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욥기 32:1-22

<題目> 엘리후의 등장

 

<序言>

  욥은 지금까지 자신의 고난에 대해 세 친구 곧 엘리바스, 빌닷, 소발 과 세 차례의 주기에 걸쳐 변론을 했습니다 (3-26장). 그 후에는 자신의 독백을 통해 고난 이전의 삶을 회상하고 (29장),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대비시키고 (30장), 자신의 무죄함과 결백함을 주장했습니다 (31장). 본 장에서는 지금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엘리후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지금까지의 세 친구는 고난을 죄값으로 온 결과로 보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해석했지만 엘리후는 고난을 연단을 이루는 섭리로 해석하게 됩니다. 본 장은 그러한 관점에서의 변론 중 서두 부분에 해당합니다. 내용 구조는 엘리후의 소개(1-5절), 변론의 당위성(6-14절), 변론에 임하는 심정 토로(15-22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엘리후의 소개 (1-5절)

 

  1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2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4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엘리후는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입니다. '바라겔'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는 뜻이고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세 친구는 출신 지역만 말했으나 엘리후는 족속과 아버지 이름까지 거론했습니다. 엘리후의 배경이 욥의 세 친구보다 더 자세히 기록된 것은 엘리후가 그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엘리후는 배경이 보여 주듯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은 인물이었습니다.

 

  엘리후는 지금까지 욥과 세 친구의 변론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세 주기를 통해 변론이 이어졌지만 세 친구는 욥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자기의 무죄함과 의로움을 주장했습니다. 엘리후는 답답해 하고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욥과 세 친구들이 모두 연장자들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변론에 끼어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변론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2. 변론의 당위성 (6-14절)

 

  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7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8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9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11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12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13 당신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진상을 파악했으나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14 그가 내게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엘리후는 자신이 변론에 참여하게된 당위성과 필요성을 피력했습니다. 연장자가 경험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혜가 더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지혜는 연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더 어리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한 원리를 더욱 잘 알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변론에 참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욥의 세 친구들은 한결같이 인과응보의 논리를 가지고 욥이 범죄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 것이라고 몰아 세웠습니다 (11:6, 18:5, 22:5). 그러나 욥을 이해시키거나 설득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욥의 무죄성과 결백 주장에 더 이상 말하지 못했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이 변론에 실패했다는 것을 신랄하게 비평하고 욥의 세 친구와는 달리 자기는 욥을 설득시킬 자신이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사실 욥의 세 친구는 그 동안 인간의 인과응보의 논리로 고난을 해석했지만 엘리후는 하나님의 연단을 목적으로 한 섭리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곧 원인론적 고통관을 뛰어 넘어 목적론적 고통관을 말하므로 한 단계 높은 원리를 제시합니다.    

 


          3. 변론에 임하는 심정 토로 (15-22절)

 

  15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었더라

  16 당신들이 말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하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17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18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19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20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21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

 

  엘리후가 지금까지 욥의 세 친구를 향해 자신이 변론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이제는 욥을 대화 대상으로 삼아 자신이 변론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심정을 토로합니다. 자신의 심경을 '봉한 포도주' '새 가죽부대'가 터지게 된 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19절). 잘못된 욥의 세 친구의 변론과 욥의 자기 의 주장 때문에 심경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는 세 친구의 주장이 인위적이고 허구적으로 보았으며 욥의 주장은 하나님을 도독할 위험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곧 진리의 부재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자기의 심정이 불붙는 것 같다고 표현한 것과 비슷하게 (렘20:9) 자신의 심정이 뜨거워 진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한편 엘리후는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하려 한 것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른 진리만 말하며 실천하겠다고 했습니다.

 

<結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상황을 바른 원리에 의해 해석하고 이해해야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혜는 사람에게 배운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 터득한 지식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곧 세상과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으려면 참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말씀에 착념하고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얻어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