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욥기 23:1-17
<題目> 욥의 답변
<序言>
전 장부터는 세번째 변론 주기 가운데 첫번째 변론자인 엘리바스의 변론이 있었습니다. 욥은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해 논쟁하는 논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독백으로 답변하는 논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내용 구조는 하나님의 변호 요구(1-9절), 무죄함에 대한 확신(10-17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하나님의 변호 요구 (1-9절)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은 엘리바스의 변박에 대해 독백처럼 답변을 했습니다 (1-절). 욥은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고 했습니다 (2-7절). 변론의 핵심은 욥이 고난당한 것은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아무 이유 없이 그 같은 고통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욥이 남모르는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통을 준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신학적 논리 즉 원인론적 고통관로 정죄를 한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욥은 자신이 특별히 죄지은 것이 없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와 같은 재앙을 당할만한 구체적인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의 호소를 들어줄 것이고 자기의 옳음을 판단해 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만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고 했습니다 (8-9절). 욥은 친구들이 변론을 통해 자신이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을 주셨다는 정죄를 받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특별히 죄지은 것이 없는데 죄가 있어서 고통을 받는 것이라는 정죄를 듣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무죄함을 밝혀 주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무죄함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면 모든 고통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임재의 현상도 하나님의 말씀하심도 하나님의 감동시키심도 없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도 계시고 음부에 내려가도 계시고 바다 끝에 갈지라도 계시고 거기서도 주의 손이 인도하시고 붙드신다고 했습니다 (시139:7-10). 그러나 욥은 아무리 하나님을 찾으려 해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2. 무죄함에 대한 확신 (10-17절)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10절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을 우리는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난 가운데 단련하여 더욱 정결한 믿음(신앙)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고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곧 고난을 통해 믿음을 성장시켜 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으나 기본적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죄가 없음을 증명해 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곧 고난을 통해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증명해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에 나온 ‘키’(כי)는 ‘그러나’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에 해당하는 ‘떼레크 이마디’(דרך עמדי)는 ‘나와 함께 하는 여정을’입니다. 뜻과 행동에 함께한 여정을 말합니다. ‘그가 아시나니’에 해당하는 ‘야다’(ידע)는 ‘알다’는 뜻으로서 경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에 해장하는 ‘뻬하나이’(בחנני)는 ‘그가 검사한 후에는’입니다. 기본형 ‘빠한’은 금속을 검사하고 조사하고 시험하고 증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금같이’에 해당하는 ‘카자하브’(כזהב)는 ‘금같이’입니다. 기본형 ‘자바’는 금을 말합니다. ‘내가 ~같이 되어 나오리라’에 해당하는 ‘에체’(אצא)는 ‘내가 나오리라’ ‘내가 나타나리라’입니다. 그래서 본문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에 해당하는 כי ידע דרך ימדי בחנני כזהב אצא을 직역하면 ‘그러나 나와 함께하는 여정을 그가 아나니 나를 검사한 후에는 내가 금같이 나타나리라’입니다. 곧 모든 여정에 욥 자신의 뜻과 행동에 같이 하신 하나님께서 시련을 통해 검사하면 자신이 금같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뻬하나이’(בחנני)의 기본형 ‘빠한’(בחן)이 ‘검사하다’ ‘조사하다’ ‘시험하다’ ‘증명하다’ 등의 뜻이 있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시련(tried -KJV)이나 시험(tested -NIV)의 의미로 번역했고,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단련’으로 번역했습니다. ‘단련’은 금속을 불에 달구어 두드려서 단단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뜻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제련 과정에서 정제와 담금질이 있습니다. 정제는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높은 온도로 가열시켜 부산물(slag)들을 걸러내고 순금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순금을 얻기 위해서는 1200도, 1800도, 2500도 3번의 제련을 통해 얻어진다고 함). 담금질은 금속을 열처리를 하여 물이나 기름에 담궈 강도를 높이는 담금질 과정을 말합니다. 담금질은 단련을 의미하지만 정제는 정화를 의미합니다. 본문은 담금질 비유가 아니라 정제 비유입니다. 만일 단금질 비유라면 신앙의 연단을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정제를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불신앙이 없는 신실한 신앙에 대한 비유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의미는 금광석(돌)을 뜨거운 불에 녹인 다음에는 금만 나오듯이 욥 자신이 시련을 통해 자신의 진실한 신앙이 드러날 것을 비유한 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욥 자신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시련의 과정을 통해 그것을 증명해 주실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앙은 재난과 시련과 고난과 고통을 통해 증명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히5:8). 아브라함도 독자를 바치는 시련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적 목적을 가진 자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창22:12). 다니엘과 세 친구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우상에게 절하게 하는 시련을 당했을 때 신실한 사명자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단3:28). 바울도 동역자가 떠나고 몸이 병들고 생활비가 떨어지고 감옥에 갇혔을 때 진실한 사역자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빌1:20-21, 4:11-13). 욥도 소유를 잃고 자녀를 잃고 병들고 정죄 받았을 때 신실한 신앙을 가진 자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시련을 허락하신 의도와 목적대로 반응하므로 그 신앙이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는 시련 가운데 있을 때 욥처럼 반응해야 합니다. 환경이나 사람이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 말씀을 더욱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요 구원받은 자요 말씀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자요 하나님 나라를 목적으로 살아가는 자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욥은 이어서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고 했습니다 (11-12절). 욥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어기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정한 음식보다 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정한 음식’에 해당하는 기본형 ‘호크’(חק)는 ‘재정’ ‘시간’ ‘일’ ‘과업’ ‘의무’ ‘몫’ '법도' 등의 뜻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그 어떤 것들보다 중요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가치였고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평소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1:1에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했습니다. 일시에 모든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었을 때 하나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했습니다. 1:21-22에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병들었을 때도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고 했지만 하나님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신실한 신앙을 가진 자라는 것을 사탄과 친구들과 모든 사람에게 증명하고 복을 갑절로 주었습니다. 변론하던 친구들과도 화해하고 병도 낫고 자녀도 배로 생기고 소유도 배로 늘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42:12-17).
욥은 이어서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13-14절).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변함이 없고 하나님이 작정한 것은 그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재앙이나 시련도 그의 뜻대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욥 자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많이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이어서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15-17절).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욥은 자신이 당하는 시련의 이유를 모를지라도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그대로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탄식한 것입니다. 욥은 현재의 고통 뿐 아니라 미래에도 당할지 모르는 고통 때문에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고통을 당하기 전에 멸절되지 않은 것을 탄식한 것입니다. 이는 견디기 힘든 현실의 고통으로 인하여 절규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당한 고통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인정하고 다만 자신이 견디기 힘든 것으로 인하여 절규한 것입니다.
<結言>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온갖 시련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진 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고 애를 썼습니다. 육신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있는 암시를 보였습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