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룻기 3:1-18
<題目> 룻을 위한 나오미의 계획
<序言>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안식을 얻게 하기 위해 보아스와 결혼할 것을 제안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순종하여 그 지시대로 보아스에게 접근합니다. 보아스는 룻의 요청을 수락하지만 합법적이고 정당하고 덕스럽게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본 장에서는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의 의중과 행위가 함께 나타납니다. 그들의 신앙과 덕행은 참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을 이루는 조상이 될만 하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본 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학적으로 조심해야 할 부분은 세 사람에 대한 행위를 지나치게 비유(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지나치게 보면 나오미를 성부 하나님으로, 룻을 성자 예수님으로, 보아스를 성령님으로 비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이 비유와 상징으로 나타낼 때도 있지만 룻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룻기의 목적은 '아브라함 때부터 언약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여 주는데 있습니다. 그 소재로 룻과 보아스가 어떻게 결합하게 되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 장의 내용 구성은 나오미의 제안(1-4절), 룻의 순종(5-7절), 보아스의 처리(8-15절), 룻의 보고(14-18절)로 전개됩니다.
<本論>
1. 나오미의 제안 (1-4절)
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나오미는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해 복되게 하고자 했습니다 (1절). 나오미는 며느리가 결혼을 하여 남편과 함께 가정을 이르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룻이 호의를 얻은 보아스와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친족으로서 기업(基業) 무르는 법(法)의 의무를 감당할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절). 나오미가 보아스를 '친족(親族)'이라고 한 것은 '기업무를 자'라는 의미를 두고 한 말입니다. '기업무를 자'라는 의식 가운데는 남편 엘리멜렉이 잃었던 재산을 회복해 주고 (레25:25-26), 엘리멜렉의 계대를 이어 줄 자라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신25:5-6). 나오미는 보아스가 혈연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신앙적로나 남편 엘리멜렉의 잃었던 재산을 회복해 주고 엘리멜렉의 계대를 이어 줄 수 있는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엘리멜렉의 친족으로서 합법적으로 룻과 결혼하여 엘리멜렉의 계대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와 결혼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고 보아스의 타작 마당으로 가서 보아스가 타작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발치 이불을 들고 그 옆에 누우라는 것입니다 (3-4절). 유대인들의 타작 풍습은 곡식을 마당에서 타작하여 떤 다음에 타작하던 사람들이 함께 연회(宴會)를 한다고 합니다. 그 연회가 끝난 다음에는 일꾼들이 다 돌아가게 되고 주인은 남아서 곡식더미를 지킨다고 합니다. 나오미의 지시는 보아스가 연회 후에 곡식더미를 지키기 위해 혼자 남아 잠자리에 들 때 옆에 누우라는 것입니다. 이는 보아스에게 적극적으로 청혼을 하라는 지시입니다. 당시에는 '계대혼인법(繼代婚姻法)'이 있었습니다. 계대혼입법은 맏아들이 결혼했다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미망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형의 후사가 되도록 하는 법입니다. 만일 동생도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의무를 이행하는 법입니다. 그런 법이 적용되는 경우 미망인은 결혼 상대자에게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신25:5-10). 그리고 유대인들의 결혼은 일반적으로 공식적인 혼례없이 가정끼리 서로 의논하여 합의하면 결혼이 성립되었습니다. 창세기24장과 28-29장에 나온 이삭과 야곱의 결혼이 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그런 관념에 의해 그와 같은 지시를 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나오미의 지시는 당시 관습으로 미루어 볼 때 이해가 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됩니다. 보아스가 발치에 누운 룻을 보고 자기 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그에게 기업무를 의중을 물은 다음에 만일 그가 무르지 않으면 자기가 무르겠다고 한 점을 보면 나오미의 지시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13절). 그것은 후에 보아스가 더 가까운 친족과의 문제를 성읍 장로들이 참관한 가운데 해결한 것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4:1-10). 나오미의 의중은 훌륭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보아스 만큼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보아스를 직접 찾아가서 기업을 무를 의무를 이행해 달라고 요청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이삭에게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여 이삭의 축복을 야곱이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눈이 어두운 것을 이용하여 야곱에게 에서처럼 가장을 하고 에서처럼 속여서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 에서가 털이 많으므로 에서의 옷을 입히고 염소새끼 털로 손과 목을 꾸며 속인 것입니다 (창27:1-29). 리브가와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겠다는 생각은 좋지만 방법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인본주의 방법을 쓰지 않아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에게 축복받게 할 때 므낫세로 하여금 장자 축복을 받게 하려고 야곱의 오른 손에 서도록 했으나 하나님이 역사하여 야곱의 손을 어긋맞겨 얹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에브라임이 장자 축복을 받았습니다 (창48:10-20).
목적이 옳으면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교회사에서 중세 카톨릭 내에 '예수종회'가 있었습니다. 예수종회(宗會)란, 익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창설한 단체로서 중세 개신교의 개혁 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일어난 로마 카톨릭 내의 자체 개혁 운동입니다. 교리는 종래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자체 내의 부패를 정화 시키려는 노력으로 일어난 단체입니다. 그들의 규율은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개혁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실패한 데에는 3가지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키마벨리즘(machiabellism)과 프라버빌리즘(prababilism)과 맨탈 리절베이션(mental reservation)입니다. 그 중 마키마벨리즘은 '목적이 가하면 방법도 가하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목적이라면 어떤 방법도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상은 옳지 못한 사상입니다. 목적이 옳고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모든 방법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목적이 옳아야 하는 것처럼 방법도 옳아야 합니다. 우린 어떤 경우에라도 가장 선한 방법을 선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2. 룻의 순종 (5-7절)
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6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의 선대함에 대해 듣고 룻에게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누우라고 지시했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그런 지시를 한 것은 룻을 결혼시켜 안식을 얻게 하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룻의 결혼 상대를 보아스로 선정한 것은 보아스가 기업 무를 의무와 권리가 있는 친족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가 그 의무 감당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에게 청혼할 것을 지시함에 있어서 보아스가 잠을 잘 때 발치 이불을 들고 누우라고 한 것은 당시 혼인 풍습이 반영된 것 같습니다.
룻은 보아스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보아스의 타작 마당으로 가서 보아스가 연회로 인해 마음이 즐거워 노적가리(곡식더미) 곁에 눕는 것을 보고 가만히 가서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웠습니다. 룻이 그렇게 한 것은 정욕적인 욕망 때문이거나 보아스와 결혼하는 것이 육신적으로 좋기 때문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10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내 딸아'는 표현을 쓰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났던 것 같습니다.
룻이 그렇게 한 것은 나오미의 말에 그가 기업무를 자라는 말을 듣고 나오미의 말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축복에 참여하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삭과 야곱을 이은 유다의 후손 가운데서 왕과 그리스도가 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고 보아스가 그 언약을 이을 사람이라는 것을 들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보아스는 살몬이 라합에게서 낳은 유다의 7대손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의 3대손이 다윗 왕이고 그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나십니다 (마1:5-6). 1장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면 룻은 그 언약적 축복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정이 컸습니다. 사실은 그 목적 때문에 남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압에서 유다 베들레헴까지 와서 시어머니를 공궤한 것입니다. 룻은 그 이유 때문에 시어머니의 지시를 따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한 정신입니다.
3. 보아스의 처리 (8-15절)
8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14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15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룻이 나오미의 지시를 따라 보아스가 잠자리에 들 때 가만히 이불을 들고 발치에 누웠습니다. 보아스가 밤 중에 놀라 깨어 보니 그가 누워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옷자락으로 덮어 달라는 것은 결혼을 청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곧 일생을 맡기겠으니 보호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렇게 요구할 수 있는 근거는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라는 것입니다 (8-9절). '기업(基業)무를 자(者)'란 시아버지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이주할 때 팔아 버린 땅을 다시 회복시켜 줄 의무를 가진 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엘리멜렉 아들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들을 낳아 후사를 잇게 해줄 의무가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곧 룻은 자기 시아버지와 남편의 잃었던 소유를 되찾아 주고 자기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줄 자라는 것입니다. 룻의 요청에 대해 보아스는 지혜롭고 정직하게 대처했습니다.
①룻을 위로와 칭찬을 했습니다. 첫째,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고 했습니다 (10절). 룻이 시아버지와 남편의 기업을 잇기 위해 젊은 자를 선택하지 않고 나이 많은 자를 선택한 것을 칭찬하는 말입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도 남편을 사랑했지만 남편이 죽은 다음에도 남편에게 인애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룻은 남편이 죽은 다음에도 남편을 위해 시어머니를 잘 봉양했고, 남편을 위해 남편의 기업을 이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젊기 때문에 젊은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데 젊은 남자를 좇지 않고 나이 많은 보아스를 좇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정욕과 허영으로 하지 않고 기업 상속자를 얻으려는 믿음이었습니다.
둘째,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11절). '현숙(賢淑)한 여자'는 품행이 어질고 깨끗한 여인을 말합니다. 룻은 성품과 언행이 온유하고 덕스럽고 헌신적이었습니다. 룻은 보아스 자신뿐 아니라 온 성읍 사람들도 덕망있는 여인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숙한 여인들은 사람들의 호의를 얻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잠언31:10에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고 했습니다. 룻은 언행도 덕이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으니 성읍 사람들이 더욱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잠언31:30-31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3:3-4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정결한 행실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고후 11:2).
한편 사람의 장점을 칭찬해 주는 보아스의 인품과 언행 역시 훌륭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여 힘있게 해야 합니다. 이사야40:1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종말을 당하여 환난이 심한 이 때에 더욱 위로하고 소망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7-18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②룻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고 했습니다 (11절). 룻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룻의 마음을 평안케 했을 것이고 안심하게 했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의도가 정욕적인 데 있지 않고 기업을 회복하고 계대를 이어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소원대로 복 주시기를 축복해 준 동시에 (10절), 자기도 그 소원대로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룻에게 평안을 주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③룻의 요청을 합법적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자신도 기업 무를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이긴 하지만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그 친족에게 기업 무를 책임을 이행할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확인해 보고 만일 그가 이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자신이 그 책임을 이행하겠다고 했습니다 (12-13절). '기업 무르는 법'에서 그 책임을 이행할 자는 가장 가까운 친족 곧 근족입니다. 가장 가까운 친족이 기업 무를 책임에 대한 의무와 권리가 있지만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의무와 권리는 다음 가까운 친족에게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가정에 대한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으나 더 가까운 사람의 의중을 타진해 보고 그가 의무 이행을 거부할 경우에 자신이 의무를 이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급한 감정을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고 차분히 이성을 따라 공명 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입니다. 빌립보서2:14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④룻의 방문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밤에는 그 곳에서 자게 했지만 새벽에 사람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에 일어나 돌려 보냈습니다 (14절). 그것은 사람들 보기에 떳떳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많으므로 조심하려는 것입니다. 밤 중에 돌아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고 날이 밝은 다음에 돌아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므로 괜한 소문을 퍼뜨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정욕적인 불의를 행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되면 오해가 발생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룻의 인격을 위해서, 또한 자신의 명망을 위해서, 그리고 룻과 보아스 사이에 선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방해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덕을 세우려는 의도입니다. 로마서14:16에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⑤룻에게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룻을 돌려 보낼 때 겉옷에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이워 주었습니다 (15절). '겉옷'(מטפחת)은 얼굴이나 몸을 가리는 너울이나 면박을 말합니다(veil). '보리 여섯 번'은 탈굼(Targum)역에는 '여섯 스아'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되로 약 2말 3되 정도 됩니다. 보아스가 그렇게 행한 것은 나오미를 생각해서였습니다 (17절).
믿음 지킨 자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돕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정신입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연보를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도를 섬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기쁨으로 동정한 것은 그들로부터 신령한 복음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롬15:25-2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도 예루살렘에 어려움 당한 성도들을 위해 구제 연보를 요구할 때 마음에 정한대로 하되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고후9:8-9).
하나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긍휼히 여긴 자는 절대로 그 상을 잃지 않습니다. 마태복음10:42에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긍휼을 행치 않는 자는 그에 대한 보응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며 (마25:33-43),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는 긍휼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2:13).
4. 룻의 보고 (16-18절)
16 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
17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18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룻이 보아스에게서 돌아왔을 때 나오미가 보아스를 만난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한 행한 모든 일을 모든 일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보리를 여섯번을 되어 주면서 시어머니에게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는 말도 했습니다. 나오미는 모든 정황을 듣고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일단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보아스가 반드시 기업을 무르기 위해 노력할 것과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실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해 가시는지 주목하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전3:1). 사람이 노력한다고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127:1, 전9:1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잠16:9).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안연히 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30:15). 모세가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했습니다 (출14:13).
<結言>
본 장은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가진 신앙과 인격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언약적 계대를 이어 갈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대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은 인격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