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열왕기상 17:1-24

<題目> 엘리야의 출현


<序言>  

  아합왕은 이스라엘 역대 왕들 중에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우상숭배를 공적으로 공인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바알과 아세라신을 대치했습니다. 그에 일조를 한 자는 그의 아내 이세벨이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나타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시키려 합니다. 아합과 엘리야의 대결이 시작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재앙을 선포하고 그릿 시냇가로 피하게 되고 가뭄이 지속되자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본 장의 내용 구조는 엘리야의 가뭄 예언(1-7절), 엘리야의 첫번째 이적(8-16절), 엘리야의 두번째 기적(17-24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엘리야의 가뭄 예언 (1-7절)

 

  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북이스라엘 왕 아합이 그의 아내 이세벨의 사주를 받아 왕궁에 바알과 아세라 신전을 짓고 온 이스라엘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16:26-33). 그 때에 길르앗 에 거하는 디셉 사람 엘리야(Elijah)라고 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아합 왕에게 수년 동안 우로(雨露)가 없을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그 예고는 곧 실행되어 비가 오지 않았고 그로 인해 시내가 말랐습니다. 그 기간이 3년 6개월이나 되었습니다 (1-7절, 약5:17).

 

  아합이 바알과 아세라 신이 비를 내려주는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는다는 선언은 비를 주관하는 신이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라 하나님인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 선언은 그들이 주신으로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가 헛된 우상이고 하나님이 참 신인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 선언은 아합과 이세벨 정권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요단 앞 그릿 시냇가로 피해 있게 했습니다. '그릿 시냇가'는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고 다만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에 있는 시내 중 하나로 추정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그렇게 명한 의도는 아합과 이세벨의 공격이 있을 것인데 엘리야가 전면에 나타나 대항해야 하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보호 가운데 기다리게 하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심판을 선포하고 그릿 시냇가로 숨어 버린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사람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릿 시냇가로 잠적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갈1:10).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있는 동안 아침 저녁으로 까마귀가 물어다 준 떡과 고기를 먹고 연명했습니다. 까마귀는 본래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생각하는 새로서 시체와 석은 것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날짐승입니다. 하나님이 날짐승까지 명하여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하는 선지자를 먹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사람에게 생명과 생활을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일하는 자에게 먹을 것은 주시는 분입니다 (신25:4, 고전9:9, 딤전5:18, 마6:3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를 보낼꼬?" 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사6:8).

 


          2. 엘리야의 첫번째 이적 (8-16절)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제공받던 엘리야는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하나님이 공궤자로 준비한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게 됩니다. 그 과부는 가루 한 움큼과 기름이 조금 밖에 없어서 그것으로 자기와 아들이 떡을 해먹고 죽으려고 나뭇가지를 주으러 나왔습니다. 엘리야는 그가 하나님께서 공궤할 자로 준비한 당사자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가뭄의 때에 물을 내어 주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그 과부는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엘리야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습니다. 더울 확실히 알기 위해 떡 한 조각도 요구했습니다. 그가 자기와 자기 아들이 한번 구워 먹을 것 밖에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를 자기에게 구워 주고 나머지 하나로 둘이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뭄이 있는 동안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6-16절). 그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청종했고 그 결과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신약의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과 오병이어 기적을 연상케 합니다 (요2:1-11, 6:1-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 운동을 위해 엘리야를 세우셨는데 그가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 있는 장소를 시돈의 사르밧을 선택했습니다. 사르밧(Zarephath)은 헬라어로 사렙다(Σαρεπτα)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눅4:26). '사르밧'은 '염색하다'는 뜻을 가진 명칭에서 온 말로서 베니게(Phoenicia)의 염료 생산지였습니다. 그 곳은 우상숭배의 원흉인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의 통치하에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거나 하나님의 선지자를 공궤한 사실이 드러나면 어떤 처벌이 있을지 모르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그 과부는 남편이 없으므로 당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과부는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염료생산지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먹을 양식이 다 떨어졌고 땔감도 없어서 직접 주으러 나섰습니다. 아마 부요했다면 땔감이 있거나 땔감을 시장에서 사거나 땔감을 주으러 종을 보냈을 것입니다. 물론 양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구원 사역에 시돈의 사르밧 과부를 선택한 것은 그의 신앙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과부는 언약민인 이스라엘인도 아니고 남편있는 자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이면서 과부이면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으로서 살 소망을 잃어버린 상황에 놓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을 순종하는 신앙적 결단을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가뭄의 상황에서 물을 주는 것이나 자기도 먹을 양식이 없는 상태에서 떡을 구워 주는 것은 결단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그의 신앙적 결단의 모습은 주님께서도 칭찬하셨습니다 (눅4:24-26).

 

  사르밧 과부의 헌신적 결단은 자기 소유의 전부인 두렙 돈을 주께 드린 한 과부와 같고, 신약에서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자기 나귀를 내어 주는 자와 같고, 주께서 장사될 무덤이 없을 때 자기 무덤을 드린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희생적 결단을 보인 것입니다 (눅21:1-4, 마 21:1-5, 27:57-61).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헌신적으로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적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에서 어린 아이가 자기 도시락으로 가져온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 떡 다섯개를 드리므로 주께서 계시하려 했던 뜻도 나타났고 자기도 배부르게 먹었고 5,000명 이상의 함께 사람들도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요6:1-13). 주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27:32). 구레네 시몬의 아들은 루포였습니다 (막15:21). 바울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했고 그의 어머니는 곧 자기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롬16:13). 구레네 시몬이 타의에 의해 십자가를 대신 졌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사도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로 은혜를 받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복을 받는 것은 외부적 조건에 있지 않고 신앙적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쓰임 받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신앙적 결단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쓰임 받을 수 없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신앙적 결단을 보이는 사람이 쓰임 받게 됩니다 (에4:14, 계2:5).

 


          3. 엘리야의 두번째 기적 (17-24절)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평온하게 지내는 중 당혹스런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과부는 엘리야에게 항의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그 아이를 과부의 품에서 달라고 하여 안고 자기 거처인 다락에 올라가 자기 침상에 누이고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하나님께 아이의 혼이 돌아오게 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의 혼이 돌아가게 하자 아이가 곧 살아났습니다. 엘리야가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내려가 과부에게 주자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17-24절).  

 

  본 절에서 과부를 '주모'라고 했는데 '주모'(主母)의 히브리어 '바알라'는 여주인(mistress)을 말하는 단어로서 엘리야가 거처하는 집의 소유주인 여성을 말합니다. 곧 앞서 말한 과부를 말합니다. 성경에 과부가 주모로 바뀌어 기록된 것은 엘리야가 여주인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집에 더 이상 기거할 수 없음을 암시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여주인의 항의는 엘리야를 원망하는 투로 엘리야가 그 여주인에게 더 이상 행복을 가져다 주는 자가 아니라 불행을 가져다 주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평소 여주인은 엘리야로부터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고 여주인은 당연히 죄에 대한 인식이 생겼을 것이고 아들의 죽음이 자신이 인식한 죄의 결과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그래서 극적으로 표현한다면 "당신이 나에게 어떤 상관이 있어서 여기 왔습니까? 나에게 말씀을 가르쳐 죄를 알게 하게 하더니 결국 내 아들 죽는 꼴 보려고 그렇게 했습니까? 당신이 온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일 것입니다.

 

  엘리야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원망하는 과부의 아이를 받아 들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으로 올라갔습니다. 팔레스틴에서의 다락(히.알리야)은 우리 나라의 개념과 다릅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방 외에 짐이나 올려 놓는 곳을 말하지만 팔레스틴의 다락은 우리 나라의 2층에 해당합니다. 팔레스틴은 뜨거운 기운이 있는 기후이기 때문에 윗층에 있는 방은 통풍이 잘되고 시원합니다. 엘리야가 2층인 다락에 기거했다는 것은 과부가 그를 선대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다락으로 데리고 가 침대에 눕히고 세번 몸을 엎드리고 하나님께 혼이 돌아오기를 구했습니다. 세번을 엎드린 것은 엘리야가 '3번'의 의식적 의미를 생각하고 그렇게 행했는지 아니면 특별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가 하나님의 생명력이 그에게 전달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외적 표현인 것은 확실할 것입니다. '혼'(魂)의 히브리어 '네페쉬'는 목, 숨, 목숨, 생명, 혼 등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엘리야는 아이의 생명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고 그 결과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이 과부는 살아난 아이를 받아 들고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곧 이 사건의 의도가 과부에게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려는 의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요9:3).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의 기적을 볼 기회이고 하나님에 대해 아는 계기가 될 기회인 것입니다.  

 

<結言>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타락했을 때 선지자 엘리야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보호하고 공궤하는 일에 사르밧 과부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두번의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경험하게 하므로 쓰임 받기에 합당한 수준으로 자라게 했습니다. 사람이 볼 때 하나님의 일이 실패한 것 같아도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시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