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욥기 35:1-16

<題目> 엘리후의 세번째 변론

 

<序言>

  엘리후가 1차 변론에서는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언급했고 2차 변론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본 장은 3차 변론으로서 인간의 선악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믿음 없는 자의 기도는 상달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이는 욥이 의로운 신앙생활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는 욥에 대해 인간은 하나님께 불평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반론을 편 것입니다. 내용구조는 하나님께 무익한 인간의 선악(1-8절), 기도 응답에 대한 변론(9-16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하나님께 무익한 인간의 선악 (1-8절)

 

  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2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3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4 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5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6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욥은 이 세상에서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받는 현장에서 의로운 신앙생활이 아무 소용없다고 탄식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신앙의 무익성으로 오해하고 반박했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선악간의 행위는 유한한 인간의 세계에서만 통하고 초월적인 하나님께는 하등의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 신앙의 유무익을 따질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2. 기도 응답에 대한 변론 (9-16절)

 

  9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10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11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욥은 자녀들을 다 잃고 재산을 다 잃고 몸이 병들어 죽을 지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욥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6:8-13, 7:11, 9:15-16, 19:7, 27:9). 본문은 엘리후가 그에 대해 답하는 내용입니다. 9절에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불의한 권세자들로부터 압제와 핍박을 받을 때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부당한 핍박으로 인한 고통에 대해 힘들어서 소리치면서 하나님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엘리후가 욥이 고통 중에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는 말에 대답하는 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엘리후는 욥이 당하는 고통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꼭 권세자들로부터 받은 핍박으로 인한 고통가운데 부르짖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당하는 모든 종류의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좀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찾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10절上에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라고 했습니다. 고통 중에 부르짖지만 정작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은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물건이나 기구나 기계를 만든다면 반드시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듭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능을 만듭니다. 그것이 잘 작동하도록 보살피며 고장이 났을 때는 고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도 목적을 가지고 창조했습니다. 그 중에 나 한 사람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따른 특질을 부여하여 이 세상에 보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목적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섭리하시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창세기 39-41장에 보면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와그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해 주었습니다. 그 후손을 하늘에 별 같이 많게 하여 가나안 땅에서 한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가족은 팔레스틴에서 유리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아들 요셉을 보내셨습니다. 요셉을 통해 후손이 애굽에서 한 나라를 이룰 만큼 번성하게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는 준비를 시키려 했습니다. 요셉에게 우선적으로 가진 목적은 야곱 족속을 애굽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애굽왕 바로에게 총리로 발탁될 수 있는 지혜를 주었습니다. 특히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어렸을 때도 하나님이 계시로 준 꿈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야곱 족속을 인도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가게 되고 애굽에서 보디발 장군의 종으로 팔리게 되고 보디발 장군 아내의 무고로 왕의 친위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감옥에서 왕의 음식을 책임지는 관원장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꿈 해석대로 바로왕의 생일에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되고 떡 맡은 관원장은 처형되었습니다. 그 후에 바로왕이 심각한 꿈을 꾸어 잠을 이루지 못하므로 애굽의 모든 점술가들을 불러 해석하도록 했으나 아무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상황을 지켜본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가 감옥에 있을 때 자기 꿈을 해석해준 요셉을 기억하고 바로왕에게 천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바로왕 나아가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애굽이 앞으로 7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가 7년 동안 흉년이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왕이 어떻게 하면 되겠는지 물었습니다. 요셉은 풍년이 들었을 때 수매하여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 흉년 때에 방출하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왕이 그 일을 위해 요셉을 총리로 세우고 그 일을 지휘하게 했습니다. 요셉은 총리로 있으면서 자기 야곱 족속을 애굽으로 불러들여 기름진 고센 땅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럼으로 야곱 족속이 애굽의 보호아래 한 나라를 이룰 만큼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특질을 주어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특질을 잘 활용하도록 개발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요셉이 사는 동안에 죽을 위기에 처할 때도 있었지만 보호해주셨습니다. 또한 많은 역경을 당하지만 그 역경을 이용하여 오히려 목적을 이루어가는 통로가 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지고 그 목적을 이루신 것입니다. 엘리후의 말은 극한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런 주권적인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목적대로 이끄실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목적을 위해 함께 해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냐는 것입니다. 


  둘째, 밤에 노래를 주시는 하나님을 찾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10절下에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라고 했습니다. ‘밤’은 환난과 핍박과 고난과 고통의 때에 대한 상징입니다. ‘노래’는 내적 평안과 기쁨에 대한 상징입니다. 사람들이 고통의 때에 부르짖기만 하지 고통의 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도행전16:24-34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여행에서 유럽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할 때였습니다. 한 주인에게 여종이 있었는데 그 여종은 귀신의 힘을 빌려 점을 쳐서 주인에게 돈을 벌어주는 여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계속 따라오면서 사역을 방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 여종의 주인은 여종이 다시는 효험있는 점을 치지 못할 것으로 여겨 자기에게 큰 손해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종의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원들에게 고소를 했습니다. 무리들도 일제히 일어나 송사했습니다. 관원들의 상관은 바울과 실라를 옷을 찢고 매로 치고 감옥에 가두라고 했습니다. 간수가 상관의 명령을 받아 감옥에 가두고 발에 착고를 채웠습니다. 밤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렸습니다. 간수는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바울이 그에게 자신들이 그대로 있으니 자결을 하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간수가 바울에게 와 엎드리자 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간수는 복음을 받아들여 그와 그 모든 가족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전도 사역 중 귀신을 쫓은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겪게 되었는데 그 고통 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감옥에 갇히는 것을 허락한 것일 것이고 하나님이 그 상황을 허락한 것은 어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함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을 뿐아니라 그로인하여 간수와 그 가족이 구원을 받기 시작하여 빌립보에 복음 전파가 확장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셋째, 가르치고 지혜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찾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11절에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우릴 가르치고 지혜롭게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땅의 짐승이나 공중의 새를 가르치고 지혜롭게 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가르치고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이나 새 같은 동물들도 자연의 반복적인 변동을 통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게 합니다. 사람도 모든 삶의 영역에서 반복적인 고난을 통해 더욱 지혜롭게 하고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게 하십니다.  사무엘하11-18장에 보면 다윗왕이 범죄한 내용이 나옵니다. 다윗이 2차 정복전쟁을 마치고 평안해지자 낮잠을 잔 후 왕궁 위를 거닐다가 건너편에서 목욕을 하는 우리야의 아내를 보고 음욕이 들어와 간음죄를 짓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이 죽게 됩니다. 이미 있었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왕후들을 대낮에 겁탈을 했습니다. 다윗왕은 밤중에 맨발로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와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갈람산을 지나 도망했습니다. 사울왕가에 속한 시므이가 나와 사울왕에게 한 잘못으로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은 것이라는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다윗왕은 저주를 들으면서 마하나임 성까지 도망했습니다. 압살롬은 전국에서 군사를 모병하여 직접 다윗왕을 추격하여 마하나님 앞까지 갔습니다. 다윗왕의 신복 요압 장군이 압살롬의 군대와 전투를 하여 요압 장군이 승리하고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다윗왕은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 고백했습니다. 시편119:67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했고, 시편119:71-72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고 했습니다. 다윗왕은 극한 고통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신이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깨달았습니다. 다윗왕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철저히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 동물들이나 자연인들처럼 아파서 부르짖습니다. 혹 하나님께 기도한다 해도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만 기도합니다. 물론 고통의 문제를 내놓고 구체적인 필요를 구하는 기도는 옳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좀더 본질적인 생각을 하면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나에 대해 선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시는 일을 깨닫게 하여 그 고통을 이길만한 기쁨을 주신다는 사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을 위해 더욱 지혜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고통을 오히려 유익하게 해 주실 것을 바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로마서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롬5:3-4).   


  12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13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14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15 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16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12절). 악인이 범죄한 것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알고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헛된 부르짖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코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3절).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지 않고 시비를 가려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을 보아 시련을 더 당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욥에게 벌을 다 주지 않았고 긍휼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헛되게 입을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14-16).


<結言>

  엘리후는 욥이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심정을 토로한 것을 하나님을 대적하여 불평한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특히 욥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문제를 해결받을 수 없다고 한 데 대해 엘리후가 한 변론은 욥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엘리후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4:2-3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응답받는 못하는 하나님이 구해주는 것이 긍휼과 은총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응당 권리를 요구하는 것처럼 교만한 마음으로 분노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