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言>
16장에서 압살롬은 예루살렘 성을 탈취하고 다윗의 후궁들을 욕보이므로 반역에 성공을 가져오는 듯했습니다. 17장에서는 아히도벨의 모략을 빌어 다윗을 살해하므로 유일한 왕으로 군림하려 합니다. 하지만 후새의 방해 공작으로 아히도벨 모략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외적으로는 압살롬 진영이 다윗 진영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압살롬 진영이 점점 패퇴가 짙어갑니다. 1-14절은 아히도벨과 후새의 모략이, 15-23절은 다윗의 위기 모면과 아히도벨의 죽음이, 24-29절은 압살롬의 추격과 다윗을 선대하는 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아히도벨과 후새의 모략 (1-14절)
1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2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3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4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5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6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7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8 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9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10 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11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12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13 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알살롬이 예루살렘 성에 진입한 후 아히도벨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후궁들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동침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왕권 장악을 과시하는 동시에 반란에 참여한 자들에게 힘을 얻게 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 다음에 아히도벨은 이어서 왕권의 영구 장악을 위해 도망하는 다윗을 죽일 모략을 베풀었습니다. 다윗 진영은 곤하고 약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당장 12,000명을 택하여 뒤쫓아 엄습하자고 했습니다. 밤에 갑자기 엄습하여 무섭게 하면 함께 있던 자들은 도망하고 다윗만 남게 될 것이므로 그 때 다윗만 죽이고 백성들은 돌아오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압살롬과 장로들이 다 옳게 생각했습니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듣고 후새에게 아히도벨의 모략을 말한 다음 그에 대한 생각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후새는 아히도벨과 반대되는 모략을 제시했습니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용사로서 병법에 뛰어난 사람들이고 새끼 빼앗긴 곰처럼 격분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마 어느 곳에 숨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칫 뒤를 쫓다가 그들의 공격으로 몇이라도 죽게 되면 백성들의 마음이 저상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상하리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메스 이마스'는 '완전히 녹아 내리다, 완전히 낙담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지파에서 백성을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이 모집하여 만날 만한 곳에서 하늘의 이슬이 내림같이 엄습하여 모두 죽이자는 것입니다. 혹이 어느 성에 있으면 줄을 가져다가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 모두 침수시키자는 것입니다. '단'은 이스라엘 최 북단에 위치한 성읍이고 '브엘세바'는 이스라엘 최남단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온 이스라엘에 대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압살롬과 장로들이 후새의 모략을 들은 다음에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 같다고 할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16:23). 실제로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한다면 다윗은 꼼짝없이 붙잡혀 죽게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과 장로들은 그 모략과 반대되는 모략을 베푼 후새의 모략을 더 좋게 여겼습니다. 후새의 모략은 온 이스라엘 백성을 모집하는 동안 다윗으로 하여금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모략이었습니다. 압살롬이 후새의 모략도 들어보기를 원했고, 후새가 설득력 있게 모략을 베풀고, 압살롬과 장로들이 후새의 모략을 더 좋게 여기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벌하기 위해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4절). 그리고 그것은 다윗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기도 한 것입니다 (15:31).
대부분 불행한 사건들은 인간들의 개입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과 의지는 하나님의 관할 하에 있습니다. 기도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만 명의 군사보다 기도하는 한 명의 크리스챤이 강합니다 (약5:16).
2. 다윗의 위기 모면과 아히도벨의 죽음 (15-23절)
15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16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전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17 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알리더니
18 한 청년이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알린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19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전혀 알지 못하더라
20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하니 여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그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21 그들이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가서 다윗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22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23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면서 따라나선 사람들 가운데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돌려 보낸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압살롬에게 충성하는 척 하면서 압살롬의 계획에 관한 정보를 빼내어 다윗에게 알려 주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그가 바로 모사 후새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과 그들의 아들들인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입니다 (15:24-37).
후새는 이미 압살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당장 12,000명으로 추격해야 한다는 아히도벨의 모략과 반대되는 모략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내리지 않은 상태이므로 아히도벨의 모략이 채택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후새는 아히도벨의 모략이 채택될 경우를 대비하여 그 사실을 다윗에게 빨리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히도벨이 당장 추격해야 한다는 모략을 베풀었다는 사실과 압살롬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과 압살롬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광야 나룻터에 머물지 말고 밤이 되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후새는 이미 정해진 연락 구축망대로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사독과 아비아달은 계집종을 시켜 성 밖 기드론 골짜기에 위치한 에느로겔(풍성한 샘이라는 뜻)에서 기다리는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전달했습니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수색해 오는 압살롬의 군사들을 피하기 위해 바후림 어느 집 우물에 들어갔습니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감람산을 넘어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입니다. 그 여인이 우물 아구를 덮고 찧은 곡식을 널어 위장했습니다. 압살롬의 군사가 그들을 찾자 시내를 건넜다고 하였습니다. 압살롬의 군사들은 그 말을 믿고 뒤쫓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성으로 돌아갔습니다.
바후림의 한 여인은 마치 여리고성에 들어간 정탐꾼을 숨겨준 라합을 연상케 합니다 (수2:4-6). 이른바 선한 거짓말을 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살린 여인들입니다. 그러면 선한 목적을 가진 거짓말은 하나님 앞에 정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목적도 선하고 방법(수단)도 선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목적과 방법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목적을 선택해야 합니다. 방법에 얽매여 목적을 상실한다면 안됩니다. 거짓말하지 않기 위해 생명을 잃게 한다면 거짓말 하고 생명을 살린 경우보다 어리석은 것이며 책망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바후림 여인이 아니었다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물론 요단강 나룻터에 머물던 다윗과 그 일행도 몰살 당했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계획은 후새→ 사독과 아비아달→ 계집종→ 요나단과 아히마아스→ 다윗 순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다윗은 그 전갈을 받고 압살롬의 추격권을 벗어나 요단 건너편 마하나임에 이르게 됩니다 (22,24절). 하나님의 역사는 불의한 많은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의로운 소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롬12:2).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생명을 무릎 쓰고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한편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를 타고 자기 고향 길로로 돌아가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게 됩니다 (23절). 아히도벨의 죽음은 압살롬에게 다윗을 이길만한 계략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압살롬의 실패와 죽음의 서곡이기도 합니다 (18:9-15). 아히도벨이 자살을 하게 이유는 한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한 자존심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은 당대 이스라엘의 최고의 모략가였는데 그 모략이 시행되지 못한데 대한 수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공포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께 받아 말한 말씀처럼 정확하다고 했습니다 (16:23). 그런 사실로 보아 아히도벨은 지혜가 뛰어난 사람으로서 자신의 모략이 채택되지 못하여 다윗을 붙잡을 기회를 놓쳤을 경우 그 결과에 대해 능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요단강을 넘으므로 인해 다시는 잡을 수 없고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압살롬은 패하고 다윗이 왕권을 되찾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다시 회복한 다음 자신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질 것을 예측하고 그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했을 것입니다. 셋째는 자책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친구로서 반란을 도와 후궁들을 욕보이는 모략을 베풀고 다윗을 죽이는 모략을 베풀었습니다. 다윗이 다시 회복했을 때 그를 대면하게 될 경우 그의 죄책감을 때문에 견디기 힘들 것을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죽음은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스스로 목매어 죽은 가룟유다를 연상케 하는 사건입니다. 가룟 유다는 목매어 줄이 끊어져 창자가 터져 곤두박질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마27:5, 행1:18). 아히도벨과 가룟 유다의 공통점은 동일하게 받은 은혜를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비참한 자살로 결말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아히도벨은 원한 때문에 배반했고 가룟 유다는 돈 때문에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 가룟 유다가 셀롯파(열심당)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1세기에 팔레스틴에서 신앙의 주류를 형성한 집단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와 셀롯파였습니다. 사두게파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졌고, 바리새파는 율법을 생활화하려는 사람들로 이루어졌고, 에세네파는 시대적 조류와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여 광야로 들어가 금욕과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셀롯파는 로마에 저항하고 율법을 힘으로 지키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룟유다가 셀롯파였던 것이 확실하다면 예수님이 로마를 대항하여 정치적으로 승리하여 백성들에게 자유와 풍요를 가져다 주는 자일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도리를 가르치자 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신앙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좇아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봉사했는데 결과가 엉뚱한 것을 보고 배신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돈이 욕심나서였다면 예수님을 넘겨주고 받은 은 30을 성전에 던지고 돌아올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런 추측이 맞다면 가룟유다는 배신감과 배반감에 상처를 입고 분노하여 예수님을 팔고 가책 때문에 자살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아히도벨이나 가룟유다나 은혜를 배반하고 자살한 이유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압살롬의 추격과 다윗을 선대하는 자들 (24-29절)
24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25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그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26 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27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28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29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다윗은 후새와 사독과 아비아달과 여종과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와 바후림 여인의 도움을 받아 압살롬의 모략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을 거쳐 마하나임에 들어갔습니다. 마하나임은 성문과 성읍이 있는 요새화된 성읍이었습니다 (18:24). 전에 이스보셋 왕국이 왕도로 삼은 곳이기도 합니다. 한편 압살롬은 뒤늦게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후새의 모략을 취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국민병을 모집하여 아마사로 군장을 삼고 직접 지휘하여 추격에 나섰습니다. 아마사는 압살롬과 고종 사촌간이었습니다. 압살롬의 군대는 요단강을 건너 마하나임에 가까운 길르앗에 진을 쳤습니다. 다윗 진영과 압살롬 진영의 전투가 불가피하게 된 상황입니다.
다윗의 진영은 점점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압살롬 진영은 불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다윗 진영은 요새화된 마하나임을 본부로 둔 반면 압살롬 진영은 무방비 상태에 있는 길르앗 들에 진을 친 것입니다. 다윗은 마하나임 성에서 지휘를 하는 반면 압살롬은 전쟁에 직접 나서므로 죽음의 위험이 컸습니다. 더욱이 다윗 진영은 예루살렘에서 급히 피해 나오느라 식량을 준비해오지 못한 것이 큰 약점이었을 것인데 부호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먹을 양식을 공급해와 군사들의 사기를 드놉게 했습니다.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 등은 군사들이 피로를 회복하여 전투 준비를 할 수 있는 중요한 것들입니다. 상황이 다윗 진영에 점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비'(Shobi)는 암몬왕 나하스의 아들 하눈의 동생입니다 (10:1). 소비는 부왕 나하스와 다윗의 좋은 관계를 유지해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 같습니다. 다윗이 하눈의 모욕한 사건 때 랍바를 정복한 이후 다윗에게 정치적인 호의 곧 어느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받은 것 같습니다. '마길'(Machir)은 전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보호하며 은혜를 베풀던 사람입니다 (9:4). 후에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절름발이 므비보셋에게 왕자처럼 후대했습니다. 마길은 다윗의 처사를 보고 감복했을 것입니다. '바르실래'(Barzillai)는 길르앗의 한 성읍 로글림의 거부였습니다 (19:32). 길르앗 땅은 북쪽 아람국의 침략을 자주 받았는데 다윗의 강력한 군사 행동으로 이 지역이 평화롭게 되었습니다 (8장). 한 마디로 다윗을 위기 때에 도운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는 모두 다윗의 인격과 통치에 감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다윗이 평소에 어떻게 행했는지를 증명하는 면이기도 합니다.
<結言>
다윗은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 예루살렘에서 눈물 흘리며 맨발로 도망해야 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해야 했습니다. 시므이의 저주가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피로를 무릎 쓰고 계속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생명을 무릎 쓰고 따라 나선 가드 사람 잇대와 용사들이 있었고 적진에서 도운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의 여종, 요나단과 아히마아스, 바후림의 여인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회복과 전투 준비를 위해 마하나임에 용품과 식물을 가져온 소비와 마길과 바실래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평소에 베푼 은덕의 결과입니다. 다윗의 인격적 호의에 감복한 이들이 다윗이 위기에 당했을 때 그 은혜를 보답하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회개하는 믿음과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으려는 마음을 가질 때 회복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돕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사람들에게 인격적 호의를 베풀어 좋은 감정을 갖게 해야 합니다. 심는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고후9:6, 갈6:7). 갈라디아6:9-10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