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잠언17:1-28
<題目> 실천적 지혜
<日時> 2009. 12. 1~ 매일저녁
<講解> 차용철 목사
<序言>
전 장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거로 지혜의 다양한 국면을 다루었습니다. 본 장에서는 생활 속에서 지혜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지를 다루었습니다. 특히 지혜의 윤리적 성격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구조 실천적 삶의 지혜 1(1-9절), 실천적 삶의 지혜 2(10-28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실천적 삶의 지혜 1 (1-9절)
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2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4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7 지나친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8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1절). 한 조각의 떡만 있어도 서로 화목하는 것이 육고기가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낫습니다. 15:17에는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약간의 채소를 먹으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육고기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가난해도 서로 화목한 것이 부요하면서 불화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적인 음식이나 재산에서 오는 고통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 큼을 말해 줍니다.
2절에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부모를 욕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계 질서를 파괴하는 자로 간주되어 공개적인 처형까지 당하기도 했습니다 (신21:18-19). 반면에 종(노예)이라 해도 주인에게 충성하는 지혜로운 자는 아들들과 같은 유산을 물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창15:3, 삼하16:1-4, 19:24-30). 아브라함이 오랫 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자 종 가운데 신임할 만한 다메섹 사람 엘르에셀을 후사로 삼으려 했던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15:2-3). 신분과 위치와 직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혜로움입니다.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도가니와 풀무는 뜨거운 불로 금광석을 녹여서 금이 분리되게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연단을 시킵니다. 가난, 질병, 사고, 번민 등의 고통으로 시련 가운데서 인격을 온전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 성화를 이루게 하고 사역을 감당하는 자가 되게 하고 영화로운 자가 되게 하고 영적으로 부요하게 합니다 (약1:3-4, 벧전1:7, 계3:18). 한마디로 장래에 평안과 소망을 주려는 것이고 마침내 복 주시려 하는 것입니다 (렘29:11, 신8:16). 욥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욥23:10). 하나님이 그런 방법을 사용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6-28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부르시는 방법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구원을 위한 소명의 방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부른 자를 성장시키는 성화의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시련이 아니면 죄가 그쳐지지 않고 낮아지지 않고 깨어지지 않고 죽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통해 우리의 모난 인격의 부분들이 깎여 원만해지고 사역을 감당할 만한 믿음과 지혜와 능력이 생기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습니다 (시119:71).
4절에 "악을 행하는 자는 궤사한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악한 말에 귀를 기울이고 거짓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악한 자는 지어낸 말이나 남을 험담하는 말을 곧이 듣고 그 말을 하는 것을 즐거워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 전체의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7절에 "분외의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치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분외(分外)의 말'은 지나친 말, 거만한 말, 주제 넘는 말을 말합니다. 신앙없는 사람이 주제넘는 말을 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는데 하물며 신앙있는 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떻게 합당하겠습니까? 9절에는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는 자는 친구를 이간하는 것이 됩니다. 10:12에도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4:8에도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는 자가 신앙이 있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마태복음7:1-5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했습니다.
5절에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고 했습니다. 14:31에도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지 않고 조롱하는 자는 가난한 자를 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섭리 가운데 연단시키기 위해 가난한 가운데 두신 상황이라면 하나님의 섭리를 멸시하는 행위가 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10:41-42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히13:2).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는 가난한 자를 존중합니다. 야고보서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긍휼을 행치 않는 자는 긍휼없는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음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약2:13-17).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24:17에도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형벌 받는 자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욥의 경우도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바로 세워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 바벨론을 통해 징계했는데 바벨론은 그들을 원욕대로 쳤기 때문에 그 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합1:11). 두로도 예루살렘이 망하는 것을 보고 '아하 좋다'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겔26:1-6). 암몬도 유다가 포로잡혀 가는 것을 보고 좋아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겔25:1-7).
6절에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고 했습니다. 25절에는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노인'(히.제케님)은 조상을 말하며 '손자'(히.메네 아님)는 '아들들의 아들'로서 자손을 말합니다. 조상이나 아버지에게 있어서 자손이나 아들의 창성은 그들의 자랑과 기쁨이 됩니다. 부모에게 있어서는 자식이 의롭고 성실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처럼 담대함이 없는 것입니다. 시편127:5에 "이것이 그 전통(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효도는 자식이 하나님을 섬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영적인 스승과 제자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8절에 "뇌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23절에도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뇌물은 정당한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당하게 드린 선물입니다. 뇌물은 뇌물을 받는 자에게 보석같이 여겨져 원하는 일을 들어주게 됩니다. 뇌물은 받는 자의 분별력을 흐려지게 하고, 주는 자의 원욕을 정당화 시켜 주는 것이 되고, 공동체에 막대한 손해를 주는 것입니다 (출23:8).
2. 실천적 삶의 지혜 2 (10-28절)
10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11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받으리라
12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13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14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15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16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17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19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20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21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23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24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25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26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은 선하지 못하니라
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28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10절에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 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잘못을 할 때 책망을 하면 그 한마디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더욱 겸손해져서 잘못된 길에서 돌이킵니다. 하지만 미련한 자는 책망을 하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 합니다. 그 길에서 돌이키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미워하고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를 책망하고 미련한 자는 책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련한 자를 책망하면 책망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오고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11절에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고 했습니다. 악하고 미련한 자는 교만하고 자기 이익만 추구합니다. 그래서 군주를 순종하거나 군주에게 협력하지 않고 반역을 일삼습니다. 그렇게 되면 군주는 군사를 보내어 진멸하게 됩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도 교만한 자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적 재해와 몸의 질병으로 징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를 보내어 심판을 경고하기도 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의 이익만 일삼는 행동을 하다가 결국 망하게 됩니다.
12절에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악하고 미련한 자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미련한 자들은 사리에 대한 분별력이 없이 자신의 생각이 중심이 되어 행동합니다. 그를 가까이 하여 따르면 큰 손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차라리 새끼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자는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5:33에는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고 했습니다.
13절에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으면 그에 대한 보응을 받게 됩니다. 선을 선으로 갚지 못할지언정 배은망덕해서는 안됩니다. 구약에 나오는 나발은 다윗에 대해 선을 악으로 갚은 사람입니다 (삼상25:21). 나발은 자기에 대한 욕심만 있고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자신이 유익을 보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마태복음5:39-44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서12:17-19절에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5에도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3:9에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도 주의해야 하거늘 선을 악으로 갚아서는 더욱 안될 것입니다.
14절에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저수지나 댐의 작은 틈새는 그대로 두면 댐 전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다툼은 작은 불일치에서 시작되지만 그 결과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합니다.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는 법정소송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법정 소송으로 가기 전에 다툼을 그쳐야 합니다. 성도들간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 법정에 나아가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선한 양심으로 살아야 할 자들이 우상성기는 세속적 법으로 재판을 하는 판결에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세상 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보다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고전6:1-6). 영적인 측면에서 양심이 마비되어 영적인 흑암을 만나기 전에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려 하다가 형제에게 원망받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송사하는 자가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둔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는 한 호리라도 갚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5:23-26). 재판까지 가도 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영적인 흑암에 갇힌 다음에는 그 곳에서 나오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15절에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간의 판단을 뒤집어 놓아 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는 하나님이 혐오하는 일입니다 (24:24, 출23:7, 사5:23). 이사야5:20에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고 했습니다. 마태복음5:37에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16절에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는 지혜를 물질로 사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일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통해 얻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선물로 얻는 것이지 물질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안수하므로 성령을 주었습니다. 안수받는 자들이 성령의 나타남을 경험했습니다. 시몬이라는 사람은 사도들의 능력을 보고 자신도 그 능력을 얻고 싶어서 돈을 주고 사려고 했습니다 (행8:18-19).
17절에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고 했습니다. 18:24에는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고 했습니다. 신앙관이 같고 가치관이 같은 친구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대표적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시기하여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서로 생명의 언약을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다윗이 사울이 보낸 군대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다윗은 훗날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쟁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한 다음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데 그 때 살아남아 있던 므비보셋을 찾아 왕궁에서 지내게 했고 사울과 요나단의 재산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삼하9장). 다윗과 요나단은 생명을 맹약한 친구로서 끝까지 신의를 지켰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끊을 수 없는 우정을 가지게 된 이유는 두 사람의 정신이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투철했고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용감무쌍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땅에 주둔한 블레셋 수비대를 격파했습니다. 또한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면서 병기든 소년 한 사람을 데리고 블레셋 진지에 들어가면서 20여명을 죽이므로 블레셋 군은 지기들끼리 찌르는 자중지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사울이 군사를 데리고 오자 블레셋 군이 패주했습니다 (삼상13-14장).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하면서 혼자서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블레셋 가운데서 구원했습니다 (삼상17장). 이와 같이 신앙의 정체성이 같고 사역의 필요성을 공유한 친구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보다 끈끈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했습니다 (요15:13). 목회자와 성도간, 성도와 성도간에 이런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18절에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6:1-5을 반영한 내용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타인의 보증을 섣불리 하므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보증서는 자체를 무작정 금하는 것이 아니라 보증서는 행위에 그만큼 신중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보증을 서 주려고 하는 대상의 신용도나 보증을 서는 자신의 채무 이행 능력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나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관계를 파괴하는 자입니다. '문'은 입에 대한 상징으로서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거만한 말을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20절에는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고 했습니다. 불의한 자는 거짓된 마음에서 비롯된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 내므로 상대를 해합니다. 27-28절에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성품이 안존한 자는 자제력을 가지고 침착하기 때문에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급하게 대답하지 않으며 먼저 생각한 다음에 말을 합니다. 미련한 자가 침묵하므로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침묵하면 어리석음을 감출 수는 있습니다. 미련한 자가 급하게 말하는 것은 자신의 미련한 시각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1-22절에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아버지의 충고를 듣지 않고 계속적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므로 아버지의 근심거리가 됩니다. 마음과 심령의 즐거움은 육체의 건강을 증진시키나 근심은 육체의 건강을 해합니다. 삶에서 그만큼 마음의 평안이 필요한 것이고 심령의 만족이 중요한 것입니다.
24절에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시선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시선을 땅 끝에 둡니다. 분명한 목적에 시각을 고정시키지 않고 근시안적으로 살아갑니다. 베드로후서1:9에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은 그 앞 절에 말하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입니다 (벧후1:4-7). 미련한 자는 내세를 생각 않고 신앙 인격의 중요성을 생각지 않습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육체의 욕구를 이루는 것만을 목적하고 살아갑니다.
26절에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이 선치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귀인'은 도덕적으로 인격이 출중한 자를 말합니다. 의인과 귀인을 벌하는 것은 도덕적 기준과 사회의 기강을 흐트려 놓은 것이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공의에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이사야5:20에는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5:37에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結言>
지혜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에 속한 것이고 그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 있고 하나님의 사역에 나타났습니다. 창조사역과 구속사역뿐 아니라 성도를 다스리는 모든 경륜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말씀과 사역을 좀더 앎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를 터득하여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가 삶의 전 영역에 나타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뜻대로 살고 성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성공을 가져오는 듯한 세속적인 지혜를 추구하지 말고 영원한 성공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