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잠언29:1-27

<題目> 의인의 통치


<序言>

  지금가지 취급해 온 악인과 의인의 개인적인 특성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동시에 더 나아가 지혜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통하여 다스리는 이상적인 나라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조망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참된 번영의 요체와 그 결과(1-22절),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삶(23-27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참된 번영의 요체와 그 결과 (1-22절)

 

  1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3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와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느니라

  4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6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

  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8 거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하게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9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10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11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12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

  13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16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17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19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따르지 아니함이니라

  20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21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

  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1절에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목이 곧다는 것은 멍에를 쓰지 않으려고 목을 이리 저리 뒤흔드는 완고한 황소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메세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과 신앙 양심과 섭리를 통해 자주 옵니다. 그 책망을 무시하는 자는 패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되풀이되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했던 엘리와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이 실례입니다 (삼상2:25).  

 

  2절에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의로운 자가 권좌에 있게 되어 그 세력이 커지면 백성들이 즐거워 합니다. 하지만 악인이 권세를 잡게 되면 백성들이 탄식합니다. 백성들이 공의가 시행되지 않으므로 혼탁해 지고 도탄에 빠지게 되어 신음하게 됩니다. 16절에는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거니와 의인은 그들의 멸망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바벨탑 사건과 노아의 사건과 소돔 고모라 사건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타락하게 되고 죄가 많아집니다. 그에 따라 멸망과 파멸이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의로운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되고 그들의 멸망을 목도하게 됩니다. 죄가 파멸을 부르는 것입니다.

 

  3절에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지배 원리를 추구하는 자는 바른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를 지도하는 자에게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창기와 짝하는 자처럼 옳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자는 재물을 잃어버리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고 공동체의 기쁨이 되고 재정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4절에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고 했습니다. '뇌물'(תרומות)은 백성들이 바치는 공물을 말합니다 (bribes-NIV). 때로 왕들이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려고 거대한 건축물들을 만들기 위해 많은 세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백성들이 싫어하게 되고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세워 달라고 할 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왕의 제도에 대해 말하면서 왕이 세금징수를 통해 고통스럽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삼상8:11-18).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북쪽 10지파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 나라를 갈랐던 이유도 부역과 세금에 관한 원성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이 20년동안 왕궁과 성전을 짓기 위해 많은 노역과 세금을 요구하므로 백성들이 피곤했는데 그 아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보다 더 강하게 다스리겠다고 하니까 싫어한 것입니다 (왕상12:1-20).  

 

  5절에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아첨하는 것은 어떤 사악한 계획을 가지고 그것을 가장하기 위한 행위로서 상대를 기쁘게 하는 말입니다. 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대상자를 기분 좋게 하려고 높이는 말입니다.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으로 아첨하는 말은 그 사람이 망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대상자는 아첨하는 말에 속아 잘못 판단하고 잘못 결정하고 잘못 처리하므로 실패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거짓으로 아부하고 아첨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6절에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악인은 성품적으로 습관적으로 고질적으로 범죄합니다. 그런 범죄는 결국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는 올무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의로운 자는 범법에서 벗어나 양심이 가책에서 자유롭게 되고 멸망의 두려움을 갖지 않기 때문에 기뻐 노래합니다. 영속적인 기쁨을 누립니다.

 

  7절에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회에나 궁핍이 절정에 이르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인은 그런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돕습니다. 하지만 악인은 그런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보지도 못하고 본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악인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8절에 "모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만(侮慢)한 자'는 남을 업신여기고 잘난 체 하는 자를 말합니다. 모만한 자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대상을 배려하지 않고 공동체를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자는 미련한 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하고 공동체의 분쟁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오히려 분노를 차분히 가라앉힙니다. 9절에는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자가 미련한 자를 경멸하든 인자하게 대하든지 미련한 자와 논쟁하면 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련한 자는 인격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고 인격적인 해결 방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는 아무리 인격적으로 대하는 노력을 해도 쉽게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자는 쉽게 분노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런 자와 관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11절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다 드러내지만 지혜로운 자는 제어합니다. 22절에는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분을 품고 노를 발하는 것이 습관화된 자를 말합니다. 분노가 기질처럼 된 자는 항상 다투고 범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분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지 말고 마음에서 잘 삭혀 나가야 합니다. 분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육체의 부패한 죄성이기도 합니다 (갈5:19-20). 그래서 누구에게나 분노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질과 성품에 의해 분노를 잘 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심리적 요인으로 인하여 분노를 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리적 분노는 피상적으로 보면 '자기방어기재'라 할 수 있고 본질적으로 보면 '자아보존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은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거나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본능적인 욕구가 거부되거나 기본적인 신념들이 무시될 때 느끼는 분한 감정으로서, 그것들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한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분노의 원인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감정, 지배받고 있다는 감정 때문에 생깁니다. 그 분노가 지속되게 하는 관념은 아무도 자기를 받아 주지 않는다는 생각, 아무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 하나님이 고통을 막아 주지 않았다는 생각 들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려면 다른 사람의 행동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에 몰입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려고 해야 합니다. 분노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분노 다스리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분노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했고 (약1:20), 마귀로 틈을 타게 했고 (엡4:27), 다툼을 일으켰고 (잠15:18), 우리로 하여금 평안을 얻지 못하게 했습니다. 분노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치유받아야 합니다.

 

  10절에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악인들은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해하려 합니다. 처음부터 살인자였던 사단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죽이려 합니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와 싸워 이기려 하다가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신앙을 가진 자들과 싸워 이기려 합니다 (계6:2). 요한계시록12:17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세상 정권을 이용하여 모세를 죽이려 했고 환난을 통해 욥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것이 사단의 성품입니다.

 

  12절에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일단 지도자가 거짓말과 아첨하는 말을 들어주기 시작하면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 것이 통하는 줄 알고 지도자의 호의를 얻기 위해 거짓말과 아첨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관원들 전체가 그같은 악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피지배 계급에서도 속임수를 사용하기 시작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공동체 전체가 순식간에 부패와 타락이 창궐하게 됩니다. 그 결과 지도자도 결국 위치를 잃게 됩니다. 14절에는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했습니다. 지도자가 거짓과 속임수에 속지 않고 신실하게 판단하여 정의가 실현되게 하면 관원들도 따르게 되고 백성들도 정의를 따르게 됩니다. 그 결과 지도자의 위는 더욱 견고해 집니다.

 

  13절에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삽니다. 포학한 부자와 온유한 빈자, 악한 부자와 정직한 빈자가 함께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부정직한 부자에게도 정직한 빈자에게 동일하게 생명을 주고 삶을 유지하게 합니다. 마태복음5:45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일반은총에 있어서는 선인과 동일하게 대하시는 것은 자비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악인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악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그들을 심판 때까지 두신 것은 적당한 때에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16:4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일정 기간 동안 그대로 두시므로 선인들을 연단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심판 때에 그들에 대한 심판을 보여 주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17절에는 "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자식이 잘못할 때에도 그대로 두면 악한 습관이 인격화 되어 악하게 살아가게 되며 결국에는 부모를 욕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13:24에는 "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사소한 잘못에 함부로 대하므로 자녀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내재되게 하고, 중요한 잘못에는 관용하므로 자녀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하나님 앞에 치명적인 죄를 범하거나 인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만한 잘못을 할 때에 엄히 훈계하거나 징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가 잘되게 하는 것이고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는 길입니다.  

 

  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묵시'(히.하존)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계시를 말합니다 (사1:1. 나1:1). 묵시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가 내리지 않는다는 말과 계시가 주어졌을 때 백성들이 무관심하여 듣지 않고 지키지 않는 말의 의미가 있습니다. 헌데 뒤에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는 문구와 대조하여 생각해 보면 후자의 의미에 속할 것입니다. '방자히 행하거니와"(히.이파라)는 벌거숭이가 되거나 멸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무관심하거나 거부한 백성은 입은 옷까지 벗기움을 당하게 되고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계시를 무시한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 같은 나라들의 침입으로 모든 소유를 약탈당하고 포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호세아4:6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였도다"한 말씀과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한편 현대어 성경에서는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할 수 밖에 없다."고 번역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묵시'를 꿈(vision- KJV, NASB)으로 번역하고 '방자히 행하거니와'는 제 멋대로 억제되지 않는다는 의미(unrestrained- NASB)와 멸망한다는 의미(perish- KJV)로 번역했습니다. 비전은 인생의 밑그림, 청사진으로서 인생의 목표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억제하지 않고 제 멋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망할 짓만 골라서 하다가 결국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비전이 없는 사람은 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젼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은 삶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삶의 목적을 가지게 하고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삶의 열정을 증진시키고 기능을 극대화시켜 줍니다. 그러기에 비전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을 접하더라도 우왕좌왕하지 않으며 갈등하지 않으며 인내하게 됩니다. 요셉은 자기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구원을 성취할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에, 형들의 배반과 보디발 아내의 무고와 술 관원의 배신과 감옥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37:5-9, 41:41-45,45:7-8). 욥도 하나님께서 정금같은 인격으로 성장시킬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기에, 자녀의 죽음과 재산의 잃음과 육체의 질병과 아내의 욕설과 친구들의 정죄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욥23:10). 바울도 주께 받은 사명을 다하고 주께 면류관을 얻게 될 소망을 가졌기에, 죽음의 위기와 매 맞음과 바다에서의 표류함과 여러 대적들의 위협과 가난과 곤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후11:24-27, 행20:24, 딤4:7-8). 예수님께는 구속을 이루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실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12:2). 비전이 없는 사람은 그와 반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볼 수 없습니다. 좋은 비전은 몇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초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젼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자기 지식과 능력과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비전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비전이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 보편적 진리에 속한 목표는 하나님을 향한 비전이 아닙니다. 환경의 열악함을 보지 말고, 자기의 연약함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강함을 보고 크게 가져야 합니다. 둘째, 실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전은 미래 지향적이고 현재보다 큰 내용 담고 있어야 하면서도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목표는 허상이고 망상이고 헛된 꿈입니다. 하나님의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하고, 자신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하고, 현실 속에서의 경험을 중시해야 하고, 공동체와 연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필수 조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와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지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대상4:9-10에 보면 야베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야베스'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뜻입니다(9절). 보다 문자적인 의미로 '그가 고통을 불러오다' 혹은 '그가 고통을 불러올 것이다' 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고대 풍습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창25;25-26), 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준 것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큰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았을 때 그로 인하여 더욱 큰 고통을 당하였고, 그 아이에 대한 미래에 대한 좋지 않은 예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야베스는 태어날 때부터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왔고, 미래에 대한 좋지 않은 징조를 보고 자랐습니다. 슬픈 과거와 침울한 현재 속에서 꽉 막힌 미래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더 많은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원컨데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다 허락해 주셨고 그로 인하여 어떤 형제 보다도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한 가문에서 눈에 띌 만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했고, 야고보서4:2에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복을 구해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지은 부르스 윌킨슨을 자기의 비전을 두고 30년 동안 기도를 계속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제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때문에 제한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대하16:9, 잠10:22). 유명한 발명가 '토마스 알바 에디슨'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성공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99%의 노력이 성공을 이룬다는 것을 강조한 말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가 원래 의도한 바는 1%의 영감이 성공을 이룬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었습니다. 99%의 노력을 해도 1%의 영감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1%의 영감이 99%의 노력을 이끌어 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 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와 목적이 있으면 이루어집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친히 능력으로 행하십니다.

 

  19절에는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 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청종치 아니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종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마지 못해 눈가림으로만 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엄히 하지 않으면 뒤에는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21절에는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 하리라"고 했습니다. 종을 어렸을 때부터 지나치게 관대히 대하면 나중에는 주인의 법적 상속권까지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종이 아들의 권리까지 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현상을 말하는 것이고 처음부터 위치와 질서를 잘 세우라는 의미입니다.  

 

  20절에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에 급한 사람은 실수를 잘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줍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 심각한 부정적인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엇을 바랄 것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야고보서3:6-8절에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삶 (23-27절)

 

  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24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

  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23절에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만 낮아지고 겸손하면 높아집니다. 16:18에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교만이 가장 먼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낮추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4: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했고 베드로전서5:5-6에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도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임을 가르쳤습니다. 누가복음14:8-11에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누가복음18:10-14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였습니다. 마태복음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온유하고 겸손한 증거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는 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질 것을 앞두고 기도하면서 마태복음26:39에 보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입니다 (빌2:8). 그는 요한복음4:34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최고의 만족과 가치와 즐거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인생의 목적과 목표와 가치와 만족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입니다. 자기의 뜻을 우선하고 자기의 고집대로 불순종하는 자가 강퍅하고 패역하고 교만한 자입니다. 사람 앞에 겸손한 자가 사람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얻게 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24절에 "도적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맹세함을 들어도 직고(直告)하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도적의 공모자는 도적의 범죄를 밝히는 증언대에 서서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한 후에도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율법에는 진실을 증언하지 않을 경우 모든 죄가 증언하지 않은 자에게 돌아간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레5:1). 그런데도 거짓을 말하는 것은 인정에 얽매여 율법을 중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한지 하나님 앞에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4:19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25-26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 하여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면 반드시 올무에 걸리고 맙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바로하면 안전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계획하고 실행할지라도 그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16:33에도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27절에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선과 악은 본질적으로 불일치합니다. 빛과 어둠이 일치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단이, 성전과 우상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일치할 수 없습니다 (고후6:14-18). 그것은 본질적 속성이 다르고 목적과 목표가 다르고 방법과 수단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적 계대에 속한 자는 핍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와 사단의 후손인 핍박자들에 대해 예언하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창3:15). 갈라디아서4:28-30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는 자는 핍박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디모데후서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 연장선에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10:34-38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結言>

  마태복음10:33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의 주권이 하나님께 달린 것을 믿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