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잠언30:1-33

<題目> 아굴의 잠언


<序言>

  본 장은 아굴의 독특한 잠언이 실려 있는 곳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낮아진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또한 피조물들에 관한 여러 가지 유익한 교훈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개인적인 고백(1-6절), 평생을 두고 한 간구(7-9절), 세대의 대표적인 죄(10-14절), 지혜자의 처신에 대한 비유들 (15-3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개인적인 고백 (1-6절)


  1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2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3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6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1절에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야게'나 '아굴'이나 '이디엘'과 '우갈'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아서 정확히 나오지 않아서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 장의 저자가 아굴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솔로몬이 기록했으나 본 장은 아굴이 기록한 것입니다. 솔로몬왕 주위에는 지혜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지혜자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왕상4:30-31).

 

  2-4절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고 했습니다. 저자 아굴은 지혜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에 비교해 볼 때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각도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참 지혜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대답을 염두에 둔 수사학적 표현입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하늘에 올라가 본 사람이 어디 있느냐 ? 바람을 움켜 쥐어 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물을 옷자락에 감싸 본 사람이 있느냐? 땅의 경계를 그은 사람을 찾아보았더냐? 그 사람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이에게서 배우는 제자를 본 일이 있느냐? 네가 알고 있다면 나에게 한 번 그것을 알려 주렴."이라고 했습니다.

 

  5-6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해 계시해 주는 말씀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불순물이 전혀 없는 정화된 말씀으로서 고귀한 말씀입니다. 불순물이 전혀 없는 깨끗한 말씀에 다시 불순물을 섞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계시된 하나님 말씀을 인간의 이성 등에 의해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4:2에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고, 요한계시록22:18-19에는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1:20-21에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2. 평생을 두고 한 간구 (7-9절)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7-9절에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라고 한 것은 생전에 이루어 달라는 표현으로서 생애에서 반드시 그 기도의 응답을 받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가 평생을 두고 구한 것은 '정직'과 '양식'이었습니다. 그가 구한 것은 모세처럼 바다를 건너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한나처럼 낳지 못한 아들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기드온처럼 표적을 달라는 거도 아니고, 엘리야처럼 수년 동안 오지 않던 비를 내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엘리사처럼 죽은 자를 살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히스기야처럼 죽을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여호사밧처럼 전쟁에서 승리케 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극적인 상황에서 필요한 기적을 구하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베스처럼 평생을 두고 지경을 넓혀 복에 복을 달라는 비전있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소박한 기도였습니다. 누가 들었을 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기도였고 그 내용이 이루어졌을 때도 놀랄 사람이 전혀 없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가장 필요한 기도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기도였습니다.

 

  아굴은 정직한 생애를 구했습니다. 첫째, '허탄-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라고 했습니다. 허탄은 무가치한 것들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적으나 육적으로나 허황된 것들이 많습니다. 가짜를 위해 허비하는 인생이 되지 않고 진짜 생명있는, 가치있는, 영원한 진리를 따라 살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허황된 것을 따르거나 허황된 교훈을 따르거나 허황된 행동을 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며 살기를 구한 것입니다. 그릇된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루 하루의 삶에 충실하며 살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내실있는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속성(secularity)와 현세성(earthiness)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속은 세상에 빠지는 것을 말하지만 현세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인은 초현실적이어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망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을 토대로 현실 속에서 비전(꿈)을 가져야 합니다. 뜬 구름을 잡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마주하면서 현실을 극복하려 해야 합니다. 현실의 문제와 고통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실재적인 고통을 놓고 그 문제를 극복하기를 구하고 하루 하루를 바르게 살려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건 사고 질병 시험 미움 등 일상생황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도 불의를 행치 않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려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시편131:1, 딤전4:7, 요일2:16-17). 둘째,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은 속임수, 겉치레, 지키지 못할 약속 등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면서 사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직의 결과는 때로 따돌림 슬픔 고통 손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정직해야 합니다. 루터는 성공적인 기도의 첫번째 규칙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은 하나님의 속성에 맞지 않습니다 (히6:8,딛1:2). 거짓은 사단이 좋아하는 것이고 사단을 따르는 자들이 본받습니다 (창3:1-4, 요8:44). 그러므로 성도의 속성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도는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양심의 자유가 있고 마음의 평안이 있고 담대함이 있습니다. '옳다' 와 '아니라'를 정직하게 해야 합니다 (마5:37). 존 거스너(Jone Gerstner)는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굴은 필요한 양식을 구했습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이유는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첫째,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라고 했습니다.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가난하게 될 때에는 죄를 짓기 쉽습니다.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되면 장발장처럼 빵을 훔칠 수 있습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 거짓말, 구걸, 도적질, 폭행, 살인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조그마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이 좋았고 매사에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IMF가 오더니 거래처가 연쇄 부도로 자신의 사업도 부도를 당했습니다. 은행에서 자신의 재산을 차압했습니다.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와 어느 허름한 달동네 단칸방에서 월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아이들 학비는 고사하고 먹고 살 양식조차 없었습니다. 일자리도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경비가 허술한 새마을 금고에 들어가 가짜 총을 들고 강도짓을 하게 되었고 결국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가난해지면 부자들에 대한 실망과 상처로 분노와 증오와 원한을 가지게 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기도 합니다. 부자에 대해 미워하게 되고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에 대해 분노를 가지게 되고 심지어는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가난의 위험입니다. 아굴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둘째, '부하게도 마옵시고'라고 했습니다. 부(富)도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가난이 죄가 아닌 것처럼 부유함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유함도 가난처럼 유혹이 많습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쓸모없었던 자신의 땅에 개발되면서 수 백 억대의 재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늘 가난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었습니다. 가정의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교회에서 철야하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기도할 제목이 없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점점 나태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자신이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자신이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지나치게 부요해지면 소유의 즐거움과 그것을 누리는 즐거움에 빠지게 되고 그것을 더 많이 누리기 위해 더욱 많은 것을 얻으려 합니다. 어떤 사람이 록펠러에게 "선생님은 돈이 얼마나 더 있으면 만족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조금만 더 있으면 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돈을 벌지만 돈이 돈을 버는 맛을 보게 되면 탐욕에 눈이 멀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되고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신8:12-14, 딤전6:9-10). 사람은 배부르고 평안할수록 마음이 태만해지고 강퍅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호13:16). 세상 재리와 염려로 인하여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13:22). 물질적 부요 때문에 마음까지 부요하게 되어 영혼까지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을 했고 (마19:24), 물질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6:24). 그래서 성경은 탐심이 우상숭배와 같고 탐심은 하나님께 버림 당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골5:3, 롬1:28-29, 고전6:9-10). 셋째,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나에게 정해진 몫의 빵을 음식으로 내게 주소서'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마6:11). 아굴은 가난하게 사는 것도 원하지 않고  부자로 사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필요한 양식만 있기를 원했습니다. 필요한 양식이란 고정된 분량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소명에 따라 공급해 주시는 양식입니다. 만일 아굴이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면 아내와 자녀들을 먹이기에 충분한 정도를 말할 것입니다. 그가 만일 국가 고위직에 있었다면 기관과 그에 따른 백성들을 먹여 살릴 정도를 말할 것입니다. 적정한 양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우리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최소한의 필요를 구해야 합니다 (빌4:19).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한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딤전6:8, 히13:5). 빌립보서4:13-14에서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굴의 기도와 대치되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굴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이 그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온전하지 못함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연약성과 한계성을 시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을 따라 필요한 양식으로 채워 달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런 결연한 의지를 가졌던 것처럼 아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런 기도를 한 것입니다. 아굴의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가 왜 허탄을 멀리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까? 왜 거짓말을 멀리해 달라고 했습니까? 왜 가난하게 되지 않게 해 달라고 했습니까? 왜 부자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지 않기 위함이었고, 그것이 최고의 행복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3. 세대의 대표적인 죄 (10-14절)

 

  10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11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2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3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14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10절에 "너는 종을 그 상전에게 훼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고 했습니다. 종을 그의 상전에게 모함하거나 고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종이 상전으로부터 어떤 형태로든지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 나중에 종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데 된다면 모함한 한 자는 종에게 심각한 죄를 짓게 된 것이고 모함한 자는 심각한 징책과 수치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종이 모함한 자에게 원한을 품고 자기도 고발할 기회를 찾게 됩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잘못에 대해 표명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자에 대한 경종이 되기도 합니다.

 

  11절에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무리'(히.또르)는 세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혜자는 당시 세대에 만연한 죄악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세대는 아버지를 저주하고 어머니를 축복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를 가볍게 여기고 멸시하고 욕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모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부모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은 자들입니다. 십계명 중 제 5계명을 버린 자들입니다. 출애굽기20:12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엡6:2). 자녀는 당연히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계명 곧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할 것을 하나님께 했으니 부모에게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고르반 사상은 바른 사상이 아닙니다 (막7:10-13). 고르반 사상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이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탄생시킨 자이고, 우리를 희생적으로 길러 준 자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이 마땅하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레20:9). 부모를 저주하고 욕하는 자는 황량한 곳에서 무덤도 없이 죽을 운명에 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7절에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경멸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눈은 뽑힐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미물인 들짐승에게 뽑힘을 당하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까마귀는 미물이지만 태어난 지 3개월이 되어 어른이 되면 자신이 어미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준다고 합니다.

 

  12절에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깨끗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더러움을 씻지 않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불결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정결한 척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때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마태복음23:25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고 했고 이어서 27-28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옳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옳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13-14절에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앞니는 장검(長劍) 같고 어금니는 군도(軍刀)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높은 시선을 가지고 눈꺼풀을 높이 뜨는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당시에 마음이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마치 앞니와 어금니가 군인들이 사용하는 칼 같아서 죽이고 삼키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의지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약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악입니다. 힘없고 가난한 자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4. 지혜자의 처신에 대한 비유들 (15-33절)

 

  15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6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18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9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20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21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22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23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24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25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26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27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28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29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31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32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33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①족한 줄 알지 못하는 4가지

 

  15-16절에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고 했습니다. 거머리는 피를 빨아먹는 생물입니다. 거머리는 두 개의 강력한 흡입력을 가진 흡입관으로 다른 생물의 피를 한없이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평시에는 실날처럼 가느다란 몸으로 물을 헤엄쳐 다니지만 다른 생물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 먹을 때는 몸이 손가락처럼 굵어져 구를 정도가 됩니다. 거머리는 계속 '다' '다' 합니다. '다오'해당하는 '아하브'(יהב)는 '주다'(give)는 말입니다. 거머리는 피를 빨아먹으면서도 계속 더 먹으려 합니다. 거머리는 한없이 욕망을 채우는 속성을 나타내기에 알 맞는 생물입니다. 거머리 외에도 욕망이 끝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음부입니다. '음부'(히.스올)는 무덤이나 지옥을 말합니다. 무덤이나 사후의 세계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을 다 데려가고도 계속 데려갑니다. 다 채워져서 만족하는 일이 없습니다. 둘째는 태입니다. 아이 배지 못한 태입니다. 아이를 갖고자 하는 여인의 태는 아이를 갖고자 하는 욕망이 끝없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하면 남의 아이를 훔치기까지 합니다. 셋째는 땅입니다. 물로 다 채울 수 없는 땅입니다. 가뭄의 현장에 가보면 땅이 메말라 있는데 그런 땅에는 아무리 물을 대어도 계속 빨아 들입니다. 땅은 계속 비가 와도 다 흡수합니다. 넷째는 불입니다. 족하다 아니한 불입니다. 불은 물건이나 집이나 산을 태웁니다. 그러나 스스로 족하여 태우기를 그치는 법이 없습니다. 끝없는 인간의 욕심에 대한 적절한 비유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고 자족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디모데전서6:8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4:11-13에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②기이히 여기는 것 4가지

 

  18-20절에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의 직역은 '나에게 너무 경이로운 것 세가지가 있다 내가 모르는 네번째 것도 있다'입니다. 수수께끼와 같은 일이 4가지 있는데 앞의 세가지 보다 네번째 것은 더욱 오묘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첫째는 독수리의 자취입니다. '자취'(히.데레크)는 행동의 과정을 말합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그 나는 방향과 목적 등은 알기 힘듭니다. 둘째는 뱀의 자취입니다. 뱀도 쉽게 볼 수 있지만 발도 없는 뱀이 바위를 능숙하게 기어 가는 뱀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는지 알기 힘듭니다. 셋째는 배의 자취입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자주 볼 수 있지만 배가 어떻게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지 신비할 다름입니다. 넷째는 남자와 여자의 자취입니다. 여자가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연합하는 것은 신비할 다름입니다. 음녀의 자취도 그러합니다. 마치 음식을 먹고 입을 씻어서 안 먹은 것처럼 하는 것같이 성적 범죄를 하고도 그렇지 않은 거처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독수리나 뱀이나 배나 음녀의 행동 과정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은밀한 범죄라 해도 그 죄는 그대로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암시하는 비유들입니다. 마 태복음10:26에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범죄도 반드시 드러나고 선행도 반드시 드러납니다.

 

     ③세상을 진동시키는 것 4가지 (21-23절)

 

  21-23절에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 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참을 수 없게 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종이 임금되는 것입니다. 신분적으로 종이 임금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임금이 되어서는 안될 사람이 임금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통치자의 자격에 맞는 지식과 교양과 인격과 영성을 가지지 않은 자가 통치자가 될 경우 폭군으로 변하여 압제자 될 뿐입니다 (사3:4). 그런 자가 통치자가 될 경우 백성들이 견딜 수 없어 합니다. 둘째는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입니다. 지혜롭고 덕있는 자가 돈을 많이 가지게 되면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하지만 미련하고 덕없는 자가 부유하게 되면 그 돈으로 도리어 악을 행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공동체에 소동을 일으킵니다. 셋째는 꺼림 받는 계집이 시집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 시집을 가데 되면 남편뿐 아니라 그 가정 전체에 불화와 문제를 일으킵니다. 교만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다투기를 좋아하는 여자는 가정을 힘들게 합니다. 넷째는 계집 종이 주모(主母)를 잇는 것입니다. 여종이 부모의 자리에 있게 되면 사람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일에 대한 규모가 없어서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종이 임금이 되는 곳,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 꺼림 받는 여인이 시집가는 것, 여종이 주모를 잇는 것, 이 모든 것은 자격없는 자가 관리자 위치에 있게 되면 공동체가 시끄러워 지고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위치와 자리를 탐내지 말고 지적 인격적 도덕적 영적 실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그 자리에 오르게 되고 그 자리에 올랐을 때 잘 감당하는 자가 됩니다.   

 

     ④작으면서 지혜로운 것 4가지 (24-28절)

 

  24-28절에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고 했습니다. 땅에서 작으면서도 지혜로운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개미입니다. 개미는 힘없는 작은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여 겨울을 지냅니다. 개미는 예비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개미들은 일기에 민감하여 날이 좋으면 열심히 일하고 비가 오려 하면 비가 오기 전에 집으로 들어갑니다. 여름에는 열심히 양식을 모아 들여 겨울이 오면 땅 속 집으로 들어가 비축한 양식으로 통과합니다. 개미들은 분별력과 근면성뿐 아니라 예비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둘째는 사반입니다. 사반은 중동 지역에서 서식하는 동물로서 토끼나 오소리로 불리 웁니다. 사반은 바위 사이에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사반은 다른 동물들처럼 공격할만한 무기도 없고 방어할 만한 무기도 없습니다. 맹수들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받아도 방어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사므로 잡아 먹히지 않습니다. 사반은 약하지만 의지성을 가진 동물입니다. 셋째는 메뚜기입니다. 메뚜기는 임군이 없어도 떼를 지어 나아갑니다. 중동의 사막 메뚜기는 연약한 곤충이지만 유충 시기가 끝난 다음엔, 3일 동안 쉬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는데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 메뚜기 떼가 지나가면 초목이 완전히 황폐화되어 사람들에게 위협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메뚜기 떼 출몰은 일종의 재앙입니다. 그 메뚜기 떼가 누가 지시하는 지도자가 없어도 그와 같이 떼를 지어 이동하고 모든 동물에게 위협적 대상이 됩니다. 메뚜기는 약하지만 단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넷째는 도마뱀입니다. 중동의 도마뱀은 사람 손가락만 합니다. 도마뱀은 적에 대한 경계심이 많고 민첩하게 움직입니다. 도마뱀은 들의 바위 틈에서도 볼 수 있지만 집의 벽에서도 볼 수 있고 심지어는 왕궁의 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벽 틈 사이로 드나들며 곤충을 잡아 먹고 삽니다. 사람들 가까이 있는 작은 종류이기 때문에 사람의 손에 쉽게 잡힐 것 같으나 잡히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경계성과 민첩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미와 사반과 메뚜기와 사반은 모두 연약하고 힘없는 것들이지만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자기고 있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마태복음10:16에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⑤위풍있게 다니는 것 4가지 (29-30절)

 

  29-31절에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고 했습니다. 위풍있게 당당히 걸어가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자입니다. 사자는 사냥감을 얻기 위해 달릴 때는 물론이거니와 보통 때에도 당당하게 걷습니다. 어떤 짐승이 달려와도 숨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물러가지 않습니다. 둘째는 사냥개입니다. 사냥개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냥감을 쫓아 걸어갑니다. 셋째는 숫염소입니다. 수염소도 앞을 향해 나아갈 때 아무 것도 무서워 하지 않는 위엄으로 걸어갑니다. 넷째는 왕입니다. 왕은 신하들과 군사들에 둘러 싸여 행차할 때 보면 위풍당당합니다. 왕이 권세를 행할 때 그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16:33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⑥마지막 권고 (32-33절)

 

  32-33절에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대저 젖을 저으면 버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했거나 악한 일을 도모했다면 잠잠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억제하여 잠잠히 반성하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인하거나 변명하는 것은 더욱 미련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젖을 저으면 버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난다는 말은 당연한 결과를 나타내 것을 말합니다. 그와 같이 노를 발하면 당연히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잘못할 때 겸비하고, 분노를 잘 제어합니다.

 

<結言>

  우리 인간은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지혜를 갖고 살아가지 않으면 바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연과 동물에서도 지혜를 얻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