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序言>

   15~19장까지는 다윗 시대에 있어서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인 압살롬의 반란이 소개된 장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 사건에서 아들 압살롬과 친구 아히도벨과 자신이 속한 유다지파로부터 배반을 당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 들의 배반으로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도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0절). 그는 그 일로 처절한 배신감으로 괴로워 했습니다 (시41:9, 55:12-14). 물론 그 사건은 나단 선지자의 경고의 성취였습니다 (12:10-12). 본 장의 내용구성은 압살롬의 반역 준비(1-6절), 압살롬의 반역(7-12절), 다윗의 도피(13-23절), 언약궤를 위한 조치(24-29절), 다윗과 후새의 만남(30-37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압살롬의 반역 준비 (1-6절)

 

  1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2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3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4 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5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6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아람 소국 그술로 도망했다가 요압의 지략으로 다윗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를 보지 않았는데  2년 후에 그를 만났습니다. 다윗이 그를 대면한 것은 그의 죄를 사면해주는 것 같은 인식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이후부터 압살롬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시키려 갖은 술수를 다 사용했습니다.

 

   압살롬 기본적으로 왕의 계승자가 될 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4:25-26). 그런데 다윗의 대면으로 사면받았다고 생각하고는 그 이후부터는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한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우선 왕이 될 수 있는 인물로 부각시키기 위해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 오십 명을 세웁니다 (1절). 전배(前陪)는 히브리어로 '이쉬 라침'인데 이는 '달려가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왕의 마차 앞에서 뛰어 다니며 지나갈 길을 트고 왕을 경호하는 경호부대를 말합니다. 압살롬이 마차를 타고 전배를 50명이나 둔 것은 왕처럼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일찌기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왕의 재판을 받기 위해 가는 사람을 불러서 호의를 베풀고 다윗의 실정을 비판하고 자신을 재판관으로 선언하고 자신에게 와서 재판을 받으면 공의를 베풀겠다고 했습니다. 혹 사람들이 가까이 와서 절을 하려 하면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2-5절). 백성들에게 자신의 정치 능력과 세심한 배려를 인식시키려는 의도입니다. 이는 6절에서 말한대로 백성들의 마음을 다윗에게서 돌려 자기에게 향하게 하는 도적 행위였습니다.

 

  어느 때에나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욕을 채우기 위해 우매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옳지 못한 지도자는 외부적인 것과 허탄한 것으로 미혹합니다. 그 속셈은 결국 자기 유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노략하기 위함입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기 위함입니다. 멸망시키기 위함입니다 (요 10:10, 골2:8). 그러므로 영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요일4: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항상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귀가 가려워 사욕을 좇는 스승을 따르고 허탄한 이야기를 좇습니다 (딤후 3:6, 4:3)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 참된 사역자가 되기 위해 깨끗한 양심, 선한 양심, 거짓없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딤전1:5. 딤후1:3). 전에 이기선 목사님은 선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챤의 매력은 진실한데 있습니다. 참된 리더쉽은 진실과 희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 압살롬의 반역 (7-12절)

 

  7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8 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9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10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11 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압살롬이 반란을 위해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는 준비 작업을 한 후 드디어 반란을 꾀했습니다.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거사(擧事)를 일으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모든 지파에 정탐꾼을 보내어 정지(整地) 작업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거사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기치를 들도록 선동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윗 왕에게 헤브론에서 하나님께 서원 제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진의를 모른채 헤브론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200명을 청해서 함께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아마 그들은 정치적 역량이 있는 자들이었을 텐데 그들의 동조를 이끌어 내어 세력을 강화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 200명도 압살롬의 의도를 모르고 따라갔습니다 (7-11절).

 

  헤브론(Hebron)은 예루살렘에서 30여km 떨어진 곳입니다. 압살롬이 그 곳을 거사의 거점으로 선택한 것은 여러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 곳은 압살롬의 고향입니다(3:1-3). 예로부터 신앙의 진원지이기도 합니다 (창13:18). 다윗이 그 곳에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2:1-4). 그러면서도 다윗이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탓에 다윗에 대한 불평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압살롬은 여러 관점에서 헤브론이 왕으로 오를 수 있는 최적지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에서 200여명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가서 피상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에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청해왔습니다. 길로는 헤브론에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친구이자 모사였는데 그의 모략은 신이 내려준 것처럼 신통했습니다 (16:23). 그가 압살롬에게 붙어 거사에 참여한 것은 압살롬에게는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실제로 압살롬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16:20-23, 17:1-3). 압살롬의 반역이 구체와 되어가면서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협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12절). 압살롬의 외모와(14:25-26) 간교한 여론 조성과(1-6절) 유력한자들의 협력으로 압살롬이 왕이 될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물론 보이지 않게 다윗의 영토 확장에 따른 부담, 밧세바에 대한 문제, 암논에 대한 조치 등의 실정이 백성들로 하여금 압살롬 반역에 호응하게 했을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하고 반역자 압살롬에 붙어 반란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추측해 보건데 밧세바 일로 다윗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밧세바의 아버지는 엘리암이었고 엘리암의 아버지는 아히도벨이었습니다 (11:3, 23:34, 대상3:5). 그렇다면 밧세바는 아히도벨의 손녀인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으나 자기 손녀의 문제와 손녀 사위의 죽음을 보면서 다윗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압살롬 반란에 가담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게 됩니다 (17:23). 물론 압살롬도 요압에게 에브라엠 수풀 전투에서 패하여 도망하다가 머리가 상수리 나무에 걸려 따라오던 요압에게 살해됩니다 (18:9-15). 아히도벨도 압살롬과 마찬가지로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풀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해결하려 하다가 결국 자신의 인생도 비참하고 이스라엘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못하고 자신의 상처와 분노를 육욕으로 해결하려 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상처와 분노와 원한을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해야 합니다 (롬12:17,19, 마5:44).

 


         3. 다윗의 도피 (13-23절)

 

  13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14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15 왕의 신하들이 왕께 이르되 우리 주 왕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보소서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더라

  16 왕이 나갈 때에 그의 가족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왕이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니라

  17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멈추어 서니

  18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이 왕 앞으로 행진하니라

  19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20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21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22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다윗은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는 반역 소식을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심이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칼로 칠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하기로 결정하고 신복들도 동의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궁에 10명의 후궁만 남겨 둔 채 가속과 신복과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과 가드에서 온 600명과 함께 벧메르학에 모였다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을 거쳐 여리고로 가는 광야길로 행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북쪽 마하나임으로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은 다윗의 시위병들을 말합니다. '그렛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크레티'는 '칼로 베다, 죽이다'는 뜻을 가진 '카라트'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따라서 중죄인을 처벌하고 처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블렛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플레티'는 '도망하다, 경주하다'는 뜻을 가진 '팔라트'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따라서 왕의 명령을 지방에 속히 전달하는 보발군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드에서 온 600명'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 가드에 있을 때 다윗을 추종했던 자들로서 가드에서 시글락과 헤브론을 거쳐 예루살렘까지 따라 온 자들입니다 (삼상27:2, 6, 30:1, 삼하2:3, 5:6).  그리고  '벧메르학'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 있던 다윗의 별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성을 빠져 나올 때 이 곳에 모여 출발을 한 것입니다.

 

  한편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가드 사람 잇대에게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잇대는 블레셋 가드 사람인데 정치적 이유로 이스라엘에 망명한 용사입니다. 다윗은 그의 무용과 지위를 인정하여 군대 장관 중 한 사람으로 임명하여 가드 사람들을 지위하게 했습니다 (18:1-2). 잇대는 후에 요압과 아비새와 동등한 위치에서 압살롬 군대를 진압하는 지휘관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므로 이스라엘 환난에 빠져 들 필요가 없고 가드에서 온지 얼마 안되기도 했으니 자신과 함께 고난받을 필요가 없고  압살롬에게도 긍휼을 얻을 수 있겠다 하여 예루살렘에 남아 압살롬을 왕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은혜와 진리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은혜와 진리로 축복한 것은 이스라엘의 언약민에게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그에게도 임하기를 원한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잇대는 다윗과 사생을 같이 하기로 결단 하고 따라 나섭니다.

 

  다윗의 기본적인 인품을 다시 한번 보게 하는 부분입니다. 가드에서부터 자신을 추종했던 사람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잇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가 고생하지 않기를 원하여 예루살렘에 남아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잇대가 사생을 결단하고 다윗을 따른 것을 보면 다윗이 평소에 그에게 얼마나 신뢰감을 갖게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잇대 또한 다윗만큼이나 망명한 자신을 세워주고 배려해 준 것을 잊지 않고 끝까지 의리를 지키려 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성도는 거룩하고 진실할 뿐 아니라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4. 언약궤를 위한 조치 (24-29절)

 

  24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28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레위의 증손자요, 고핫의 손자요, 아므람의 아들인 대제사장 아론에게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네 사람이었습니다 (출 6:23, 민 3:2).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려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 당시에는 세번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자손 사독과 네번째 아들인 이다말의 자손 아비아달이 제사장 사역을 이었습니다. 사독(Zadok)은 기브온에서 사역을 했고 아비아달(Abiathar)은 놉 땅의 아히멜렉 제사장 아들로서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독과 아비아달은 이스라엘이 통일 국가를 이룬 후부터 다윗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제사장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 기드론 시내를 지나 감람산에 오를 때 사독과 아비아달이 언약궤를 메어왔습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다윗에게로 메고 온 것은 압살롬이 자신들과 언약궤를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다윗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언약궤를 예루살렘성으로 다시 메어다 놓도록 명했고 각기 두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성에 데리고 들어가 사역을 계속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의 동태를 살펴 기별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후에 다윗이 다시 입성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17:15-23).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성으로 반환시키고 제사장들을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피상적으로 볼 때 제사장들을 연락원으로 활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있고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섬기기 위해 머물게 되면 압살롬이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독은 다윗이 선견자(先見者)라고 했습니다. 당시엔 선지자를 선지자(先知者)라고도 했지만 혹 선견자(先見者)고도 했습니다 (삼상9:9).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점이 강조된 명칭이라면 선견자는 하나님의 뜻을 보고 해석하는 점이 강조된 명칭입니다. 사독이 제사장인데 그를 선견자라고 한 것은 그가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실 미래의 일을 깨닫고 모든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독은 예루살렘에 남아 압살롬에 대한 정황을 파악하고 분별하여 바른 정보를 제공하기에 합당한 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적이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25-26절에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사독에 한 이 말을 보면 다윗은 분명 하나님이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행하심에 따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밧세바와 우리아 사건 이후 아들이 아파 죽게 되었을 때 금식하다가 아들이 일주일만에 죽게 되자 당연히 여기고 평상시 상태로 돌아간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압살롬의 사건을 당해 피난길에 올라야만 하는 상황이 자신의 죄에 대한 징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혹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신다고 해도 하나님이 옳게 행하신 것인 줄 알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당연한 징계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는 것이 당연한 보응로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궁극적인 언약대로 돌아와 왕권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삼하7:12-16).   

 


         5. 다윗과 후새의 만남 (30-37절)

 

  30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31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32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33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34 그러나 네가 만일 성읍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전에는 내가 왕의 아버지의 종이었더니 이제는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35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왕의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알리라

  36 그들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그들과 함께 거기 있나니 너희가 듣는 모든 것을 그들 편에 내게 소식을 알릴지니라 하는지라

  37 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읍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

 

  다윗이 예루살렘성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 길을 올라갔습니다.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갔습니다. 다윗이 그 피난 길에서 압살롬과 함께 모반하는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다는 보고를 듣게 됩니다. 압살롬에게 본래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두렵게 했을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들은 말씀처럼 정확했습니다 (16:23). 다윗은 경험적으로 아히도벨의 모략이 어떠한지 알고 있기 때문에 피난길에 그의 모략에 의해 참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맨발로 울며 도망하는 길에서도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르렀을 때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왔습니다. 후새는 다윗의 모사입니다. 다윗은 그에게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가서 압살롬을 왕으로 섬기면서 아히도벨의 모략이 실패하도록 방해공작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선 내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이미 정보역할자로 보낸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두 아들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통해 다윗 자신에게 전달되도록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후새는 그 명령대로 압살롬에게 들어가 아히도벨의 모략이 채택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므로 다윗의 생명을 건지게 되고 압살롬군대와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하는 공을 세웁니다 (17:15-23). 다윗에게 모사였던 친구 아히도벨과 후새는 정 반대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윗은 희망이 끊어지는 절망 속에서도 걸으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모사 후새를 보내셨습니다. 다윗은 후새를 만나자 구체적인 작전을 지시합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대했을 때도 그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위경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지략을 최선을 다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가 위경을 만날 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시편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마7:7). 전도서11:4에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 리빙바이블(The Living Bible)에 보면 "If you wait for perfect conditions, you will never get anything done"라고 했습니다. '만일 네가 완벽한 상황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결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는 말입니다. 전도서11:6에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때에 어떤 일에 어떤 상황에 역사하실지 모릅니다.

 

<結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피난길에 오를 때에 다윗을 좇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드 사람 잇대 장군과 600명의 가드 용사들,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  모사 후새 등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게 되고 압살롬 군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재입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정직한 것이 중요하고 사람들과의 대인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물질은 잃을지라도 사람을 잃지 않아야 하고 사람을 잃을지라도 하나님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