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사무엘상 31:1-13

<題目> 사울 왕가의 최후


 

<序言>

  전 장에서 다윗은 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말렉 족속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므로 많은 전리품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와 유다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본 장에서 사울은 블레렛과의 전투에서 아들들과 함께 죽게 됩니다. 이 사실은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었고 (3:13-14)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는 게기가 됩니다 (13:14, 행13:22). 1-6절은 이스라엘의 패배와 사울의 죽음에 대해, 7-13절은 사울의 시신이 모욕을 당하고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을 장사지낸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本論> 

          1. 사울의 죽음 (1-6절)

 

  1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4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5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6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블레셋 연방은 아기스 왕을 중심으로 모든 도시 지도자들이 총 연합하여 전차를 끌고 이미 이스라엘 깊숙한 수넴까지 들어와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사울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그들을 막기 위해 길보아 산에 대진했습니다. 결국 길보아 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스라엘이 패했습니다. 전투 상황이 그려지지 않았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도 전사했습니다. 사울도 블레셋 군에게 쫓기다가 중상을 입고 자결을 했습니다.

 

  사울이 병기든 자와 함께 쫓겨 가다가 중상을 입고 더 이상 도망하지 못하고 잡힐 위기에 처하자 병기든 자에게 자신을 찌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할례없는 블레셋 군에게 모욕을 당할까 해서였습니다. 블레셋 군에게 죽임 당하는 것 자체를 모욕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당시 히브리적 사고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고 다른 나라 민족은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난지 8일만에 양피를 베는 의식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백성된 표로 행해졌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군을 가리켜 '할례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 하노라' 고 한 것은 그런 의식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병기든 자가 찌르기를 두려워 하여 거부하자 자기 칼을 바닥에 거꾸로 세우고 그 위에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병기든 자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아마 왕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없었을 것이고 왕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혼자 살아 남았을 경우에 받을 처벌을 생각해서 하고 하기 보다 자신이 섬기는 자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사울의 죽음은 비참합니다. 처음엔 겸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으나 얼마가지 않아 교만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수많은 제사장들을 죽이고 신접한 여인을 찾기까지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자 계속 왕위에서 떨어질 것을 두려워 하여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 다녔고 결국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자결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전투의 가장 근본적인 패배 원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을 때는 극명하게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하나님을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잠16:18, 약4:6, 벧전5:6).

 

   ※ 자살과 구원의 관계

 

  성경에서 자살은 사울, 아히도벨, 가룟 유다가 대표적으로 나옵니다 (삼상31:4, 삼하17:23, 마27:5). 성경은 사울의 자살을 구원 여부와 결부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울이 자살한 행위를 근거로 자살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단정합니다.

 

  카톨릭에서도 자살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자살한 사람에 대해서는 생전에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칠성례(七聖禮) 중 종부성사(終傅聖事)를 베풀지 않습니다. 개신교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 사람은 지옥 갔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이 행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카톨릭이나 또 개신교 가운데서도 구원이 사람의 의지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알미니안주의 교리를 가진 교단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 신학적 배경을 감안할 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개신교 안에서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칼빈주의 혹은 복음주의 교리를 가진 교단에 속한 사람들까지 자살을 구원론과 연관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장로교권에서 가지고 있는 칼빈주의 교리의 근본 원리는 하나님 주권(主權)에 있습니다. 분명히 전제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은 행위를 근거로 한 것도 아니고,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얻습니다 (롬1:17, 10:10). 그것을 우리는 이신득구(以信得救)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는데 그것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 용서받은 죄는 원죄(정죄,유전죄)와 본죄(자범죄, 요구죄)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이미 모든 죄에 대해 용서를 받았고 구원을 얻어 사후에 천국을 가게 됩니다.

 

  우리가 믿은 다음에도 어떤 종류의 죄이든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 죄는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모든 죄를 빠짐없이 완벽하게 찾아 회개할 수도 없거니와 현저히 발견된 죄라 해도 회개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사(罪赦)함과 칭의(稱義)가 법정적으로 취소되거나 중생(重生)과 구원(救援)이 취소되거나 영생(永生)에 대한 보장이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근본적으로 죄를 사함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회개를 해야 법정적인 용서를 받는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담당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양의 피뿐 아니라 회개의 행위로도 죄를 속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대속하신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타살이나 자기 생명을 빼앗은 자살은 모두 죄입니다. 타살죄와 자살죄의 다른 점이 있다면 타살죄는 회개할 수도 있지만 자살죄는 회개할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에 대한 책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타살죄이든 자살죄이든 회개의 기회 여부만 다를 뿐 동일한 죄입니다. 타살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자살죄도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단지 자살죄가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효과를 제한 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구원이 사람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보는 인본주의적 사고에 빠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이미 믿은 사람이 자살했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자살을 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에 자살하는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자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거나 이성적인 판단을 가지고 살지 만은 않습니다. 믿는 사람도 얼마든지 행위로는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기도 합니다. 도둑질도 하고 간음도 하고 살인도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을 만들어 절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살지 말라고 10계명을 규범으로 주신 것입니다. 자살도 그 중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각도이긴 하지만 사람은 충동에 의해 의도와 달리 자기 생명에 타격을 입히고 생명을 잃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사고로 자기가 자기 생명을 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선한 의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죽음에 내어 주는 일도 있습니다.

 

  그 말이 크리스챤이 자살을 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이 자살을 한다면 천국에 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끊은 죄에 대한 책망이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찬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살을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인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2. 사울의 장사(葬事) (7-13절)

 

  7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8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9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땅 사방에 보내고

  10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11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12 모든 장사가 일어나 밤새도록 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취하여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와서 거기서 불사르고

  13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일을 금식하였더라

 

   ①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능욕했습니다 (7-10절).

 

  길보아에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의 세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는 전사하고 사울은 도망하다가 위급함을 느끼자 자결을 했습니다. 남은 이스라엘군은 도망하고 주변에 있는 성읍에 있는 자들도 성읍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패배의 분위기는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그 다음날 블레셋군들이 의복과 무기와 식량 등 전리품을 약탈하기 위해 전장에 이르렀다가 사울과 세 아들들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블레셋군들은 죽은 사울의 머리를 베고 갑옷을 벗겼습니다. 사울의 머리를 다곤 신당에 매달고 그 갑옷은 아스다롯 신당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목없는 시체와 세 아들들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박았습니다 (대상10:10). 벧산 성벽은 요단강으로부터 서쪽으로 6.5km 갈릴리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19km 정도 떨어진 성읍의 성벽입니다.  

 

  블레렛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능욕한 것은  첫째, 전쟁의 승리를 자신들의 신에게 돌리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스다롯(Ashtaroth)은 전쟁과 풍요의 신인데 그들이 사울의 옷을 아스다롯 신당에 둔 것은 승전의 원인이 아스다롯에게 있다고 보고 아스다롯에게 기쁨과 영광과 경배를 돌리려는 의도입니다. 둘째, 승리의 기쁨을 공개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죽은 사울의 시체를 목을 베어 블레셋 온 땅에 보낸  것은 모든 블레셋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의 대상이었던 사울의 죽음을 확인하고 완전히 승리했음을 기뻐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상대국에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입니다. 사울의 목없는 시체와 세 아들들의 시체를 자신들이 취한 성읍의 벽에 못을 박아 매단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욕하므로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항거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게 하기 위한 전시행위입니다. 시체에 대한 모욕은 당시 중근동 지방에서의 전쟁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라고 합니다.  

 

  사울은 인간들의 육욕에 의해 세워진 왕이었습니다. 사울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제사장들을 죽이고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완악하여 불순종했습니다.  이미 예고된대로 그와 그의 집은 멸망했습니다. 그는 위급한 상황에서 자살까지 했습니다. 죽은 후에도 시체의 목이 잘리고 갑옷을 벗기우고 몸은 성벽에 못 박혀 능욕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불순종한 자의 결과입니다.    

 

  출애굽기20:5-6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죄는 3~4대까지 이르고 은혜는 1,000대까지 이를까요. 원리적으로 3~4대나 1,000대나 같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2대에서 3대까지 가면 4대이고 3대에서 3대까지 가면 5대이고.... 계속 나가기 때문에 은혜뿐 아니라 죄도 1,000대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론 3~4대 이상을 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점점 멸절하여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므로 은혜받을 가속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②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11-13절).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왕의 시체가 블레셋군들에 의해 목이 없는 채로 아들들의 시체와 함께 벧산 성벽에 못 박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중 장사들이 밤새로록 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취하여 길르앗 야베스로 돌아와 화장(火葬)하고 그 뼈를 에셀나무 아래 묻었습니다. 그리고 7일을 금식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매장(埋葬)하지 않고 화장(火葬)한 것은 사울의 시체가 목이 없는 등 많이 훼손 되었고 시체가 오래 방치되어 부패했기 때문에 화장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항간에 사울의 시체를 화장한 사실을 근거로 믿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장을 하면 부활하지 못한다는 가르침이 있는데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가르침이고, 하나님의 전능성을 모욕하는 가르침입니다.

 

  길르앗 야베스는 갈릴리 바다 남쪽 30km 떨어진 곳이며 요단강 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곳은 요단 동편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 있는 성읍입니다 (수17:5-6). 길르앗 야베스는 사울의 시체가 있던 벧산까지는 21km 정도 됩니다. 길르앗 야베스는 사울이 즉위한 초기에 암몬 사람들로부터 침공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사울이 군사를 베섹에 모집하여 밤새 가서 새벽녘에 암몬 사람들을 치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11:1-11).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지 않고 감사했습니다. 사울왕의 시체가 모욕당한 사실을 접하고 자신들도 그 은혜를 보답하는 양으로 밤새 요단강을 건너 수십 킬로미터를 달려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취하여가 장사를 지내 주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사람들이며 신의(信義)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의가 부족한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관심을 가져야 할 행동입니다.       

 

<結言>

  사울의 출발은 개인적으로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보면 출발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기 위해 이방 국가의 왕과 제도를 원해서 그들에 의해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사울은 그 구조 속에서 백성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교만해져 하나님을 떠났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그들은 이방 왕과 제도를 갖추면 강한 나라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강한 듯 보이다가 결국 블레셋에 패배하므로 정국 상황은 사사시대 상황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