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序言>

  다윗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예루살렘을 왕도로 삼고 여부스 족속이 거하던 예루살렘 점령하여 다윗성을 쌓습니다. 군사 정치 면에서 안정되고 평안을 찾자 오랫동안 방치되어온 언약궤(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합니다. 그러나 율법대로 준행하지 않으므로 인해 재난을 만나고 다시 두번째에 성공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고 친히 다스리는 신정국가를 건설하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대목입니다. 1-11절에는 언약궤 운반과 웃사의 죽음에 대해, 12-19절은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에 대해, 20-23절은  미갈의 실수와 다윗의 책망에 대해 나옵니다.

 

<本論> 

       1. 언약궤 운반과 웃사의 죽음 (1-11절)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① 다윗이 언약궤를 바알레유다에서 모셔 왔습니다 (1-5절).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이후 바알레유다 아비나답 집에 있는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모셔 오려 했습니다. '바알레유다'는 예루살렘 서쪽으로 20여km떨어진 곳으로서 '기럇여아림'의 옛 이름입니다. 언약궤는 아비나답 집에서 수레에 싣고 앞에서는 아효가 뒤에서는 웃사가 행했습니다. 그 뒤를 다윗과 백성이 따르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 등 여러 악기를 연주하며 따랐습니다. 수금은 6줄로 된 현악기이고 비파는 하프 일종이고 양금은 탬버린 일종이고 재금은 심벌즈 일종입니다. 그 때 동원된 수가 무려 30,000이었습니다. 이들은 전국에서 뽑은 사람들인데 아마 당시 있을지도 모르는 블레셋의 공격을 대비하여 호위하게 하는 군사역할을 하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Keil & Delitzsch, Lange). 당시 언약궤가 있던 바알레유다는 블레셋 지경에서 가까워서 블레셋의 기습 공격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언약궤가 사울왕 때 아벡전투에서 블레셋에 빼앗긴 이후부터 70여 년 동안 성소에 모셔지지 못했습니다. 사울왕 때 있었던 아벡전투 때부터 다윗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까지의 기간은 B.C.1075-1003년입니다 (Leon Wood). 사울왕 때 언약궤를 아벡전투에서 블레셋에 빼앗긴 때로부터 다윗왕이 언약궤를 바알레유다 아비나답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셔 올 때까지가 약 70여 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레를 몬 아효와 웃사는 아비나답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3절). 아효와 웃사는 아비나답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니'(בני)가 복수로서 복수형태는 손자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이이며 (민16:1, 왕하25:22, 대상8:40), 또한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이 이미 70년 전부터 그 집에서 법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삼상7:1-2) 늙은 아비나답의 아들들이 수레를 몰았다는 것보다는 손자들이 수레를 몰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4~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성막은 실로라는 곳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아벡 전투 때에 이스라엘이 패하고 성막은 불타고 언약궤는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빼앗아 자기들이 섬기는 다곤 신당의 다곤 신상 옆에 두었는데 하나님이 다곤 신상을 깨트리자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옮기는 곳마다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레위인들이 많이 사는 벧세메스 마을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때 언약궤가 수레에 실려 돌아온 것을 본 벧세메스 사람들이 보자 그 언약궤 뚜껑을 열어 보았고 그로 인해 70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벧세메스에서 가까운 바알레유다(기렷여아림) 사람들에게 가져가게 했고 바알레유다 사람들은 언약궤를 메어다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 집에 두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로 하여금 지키게 했습니다. 언약궤는 그렇게 개인의 집에 2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25~3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있을 때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100×50×5규빗 (50×25×2.5m) 크기의 천막을 두르고 그 안에 성소와 지성소를 짓게 했습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를 만들어 놓게 했습니다. 언약궤는 법궤라고 하기도 합니다. 2.5×1.5×1.5규빗(1.2×0.7×0.7m)의 크기로 조각목(싯딤나무)으로로 만들어 순금을 입히게 했습니다. 위로 돌아가면서 금테를 두르게 했고 양편에 두 금고리를 만들어 채(봉)를 꿰어 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십계명이 기록된 두 율법판을 넣어 두게 했습니다. 열왕기상8:9과 역대하5:10에 보면 언약궤 안에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9:4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모세의 두 돌 비석(율법판)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만나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궤 안에 두라 하지 않고 궤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출16:33-34, 민17:10). 그런데도 히브리서에서 세 종류가 다 안에 있었다고 한 것은 사실 여부에 관심보다는 언약궤와 관련하여 표징으로 보관되었던 물건들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무엇을 예표하느냐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언약궤는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했습니다. 성막 밖에서 보면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 지붕 위로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솟아 있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떠오르면 성막을 거두고 백성들도 천막을 거두었습니다. 이동 중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서면 그 곳에 언약궤를 안치하고 성막을 설치하고 주위에 레위인들이 천막을 치고 사방으로 백성들이 천막을 쳤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출애굽기25:22에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때론 하나님 자체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사무엘상4:22에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사무엘하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왕이 블레셋의 길보아 전투에서 죽게 됩니다. 이후에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고 7년 6개월 후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동안 여부스 족속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400여 년 동안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그 성읍은 해발 670m 고지대에 있었는데, 고원과 접하고 있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세 방면에 모두 수백 미터나 되는 가파른 언덕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쪽과 남쪽은 힌놈 골짜기가 있고 동쪽은 기드론 골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예루살렘 주위에 또 성을 쌓아서 더욱 요새화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을 완전히 물리쳤습니다. 그리고는 장막으로 성소를 만들어 언약궤를 모시려 했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은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요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 종교적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왕은 언약궤가 70여년 동안 개인의 집에 있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지은 성소에 모시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20여km 떨어진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 집에서 모셔왔습니다.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하고 앞에서는 아효가 가고 뒤에서는 웃사가 따르게 하고 다윗과 백성들은 각양 악기 연주 찬양하면서 따라가고 30,000명의 군사가 호위했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소가 뛰므로 흔들리는 언약궤를 웃사가 붙잡았다가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언약궤를 모셔오지 못하고 제사장 반열에 속한 오벧에돔 집에 두게 했습니다. 3개월 후에 다시 모셔왔습니다. 이번에는 전번에 실패한 요인들을 수정하여 모셔왔습니다. 백성들이 각종 악기로 연주하며 환호를 하며 찬양을 했고 다윗은 너무 기뻐서 언약궤 앞에서 빙빙 돌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예루살렘성에 준비한 장막에 안치하고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다윗은 그에 그치지 않고 더 크고 화려한 성전을 지어서 언약궤를 모시려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불러 자기는 백향목으로 지은 궁전에 살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는 장막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성전을 지으려는 소망을 밝혔습니다 (삼하7:2, 대상17:1). 물론 하나님이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그 열정은 받아주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다윗은 왕이 되기 전부터 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수 십년 동안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왕도로 정하여 성을 쌓은 것도 언약궤를 모셔 올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평안해지자 언약궤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소원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나라를 더 강하게 하고 그 아들 솔로몬 때에 성전을 짓게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 마음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왕상8:15-21).     

 

   하나님이 진정한 예배에 임재하시고 감동시키시므로 영광 받으십니다. 그런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 예배에 임하여 감동시켜 영광 받을 수 있도록 예배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임하실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개인에게 내주하셔서 교제하고 동행하므로 기쁨을 얻으십니다. 하나님이 교제하며 동행하며 기뻐하실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 안타까움을 느끼고 내주하신 하나님이 교제하며 기뻐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사무엘하7:2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고 한 다윗의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대상17:1).

 

   ② 언약궤를 옮기는 중 웃사가 죽었습니다 (6-8절).

 

  다윗왕이 바알레유다에 있는 아비나답 집에서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왔습니다. 새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소가 끌고 아비나답의 아들 아효가 소를 몰고 또 다른 아들 웃사가 수레 뒤에서 따랐습니다. 다윗왕과 백성들은 각종 악기를 연주하면서 뒤를 따랐습니다. 30,000명의 군사가 호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가 뛰었습니다. 발이 돌에 걸렸는지 패인 곳을 헛딛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가 뛰자 수레가 흔들렸고 수레에 실린 언약궤도 흔들렸습니다. 뒤를 따르던 웃사가 언약궤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얼른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웃사가 언약궤를 붙들자마자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여 치신 것입니다. 본문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소로 옮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오벧에돔 집에 두게 했습니다.


  다윗왕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지은 성소로 옮기려는 목적은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라고 했습니다. ‘베레스웃사’(פרץ עזה)는 ‘웃사를 갈라놓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웃사를 갑자기 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이 분하여 그 곳 이름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분해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방치되어 있던 언약궤를 모시려 했는데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실패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왕은 사울왕 때로부터 약 70여 년간 아비나답 집에 둔 때로부터 20여 년간 하나님의 표상인 언약궤가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성소를 만들어 옮기려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표상을 안전하며 예배를 받으실 만한 곳으로 이동시키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언약궤를 옮기려는 목적과 열정은 좋았습니다.


  문제는 방법에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모시려는 목적과 열정은 옳았는데 언약궤를 옮기는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1-10절에서는 다윗왕이 언약궤를 옮기려다 실패한 내용이지만 11-19절에 보면 이후에 다시 언약궤를 옮겨서 성공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 옮길 때는 첫 번째 옮기다가 실패한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수정해서 옮겼기 때문에 성공한 것입니다. 두 번째 옮기려 할 때 다윗의 한 말을 보면 역대상15:13-15에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왕이 첫 번째에는 하나님의 규례대로 하지 않아서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두 번째에는 하나님의 규례대로 해서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궤를 취급하는 방법에 대해 주신 율법의 규례는 레위지파의 아론의 아들인 고핫의 자손만이 할 수 있다고 했고 그것도 직접 어깨에 메어야 한다고 했고 누구도 만져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민수기4:15에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고 했습니다 (민3:30-31). 언약궤에 채(pole)를 꿰어 둔 채로 두었다가 이동할 때는 고핫 자손이 직접 만지지 말고 천으로 덮은 후에 채를 어깨에 메고 이동하게 한 것입니다 (출25:14-15, 민7:9). 그런데 다윗왕이 언약궤를 새수레에 실어서 이성 없는 소로 하여금 끌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이고 웃사는 손으로 붙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치신 것입니다 (3절).

 

  언약궤 이동의 실패 원인은 언약궤를 옮기는 율법의 규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왕이 율법의 규례대로 하지 않은 것은 고의적인 것이 아니고 몰라서였습니다. 두 번째 옮길 때 율법의 규례를 지키지 않았음을 깨닫고 수종하여 옮긴 것을 보면 (대상15:13-15) 율법의 규례를 몰라서 그런 실수를 한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죽은 후(삼상25:1) 오랫동안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다윗왕도 율법에 대해 정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 이동에 관련한 율법의 규례를 알지 못한 채 언약궤를 잘 모시려는 열정만 가지고 행하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다윗왕이 언약궤 이동에 실패한 것은 율법의 규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더 근본적으로 보면 율법의 규례를 알지 못해서 실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율법은 모세5경(창,출,레,민,신)에 기록된 내용으로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모세오경의 율법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세5경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와 신약성경 전체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을 입은 자들을 통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의지와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을 때 기쁨과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시대에 남유다왕 여호야긴 때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유다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이 사로잡혀갔습니다 (2차 포로). 그 때 에스겔 선지자도 사로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이 씌여있는 두루마리 책을 주시면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은 그 두루마리를 먹었는데 입에서 꿀같이 달았다고 했습니다. 에스겔3:3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고 했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책의 내용을 지적으로 깨다달아 아는 것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고, 달다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은유적 표현입니다 (렘15:16). 에스겔은 유다 백성이 사로잡혀 고통당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유다 백성은 패역하여 돌이키지 않고 유다 예루살렘은 또다시 더 큰 환란을 당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에 좌절해 있었습니다 (3차 포로). 그런데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내용을 보고 마음이 기뻤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의도를 알게 되어 기뻤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을 회개와 연단을 통해 더욱 정결하게 하고 마침내 본국으로 귀환하여 더 온전한 나라를 이게 하려는 의도를 알고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 경험은 사도 요한도 했습니다 (계10:9-10).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힘든 가운데서도 분별력을 가져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의도를 알아 내적으로 소을 가운데 기뻐하게 됩니다. 예레미야29:11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과정이 힘들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함께 함을 느끼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기뻐하게 됩니다. 이사야41:10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했습니다. 힘든 때일수록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기를 힘써 내적 평안과 기쁨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잠6:23, 시19:6-10, 119:103).


  웃사가 언약궤를 붙들었다가 즉사하고 다윗왕이 언약궤를 옮기는 일을 실패한 데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백성은 말씀을 떠나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유다 벧세메스로 이동시킬 때 새 수레에 싣고 암소 2마리로 끌고 가게 했습니다 (삼상6:10-11). 그런데 하나님이 섭리하여 아무 일도 없이 목적지에 잘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가 도착했을 때 그 궤를 열어 본 유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70명이나 즉사했습니다 (삼상6:19). 그리고 본문에서 다윗과 웃사는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실어 소로 끌게 하고 궤를 만졌을 때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하6:7). 블레셋 사람들은 택하지 않은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유기(遺棄)관점에서 용납된 것 같고 유다 사람들은 택한 선민들이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대노(大怒)하지 않으시나 자기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돼지는 잡아먹기 위해 살찌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도 남의 자녀가 잘못 나갈 때에 내버려 두지만 자기 자녀가 잘못 나갈 때는 근실히 징계합니다 (잠13:24). 하나님은 다른 백성이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땐 관망하시기도 하지만 자기 백성이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 징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 살면 안됩니다 (히12:8).    

 

  둘째, 목적도 중요하지만 방법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중심을 볼 때 다윗의 신앙적 열정이나 웃사의 열정 자체는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율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약궤를 옮기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다윗이 궤를 새 수레에 실은 것이나 웃사가 흔들리는 언약궤를 붙잡으려 한 것이나 모두 하나님을 생각하는 열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방법이 잘못되어 실패한 것입니다. 교회사적으로 카톨릭 내에서 정화운동으로 익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창설했던 '예수종회'가 후에 실패로 돌아간 이유 가운데 하나도 '마키아벨리즘'(machiabellism)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곧 '목적이 가하면 방법도 가하다'는 사상 때문입니다. 목적도 좋아야 하지만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방법을 몰라서 실수했다고 해서 용납되지 않습니다. 옛말에 '양잿물은 모르고 먹어도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는 말씀대로 되지 않은 것은 그 공력이 다 불타고 맙니다 (고전3:12-15). 그러므로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1:3). 깨닫는 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아예 지키지도 못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촉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웃사가 흔들리는 언약궤를 붙잡으려 했던 것은 윤리적으로 볼 때 옳은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 벧세메스 사람들도 블레셋에서 돌아온 궤를 만지고 뚜껑을 열었다가 70명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상6:19). 그들은 궤가 블레셋에 있었기 때문에 궤 안에 있는 율법판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려 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궤를 확인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이었습니다 (출25:21-22).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영광의 표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에 있는 동안에도 가는 곳마다 재앙을 내려 스스로 영광을 지켰습니다 (삼상5:1-12). 하나님은 자기 위엄과 영광을 스스로 지키고 드러내십니다. 사람이 윤리적 열심 때문에 그 주권을 관여하거나 침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시도록 사람들은 순종만해야 합니다. 더욱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에게 밭을 팔아 드린다고 해 놓고 절반만 드렸다가 베드로가 성령의 지시에 의해 책망하자 한 날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행5:1-11). 그것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아 서로 핍절한 사람이 없도록 자기 것을 내놓았고 바나바 밭을 드리므로 권위자라는 칭찬을 받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칭찬받고 싶은 욕망에서 밭을 드린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행4:33-37). 그것은 곧 성령의 역사로 되어진 것들을 보고 자신들도 인간적인 욕망을 성령의 역사로 가장하여 영광을 얻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침해한 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침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행12:23).  

 

  넷째, 사람들 보기에 좋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려 하는 목적이나 궤를 새 수레에 실어서 운반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최고로 대접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수레에 실은 것은 율법을 생각지 않은 처사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과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율법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면 결국 사람들 보기에 좋은 모습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할 때 말씀대로 하지 않고 사람 중심으로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대부분의 활동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했습니다. 구제, 기도, 금식 등을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해서 했습니다 (마6:1-18)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6:1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일반 생활에서 조차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살지 않아야 합니다.

 

  다섯째, 쉽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언약궤 실은 수레를 소로 끌게 한 것은 쉽게 운반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쉽게 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영혼이 성장하고 인격이 만들어지는 것은 빠른 시일에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과 많은 시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마16:24).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14:22). 옛말에 "털도 뽑지 않고 먹으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 사역에서도 쉽게 하려 해서는 안되고 일반 생활에서도 쉽게 하려는 정신은 버려야 합니다. 시편126:5-6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했습니다. 전도서11:6에서는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③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습니다 (9-11절).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위해 새 수레에 실어 소로 끌게 했다가 소가 뛰므로 웃사가 붙잡는 순간 죽임을 당하므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분해했습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70여 년 동안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예루살렘으로 모시려했고 모든 신하들을 동원하여 찬양하며 가장 좋은 새 수레에 싣고 모병한 30,000명의 군사로 호위하게 하며 이동을 시켰는데 하나님이 웃사를 쳐서 죽게 하는 일이 일어나자 억울해 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했습니다. 9절에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데 대해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계속 이동시키다가 하나님이 또 누구를 치실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10절에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고 했습니다. 오벧에돔(Obededom)은 제사장 반열인 레위지파의 고핫 자손이며 후에 예루살렘 성전 문지기로 활약한 사람입니다 (6:16, 대상26:15:18,24, 26:4). 그런데 그를 가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아마 그가 단 지파 지경 내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인 가드림몬(Gathrimmon)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19:45, 21:20-24, Keil, Clericus, Wycliffe, Pulpit Commentary).

 

  언약궤가 오벧에돔 집에 있는 동안 오벧에돔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11절에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대상13:14). 오벧에돔이 언약궤를 3개월 동안 모시고 있는 동안 하나님이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의 집이 어떤 복을 받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12절에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보고하기를 하나님께서 언약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고 한 것입니다. ‘소유는 아마도 구약적인 관점에서 건강과 자녀와 가축과 소산 등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그와 관련된 복을 주변 사람들이 다 알고 그 보고가 다윗왕에게까지 들어갈 정도로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후에도 후손의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역대상26:4-8에 보면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어 8명의 아들을 낳게 했고 그들이 또 아들들을 낳아 모두 60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 문지기로 뽑혔으며 조상의 가문을 다스리는 자’ ‘큰 용사’ ‘능력이 있는 자’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역대상26:8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고 했습니다. 자녀와 손자가 많았고 그들은 모두 능력이 있어 직무를 잘 감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집안에 그처럼 복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11절에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언약궤를 3개월간 모신 것과 관련하여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왕이 언약궤가 70년간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소가 뛰므로 웃사가 흔들리는 언약궤를 붙잡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다윗왕은 충격과 두려움에 있었습니다. 함께하던 신하들과 백성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다윗왕은 언약궤를 계속 예루살렘으로 옮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웃사를 치신 것은 하나님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을 싫어하셔서 진노하신 것인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비나답 집으로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아비나답의 아들(손자) 웃사가 언약궤를 붙들다가 죽었는데 다시 그 집으로 옮길 수는 없었습니다. 다윗왕은 언약궤를 어떻게 할지 난처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 때 오벧에돔이 나서서 언약궤를 자기 집으로 모셔 가도록 했습니다. 다윗왕에게 누가 천거해서 다윗왕의 부탁으로 언약궤를 자기 집으로 모시는 것을 허락한 것인지, 자신이 스스로 자원하여 언약궤를 자기 집으로 모시겠다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언약궤를 모실 곳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 집에 모신 것은 분명합니다. 다윗왕도 모셔가지 못하고 신하들과 백성들도 모셔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핫 자손인 자신이 모시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자기 집에 메어가는 도중이나 자기 집에 모셨을 때 웃사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자기 집에 모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로 인하여 재앙이 일어나 언약궤를 누구도 모실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모시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밖에는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특별한 믿음을 가지고 행동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 따른 복을 주셨을 것입니다.


  아합시대에 이스라엘에 흉년이 3년 6개월 동안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이르러 나무를 줍는 과부를 만나 물을 달라고 청하고 물을 가지러 갈 때에 다시 불러 떡을 한 덩이 달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떡이 없고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있다고 했고 그것으로 떡 한 덩이 만들어 자기와 아들이 먹고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여인에게 그것으로 작은 떡을 하나 만들어 자기에게 가져오고 나머지로 하나를 만들어 둘이 나누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엘리야의 말대로 했고 그 결과 그 여인의 가정에는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흉년 내내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살아나게 해 주셨습니다  (왕상17:1-24). 하나님의 사역을 헌신적으로 도운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업이 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을 도와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그 곳에 머물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행18:1-3, 11). 후에 바울이 로마서16:3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하나님 일에 헌신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제가 존경했던 이병규 목사님이 전쟁 때 이북에서 나와 부산에 피난갔다가 전쟁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명륜동에서 이북 출신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그 할머니가 이 목사님을 자기 집 뒷 방을 내 주어 기거하게 했고 그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교회가 현재 명륜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아들이 목사님이 되었고 신앙과 인격이 훌륭한 분이 며느리로 들어왔습니다. 그 목사님 부부는 제가 잘 아는 분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기초 헬라어를 그 목사님께 배웠고 그 사모님과는 같이 근무를 해서 잘 압니다. 하나님의 일에 희생하는 가정은 반드시 복을 받게 됩니다.

 


       2.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12-19절)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이 베레스 웃사 사건 이후 근 3개월이 지나 오벳에돔이 언약궤를 모시는 동안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를 푸신 것으로 생각하고 언약궤를 다시 다윗성으로 옮기려 합니다. 그런데 전에 베레스 웃사 사건에서 언약궤를 새수레에 실어서 소로 끌게 한데 실패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게 했습니다 (대상15:14-15). 언약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메어 가도 아무 일이 없자 다윗은 제사장들을 시켜 소를 잡아 감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즐거움으로 언약궤를 다윗성까지 옮겼고 준비된 장막에 안치하게 했습니다. 언약궤를 안치한 다음에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을 통해 백성들을 축복하고 화목제물을 모든 무리에게 떡과 고기와 포도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번 모습에서는 언약궤를 옮길 때 감사 제사를 드린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언약궤를 옮기면서 다윗은 에봇을 입고 춤을 춘 것이 특징입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소매없는 두루마기이나 다윗은 예복으로 그와 같이 생긴 옷을 입었습니다 (대상15:27, 삼상2:18). 또한 백성들은 각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크게 노래를 부른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상5:18).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모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돌아와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아비나답 집에 70여년 동안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다윗성을 수축한 다음 언약궤를 안치할 장막을 준비하고 언약궤를 모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웃사가 죽는 사건으로 인해 실패하였습니다.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것을 기뻐하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벧에돔의 집이 언약궤 모신 기간에 복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다윗은 언약궤를 다시 한번 다윗성으로 모시려는 생각을 가지고 전에 잘못된 것들을 고쳐서 실행에 옮깁니다. 헌데 언약궤가 여섯 걸음 나아갈 때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하나님께서 언약궤 이동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하고 감사 제사를 드리고는 이동시키면서 즐거워 춤을 추었습니다. 백성들도 악기를 동원하여 큰 소리로 노래하며 따랐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모시려는 열망과 하나님을 모시게 될 때 기쁨을 그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언약궤를 모시는 것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이 나라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언약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열망을 받으시고 그들 가운데 계시겠다고 허락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 되어 주시겠다고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다윗과 백성들은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고 받아 주시고 왕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기뻐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위신과 체면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3. 미갈의 실수와 다윗의 책망 (20-23절)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언약궤가 이동될 때에 백성들은 각종 악기를 힘있게 연주하며 큰 소리로 찬양을 했습니다 (대상5:18). 다윗은 에봇을 입고 언약궤 앞에서 춤을 추며 나아갔습니다. 그 모습을 창으로 본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 그를 심중에 업신여겼습니다 (16절). 그래서 다윗이 언약궤 안치 후 백성에게 축복한 다음 가족에로 축복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고 했습니다. '방탕한'(히.레크)는 '공허한' '가치없는' '가난한' 등의 뜻으로서 신약의 라가(ραγα: 어리석은 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 신복의 계집 종'이란 '그 종들의 종년'으로서 가장 천한 자들이란 뜻입니다. 곧 미갈의 말은 다윗이 에봇을 입고 춤을 추므로 가장 존귀한 왕의 위치에 있는 자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처럼 가장 비천한 자들 앞에서 품위를 지키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미갈에게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고 했고 (21절)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고 대답했습니다 (22절). 다윗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중심을 받아 주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친히 인도하시므로 복을 주실 것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겸손하기 위해 왕복을 입지 않고 레위인들이 입은 에봇(소매없는 두루마기 형태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견딜 수 없는 기쁨이 있어서 춤을 추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행동이 종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임을 받으리라 확신했습니다.   

 

  다윗과 미갈이 다툰 것은 근본적으로 시각차이입니다. 언약궤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입니다. 다윗은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의 가견적 표징으로 생각하여 언약궤를 모심이 하나님을 모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오는 것이 하나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갈은 언약궤를 한낱 종교적 상징물인 하나의 궤짝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언약궤가 들어오는 데 대한 관심보다 다윗의 외부적 행동 더 크게 보인 것입니다. 아마 사울이 언약궤를 귀히 여기지 않은 연고일지도 모릅니다. 본문에서 다윗의 아내 미갈을 '사울의 딸' 미갈로 묘사한 것은 그런 의도를 드러내려는 것일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다윗의 행동을 좋게 여기시고 미갈의 정죄는 옳지 못하게 생각하셨습니다 (23절). 그래서 하나님이 미갈을 징계하므로 미갈에게는 평생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미갈이 자식이 없는 것은 다윗이 미갈을 미워하여 평생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Dake, Wycliffe). 하여간 미갈이 평생 자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임이 분명합니다. 자식이 없는 것이 모두 징계는 아니지만 미갈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는 것을 징계로 사용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는 교만할 수 밖에 없고 그 교만한 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되게 됩니다.

 

<結言>

  다윗이 평생 소원하는 바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성 곧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선한 중심에도 불구하고 1차 기시에는 실패하고 2차 시기에 성공하게 됩니다. 다윗이 1차에는 율법대로 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을 깨닫고 2차에는 율법대로 합니다. 결국 성공하자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 주시고 온 이스라엘에 주인이 되시기로 했다고 생각하고 체면을 생각지 않고 기뻐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남다른 시각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