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창세기37:1-36
<題目> 요셉의 꿈과 팔림
<序言>
창세기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면 본장부터는 후반부에 속합니다. 전반부에서는 노아 이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족장을 중심으로 기술했지만 본장부터는 이스라엘 출애굽 역사의 배경이 되는 요셉의 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본 장은 17세의 요셉이 아버지의 편애와 그가 꾼 꿈으로 인해 형들의 미움과 시기를 사 애굽으로 팔려 가게 된 서론적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야곱의 편애와 요셉의 꿈(1-11절), 심부름 길을 떠난 요셉(12-17절), 애굽으로 팔리는 요셉(18-28절), 요셉에 대한 야곱의 애통(29-36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文>
1. 야곱의 편애와 요셉의 꿈 (1-11절)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야곱에게는 2아내와 2첩으로부터 낳은 12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내 레아에게서 아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블론을 낳았고 딸 디나를 낳았습니다. 아내 라헬에게서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습니다. 첩 실바에게서 갓과 아셀을 낳았습니다. 첩 빌하에게서 단과 납달리를 낳았습니다. 그중에 요셉은 11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란의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헤브론으로 돌아와 이삭과 함께 산지 11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이 때 이삭의 나이는 168세였고 야곱의 나이는 108세였고 요셉의 나이는 17세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로부터 극도로 미움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야곱이 요셉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12아들 가운데 요셉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야곱이 아내들 중에 라헬을 가장 사랑했기 때문에 라헬의 아들인 요셉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더욱 사랑했습니다. 더욱이 장자 르우벤은 첩 빌하와 통간하여 수치심이 들게 하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성 남자들을 살육하여 위기에 빠뜨렸고 갓과 아셀과 단과 납달리는 행실이 좋지 못해 근심이 되게 했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모범적이었기 때문에 요셉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형들이 느낄 정도로 표현을 했습니다. 3절에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채색옷'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토네트 파심'(כתנת פסים)은 '긴 웃옷'(케토네트)과 '손이나 발들'(파심)이 합쳐진 말로서 '손과 발까지 내려온 긴 겉옷'을 말합니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a)에는 '많은 색깔로 된 길고 품이 큰 겉옷'(a robe of many colors)으로 번역했습니다. 요셉에게는 귀한 옷을 해 입힌 것입니다. 그런데 '지었더니'에 해당하는 '웨아사'(ועשה)는 '만들다'란 동사 '아사'에 '웨'가 붙어 습관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곧 요셉에게 귀한 옷을 해 입히되 옷이 낡아질 때마다 그 옷을 만들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4절에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ולא יכלו דברו לשלם)는 문자적으로 '그들이 그에게 샬롬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입니다. '샬롬'은 '하나님의 평안을 주시길 바랍니다'는 뜻으로 하는 인사인데 히브리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일반적인 인사로서 '평안하길!'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녕!'과 같은 인사입니다. 야곱이 너무 표가 나도록 요셉만 사랑하기 때문에 요셉을 시기하여 미워했기 때문에 관계가 불편하여 자연스런 인사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이렇게 표시가 나도록 편애한 것은 심리적으로 자신이 역기능 가정에서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만 받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편애를 표현하는 것은 오히려 시기와 미움의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둘째는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했기 때문입니다. 2절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고 했습니다. 실바와 빌하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과 단과 납달리입니다. 그들은 야곱의 첩의 소생들로서 자기들끼리 잘 어울리는 관계입니다. 나름대로 다른 적자들에게 특히 요셉에게 열등의식과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들과 함께 양을 치는데 있다가 그들의 잘못을 보고 아버지 야곱에게 일렀습니다. '잘못'에 해당하는 '라아'(רעה)는 '나쁜 행실' '악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요셉이 그들의 행위를 아버지 야곱에게 보고한 것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기 이함이었는지 아니면 나쁜 행동을 보고 순수한 신앙심에서 아버지 야곱에게 보고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요셉이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보고하므로 그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책망을 들었을 것이고 당연히 그 보고를 한 요셉을 미워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고자질이 관계를 파괴할 수 있는 요인입니다.
셋째는 요셉이 꿈꾼 것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2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첫 번째 꿈은 형제들이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자기 단이 일어서고 다른 단들이 자기 단에 둘러서서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11별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꿈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방편으로서 요셉이 부모형제들을 인도할 것에 대한 예언적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42:6, 43:26, 44:14). 요셉은 그 꿈을 꾸고 나서 그 꿈이 신기하여 형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잖아도 형들은 요셉에 대해 열등의식과 시기심과 미움을 가지고 있던 차에 충격을 받고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8절에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고 했습니다.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는 표현은 '네가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를 원하느냐'는 의미입니다. '그 꿈이 말하는 대로 우리 위에서 우리를 다스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표현으로 말하면 '아니 이 건방진 녀석이 감히 우리를 다스리는 자가 되겠다고?'의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그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고 화가 났는지 알 수 있는 표현입니다. 요셉이 아직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숙한 정도가 아니어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함부로 말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형들에게 있어서 자랑으로 느껴지게 하고 오히려 분노하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극한 미움을 당하게 된 원인은 형들에게도 원인이 있고 아버지 야곱에게도 원인이 있고 요셉 자신에게도 있습니다. 모두 건강하지 못하고 성숙되지 못한 인성과 인격 때문에 서로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더 본질적으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인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이스마엘에게 희롱을 당하고 야곱이 에서에게 쫓겨나고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당해 팔린 것은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언약적 성취의 목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가부정적인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요셉이 자만하면 안 되겠기 때문에 요셉을 책망하면서도 그 말을 마음에 계속 두고 있었습니다 (10-11절). 야곱 자신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꾼 적이 있고 요셉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통해 언약적 목적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가지신 목적과 의도와 계획을 깨닫고 그것을 근거로 한 비전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요셉 당시 꿈은 환상과 함께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꾸는 꿈은 대개 뇌 속에 잠재되었던 것의 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S.Freud). 우리 옛말에 주사야몽(晝思夜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낮에 보거나 생각한 것이 꿈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꿈을 계시의 방편으로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욜2:28-29, 행2:16-21, 계11:3-6),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성경 말씀이 완성된 때이므로 그 뜻을 성령의 감동과 성경 말씀으로 나타내십니다. 성령이 마음을 통해 감동시키고 말씀을 통해 확신을 줄 때 평생 그 비전을 소망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 비전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고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마침내 쓰임받게 됩니다. 마치 건축자들이 청사진을 만들고 그 청사진을 반영한 설계를 하고 그 제도된 설계대로 건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가 개념과 물질로 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먼저 인지 논란을 벌였습니다. 물질의 형태로 인해서 개념이 생길 수도 있고 개념에 의해 물질의 형태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개념이 더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의 형태에 의해 개념이 생기는 측면도 있지만, 개념에 의해 물질의 형태가 결정되고 물질의 형태가 없어진 다음에도 개념은 남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형체와 개념들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지상성막과 하늘성소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런 면에서 행동이 사상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사상에 의해 행동이 결정되고 행동이 없어도 사상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인생의 목적으로 가지고 살아가면 그렇게 살아가게 되고 그렇게 살지 못할 때에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성 곧 잘못과 실수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의 시기와 미움 때문에, 환경 때문에 비전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비전을 가지고 그 비전을 향해 살아가면 무시당하고 모욕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미움과 핍박을 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잘못과 실수로 당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품고 살아가기 때문에 악령들의 역사로 당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4:28-29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움과 핍박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요셉처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잃지 않고 그것 붙잡고 살아야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2. 심부름 길을 떠난 요셉 (12-17절)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17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야곱은 헤브론(Hebron)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양 떼를 치기 위해 세겜에까지 갔습니다. 세겜(Shechem)은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야곱은 그들이 세겜에까지 가서 양떼를 치는 것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그들에게 보내어 안부를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세겜에 다다른 들에서 헤매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 형들에 대해 물으니 그들이 도단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도단(Dothan)은 세겜에서 더 북쪽으로 30km 떨어진 곳입니다. 요셉은 도단까지 가서 형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양떼를 먹일 초장을 찾아 세겜까지 간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약 10여 년 전에 아들들이 세겜성 남자들을 살육하고 세겜 성의 소유들을 약탈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일을 무릅쓸 만큼 대담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을 고립되어있는 그들에게 보낼 경우 요셉이 어떤 일을 당할는지 생각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외부적인 위험에만 신경을 쓰고 내부적인 위험에 대해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요셉도 형들이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생각지 못하고 아버지 야곱의 명령을 따라 세겜 성으로 간 것입니다.
3. 애굽으로 팔리는 요셉 (18-28절)
①형들이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모의했습니다 (18-20절).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도단에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본 형들은 서로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고 했습니다. 꿈쟁이, 몽상가가 온다는 조롱 섞인 표현입니다. 그들은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고 모의했습니다. 당시 구덩이는 우물로 사용하기 위해 깊이 팠는데 그 곳에 빠지면 스스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을 만큼 깊습니다. 건기에는 물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을 가두는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렘38:6). 형들은 요셉을 죽이고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요셉의 꿈대로 되는지 보자면서 격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2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는 밭에 있는 곡식 단들이 요셉의 곡식 단에 절을 하는 것이었고 하나는 해와 달과 별들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꿈들은 하나님이 계시의 방편으로 사용한 것으로서 그 내용은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 가정과 부족과 국가를 인도하는 구원사역에 사용할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을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한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어렸을 때부터 그 계시를 하고 요셉은 그 계시를 비전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비전은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30년 후에 그가 애굽(이집트)의 총리가 되므로 이루어집니다. 그 꿈 때문에 형들이 시기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므로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 의해 그 꿈이 이루어집니다. 베드로전서5:6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섭리로 끊임없이 비전에 대해 물어야 합니다.
첫째, 비전은 초월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선생님이 한 번은 자기 반 학생들에게 '뛰는 벼룩'을 가지고 실험을 해 보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수십 마리의 벼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벼룩들이 얼마나 높이 뛸 수 있는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학생들은 커다란 유리그릇을 가져다가 뒤집어서 뛰는 벼룩 위에 덮었습니다. 이제 벼룩들은 뛸 때마다 유리그릇에 부딪혀서 결국은 더 이상 높이 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생님이 유리그릇을 치웠으나, 벼룩들은 아직도 유리그릇이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그 높이까지만 뛰었습니다. 벼룩들은 그들의 한계라고 생각한 높이로 뛰는 능력을 제한시켰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이와 같다. 사람들은 마음에 뚜껑을 덮고, 좀 더 높이 뛰어서 그들의 인생에서 좀 더 위대한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합니다. 결과적으로 평범함이 자리잡게 됩니다. 이것은 특별히 영적 신앙의 견지에서도 사실입니다. 즉, 사람들이 좀더 헌신되고 영적 헌신에 대한 좀더 나은 신앙을 소유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때, 그들은 평범한 신앙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최선의 것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비전을 크게 가져야 합니다. 내 지식과 능력과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비전이 어떤 것이었으며 야곱의 비전이 어떤 것이었으며 요셉의 비전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 보편적 진리에 속한 목표는 하나님을 향한 비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환경의 열악함을 보지 말고, 자신의 연약함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강함을 보아야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신앙을 을 가여야합니다.
둘째, 비전은 실제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은 미래에 대한 마음의 그림입니다. 그 그림은 미래 지향적이고 현재보다 큰 내용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목표는 허상이고 망상입니다. 헛된 꿈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비전을 말해 보라하면 선교센타 짓는 것, 순교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어떤 교회는 이제 개척하는 교회가 세계제일교회 등으로 짓습니다 그런데 1년도 안되어 간판을 내립니다. 비전을 갖는 데에는 적어도 4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대한 이해가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뜻을 가지시며 어떻게 일해 나가는지 말씀을 통해 깨달아 가야합니다. 그럴 때에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가 바로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면서 감동되고 흥분되고 열정이 생기는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이 신앙적으로 가장 만족해하는 분야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는 현실 속에서의 경험을 중시해야합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확인해 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과거의 경험을 얘기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 간다. 과거부터 자신에게 어떻게 역사했는지 생각했고 그 당시에도 하나님이 동일하게 감동시킴을 느꼈던 것입니다. 넷째는 공동체와 연관성이 있어야합니다. 비전의 가장 중요한 필수 조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와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항상 시대와 국가와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 특별히 다니엘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방국가에 대해 섭리하시고 또 이스라엘 공동체에 섭리하시고 또한 그 일에 쓰임 받을 개인에게도 섭리하신 것이 잘 나타납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역사와 교회 공동체와 우리 개인의 비전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과 가정의 비전을 실천할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이 시대적으로 하시려는 일과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그 한 부분으로서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되어져야 할 일과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그 지역 교회에 대한 특히 자신이 다니는 교회와 목화자의 비전과 관계성이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국가와 교회와 개인에 대한 일을 연관성 있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배경에 잘 나타나고 에스겔이 본 환상에 나타납니다. 요셉의 비전과 이스라엘의 비전과 애굽에 대한 경륜과 팔레스틴에 대한 섭리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그 모든 비전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 나가십니다.
셋째, 비전은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역대상4:9-10에 보면 야베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야베스'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뜻입니다(9절). 보다 문자적인 의미로 '그가 고통을 불러오다' 혹은 '그가 고통을 불러올 것이다' 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고대 풍습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창25;25-26), 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준 것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큰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았을 때 그로 인하여 더욱 큰 고통을 당하였고, 그 아이에 대한 미래에 대한 좋지 않은 예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야베스는 태어날 때부터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왔고, 미래에 대한 좋지 않은 징조를 보고 자랐습니다. 슬픈 과거와 침울한 현재 속에서 꽉 막힌 미래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더 많은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원컨데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다 허락해 주셨고(10절) 그로 인하여 어떤 형제 보다도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9절). 유다 지파의 한 가문에서 눈에 띌 만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꿈의 사람 요셉도 당시에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비전은 내 능력과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 내 연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근거하여 세운 것이 아니므로 내 계획에 불과 합니다. 자신의 환경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쓰임 받고자 하는 열정으로, 지속적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어느 사람이 천국에 갔습니다. 베드로가 문에 서서 기다리다가 황금 길과 저택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창고같이 생긴 건물이 보였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 보고 싶다고 하자, "안 보는 게 나을거여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궁금해서 계속 졸라 댔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져 보여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문을 열자 그는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바닥에서 천정까지 선반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그 선반에는 빨간 리본이 묶겨진 하얀 상자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부 이름이 씌여져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그는 자기 이름이 씌여진 상자를 찾아 리본을 풀어 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수차 들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상자 안을 보고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 상자 안에는 그가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이 그에게 주기를 원했던 복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있을 때 그 복을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했고, 야고보서4:2에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복을 구해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지은 부르스 윌킨슨은 자기의 비전을 두고 30년 동안 기도를 계속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제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때문에 제한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대하16:9, 잠10:22).
우리는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비전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 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와 목적이 있으면 이루어집니다. 단 1%라도 하나님이 이루시면 100%인 것이고, 99%의 가능성이 있어도 이루지 못하면 0%인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친히 능력으로 행하십니다. 그 비전은 반드시 실상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그 비전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에 많은 인격적 모순이 제어되고 흔들림 없는 목표와 방향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②형들이 요셉을 덩이에 빠뜨렸습니다 (21-24절).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형들이 요셉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요셉을 죽일 모의를 했습니다. 죽여서 구덩이에 빠뜨리고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고 했습니다 (18-20절). 그런데 장자 르우벤은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를 구덩이에 던지고 그에게 손을 대지 말자고 했습니다. 요셉을 구해서 돌려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이르자 그를 잡아 채색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르우벤이 장자로서 동생에 대한 책임감을 어느 정도 느껴서 죽이지는 말라고 권했지만 전적으로 그들의 행동을 막지 못한 것은 근친상간의 죄로 권위가 떨어졌거나 아니면 르우벤 자신도 그들과 같이 요셉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형들은 요셉이 이르자 요셉의 채색 옷을 벗기고 잡아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형들이 요셉에 대해 행동한 것에 대한 표현을 보면 '이르다'(בוא) '벗기다'(פשט) '잡다'(לקח) '던지다'(שלך)의 동사를 연속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형들의 공격 속도와 난폭성이 얼마나 대단했겠는지 알 수 있고 그들의 적개심과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겠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이런 일을 당한 데에는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형들의 열등의식과 요셉 자신이 꿈을 말하는 실수가 원인입니다 (1-11절).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언약 성취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대한 비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탄의 방해가 있게 되고 그에게 이용되는 사람들의 도전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탄은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고 방해하는 환경을 조성하여 실패하게 하려 합니다. 느헤미야4:1-12에 보면 느헤미야를 통해 예루살렘성을 중수하려 할 때 주변 국가의 정치인 산발랏과 도비야가 적극적으로 방해했고 아라비아 사람, 암몬 사람, 아스돗 사람, 유다 사람들이 방해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속사역을 이루려 할 때 로마총독 빌라도와 유다 왕 헤롯과 유다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을 통해 방해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비전을 위해 당하는 어려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합니다.
③형들이 요셉은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25-28절).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형들이 요셉을 잡아 구덩이에 빠뜨린 후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 음식 중에는 요셉이 가져온 음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다가 낙타를 타고 오는 이스마엘 사람들의 무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길르앗에서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서 각국 대상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당시 이스마엘 후예들과 미디안 사람들이 함께 상품을 싣고 애굽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28절).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 족속의 상인을 본 유다는 요셉을 그들에게 팔자고 제안했습니다. 요셉이 아무리 미워도 형제인데 동생을 죽일 것까지 있느냐고, 요셉을 죽인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남의 손을 처리하고 소득을 얻자고 했습니다. 유다는 요셉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공리적인 논리로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유다의 말에 동의하고 요셉을 구덩이에서 꺼내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은 20을 주고 팔았습니다. '은 20'은 은 20세겔입니다. 당시 노예의 몸값은 은30세겔이었는데 20세가 안된 노예는 20세겔이었습니다. 요셉은 당시 나이가 17세였으므로 20세겔을 받고 노예로 판 것입니다. 요셉을 산 그 상인들은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요셉이 죽게 되었을 때 르우벤을 통해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빠뜨리자고 했습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두고 가면 요셉이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자고 하므로 요셉이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이 그렇게 애굽으로 가는 것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목적을 향한 출발점이 됩니다.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아무도 상상치 못한 방법으로 요셉을 지키고 오히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19:1-4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죽게 되었을 때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의 의도를 미리 알려 주어 피하게 하고, 미갈이 아버지 사울이 보낸 군사가 집을 포위했을 때 창으로 끈을 매달아 도망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사무엘이 있는 라마나욧으로 도망했을 때도 사울왕이 군사들을 3번이나 보내고 심지어 사울 자신도 직접 참여했으나 그들이 모두 성령에 감동되어 다윗을 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진 자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보호하십니다. 오히려 그 어려움을 목적을 이루는 통로로 활용하십니다. 우리 사람들이 가히 추측할 수 없는 기이한 방법으로 그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로마서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5:3-4에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야고보서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베드로전서1:7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4. 요셉에 대한 야곱의 애통 (29-36절)
①르우벤이 요셉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애통해 했습니다 (29-30절).
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요셉의 형들이 세겜 위 도단에서 양을 치다가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요셉을 구덩이에 빠트렸다가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 사람들과 미디안 사람들의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르우벤은 이미 요셉을 구하여 아버지에게도 데려갈 계획을 가지고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판 사실을 모른채 요셉이 들어가 있는 구덩이로 왔습니다. 르우벤이 구덩이에 와 보았을 때는 요셉이 없어진 뒤였습니다. 르우벤은 어찌된 영문인줄 알지 못하고 요셉이 없진 것으로 인하여 옷을 찢어 애통해 하고 다른 형제들에게 와서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표현입니다. 르우벤은 장자로서 동생을 지켜야 하는데 동생이 없어졌으니 자신이 장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므로 아버지가 얼마나 애통해 할지를 생각하고 집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고 절규한 것입니다.
②요셉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을 속였습니다 (31-35절).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채색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 피에 적셔서 그 채색 옷을 심부름꾼을 통해 아버지 야곱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헤브론에 도착하여 아버지 야곱에게 그 채색옷을 보이며 요셉의 옷인지 보시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그 옷이 요셉의 옷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분명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잡혀 먹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오랫동안 애통했습니다. 극도의 슬픔을 표현한 행동입니다. 야곱의 자녀들인 아들들과 딸 디나와 며느리들이 그를 위로했지만 슬픈 기색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 가리라' 하면서 울었습니다. '스올'(שאול)은 무덤, 죽음, 죽음의 상태, 지옥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처럼 고통스러워 한 것은 사랑했던 라헬이 죽은 다음에 얼마 되지 않아 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고, 사랑하는 아들이 짐승에게 찢겨 죽어 시체도 찾을 수 없는 비참함이 있었고,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 가정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를 속이고 아버지로부터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로 인해 형 에서는 분노하며 울었고 아버지 이삭은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27장). 이제 자기의 아들들의 공모로 아들들에게 속임을 당하므로 극에 달한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인과응보인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욕심만 채웁니다. 우리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얼마나 힘들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행동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면 우리도 똑같은 문제로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언제나 진실하게 살아야합니다.
③요셉이 애굽에서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종으로 팔렸습니다 (36절).
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요셉을 요셉의 형들로부터 노예로 사간 상인들은 애굽에 도착하여 요셉을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팔려 간 곳은 애굽의 바로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이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집에 종으로 팔려간 것은 요셉이 장차 바로왕 앞에 나아가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배경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야곱이 요셉을 편애했기 때문에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고,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렸기 때문에 애굽에 팔려 가 바로왕의 신하 호위대 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기, 있었기 때문에 보디발 아내에게 무고를 당하고, 보디발 아내가 무고했을 때 죄수 가운데 고관들만 들어오는 호위대 감옥에 갇히게 되고, 호위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바로왕의 술 맡은 관원을 만나게 되고, 술 맡은 관원을 만났기 때문에 바로 왕에게 천거되고, 바로 왕에게 천거되었기 때문에 바로왕의 신임을 받아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헤브론에 있는 이스라엘 부족을 애굽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고, 이스라엘 부족이 애굽의 보호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국가를 이룰 만큼 창성했고, 국가를 이룰 만큼 창성했기 때문에 가나안에 제사장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르우벤이 요셉의 없어진 것을 보고 애통해 하고 야곱이 요셉의 없어진 것을 보고 애통해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미국의 한인교회도 분쟁이 많다고 합니다. 친교시간까지는 괜찮은데 제직회만 하면 서로 싸우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그 싸움이 심한지 '제직회 사탄이 있나 보다'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은 으레 교회가 2개로 갈라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8조각이 난 곳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내 한인교회가 3,000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싸우고 깨져서 생긴 교회들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열심만 있고 기독교문화가 인격화되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그렇게 싸우고 잘라지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깨져서 나누어진 교회들이 또 다시 커져서 모두 이전의 교회만큼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똑같은 교회가 계속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그 결과 때문에 갈라지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갈라지는 것은 분명 우리 사람의 잘못입니다. 헌데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잘못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좋지만 우리가 잘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잘못한 우리에게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성공과 실패가 있지만 하나님은 실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만큼 평안하고 담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각종 환난을 당했을 때도 태연하고 욥이 극한 고난 중에서도 태연한 것처럼 말입니다 (욥23:10).
<結言>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사야55:8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판단하여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하고 슬퍼하고 억울해 하고 분노합니다. 하지만 지혜의 한계를 가진 우리가 실패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하나님도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우리의 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방법대도 되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목적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고 하나님의 축복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5:3-4에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고 했습니다. 로마서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안연히 인내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