된 표징으로 행했습니다. 바벨론에 대해 할례받지 않은 자임을 드러내라는 것은 이방족속임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곧 바벨론이 악행으로 멸망하여 그 수치를 드러내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아닌 것을 입증하라는 의미입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오른손’은 권능을 상징하고 ‘잔’은 심판을 상징하는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내려질 것을 의미합니다. ‘더러운 욕(辱)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여 수치를 당하므로 그 영광된 찬란함이 더 없어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17절에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레바논’은 바벨론이 무너뜨리고 압제한 주변 모든 나라들을 상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14:4-8에 보면 하나님이 바벨론 왕을 심판하여 폐한 이후에 바벨론에 압제를 당했던 나라들이 바벨론 왕에 대해 ‘네가 넘어졌은즉 우리를 베어버릴 자가 없다’고 노래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에 압제를 당한 나라들에 대해 ‘향나무’ ‘레바논 백향목’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은 바벨론이 주변 모든 나라에 행한 강포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짐승을 죽인 것’은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라는 말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바벨론이 주변 나라들의 백성들을 살육한 것을 두고 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바벨론은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여 땅과 성읍을 황폐화시키고 성읍 안에 있는 주민들에게 강포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행한 것들이 모두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할 때 바벨론이 악행을 저지른 대로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⑤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입니다 (18-20절).
18절에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우상’(偶像)은 금속이나 나무나 돌 등으로 만든 형상을 말합니다. 고대에는 자신들이 추구하여 만든 신(神)을 형상으로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바벨론은 당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것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역사로 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신을 형상으로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체가 없는 신의 형상으로서 사람이 자기들 손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스승처럼 교훈을 베풀거나 인도하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비인격체인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19절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상은 말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생기 없는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아무 생명이나 호흡이 없는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허망한 것을 의지하는 자는 허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42:17).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할 때 그들이 의지하는 우상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20절에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상은 헛된 것으로서 섬길 대상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할 대상임을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성전에 계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해 있는 곳으로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음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성전은 하늘보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보좌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온 우주에 대한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서는 온 땅이 잠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땅의 모든 왕들과 군사들과 백성들은 그분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겸손함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연약한 인간들이 가져야할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5-20절은 하나님이 심판할 바벨론의 죄악을 지적한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할 이유를 5가지 죄악으로 지적했습니다. 바벨론은 우상을 숭배하고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여 약탈하고 파괴하고 살육하고 사로잡아갔습니다. 사로잡은 자들을 노동착취로 자기들의 성읍을 건설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부패한 문화를 전하여 타락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은 반드시 심판하여 멸망시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타락했을 때 바벨론을 통해 징계한 후 바벨론을 위에서 말한 죄들을 물어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악을 행한 대적을 심판하므로 공의를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시편98:2에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스스로 바벨론을 물리칠 힘도 없거니와 스스로 대적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만 하면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해주십니다. 우리도 압제하는 세력에 대해 대적하므로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서므로 벗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結言>
우리가 현실 속에서 불합리한 상황을 목도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회의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섭리를 믿어야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3:13에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6:9에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