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言>
전 장에서는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본 장은 40-45장에서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전 장에서 바벨론 멸망을 예언하면서 대표적인 죄목을 우상숭배 죄로 지적했는데 본 장에서는 동일하게 우상숭배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구원할 것을 서술함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사랑을 부각시켰습니다. 내용구조는 완고한 이스라엘을 향한 새 일 선포(1-11절),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12-22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완고한 이스라엘을 향한 새 일 선포 (1-11절)
1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
2 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며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
3 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듣게 하였고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
4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5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야곱의 집은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스라엘 하나님을 기념하며 스스로 거룩한 성 출신이라 부르며 이스라엘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며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지만 진실과 공의가 없다고 했습니다 (1-2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언약백성들로서 스스로 예루살렘 출신임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과 공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실'에 해당하는 '에메트'(אמת)는 '진실' '신실'의 뜻입니다. '공의'에 해당하는 '체다카'(צדקה)는 '의' '의로움'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 하나에 대한 신뢰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나 제사에 대한 진정성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함이 없었고 의로움이 없었습니다 (1:10-15, 29:13, 58:2, 마23:1-36).
하나님이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했고 하나님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듣게 했고 하나님이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3절). 하나님이 과거에 선지자들을 통해 미래의 일을 예언하셨고 그 일들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상하지 못했지만 다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멸망과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에 관한 예언도 그같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완고하다고 했습니다. 목은 쇠의 힘줄이고 이마는 놋이라고 했습니다 (4절). 이 이미지는 멍에를 메지 않으려 완강하게 버티는 황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 모습을 가리키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일을 예로부터 알게 했고 이루어지기 전에 듣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상들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한 것으로 알게 했다고 했습니다 (5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자자들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언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어나는 일이 우상들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어나게 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시는 이유를 밝힌 것입니다. 이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우상을 좇으려는 우매함과 완고함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6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
7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8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예언을 들어왔는데 그것들을 분별력 있게 보면 그것들이 다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선전해야 하는 위치에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6절). '선전해야'에 해당하는 기본형 '나가드'(נגד)는 '설명하다' '입증하다' '증명하다' '선언하다' 등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 때부터 이사야 선지자 때까지 많은 예언을 듣고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증인으로서 사실을 증거해야 할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이제부터 새 일 곧 이스라엘 백성이 알지 못하던 은비(隱秘)한 일을 듣게 한다고 했습니다 (6절下).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는 많은 예언을 듣고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과거에 들었던 예언이 아니라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신비한 새 일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새 일'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회복된다는 내용이지만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택함 받은 백성들이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된 것입니다. 이 일들은 옛 것이 아니라 지금 창조된 것으로서 이전에는 듣지 못하는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7절). 바벨론 포로 귀환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예전에 예언한 것이 아니고 전혀 새로운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 일에 관한 메세지를 미리 예언하여 알게 해 주지 않고 지금 예언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7절下). 하나님이 새 일을 아브라함이나 모세 때부터 말씀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일 뿐 아니라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계속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일이 이루어질 때에 그 일에 대한 예언을 기억할 수 있는 때에 예언을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귀한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배역한 자라 불릴 줄을 하나님이 알았다고 했습니다 (8절).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질을 알기 때문에 새 일에 관한 예언을 미리 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미리 해 주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롱하는 배역한 모습을 보일 것이 뻔하기 때문에 미리 알게 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본성을 잘 알기 때문에 그에 적적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좋은 것을 주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11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전 역사에서 하나님께 불신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 때에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모욕했습니다. 심지어는 우상숭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Babylonia) 제국에 멸망하여 사로잡혀 가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은을 연단하듯이 하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10절에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고 했습니다. 금광석을 녹여 금을 추출하는 것처럼 은광석을 녹여 은을 추출합니다. 은광성을 제련소에서 용광로에 녹여 정련하여 은을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 역사에서 불신앙으로 나갈 때마다 은광성을 용광로에서 정련한 것같이 고난의 풀무불에서 연단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용광로에 두지 않고 일정한 때에 건져 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 고난 가운데 두지 않고 도중에 건져 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앞으로 바벨론 제국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택하여 불러 낸다는 것입니다 (겔22:18-22, 벧전1:7). 아주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바사(Persia) 제국의 고레스(Cyrus)를 통해 바벨론 제국을 우상숭배 죄로 멸망시키고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공의로 대하지 않고 긍휼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로 말미암으면 아주 멸절시켜야 하지만 긍휼을 베풀어 죄대로 갚지 않고 다시 돌아오게 하여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9절에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아주 내버려 두지 않고 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셈,שם)은 하나님의 본질이 반영된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와 성품과 의지가 반영된 칭호입니다. '영광'(테힐라,תהלה)은 그 이름에 반영된 본질이 다른 사람에게 좋게 평가되는 평판을 말합니다 (출32:11-14, 겔36:18-23).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이름과 영광을 나타낼 족속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해서 정결케 하려고 징계로 바벨론 제국에 사로잡혀 가게 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게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면, 열방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자기 백성을 멸망하게 내버려 두었다고 생각하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하나님이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신)들보다 못하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영광이 가리워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 자기가 받아야 할 영광을 다른 대상 곧 정복자나 우상(신)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레22:1, 민20:12, 렘34:16, 겔36:20, 암2:7, 말1:11-12).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대하십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고 했고, 요한계시록1:6에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자기 소유와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죄인들에게 전하고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제사를 드려 주는 직책입니다.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으로 나타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위치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며 향기이며 편지입니다 (마5:13-15, 고후2:15-16, 3:3).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도 하고 가리워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아주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고난에서 건지시며 회복시키시며 번영하게 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결코 자기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영광을 다른 대상에게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질적 기질을 잘 압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악합니다. 욕심이 많고 교만하고 완고하고 배역합니다. 매일같이 죄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버릴 것 같은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실패한 자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이든 육적이든 물질적이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더욱 성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있는 이름이 모욕을 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영광이 가리워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우리를 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은혜주시는 것은 그 근거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실패하지만 절망 가운데 있지 말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은혜를 생각하고 매일 같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2.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 (12-22절)
12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13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14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
15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것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12절). 이스라엘을 부른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의를 행하고도 완악한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이 그들을 언약 백성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처음이며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역사의 시작하신 분이며 이루실 분이라는 것이며, 특히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을 계획하신 분이며 반드시 이루실 분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손이 땅의 기초를 정했고 하나님의 오른손이 하늘을 폈으니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선다고 했습니다 (13절). '손'과 '오른손' 신인동형론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행위와 능력있는 행위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바벨론에 행할 것이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4절).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바벨론을 멸망시킬 바사의 고레스(Cyrus)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구원할 도구로 사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이므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표현은 사실 고레스 왕이 예표하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가장 적합한 표현입니다 (눅3:22). 하나님이 고레스를 통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고 했습니다 (14절下). 하나님이 말하였고 하나님이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했으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15절). 하나님이 그 계획을 가지시고 하나님이 예언하셨으며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 구원자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고 인도했으니 그가 그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레스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인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일어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비밀을 말하지 않았으니 그것이 있을 때부터 하나님이 거기에 있었다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16절). 하나님이 고레스 출현에 대해 은밀하게 혹은 애매하게 말씀하지 않고 확실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처음 주어질 때부터 하나님이 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16절下). 화자(話者)가 바뀌었습니다. '나'는 이사야 선지자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본 말씀을 주실 당시 이사야 선지자 자신을 통해 주시고 또한 하나님의 영을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곧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이 말씀을 예언하고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깨닫지 못했고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도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바사의 고레스를 통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귀환하게 하겠다는 말씀도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을 통해 받은 계시를 예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확고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세상을 창조 운행하신 분으로서 모든 역사에도 주권적으로 관여하시는 분으로서, 고레스를 통한 바벨론 멸망과 이스라엘 구원도 그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말씀하셨으니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믿기를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도 시작이며 마지막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계22:13).
17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18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19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
20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 주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21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구속자시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하나님께서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17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선택하고 그들을 유익하게 가르치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이스라엘에 평강이 강 같았겠고 이스라엘에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8절). '강'에는 항상 물이 풍성히 있는 것을 '바다 물결'은 물결이 계속적으로 밀려드는 것을 비유한 것인 바, 강과 바다 물결은 풍성함이 압도적일 것에 대한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강'(שלום)은 하나님이 주신 평안하고 평화로운 삶을 말하고, '의'(צדקה)는 의로운 삶을 말합니다. 평강과 의는 개인적인 내적 복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복이기도 합니다. 또한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고 자손이 모래 같아서 그의 이름이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9절). 자녀와 자손의 번성과 안녕은 개인이나 사회에나 복입니다. 의와 평강과 번영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대한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들의 본질적 욕망과 기질을 따라 행하므로 역사를 보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했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었습니다 (1:5-6).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바벨론에서 나와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알게 하여 들려 주며 끝까지 반포하여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고 하라고 했습니다 (20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상기시킨 후에 이제는 강력한 어조로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지금까지 약속해온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이 현실화될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제 멸망할 바벨론에서 속히 나와 그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고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만방에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구원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있는 계획으로서 이스라엘의 번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친히 능력으로 실현시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열방을 향해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구원받은 자는 전도를 해야 합니다 (벧전2:9).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않게 하시되 그들을 위해 바위에게서 물이 흘러 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21절). 다가올 전망을 하면서 독자들이 친숙한 출애굽과 관련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이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것도 특별한 역사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통과할 때 인도하신 것도 특별한 역사였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한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이로 되어진 일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나와 유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도 특별한 역사로 친히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미래 예언에 대한 성취의 확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거 출애굽 때보다 훨씬 온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생각하면 하나님이 미래에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22절). 18-19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와 평강과 번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20-21절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서 구원하고 귀환할 수 있도록 친히 인도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한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징계 가운데서도 아주 내버려 두지 않고 구원과 인도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과 인도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의와 평강과 번영의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 명령을 순종해야 그 복이 더해진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도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는다면 본래 악한 기질을 가졌던 그들이 여전히 악인이라는 라벨이 붙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의와 평강과 번영의 복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지만 구원받은 다음에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結言>
하나님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사의 고레스를 통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을 유다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행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적으로 악한 기질로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영광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다음에 바로 서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의와 평강과 번영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받은 성도는 이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