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창세기39:1-23
<題目> 요셉이 당한 시험과 고난
<序言>
가나안에서의 유다의 행적에 관한 기사가 끝나고 본장부터는 다시금 요셉에 대한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본장은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이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을 하고 있는지,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도우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는 야곱 가족의 애굽 이주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용구조는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1-6절), 요셉에게 임한 시험(7-18절), 요셉의 옥중생활(19-2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文>
1.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 (1-6절)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요셉이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여 가나안의 도단에서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 사람과 미디안 사람들로 구성된 상인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그 상인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데려가 바로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 때는 애굽의 12왕조시대인 B.C.1898년 경으로 추측됩니다. 요셉은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를 했는데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여 형통한 자가 되게 했습니다. '형통한 자'의 히브리어 '이쉬 마츨리아흐'(איש מצליח)는 '번영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번영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 보디발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범사에 함께 함을 보고 그를 가정총무(執事長)로 삼아 모든 소유와 일을 다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보디발은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어떤 것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을 경우 부정을 탄다는 제의적 이유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과 음식을 함께 먹지 않았는데 보디발도 요셉에게 그런 이유 때문에 자기가 먹는 음식은 맡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Sarna). 혹 자기의 아내에 대해 범하지 않은 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Westermann, 9절 참조). 이는 보디발이 요셉을 신임하여 어떤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맡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모든 일을 맡아서 하는 동안 하나님이 보디발의 집과 소유에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 때문에 그의 집에까지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 여러 교훈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언약적 목적이 있는 자를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당한 환경은 참으로 비참했었습니다. 모든 형들이 자신을 미워하여 분노한 낯으로 자신을 결박하여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형들이 구덩이 위에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두운 구덩이에서 누구도 건져 주지 않았습니다. 은 20세겔에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렸습니다. 쇠사슬에 묶여 가서 물건처럼 흥정거리가 되었습니다. 17세에 홀로 이국 땅에서 노예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상처와 울분과 분노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요셉에 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단시키는 훈련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키고 큰 민족으로 성장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목적있는 계획을 통해 꿈의 계시로 보여 주셨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비전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통해 연단시켰습니다. 그것도 다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기 위해 연단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훈련시킵니다. 신명기8:16에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했고, 예레미야29:11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했고, 야고보서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베드로전서1:6-7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난을 믿음으로 견뎠고 (창45:8),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23:10).
둘째, 하나님은 언약적 목적이 있는 자에게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형통하게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집에서 보디발의 신임을 받아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보디발에게 모든 것을 위임받았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6절). 외모뿐 아니라 그의 됨됨이가 호감을 갖게 하고 신뢰하게 하고 사랑을 받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대상에게 훈련을 위해 고난 가운데 두시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은혜를 베풀어 살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보디발 집에서 신임을 받아 가정총무가 되게 하고 그 일이 잘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적 목적을 가진 자기에게는 고난과 시련과 환란 중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창세기28:15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1:5에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고 했습니다. 히브리서13:5에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고, 마태복음28:20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고, 요한복음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고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언약적 목적을 가진 자는 복의 기관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잘 되게 하려고 보디발의 집과 소유에 복을 주었습니다. 복의 통로가 되고 기관이 되게 한 것입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요셉으로 인하여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목적이 있는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과 사업체와 국가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적 목적을 가진 사람이 잘되게 하기 위해 그 영향력 안에 있는 자를 긍휼히 여기기도 하고 사역의 대상에게 복을 주시기도 합니다. 창세기12:3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창세기19:29에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6:19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0:12-15에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당한 형편과 처지는 참으로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로 태어나 다른 형들에게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형들이 붙잡아 구덩이 빠트렸을 때 무서운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형들이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아서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 종으로 들어갔을 때는 극도의 외로움과 분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을 충성되이 섬겼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에게서 하나님이 형통케 하심을 보았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총무로 삼아 자기 집과 모든 소유를 맡겼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집의 일을 맡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그 집과 밭과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후에 보디발 아내의 무고를 당하여 고급 간부만 가두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그 곳에서도 형통케 했습니다 (23절). 그 감옥에서 애굽 왕 바로의 술 맡은 관원을 만나게 되고 후에 그의 천거로 바로의 신임을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래서 흉년 때문에 존폐 위기에 있는 70인의 이스라엘 족속을 애굽 고센 땅으로 불러들여 살게 했습니다. 초강대국인 애굽의 보호 속에서 430년 동안 20~60세 남자만 60만 명이 되도록 강성케 했습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에서 독자적으로 신정국가를 세워 나갈만한 실력이 된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요셉의 믿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바라본 자입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었습니다. 형제들의 열한 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단에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또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모두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야곱의 모든 족속이 요셉에게 절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37:5-11). 그것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알려 주신 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 사역에 요셉을 쓰시겠다는 암시였습니다. 요셉은 그 암시를 항상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자기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구원을 성취할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에, 형들의 배반과 보디발 아내의 무고와 떡 관원의 배신과 감옥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37:5-9, 41:41-45, 45:7-8). 바울도 주께 받은 사명을 다하고 주께 면류관을 얻게 될 소망을 가졌기에, 죽음의 위기와 매 맞음과 바다에서의 표류함과 여러 대적들의 위협과 가난과 곤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후11;24-27, 행20:24, 딤4:7-8, 고후4:8-10). 예수님께는 구속을 이루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실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12:2-3, 마10:29).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역대상4:9-10에 보면 야베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야베스'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뜻입니다(9절). 보다 문자적인 의미로 '그가 고통을 불러오다' 혹은 '그가 고통을 불러올 것이다' 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고대 풍습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창25;25-26), 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준 것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큰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았을 때 그로 인하여 더욱 큰 고통을 당하였고, 그 아이에 대한 미래에 대한 좋지 않은 예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야베스는 태어날 때부터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왔고, 미래에 대한 좋지 않은 징조를 보고 자랐습니다. 슬픈 과거와 침울한 현재 속에서 꽉 막힌 미래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더 많은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원컨데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다 허락해 주셨고(10절) 그로 인하여 어떤 형제보다도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9절). 유다 지파의 한 가문에서 눈에 띌 만한 존재가 된 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자입니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극한 상황이 발생해도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반드시 이루시리라 믿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불행한 사건을 만났을 때에도 그 불행한 사건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필요한 사건이라고 믿었습니다. 좀더 부드럽게 표현한다면 그는 불행한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한 도구로 활용하시되 도리어 목적을 이루는데 유익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형제들이 찾아와 용서를 구할 때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45:8). 그는 실로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는 자였습니다. 욥이 자녀의 죽음과 재산의 잃음과 육체의 질병과 아내의 욕설과 친구들의 정죄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당한 환난이 목적있는 고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욥기23:10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욥23:10). 바울은 로마서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셋째, 자신이 맡은 현재의 일에 충성하는 자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를 믿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 그 목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도 반드시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보디발 집에서도 충성을 다해 주인을 섬겼고, 시위대 감옥 안에서도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행했고, 총리가 되어서도 임무를 진실하게 수행했습니다. 결국 그런 모습이 보디발에게 신임을 얻게 되었고 간수에게 신임을 얻게 되었고 바로 왕에게 신임을 받아 이스라엘 족속을 환난에서 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오늘에 충실하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아도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베드로전서5:6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샤르니'라고 하는 한 프랑스인이 나폴레옹의 노여움을 사서 토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바깥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지는 듯 했습니다. 고독과 절망에 빠진 그는 작은 돌 조각 하나를 들어 독방 벽에다가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고 새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토굴 감옥 바닥에 깔려 있던 돌들 틈에서 푸른 새싹이 돋아났습니다. 그것은 벽 위에 뚫린 작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향해 뻗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넣어 주는 물을 조금식 남겨 그 푸른 잎사귀에 주곤 했습니다. 새싹은 마침내 파란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되었습니다. 꽃나무가 탐스러운 꽃송이를 터트리자 그 고독한 포로는 전에 벽에 새겼던 글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새겼습니다. 그 소식이 죠세핀 여왕에게 들어가게 되었고 여왕은 황제를 설득하여 황제는 결국 그를 석방시켰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요셉이 왜 낙심하지 않았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28:20, 요14:16).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선한 목적을 가지시고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라도 그 목적에 유익케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오늘 나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되기를 바랍니다. 결국 모든 일이 형통케 될 것입니다.
2. 요셉에게 임한 시험 (7-18절)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요셉이 애굽에서 보디발 집에 종살이를 한지 약 10년 후 요셉의 나이 27세 정도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41:1,46).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지속적으로 눈짓을 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인 보디발의 신뢰를 배반하는 일이고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것이라면서 거절하며 그와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일을 하기 위해 보디발 집에 들어갔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집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요셉의 겉옷을 붙잡고 동침하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 겉옷을 벗은 채 버려두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보디발 아내는 요셉이 옷을 버려 둔 채 도망하자 수치심과 증오심을 가지고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요셉을 모함했습니다. 집 사람들을 불러서 보디발이 데려온 '히브리 사람이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히브리 사람'은 에벨(Eber)의 후손을 지칭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야곱의 후손을 말합니다.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디발 아내는 공동의 적개심을 유발시키기 위해 히브리 사람이 자기들을 희롱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와 동침하려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더니 옷을 버려 두고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혐의를 숨기기 위해 요셉을 혐의자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보디발이 돌아오자 그에게도 동일하게 말했습니다.
당시 애굽은 종교의식 가운데 성적 의식이 있어서 성교에 대한 별 거부감이 없는 곳인 동시에 요셉은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청년으로서 성적 욕구가 아주 강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유혹을 이겼습니다. 첫째, 범죄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보디발 아내가 눈짓하며 동침할 것을 요구하자 그와 함께 있지 않으려 했습니다. 유혹을 감지한 후에는 유혹을 받을 환경을 멀리하므로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른 신념을 가진 사람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음행 죄는 음행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6:18에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념을 굳게 가지지 못하면 이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삼하11:2). 둘째, 사람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보디발 아내가 강권할 때 보디발이 자기를 신임하여 모든 것을 다 위임해 주었고 다만 아내에 대해서는 금했는데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은 보디발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보디발이 자기를 신임하여 모든 일을 위임한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았고 그 신임에 보답하기 위해 그의 명령은 손해가 되어도 지켰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려했습니다. 그는 보디발 아내가 강권할 때 어찌 하나님께 악한 죄를 짓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꿈을 통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자기 사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살고 하나님에 대한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타락하게 됩니다. 프랑스에는 유명한 삶은 개구리 요리가 있습니다. 이 요리는 손님이 앉아 있는 식탁 위에 버너와 냄비를 가져다 놓고 직접 보는 앞에서 개구리를 산 채로 냄비에 넣고 조리하는 것입니다. 이때 물이 너무 뜨거우면 개구리가 펄쩍 튀어나오기 때문에 맨 처음 냄비 속에는 개구리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의 물을 부어 둡니다. 그러면 개구리는 따뜻한 물이 아주 기분 좋은 듯이 가만히 엎드려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매우 약한 불로 물을 데우기 시작한다. 아주 느린 속도로 서서히 가열하기 때문에 개구리는 자기가 삶아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기분 좋게 잠을 자면서 죽어 가게 됩니다. 로마제국이나 통일신라가 멸망한 것은 외부의 침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전이 사라짐으로써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목적과 목표의식이 없어져 그냥 내부에서 저절로 무너진 것이다. 평안할 때 넘어지는 것은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29:18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묵시'에 해당하는 '하존'(הזון)은 꿈이나 계시나 이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vision). '방자히 행하거니와'에 해당하는 '이페라'(יפרע)의 기본어근 '페라'는 '풀어지다' '떠나다' '망하다' 등의 뜻으로서 영어성경 NASB에서는 '억제되지 않는'의 뜻인 unrestrained로 번역했고, KJV에서는 '멸망하다'는 뜻인 perish로 번역했습니다. 곧 방자히 행한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살다가 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현대어 성경에는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할 수밖에 없다."고 번역했습니다.
3. 요셉의 옥중생활 (19-23절)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이 보디발 집에서 10여 년 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이 집에 들어갔을 때 보디발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며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청을 뿌리치고 나왔습니다. 보디발 아내는 집 사람들에게 요셉이 겁탈하려다가 자기가 소리를 지르니 겉옷을 벗어 둔채 도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남편 보디발이 들어오자 보디발에게도 그와 같이 말했습니다. 보디발은 그 말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감옥은 왕의 고관들이 범죄했을 때 투옥되는 친위대 감옥이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여 인자를 베풀어 형통하게 했습니다. 간수장이 요셉을 신인하여 요셉에게 감옥을 주관하는 일과 간수들을 감독하는 일과 죄수들을 감독하는 일 등 감옥의 제반업무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다시 확인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일을 신임하고 위임했습니다.
요셉은 잘못이 없었지만 보디발 아내의 무고를 당했습니다. 투옥될 때도 오늘날과 같은 합법적인 절차 없이 투옥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주인이 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정한 재판없이 변호할 기회조차도 없이 투옥된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상황에 놓였지만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감옥생활에 충실했습니다. 21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인자를 더하사'에서 사용된 '인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הסד)는 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특별히 돌보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인자하신 분임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24:12,14,27). 이곳에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요셉이 절망적인 상황을 당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며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기도대로 그가 감옥에 갇혔지만 그 곳에서도 간수장의 신임을 받아 형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예 요셉의 혐의를 벗겨서 감옥에서 나오게 하시지 왜 계속 감옥살이를 하게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있는 섭리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살이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이루는 통로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갇힌 감옥은 친위대 감옥으로서 왕의 고관들이 범죄했을 때 들어오는 감옥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이 감옥에 있는 것은 애굽의 바로 왕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는 기회가 제공되는 곳입니다. 실제로 요셉은 이 감옥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고 그의 꿈을 해석해 주므로 후에 바로 왕에게 나아가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주는 길이 열리고 그 일을 계기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부족을 애굽으로 초청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불행하게 일어난 일을 요셉에 대한 계획을 이루고자 하는 통로로 이용하기 위해 요셉을 감옥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신임을 얻게 하고 하는 일이 되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보디발 집에서 가정총무로 일을 맡아서 하고 이 친위대 감옥에서 감옥총무로 일한 경험은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요셉이 감옥에 갇히는 것 같은 애매한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그 때 원망과 분노와 변명으로 일관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21-26장에 보면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교회에 선교보고겸 구제헌금을 전달하려고 예루살렘에 왔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고 공회에서 심문을 받고 로마군대의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바울을 로마총독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로 보내어 심문을 받게 합니다. 총독 벨릭스는 바울을 심문하고 구금시켜 놓습니다. 그런데 후에 본국으로 벨릭스가 소환되고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해서 바울이 베드로에게 심문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가이사 황제에게 심문을 받기를 호소했습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기로 결정하고 마침 가이사랴를 방문한 유다왕 아그립바의 도움을 받아 바울을 로마로 보냅니다. 이는 하나님이 바울을 로마에 보내어 복음이 로마 황실에 전해져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있는 섭리였습니다 (19:21, 23:11). 바울은 불행한 일을 당했으나 그 일 때문에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고 배와 식량과 돕는 사람을 제공받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로 가게 된 것입니다.
<結言>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사람에게 환난도 허락하시지만 그것은 그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신8:16, 벧전1:6-7, 약1:2-4). 그 고난도 선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통로로 이용하시면서도 그 안에서도 형통하게 하십니다 (고전10:13).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롬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