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룻기1:1-22
<題目> 나오미와 룻의 신앙
<序言>
본서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사'(士師)에 해당하는 '쇼페트(שפט)는 '재판 하는 자'를 말합니다. 당시 사사는 백성들을 재판하는 행정관 직무를 담당했고 전시에는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 역할도 담당했습니다. 곧 사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지도자 위치에 있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일반적으로 여호수아가 죽은 후 웃니엘이 등장할 때부터(BC1367) 아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등장할 때 까지(BC1025) 대략 342년 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렇게 볼 때 사사는 신정시대와 왕정시대 사이에 이스라엘을 다스린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16). 본서는 사사시대에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 가정이 흉년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므로 겪는 우여곡절, 그런 상황 속에서 아내 나오미가 회개하고 며느리 룻과 함께 다시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가정이 당한 역경과 회복을 다루는 내용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게하는 내용입니다. 1장의 구성은 엘리멜렉 가정의 이주와 실패(1-5절), 나오미의 결심과 며느리에 대한 권면(6-14절), 나오미를 따르기로 결단한 룻의 신앙(14-18절), 나오미와 룻의 베들레헴 도착(19-22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엘리멜렉 가정의 이주와 실패 (1-5절)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사사시대에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에 엘리멜렉(Elimelech)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브랏'(אפרת)은 '에브라다'라고도 하는데 베들레헴의 옛 이름입니다 (창48:7). 엘리멜렉에게는 아내 나오미(Naomi)가 있었고 두 아들 말론(Mahlon)과 기룐(Chilion)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소출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이 때는 드보라와 바락의 활동으로 40년간의 평화가 끝나고 미디안 족속의 압제를 받은 때로서 미디안 사람들이 소출과 가축을 자주 약탈해 갔습니다 (삿6:2-4). 그 때에 엘리멜렉 가정은 흉년을 피해서 요단강 동편 모압 지방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가장(家長)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식구들은 계속 모압에 거하면서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압 여인들과 결혼까지 해서 살았습니다.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바'(Orpah)였고 한 여자의 이름은 '룻'(Ruth)이었습니다. 그렇게 10년 쯤 살게 되었을 때 말론과 기룐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엘리멜렉 가정은 가장과 두 아들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며느리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일가(一家)가 몰락하는 위기에 있었습니다.
① 엘리멜렉 가정은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습니다 (1-3절).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가장 엘리멜렉이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 땅은 하나님이 조상 때부터 언약적 약속에 의해 주신 땅입니다. 하나님이 그 곳에서 이스라엘 족속을 통해 영광 받으시려는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베들레헴(에브랏,에브라다)은 미래에 구속주를 보내시려는 계획이 있는 곳입니다 (미5:2). 그래서 그 땅은 하나님의 권고가 있는 곳입니다 (신11:11-12). 그 곳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이고 하나님의 성전과 말씀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 이 세우신 질서와 제도가 있는 곳입니다. 언약적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베들레헴'(לחם בית)은 그 이름의 뜻이 '떡 집'이라는 점만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한 곳입니다. 엘리멜렉이 그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베들레헴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결과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엘리멜렉'(אלימלך)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이름입니다. 그의 부모들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살려고 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그런 신앙을 갖지 못하고 육욕을 따라 우상숭배로 가득한 이방나라로 이주한 것입니다.
누구나 상황이 힘들 때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기울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광야를 통과하면서 곤비해지고 가나안 진격에 어려움이 예상되자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과 같습니다 (민 14장).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적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2:15-17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과 벗 되려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길입니다 (약4:4). 그 길은 곤고하고 가련한 길입니다. 예레미야17:5-6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비유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자는 강도에게 옷을 벗기고 거반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매를 맞고 한 데에 버려졌습니다 (눅10:30). 그리고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들이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아버지 집을 떠나 이방도시로 갔다가 허랑 방탕하다가 재물을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어서 그 지역 사람에게 붙어 돼지 치는 일을 도왔습니다.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불리고자 하지만 그 것조차도 풍족히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눅15:11-16). 롯이 세상 물질 따라가다가 패가망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을 선택하지 않고 소돔 고모라 성으로 갔다가 죄악의 관영하는 모습을 보고 심령이 상하였고 딸들이 타락하였고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 결국 그 곳에서 얻은 재물 다 잃고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죽었습니다. 그의 후손은 딸들과 사이에서 나은 모압과 암몬 족속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창19장). 디모데전서6:9-10에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② 엘리멜렉의 가정은 엘리멕렉이 죽은 후에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4-5절).
엘리멜렉 가정이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후 얼마 안되어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가장(家長) 엘리멜렉이 죽은 후 즉시 돌이켜 베들레헴으로 올라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가(一家)는 계속 모압 지방에 거했습니다. 아들 말론과 기룐은 모압 여인과 결혼까지 했습니다. 율법에 이방 여인과 혼인을 금했던 사실을 감안 한다면 그들은 여전히 세속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모압 지방에서 계속 살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10년 쯤 되어서는 말론과 기룐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서야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멜렉이 모압 이주를 결정할 때 나오미가 설득해서 막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엘리멜렉이 죽은 후에도 아들들을 권면하여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그 때 돌아왔더라면 두 아들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은 엘리멜렉이 죽었을 때가 돌이킬 기회였습니다. 그런데도 나오미와 두 아들이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롯도 소돔 고모라 가서 돌이킬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의 불법을 보고 심령이 상했을 때 가 돌이킬 기회였습니다 (벧후2:7-8). 그러나 그는 소돔 성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돌라오멜 4대 연합군이 소돔성을 치고 재물을 약탈해 가고 롯을 사로잡아 갔을 때가 돌이킬 기회였습니다 (창14:11-12). 민수기에 나오는 발람으로 말하면 나귀의 책망을 받을 때입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의 선 것을 보고 피하자 발람이 3번을 지팡으로 때리자 나귀가 항변하며 책망했고 이어 여호와의 사자가 책망했습니다 (민22:27-33). 그러나 발람은 돌이키지 않아 결국 망할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무릇 사랑하는 자를 징계합니다 (히12:8). 하나님이 징계하심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목적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 빨리 깨닫고 돌이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속히 돌이켜야 고난을 덜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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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오미의 결심과 며느리에 대한 권면 (6-14절)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①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합니다 (6-7절).
엘리멜렉 가정은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와 아들 말론과 기룐이 있었습니다. 말론은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하고 기룐은 모압 여인 오르바와 결혼했습니다 (4:10). 결국 10년쯤 지났을 때는 엘리멜렉, 말론, 기룐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권고하여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떠나 온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든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 때서야 그래서 두 며느리와 함께 하나님의 권고가 있는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환난과 궁핍을 당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그 하나님을 떠나 산 것을 원통히 여기며 그 하나님의 권고와 섭리 아래서 사는 하나님 백성에게로 돌아가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사는 것이 복인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다가 베들레헴에 양식이 풍성해졌다는 말을 듣고 더욱 힘을 얻어 결심을 굳힌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탕자비유를 를 보면 그와 같은 처치가 나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자기 분깃을 달라고 하여 멀리 이방도시로 갔습니다. 그는 허랑방탕하며 창기들과 함께 재산을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비방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 집에서 돼지 치는 일을 도우며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불리고자 하지만 그것 조차도 풍족히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곤고하고 가련한 처치에 놓였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풍성한데... 내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배불리 먹는데...' 하면서 아버지 간섭이 싫어서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을 후회하며 아버지 집으로 향해 올라갈 결심을 하고 아버지집을 향합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아들이 기진맥진하여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거리가 먼데도 달려가 안고 입을 맞추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내가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옷과 반지와 신발을 주고 송아지를 잡아 사람들을 청해다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눅15:11-24). 탕자는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의 간섭을 받으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안 것입니다.
'실패와 낙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는 찬송이 있습니다 (330장). 사람하는 사람을 잃고 병들고 가난하고 실패할 때는 은혜받을 만한 때입니다 (고후6:2).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때요 은혜 주시려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손을 내미는 때입니다 (히12:6).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우리에 대해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벧후3:8). 시편51:17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고 했습니다.
②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모압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8-13절).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후 유다 베들레헴에 하나님의 권고가 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베들레헴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두 자부(며느리) 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두 자부에게 다시 모압으로 돌아갈 것을 권면했습니다. 자기 어머니에게 가서 새로운 남편을 만나 평안히 살라고 했습니다. 두 자부는 울면서 시어머니와 함께 시어머니 백성에게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다시 한번 권면했습니다. 나오미 자신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남편으로 줄 자가 없고, 자신은 아들을 낳고자 할지라도 늙어서 남편을 둘 수 없고, 혹 남편을 두어 아들을 생산한다 할지라도 그 아들이 자라기 까지 기다리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오르바는 나오미에게 입맞추고 모압으로 돌아갔고 룻은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권고하고 있는 말의 배경은 유대인들에게 지켜지고 있었던 계대혼입법입니다. 계대혼입법(繼代婚姻法)은 맏아들이 결혼했다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주어 그 아들이 형의 후사가 되도록 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 동생이 너무 어리면 장성한 다음에 결혼해야 합니다 (신25:5-6). 나오미의 자부들은 남자가 없으니 나오미가 아들을 낳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나오미도 남편이 없으니 다시 결혼해야 하는데 결혼한다 해도 나이가 많아 아이를 낳을 수도 없을 뿐더러 혹 낳는다고 해도 그 아들이 장성하도록 기다려야 하는데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면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부들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하려 했습니다. 나오미의 행동은 자신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자부들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하여 자부들이 희생당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회개하고 돌이키는 심정을 가진 데서 나온 행동입니다. 13절 하반절에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환난과 고난을 당한 것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잘못 때문에 자기를 친 것인데 자부들이 그로 인하여 함께 고난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해 원망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고 모든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희생당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도망하여 바후림 비탈길에 이르렀을 때 사울 집 족속에 속한 시므이라는 사람이 따라오면서 티끌을 날리며 돌을 던지며 저주하기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때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 말은 들은 다윗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했습니다 (삼하16:5-13). 이것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뉘우친 자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반드시 긍훌히 여기십니다 (시편51:17).
3. 나오미를 따르기로 결단한 룻의 신앙 (14-18절)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유다 베들레헴으로 올라오면서 두 자부(며느리)에게 자기를 따라오면 소망이 없으니 자기를 따라오지 말고 모압 지방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라고 권고했습니다. 그 권고를 듣고 오르바는 작별인사를 하고 모압 지방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따라가겠다고 붙좇았습니다 (14절). '붙좇았더라'에 해당하는 '디베카'(דבקה)는 찰싹 달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는 룻이 얼마나 시어머니 나오미를 떨어지지 않으려 했는지 느끼게 하는 단어입니다.
나오미는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룻에게 다시 한번 강권합니다. 동서 오르바가 자기 신(神)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간 것처럼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룻을 데려가도 되겠는지 마지막으로 신앙적인 관점에서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를 떠나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오미는 룻의 고백을 듣고 룻의 결심이 굳은 것을 확인하고 그를 베들레헴에 데려가게 됩니다 (15-18절).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가게 될 경우 어떤 고난이 있을 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오미가 이미 세번에 걸쳐 모압 지방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면서 충분히 들었습니다. 모압 지방을 떠나 유다 지방으로 가려면, 첫째 희망을 버려야 합니다. 베들레헴에 가면 집이나 밭도 없습니다. 혼자 양식을 구해서 나이 많은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 결혼 생활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둘째 정을 끊어야 합니다.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을 떠나야 합니다. 자기를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 형제를 떠나야 하고 같이 자란 친구를 떠나야 하고 자기 족속을 떠나야 합니다. 셋째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 동안 모압에서 살면서 가졌던 생각과 습관과 풍속을 떠나야 합니다. 넷째 신(神)을 떠나야 합니다. 모압에서 섬기던 신(神) '바알'이나 '그모스'를 버려야 합니다 (민21:29, 25:3-5, 삿11:24, 렘48:46). 고대에 자기가 섬기던 신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한 것은 신앙적 결단입니다. 나오미가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15절)고 강권할 때, 룻이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절下)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7절) 라고 대답한 말을 보면 하나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시어머니를 따라가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 이주하여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는 것을 보면서 모압으로 이주해 온 것을 후회했을 것이고 유다 지방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들에서 자부들에게 자신의 신앙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어떤 언약을 하셨는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하나님 백성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안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고, 어머니 죽는 곳에 나도 장사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기를 원하나이다'고 한 것입니다. 마치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 같습니다 (마15:21-28). 룻의 고백은 나오미로 하여금 흡족하게 하기에 충분한 고백이었고 더 이상 돌아가라 강권하지 못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고백이었습니다 .
그야말로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를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난 것과 같습니다. 그가 지시할 땅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12:1, 히11:8). 모든 기독교인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① 나오미가 가는 곳에 자기도 간다고 했습니다 (16절).
16절에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라고 했습니다. 룻은 아오미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보다 낫고, 하나님 섬기는 백성과 사는 것이 우상 섬기는 백성과 사는 것 보다 더 좋고, 육신의 어머니 보다 신앙의 어머니가 더 좋고, 육신의 남편보다 신앙의 남편이 더 좋고, 육신의 아들을 낳는 것 보다 신앙의 계대를 이를 후사를 얻는 더 좋아서 나오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오미를 따라 갈 때 어떤 환난과 고난과 역경을 당할는지 알 수 없으나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인 것을 알고 따라 가는 것입니다 (시43:4, 16:3).
히브리서11:24-26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라고 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좇을 때에 그와 같은 정신으로 따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8:22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라고 했고 (막10:21), 마태복음16:24에도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4:20, 9:9).
② 나오미가 유숙하는 곳에 자기도 유숙한다고 했습니다 (16절).
16절에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가는 곳에 갈 뿐 아니라 그가 머무는 곳에 함께 머문다고 는 것입니다. 나오미를 따르다가 돌이키거나 앞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오미가 거하는 곳에 그와 함께 거하겠다는 것입니다. 룻은 실제로 나오미를 혼자 모시면서 결혼도 하지 못하고 생활고에 얽매여 이삭 줍는 일을 하는 가운데서도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나오미을 순종하며 나오미와 함께 거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가 뒤로 돌이켜서는 안 됩니다 (눅9:62). 히브리서10:38-39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처음에는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 힘들 때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안한 때는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 고난이 닥칠 때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기적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축복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지시를 잘 따랐습니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광야 길로 인하여 곤비하고 가나안 땅을 취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한결같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다시 애굽을 향해 돌아갔습니다 (민14:1-3).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이 오병이어(五餠二魚) 이적을 일으킬 때는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좇았지만 예수님이 더 이상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자 모두 떠났습니다 (요6:66-69). 그리고 신앙 생활을 하다가 앞서 가서도 안 됩니다. 주님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자기 지혜와 자기 방법대로 행하지 말고 주님이 가는 곳 까지 가고 주님이 멈추는 곳에 멈추어야 합니다. 결과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과 동행하며 순종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출애굽기14:13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했습니다.
③ 나오미가 죽는 곳에 자기도 죽어 장사된다고 했습니다 (17절).
17절에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평생토록 떠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나오미와 함께 있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 참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 할 각오를 한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빌2:8). 생명을 바쳐서라도 하나님의 아들된 위치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화를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요17:1). 그리고 자신을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마16:24-25).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도 그런 정신을 가졌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벤느고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게 되면 풀무불에 들어가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신앙을 양보하지 않았고,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굴에 들어가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신앙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단3:15-23, 6:10-16). 에스더는 바사(Persia)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라는 아하수에로왕의 조서를 바꾸기 위해 왕 앞에 나아가면 죽임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나아갔습니다 (에4:16). 신약의 바울도 복음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면 환난과 결박을 당하게 될 줄 알면서도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고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행20:22-24). 바울은 로마서14:8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4. 나오미와 룻의 베들레헴 도착 (19-22절)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가 룻과 함께 모압 지방을 출발하여 유다 베들레헴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베드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쯤이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보리를 가을에 파종하여 봄에 거둡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4~5월 쯤 되는 때였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자 온 성읍이 그들로 인하여 떠들썩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가 나오미가 아니냐!" 하면서 나오미가 돌아온 것을 인하여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수르 광야에 들어갔을 때 3일 동안 물을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 물이 써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을 '마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물이 없어 고통을 당하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출15:22-26). 그러나 나오미는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가 동행하든 안 하든 베들레헴으로 올라오려 했고 성읍 사람들이 '나오미'라 부르자 '마라'라 부르게 했던 것입니다. 아마 나오미의 심정은 돌아온 탕자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고 생각한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눅15:18-19).
나오미가 유다 땅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베들레헴 사람들이 모여들어 너무 반가워 '이가 정말로 나오미냐'고 했습니다. 그 때 20절에 보면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나오미'(נעמי)는 '기쁨' '즐거움' '희락'이라는 뜻이고, '마라'(מרא)는 '씀' '괴로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가 자기를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고 하라는 이유는 이어지는 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21절에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는 유력한 가문이었고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고 집과 밭이 있었는데, 모압 땅에 가서 10년 동안 지낸 기간에 모든 가족을 잃었고 가산을 탕진했다는 것입니다. 풍족한 가운데 있었는데 이제 모든 것을 다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징벌하셨고 전능자(שדי)가 자기를 심히 괴롭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고 풍족하게도 하고 가난하게도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징계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3절에서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라고 한 표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유다 땅은 하나님이 유다 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신 땅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땅을 유다 백성들을 통해 제사장 나라를 세우고 그들로부터 영광을 받으려는 계획을 가진 땅입니다. 그래서 유다 땅은 하나님의 권고가 있는 땅입니다 (신11:11-12). 그 곳은 하나님이 언약적 목적과 계획과 경륜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사와 율법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이 세운 제도와 질서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섭리와 축복이 있는 곳입니다. 특히 베들레헴은 오실 구원자를 보내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서 (미5:2), '베들레헴'(לחם בית)이란 이름의 뜻이 '떡 집'이라는 점을 보아 그 곳은 하나님이 육신적인 필요뿐 아니라 영적인 은혜가 풍성한 곳입니다. 이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 섬기는 백성과 함께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이 주신 언약적 목적을 바라며 살겠다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모압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그 고난이 자기의 잘못으로 인하여 온 것이라 생각하고, 신앙적 가치를 떠나 물질적인 가치를 따랐던 것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나오미는 결국 며느리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에 돌아와 남편의 친족이자 베들레헴의 유력한 보아스의 도움으로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얻어 살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살게 되었습니다. 후에 며느리 룻이 보아스와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데 사람들이 나오미가 낳았다고 해서 '오벳'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오벳'(עובד)은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오벳이 나오미를 평생 섬길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나오미는 처음엔 며느리 룻으로부터 봉양을 받고 그 후엔 사위 보아스로부터 봉양을 받고 그 후엔 손자 오벳으로부터 봉양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오벳에 대해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는데 그대로 됩니다. 오벳은 장성하여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게 됩니다. 곧 나오미는 다윗의 조상이 되고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물직적, 육체적, 사회적, 영적인 성공을 한 것입니다 (4:13-21).
우리가 지난 동안 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고 마음으로 심한 갈등을 겪었고 영적으로 심한 곤고를 당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하고 하나님 백성과 함께 교제하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공유하므로 즐거워하는 것을 떠나 물질을 따라 세상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17:5-6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고 했습니다 (창14:11-12, 눅10:30, 15:11-16).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한 것이 아닐지라도 고통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간섭을 느끼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호세아6:1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結言>
룻은 비롯 이방 여인이지만 언약적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절)라는 고백은 그가 '여인의 후손' 곧 아브라함의 자손된 축복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열망이 나타난 고백입니다 (창3:15, 갈3:16,29). 그래서 결국 유다의 혈통을 가진 보아스(유다의 7대손)와 결혼하여 다윗(보아스의 3대손)의 조상이 되고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언약의 계대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룻4:21-22, 마1:1-6).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여자 네 사람, 다말과 라합과 룻과 밧세바가 나오는데 모두 룻과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행하시려 하는 구원 역사를 알고 그 역사에 룻과 같은 신앙으로 참여하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