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序言>

  다윗의 진영은 쫓기고 압살롬의 진영은 쫓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진영은 마하나임 성읍에 들어가고 필수품과 식량을 공급해 주는 이들로 인하여 사기가 드높았습니다. 반대로 압살롬 진영은 길르앗 들에 진을 치고 여러 방면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위치에서 있었습니다. 결국 에브라임 수풀에서 전투하여 다윗군이 완전히 승리합니다. 물론 압살롬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압살롬의 난은 그렇게 진압되게 됩니다. 본 장의 내용 구조는 다윗 군대의 승리(1-8절), 압살롬의 최후(9-18절), 전령의 보고 (19-32절), 다윗의 비탄(33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다윗 군대의 승리 (1-8절)

 

  1 이에 다윗이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찾아가서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들 위에 세우고

  2 다윗이 그의 백성을 내보낼새 삼분의 일은 요압의 휘하에,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휘하에 넘기고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넘기고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니

  3 백성들이 이르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읍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하니라

  4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왕이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6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7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서 전사자가 많아 이만 명에 이르렀고

  8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

 

  다윗의 군대는 요새화된 마하나임 성읍에 주둔하고 압살롬의 군대는 길르앗 들에 주둔했습니다. 다윗은 군사들이 회복하자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를 장수로 세우고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우고 조직을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출정하려 했으나 장수들의 권유로 성읍에 남아 있게 되고 세 장수들을 머리로 하여 세 부대가 기동성을 가지고 공격했습니다. 압살롬의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다윗의 군대가  완전히 승리하게 됩니다. 그 전투에서 압살롬의 군사는 20,000명이나 죽었습니다.

 

   다윗의 군사와 압살롬의 군사는 숫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군대가 승리하게 된 비결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비록 범죄하여 징계당하는 가운데 있지만 그가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으며 연단의 계기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선택한 궁극적 목적대로 그를 왕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소년 때에 블레셋 골리앗과 싸울 때 선포했던 말대로 전쟁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삼상17:45-47). 그래서 영적 전투에서도 하나님의 의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의 비결은 다윗의 지도력에도 있습니다. 다윗을 협력해주는 사람들이나 전적으로 따르는 군사들이 다윗을 신뢰하고 그에게 절대 희생하려는 정신을 가지고 잇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지도력 때문입니다. 그 지도력은 17장에서 많이 다룬 다윗의 인격 특히 섬기는 정신으로 인해 생긴 리더쉽입니다. 그 리더쉽은 다윗과 장수 그리고 군사들에게 유기적인 생명력이 있는 조직을 가지게 하는 주 원인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가진 그 유기적 생명력이 있는 조직력을 이용하여 거대한 압살롬의 군대를 섬멸한 것입니다. 또 그들이 숫적으로 열세한 점을 감안하여 기동력을 뒷받침한 협공 전략을 구사한 것도 한 원인이 됩니다. 다윗과 지휘관들이 기동성 있는 전략을 구사했기에 압살롬의 군사들이 칼에 죽은 자보다 수풀에 걸려 죽은 자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영적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 전투이든 교회적 전투이든 지역적 전투이든 세계적 전투이든 하나님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도자의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그 지도력은 외부적 권위가 아닌 인격적 섬김에서 나온 리더쉽이어야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가 적어도 생명력있는 조직력이 필요하고 자신의 그룹의 장점을 극대화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개인별 은사를 잘 배치하는 것도 한 몫 합니다.

 


        2. 압살롬의 최후 (9-18절)

 

  9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10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11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12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13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14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16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17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18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다윗 군대와 압살롬 군대가 길르앗 지방 에브라임 수풀에서 전투를 했는데 다윗의 군대가 압살롬의 군대를 이겼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신복들과 마주치자 노새를 타고 도망하다가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 공중에 매달렸습니다. 압살롬의 머리털은 다른 사람보다 수가 많았고 길었습니다. 보통 사람의 3배 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군사 중 한 사람이 그를 보고 요압에게 보고했습니다. 요압은 왜 그를 당장에 죽이지 않았느냐고 힐책하고 은 10개와 띠 하나를 받을 기회를 놓쳤다고 야단쳤습니다. '은 10개와 띠 하나'는 군복에 다는 장식품과 허리에 띠는 장식품으로서 훈장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은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죽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요압이 지체할 수 없다고 하며 급히 창을 3개를 가지고 압살롬에게 가서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요압과 함께 하던 용사들이 쳐서 죽였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압살롬이 다시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공적인 사면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급하게 죽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죽자 나팔 신호로 공격을 중단시켰습니다. 압살롬의 시체는 수풀 구덩이에 던지고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자신이 귀인의 상징이었던 노새와 머리털이 오히려 그를 죽게 했습니다 (14:25-26).

 

  압살롬의 죽음은 비참했습니다. 창으로 찌르고 돌로 치고 주검 위에 돌을 쌓아 무더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율법에서 명한 패륜아의 처형법입니다 (신21:18-21). 주검에 돌무더기를 쌓은 것은 범죄인의 수치의 상징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여리고 성 정복에서 명령을 어기므로 아이성 실패를 불러왔던 아간과 그의 가족도 돌에 맞아 불태워진 후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수7:26).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멸망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성읍이나 집이나 제단을 돌무더기가 되게 한다는 경고를 종종 하셨습니다 (욥15:28, 사37:26, 렘9:11, 51:37, 호12:11).

 

  그런 상징들을 생각한다면 압살롬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형과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와 분노로 형을 죽이고 마침내 아버지 왕위까지 찬탈하고 죽이려 한 자입니다. 그러나 결국 요압과 그의 군사들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압의 손을 빌어 심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상처나 우리의 욕망만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순리를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의 은혜를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3. 두 전령의 보고 (19-32절)

 

  19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0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21 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23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24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25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26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30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다윗왕에게 두 전령이 있었습니다. 사독 제사장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이름을 알 수 없는 구스 사람이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생명을 무릅쓰고 압살롬의 모략을 다윗에게 알렸던 사람입니다. 구스는 아프리카 북부에 자리했던 나라인데 이 구스 사람은 다윗의 노예로 이 전쟁에 참여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압 장군은 에브라임 수풀 전투에서 승전하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사실을 마하나임 성읍에 있는 다윗왕에게 전할 전령으로 구스 사람을 택합니다. 다윗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아히마아스가 먼저 가겠다고 했지만 요압은 구스 사람을 먼저 보내고 아히마아스를 뒤에 보냈습니다. 요압의 생각에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비보를 구스 사람이 전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구스 사람은 외국인데다가 다윗의 종이기 때문에 비보를 전해도 다윗이 충격을 덜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뒤에 출발한 아히마아스가 직선 길을 선택하여 구스 사람보다 다윗에게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두 분 곧 외문과 내문 사이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히마아스가 다윗에게 승전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압살롬에 대해 묻자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구스 사람이 도착하여 승전을 전하자 다윗이 알살롬에 대해 물었고 구스 사람은 압살롬이 죽은 사실을 말했습니다.

 

  아히마아스가 압살롬의 죽음을 알면서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다윗에게 승전 소식으로 기쁘게 하고 뒤에 오는 구스 사람에게 압살롬 죽음 소식을 들으므로 충격을 덜 받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지극히 다윗을 사랑하여 충격을 줄여 주기 위한 배려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이유 때문에 아히마아스의 거짓말을 좋게 여깁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잘못된 방편을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잘못된 방편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경우는 목적이 절대적인 것이어야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방편을 택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어야 합니다. 예를 든다면 라합이 두 정탐꾼을 살리기 위해 수색군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나 바후림 여인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살리기 위해 수색군에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수2:4-6, 삼하17:15-23). 그러나 아히마아스의 경우는 목적에서 절대이지 않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 내의 자체 개혁 운동인 익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창설한 예수종회(宗會)가 실패한 이유는 machiabellism, prababilism, mental reservation이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목적이 가하면 방법도 가하다'고 믿었던 사상(machiabellism) 때문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웃 사람을 편하게 해 주려는 좋은 목적을 가지고 우회적 보고를 하다 보면 처음과 달리 나중에는 상황윤리가 보편화 되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게 됩니다. 지도자가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서양인과 동양인이 병원에 진찰받기 위해 갈 때 동양인은 깨끗이 하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서 오히려 의사가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4. 다윗의 비탄 (33절)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다윗은 전령 아히마아스의 승전 보고를 들었으나 아들 압살롬의 생사 여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전령 구스 사람의 보고를 듣고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압살롬이 죽은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울었습니다. 올라갈 때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했습니다. "마음이 심히 아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가즈'는 '떨다' '전율하다'의 뜻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극심한 충격으로 심장을 짜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울며 문루를 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올라"의 히브리어 '알라'는 '오르다'의 뜻으로서 성루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올라 갈"에 해당하는 '얄라크'는 '행하다'의 뜻으로서 성루에 이미 올라간 후 이리 저리 방황하듯이 배회한 모습을 말한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파하며 울면서 성루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리 저리 미친듯이 뛰며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한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나서 이처럼 비통해 한 것은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당연한 본능적 비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더욱 아파한 것은 아들 압살롬의 죽음이 자신의 범죄로 인한 심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1장, 12:10-12).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이미 두 아들을 잃었는데 (12:15-19, 13:30-39), 또 압살롬을 잃게 되자 (18:14-15) 자신의 뼈 아픈 과거의 죄에 대한 통한의 울음을 터트린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압살롬 대신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오열했습니다.    

 

  사무엘하13-18장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압살롬이라는 왕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다윗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 여동생 다말이 이복오빠 암논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여동생은 울부짖으면서 돌아왔습니다. 압살롬은 여동생을 진정시키고 아버지 다윗이 합당한 처벌을 내리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나도 아무 조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암논을 처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양털 깎는 날 암논을 초청하여 죽이고 그술 지방으로 도망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 다윗이 불러주길 원했지만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다윗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졌고 아버지 다윗에 대해 보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요압 장군이 데리러 와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버지 다윗이 왕궁으로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사군을 양성하면서 예루살렘 성문에 앉아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아버지 다윗에게 향했던 백성들의 마음을 가로챘습니다. 결국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고향 헤브론에서 자신이 왕됨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모사 아히도벨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군사들 약 200여명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아버지 다윗은 소수의 신하들과 군사들을 데리고 울면서 밤중에 예루살렘 궁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 마하나님성까지 도망했습니다. 압살롬은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왕궁을 무혈 접수하고 다윗의 후궁들을 대낮에 강간했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아버지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 수 만 명을 모병하여 추격했고 마하나임 성 앞 수풀에 진을 치고 마하나임 성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어쩔 수 없이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장군 요압을 전투에 보내면서 압살롬은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압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성을 나와 밤중에 급습하여 2만 명 가량을 죽였습니다. 압살롬은 말을 타고 도망했고 도망하다가 긴 머리가 상수리 나무에 걸려 매달렸고 요압 장군이 창으로 찌르자 군사들이 칼로 베어 죽였습니다. 한편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던 아버지 다윗은 전투에 승리했다는 보고에도 기뻐하지 않았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 울었습니다. 본문 사무엘하18:33에 보면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파하며 울면서 성루로 올라 이리 저리 미친 듯이 뛰며 비통하게 오열한 것입니다. 그 충격으로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사무엘하11-12장에 보면 실수로 밧세바를 간음하고 나단 선지자로부터 집안에서 간음과 살인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암논이 다말을 간음했을 때 자기 죄 때문이라 생각하고 암논을 치리하지 못했고 압살롬이 그 일을 계시로 자신을 증오하여 반역을 일으켰을 때도 자기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진압하지 못했고, 압살롬이 에브라임 수풀 전투에서 요압 장군에게 압살롬은 죽이지 말하고 했고, 압살롬이 죽었을 때 심장을 쥐어 짜는 아픔으로 성루에서 뛰었을 뿐 아니라 음식도 먹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에게는 압살롬이 모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자신의 실수를 자식들에게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사정을 알지 못해 상처를 받고 분노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버지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압살롬의 비툴어진 행동을 보면서 아들 압살롬의 분노보다 더 큰 아픔을 느꼈고 압살롬이 죽었을 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結言>

  다윗은 요압을 통해 아들 압살롬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진압했습니다. 그런데 진압 과정에서 아들 압살롬이 죽게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은 사실을 알고 심히 비통해 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압살롬 잘못이지만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비통해 한 것입니다. 참 아버지의 심정을 엿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눅15:11-24).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의 음영일 것입니다 (롬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