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열왕기상 19:1-21
<題目> 엘리야의 호렙산 기도
<序言>
18장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인과 대결하여 승리하고 백성들과 함께 그들을 처형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가뭄과 기근으로 허덕이던 이스라엘에 기도로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의기양양한 엘리야는 당시 현장에 있던 아합왕이 이스르엘 성읍으로 갈 때에 허리를 동이고 그 앞을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성 앞에서 멈추어야 했고 아합왕은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으로 들어간 아합왕은 이세벨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고 그 결과 이세벨은 더욱 강경해지고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호렙산에 이르게 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좀더 깊이 깨닫게 합니다. 내용 구조는 엘리야의 피신(1-8절), 엘리야의 탄식(9-10절), 하나님의 현현(11-14절), 엘리야의 사명(15-18절), 엘리야를 좇는 엘리사(19-21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엘리야의 피신 (1-8절)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18장 내용을 보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인과 대결하여 승리하고 백성들과 함께 기손 시내에서 그들을 처형했습니다. 또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7번 기도하여 3년 6개월 동안 가뭄과 기근으로 허덕이던 이스라엘에 큰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의기양양한 엘리야는 허리를 동이고 아합왕의 마차 앞을 뛰어 20km가 넘는 이스르엘 성읍까지 갔습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한 것은 행한 표적으로 인해 우상숭배자들이 처형당하고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고 아합도 그 광경을 보았으니 이제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는 기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 편으론 아합왕 뒤에는 이세벨이 있기 때문에 아합왕이 이세벨을 설득하고 우상숭배를 장려하는 정책에서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정책을 펴 나갈 것을 기대하고 시위하는 의미를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성 안으로 들어갔으나 엘리야는 성 입구 어귀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아합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특히 이세벨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성읍으로 들어간 아합왕은 자신이 본 상황들을 모두 이세벨에게 고했습니다. 이세벨은 엘리야가 자신이 주도적으로 장려하는 바알과 아세라 신을 모독했고 자신이 후원한 850인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내일 이맘 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즉시 처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루 간격을 두고 처단하겠다고 경고한 이유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입니다. 엘리야가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터이니 엘리야를 위협만 해서 멀리 추방하려는 의도가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반대로 엘리야가 백성들의 호응을 얻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엘리야를 백성들 앞에서 공개 처형할 목적에서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세벨이 분노했고 그 말을 들은 엘리야는 심히 두려워 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환과 함께 이스르엘에서 예루살렘 아래 있는 브엘세바에까지 도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 군대가 미치지 못하는 남 유다까지 도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못하고 사환을 떼 놓은 상태로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광야의 한 로뎀나무(broom tree) 아래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고 잠을 잤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못난 놈입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나타내고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열심이 특심했으나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허탈과 좌절에 빠진 것입니다. 탈진(burnout)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갈멜산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을 일시에 우상숭배에서 하나님께로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광경을 목격한 아합은 변하지 않았고 이세벨은 더욱 악해져 자신을 죽이려 했으니 탈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이기는 하지만 호렙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한 내용을 근거해 볼 때 엘리야가 탈진한 것은 하나님의 일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좀더 깊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5-18절 참조).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잠이 든 엘리야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천사를 통해 기력을 차릴 수 있도록 떡과 물을 주게 했습니다. 그리고 40주야를 걸어 호렙산에 이르게 했습니다. 호렙(Horeb)산은 시내(Sinai)산과 동일합니다. 브엘세바에서 호렙산까지는 350km로서 꾸준히 걸으면 10일 길입니다. 그런데 40일을 갔다는 것은 계속 걸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묵상이나 기도 등을 하며 걸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40일은 인가의 한계를 넘는 기간입니다 (신9:9,마4:2). 하나님이 호렙산에 이르러 기도를 하게 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아는 데 있어서 좀더 깊이 알고 좀더 성숙하게 하여 사명을 감당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실패하여 탈진 했을 때에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성숙시켜 사용하십니다.
엘리야도 일시에 북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리려는 사역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함께 하는 자는 없고 자기 생명까지 위태롭게 되므로 우울을 경험했습니다. 욥도 물질을 잃고 자녀를 잃고 병들고 친구들이 정죄를 받으면서 우울을 경험했습니다. 다윗도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 미친 체하면서 밧세바 사건 때문에 신음하면서 자식들의 범죄 때문에 고통하면서 우울을 경험했습니다. 요나도 하나님 명령을 수행하여 니느웨에서 멸망을 외칠 때 자신이 말한 대로 되지 않아서 위신이 하락하므로 우울을 경험했습니다. 바울도 많은 조건을 갖추고도 사도들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사도들과 다투면서 동역자들과 갈라서면서 우울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고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의 타락과 반역으로 자신이 누구보다도 우울해 하셨기에 우리의 우울과 절망과 슬픔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이해 못하는 슬픔과 아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다. 고난당하므로 우울한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치료하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출15:26). 하나님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한다고 했습니다 (말4:2). 이사야61:3에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슬퍼하는 자에게 재를 대신하여 화관을 주시고 슬픔을 대신하여 희락을 주시고 근심을 대신하여 찬송을 주어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2. 엘리야의 탄식 (9-10절)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여 비가 오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고 (약5;17), 갈멜산에서 기도하므로 불로 응답받는 경험을 하고(18:30-38), 우상을 숭배하는 선지자 850명을 숙청했습니다 (18:19,40). 그러나 이세벨의 위협을 두려워 하여 이스르엘에서 예루살렘 아래 있는 브엘세바까지 도망했고 곧이어 광야로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죽기를 구했습니다 (1-4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고도 자주 실족하여 삶의 회의를 느끼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민14:1-4).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버려두지 않고 천사를 보내어 떡과 물로 기력을 찾게 하여 40주야를 걸어 호렙산에 이르게 했습니다 (5-8절). 호렙(Horeb)산은 시내(Sinai)산과 동일한 산입니다.
엘리야가 호렙산에 이르러 한 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했습니다 (9절). '무엇이 너를 여기 있게 하느냐' '무엇 때문에 너가 여기 있느냐' '왜 너가 여기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질문에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10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의 제단을 헐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고 이제 자기 홀자 남았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일에 열심히 특심이었으나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데 대한 허탈감이 있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는 자기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는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고 자기도 붙잡혀 죽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기 형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실족한 것은 자기의 형편과 처치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3절에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의 협박이 시작되고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은 침묵하고 하나님의 권고가 나타나지 않자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쓸모없는 모습으로 생각되었습니다. 10절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14절).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살아가다가 약속한 자녀는 생기지 않고 아내와 여종은 다투고 인간의 방법으로 낳은 아들은 불순종하고 하나님은 13년 동안 나타나지 않자 실족했습니다 (창16:1-15).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전능함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창17:1). 누구든지 자신의 형편과 처지만 생각하면 실족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열악한 환경을 볼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둘째는 자기가 일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많은 열조 보다 나은 줄 알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 의를 이루기 위해 열심이 특심했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하자 하나님께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4절에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고 했습니다. 그 갈멜산 사건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도 자신이 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위신이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실족하여 박넝쿨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 (욘4:3-8).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일하는 자는 열심을 내지만 열심을 낼수록 실족하게 됩니다 (출2:11-15). 18세기 대신앙부흥운동의 기수였던 화이트 필드는 사탄의 상투적인 수단 3가지를 말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교만이다. 사탄은 교만의 도수를 조금씩 높여 주다가 갑자기 떨어뜨린다고 했다. 그러므로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로 아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는 자기 혼자 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과 이세벨의 위세가 극에 달한 반면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자는 자기 혼자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는 표현이 그의 심리를 잘 알게 해줍니다 (10,14절).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오바댜를 통해 선지자 100명을 숨겨 두었고(18:4) 바알과 아세라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7,000명을 숨겨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18절). 엘리야는 혼자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뜻을 같이 할 자들을 숨겨 놓은 것입니다. 때가 되면 그들을 통해 일하시려는 섭리인 것입니다. 다만 당장 그들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은 것은 그들을 통해 일하시려는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종들과 타락한 백성들과 이방 나라에 대한 경륜이 나타날 때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사역 방법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 서 있는 엘리야에게 여러 표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람과 지진과 불과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바람이 지날 때에 하나님을 찾았으나 없었고 지진이 일어날 때에 찾아봐도 없었고 불이 지날 때에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모두 지나간 다음에 세미한 음성이 들렸는데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11-12절). 이 표상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알려 주려는 표상들입니다. 하나님은 바람, 지진, 불 같이 일하시기도 합니다. 엘리야가 그런 표상들이 나타날 때에 그 곳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실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찾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갈멜산 사건에서 처럼 크고 기이하게 일하시는 분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일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세미한 음성을 통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 따라갔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군졸들에게 검으로 내리치면서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했습니다 (마26;47-54).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이 원하는 방법대로만 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섯째는 자기 사명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해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같은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을 일시에 하나님께로 돌리려 했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낙심한 것입니다 (11-12절).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시려는 것은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선지자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5-17절).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가 엘리사가 죽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사엘을 통해 이방 나라를 다스리고 예후를 통해 타락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엘리사를 통해 진리를 세워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방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은 조금도 실패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고 아합과 이세벨의 박해로 하나님의 일이 실패로 돌아간 것 같지만 예후를 통해 그들을 심판하리라는 계획은 조금도 변함없고, 엘리야 이후에도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나가리라는 계획은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후에 실제로 아람의 군대장관 하사엘이 벤하닷을 죽이고 아람왕이 되고,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예후는 오므리(아합왕가)를 숙청하고 이스라엘 왕이 되고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한 다음에 50년간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됩니다 (왕하2-13장). 베드로도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었습니다 (마26:47-54). 세례요한도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헤롯과 헤로디아의 박해로 옥에 갇히고 자기를 따르던 자들이 침묵하고 예수님도 자기를 구해주지 않자 실족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마11:5).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해야 할 일을 여전히 하고 계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실족케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실족치 않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마11:6). 하나님의 선하신 본질적인 성품과 일하시려는 목적과 계획과 방법을 생각하며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일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이 완전한 뜻과 방법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롬8:28-30). 그런 의미에서 뮐러는 "절망이란 것 보다 더한 신에 대한 불신은 없다"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현현 (11-14절)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호렙산 한 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굴에서 나와 산 위에 서라고 했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바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가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또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그 지진 가운데 계신가 했는데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불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가 하였으나 그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소리'(히.콜, 헬.φωνη)는 '음성'을 말합니다.
'바람'과 '지진'과 '불'과 '세미한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顯現)의 표징들입니다. 상징이나 표징이나 표호는 그것 자체가 사실적 실재는 아니지만 그것들은 나타내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표상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알려 주려는 표상들입니다. 하나님은 바람, 지진, 불 같이 일하시기도 합니다. 엘리야가 그런 표상들이 나타날 때에 그 곳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실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찾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갈멜산 사건에서 처럼 크고 기이하게 일하시는 분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일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세미한 음성을 통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 따라갔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군졸들에게 검으로 내리치면서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했습니다 (마26:47-54).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이 원하는 방법대로만 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기적 같은 외적 현상을 통해 일하시기도 하지만 그 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성령의 내적 통찰을 통해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켜나가십니다.
4. 엘리야의 사명 (15-18절)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제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자기 혼자 남았는데 그것도 자기 생명을 취하려 한다고 좌절했습니다. 자기 사명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름을 부으라’는 것은 감람유(올리브유)를 부어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자임을 알게 하라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선지자가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세울 때 감람유를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불러 세운 자로서 성령님이 임하여 직임에 필요한 은사를 준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사엘(Hazael)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하사엘을 이방 제국이었던 아람 제국의 왕이 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라는 말입니다. 당시 아람의 제국의 왕이 벤하닷이었는데 하나님이 아람 군대장관이었던 하사엘을 아람 제국의 왕이 되게 할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괴롭히던 이방 제국 아람의 왕 벤하닷을 처단하게 하고 아람 제국을 통치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후(Jehu)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예후를 타락한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라는 말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이었는데 북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었던 예후를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왕후 이세벨을 처단하게 하고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여 북이스라엘을 개혁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Elisha)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엘리사를 북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게 할 것임을 알게 하라는 말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구원 사역을 하는 선지자는 엘리야였는데 엘리사를 선지자가 되게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엘리야를 이어 엘리사를 통해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들은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이방 제국 아람에 대해, 하나님은 섬기지만 타락한 북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룰 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말한 것입니다. 후에 실제로 아람의 군대장관 하사엘이 벤하닷을 죽이고 아람왕이 되고,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예후는 오므리(아합왕가)를 숙청하고 이스라엘 왕이 되고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한 다음에 50년간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됩니다 (왕하2-13장).
하나님께서 왜 이 계획을 말씀하신 걸까요?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 섬기는 나라들을 괴롭히는 이방 제국인 아람 제국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안 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섬기는 나라인 북이스라엘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일이 안 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일시에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생명을 걸고 갈멜산 결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는 왕가가 더 완고해졌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지자들만 안전해도 훗날을 기약해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다 죽고 자기 혼자 남았고 그나마 자기 생명도 언제 죽을지 모른 상태이니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끊어졌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생명까지 바쳐서 헌신했지만 이젠 실패해서 소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엘리야 선지자가 가장 절망하고 우울하고 탈진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실패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방 나라에 대해 하사엘을 준비했고, 북이스라엘에 대해 예후를 준비했고, 선지자에 대해 엘리사와 7,000명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에 대한 섭리는 계속 이루어지고 있고 때가 되면 그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전혀 실패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엘리야는 자기의 처한 상황을 보고 실패했다고 좌절했지만 하나님은 전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도 실패하지 않았고 엘리야를 통해 하시려는 일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가서 세 인물에게 하나님이 택하여 사용하실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왜 실족했습니까? 왜 낙심하고 절망하고 탈진하고 죽기를 구했습니까? 자기 생각대로 열심을 냈다가 실패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3,4,14).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계획을 가지고 준비하고 섭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시려는 일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처럼 모든 사람이 놀랄 만한 기적으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처럼 은밀한 섭리 가운데 그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낙심하고 절망합니까? 우리 생각대로 열심을 냈다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실패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도 실패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과 계획을 따라 섭리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원리를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현재의 형편과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은 7,000명을 숨겨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엘리야 혼자 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7,000'명은 문자적일 수도 있지만 미래에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담당하기 위한 충분한 수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든 상징으로 보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시킬 구원 사역에 필요한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의도는 확실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합니다.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주역이 됩니다 (계14:4-5, 20:4).
5. 엘리야를 좇는 엘리사 (19-21절)
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21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자신이 하는 이스라엘 구원 사역을 이어 갈 엘리야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엘리사는 소 12겨리를 앞세워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소 12겨리는 24마리로서 많은 농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소로 다른 일꾼들과 함께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엘리사는 12번째 겨리에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리로 가서 그에게 겉옷을 던졌습니다. 겉옷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의 위치와 직무를 나타냅니다. 엘리야가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진 것은 엘리야 자신의 직무를 엘리사에게 대신하라는 상징행위였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는 즉시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자기 부모와 입맞추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부모에게 얽매이는 행동이 아니라 부모를 떠나 엘리야를 따르겠다는 결단의 의미입니다. 주저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 사명을 위해 부모와 영원한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감수하겠다는 결연한 모습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의지적 결단의 모습을 보고 부모와 작별하지 못하도록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기를 허락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소 1겨리를 잡고 소의 기구로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가족과 친척과 일꾼들과 마지막 잔치를 했습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의식을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야를 좇아 수종들었습니다.
엘리사의 결단있는 행동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역자로서 당연한 행동입니다. 소 24마리로 농사를 지을 정도이면 그 소들을 부리는 일꾼들과 그 소로 일할 밭이 많다는 것을 암시하고 그것은 상당히 부요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농사를 하면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탄식했을 것이고 그들을 하나님께 돌리려 한 엘리야의 노력과 활동에 대해 듣고 있었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일에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미 그를 엘리야를 이를 자로 선택했다는 점과 엘리야가 겉옷을 던질 때에 그것이 자기에게 사명과 직무를 맡긴다는 의미로 여기고 즉시 엘리야에게 나아간 모습을 보아 그렇습니다. 엘리야의 특이한 외모와 복장은 항간에 널리 알려졌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에 즉시 청종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주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할 때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는 자와 같지 않았습니다 (눅9:59). 그 사람은 자신의 부친이 죽을 때까지는 주를 좇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즉시 부모와 작별하기 위해 부모와 입 맞추기를 허락받아 소를 잡아 잔치하고 엘리야를 좇았습니다. 부모와 단순히 작별인사를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소와 기구를 없애고 작별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법대를 졸업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입학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많았고 학교는 후배였습니다. 그는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참으로 마음이 착하고 생활에 성실하고 성경과 신학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들이 늘 돌아오라고 전화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고시공부해서 검사가 되어야 할 아들이 신학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이해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부모가 아무리 반대해도 이 길을 가겠다고 여러번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형님이 쫓아와서 아예 데려갔습니다. 설득 당한 것입니다. 그는 떠나면서도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고 말하면서 떠났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인정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부모를 등져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성을 상실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도 옥고를 치루고 잠시 나왔다가 설교하면서 한 말이 '감옥에서 하루 하루를 간신히 버텼고 자기 어머니와 자식을 돌봐 달라는 것이었고 옥고를 치룰 때 사모님이 면회가서 무엇이 먹고 싶느냐고 물으면 쑥갓을 살짝 데쳐서 입안에 넣으면 톡 터지는 맛을 느끼고 싶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 때문에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창12:1-5). 모세처럼 보장된 지위와 보화와 학술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히11:24-26). 룻처럼 고국과 부모와 친구를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신과 결혼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룻1:6-18). 베드로처럼 배와 그물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4:18-20). 바울처럼 육체적으로 신뢰할 만한 출신과 성분과 지식과 율법적 열심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빌3:4-8).
<結言>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이 안 되었을 때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그 실패를 하나님의 일의 실패로 연결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했다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적 의지를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뜻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만큼 성숙되는 것입니다. 엘리야 사역이 마친 후에도 엘리사를 통해 일하시려고 엘리사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들어 쓰시되 실족한 가운데서 일으켜 사명을 감당하게 했듯이 하나님이 쓰러진 우리에 대해서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날마다 죽는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 날마나 일어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