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序言>  

  40~52장에서 소개된 전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벨론 포로에 대한 전망입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전망입니다. 여호와의 종을 온 세상의 빛으로 묘사하고 그의 순종과 고난에 대해 묘사했습니다. 본 장은 그의 고난에 대한 묘사입니다. 내용 구조는 종의 배척당함(1-3절), 종의 고난(4-6절), 배척에 대한 종의 태도(7-9절), 종의 승귀(10-12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종의 배척당함 (1-3절)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선지자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했습니다 (1절). '우리'는 선지자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경건한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팔'은 여호와의 종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 곧 자신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강판 팔로 해 주신다고 약속했는데 그 팔은 여호와의 종으로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종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인데 그것을 선지자가 전했으나 그 여호와의 종에 대한 계시는 아무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인 구원자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인데 시제를 모두 과거 완료형으로 표현한 것은 이루어질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표현한 것인데 이런 것을 예언적 과거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종인 구원자는 대개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큼 매력적인 모습을 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계시는 그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2절). '그'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구원자를,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는 전 생애가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 아래서 살았지만 사람들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존재로 보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연한 순'이나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는 나약한 모습에 대한 묘사입니다. 오실 구원자는 탄생과 환경과 모습이 사람들에게 전혀 흠모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보잘 것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했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3절). 여호와의 종인 구원자는 사역에서 사람들이 얼굴을 가릴 정도로 멸시와 배척을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간고'에 해당하는 '마크오브'(מכאב)는 슬픔 고통 비탄을, '질고'에 해당하는 '코리'(חלי)는 질병 근심 재난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배척과 멸시와 조롱을 당하므로 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첫째, 육체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 궁정에서 심문을 받을 때 대제사장과 사람들이 얼굴에 침을 뱉고 손바닥으로 치고 주먹으로 쳤습니다 (마26:67).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군병들이 옷을 벗기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갈대로 쳤습니다 (마27:29-30). 채찍질을 했습니다 (마27:26). 당시 로마 군병들이 사용한 채찍에는 끝에 조각이 달려 있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게 합니다. 비아돌로사(라. via dolrosa; 슬픔의 길)를 십자가 형틀을 지고 가게 하여 예루살렘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형틀에 못박았습니다 (마27:35). 당시에 사용한 못은 침목에 철로를 고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쇠말뚝 같은 것이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A.W.Thomason).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있으면서 심한 목마름과 찢어지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요19:8). 둘째, 정신적인 고통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유다에게 배반을 당해 붙잡혔습니다. 겟세마네 동안 아래서 대제사장들이 보낸 군사들에게 붙잡힐 때 대부분의 제자들은 도망했고, 심지어 마가는 벗은 몸으로 도망했습니다 (마26:56, 막14:51-52). 제자들의 배반은 마음에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선고를 받을 때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는 줄 알고 놓아주려 했으나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마27:20-23, 요19:6). 자신을 따르던 백성들이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것을 볼 때 마음의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비아돌로사를 갈 때 예수님 어머니도 따라 왔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십자가 아래 예수님 어머니가 보고 있었습니다 (요19:25). 자신의 고통스런 모습을 보면서 오열하는 어머니를 볼 때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셋째, 영적인 고통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지나가는 사람들 심지어는 함께 좌우에 못 박힌 강도들까지도 예수님을 희롱하며 모욕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성전을 사흘만에 세운다고 하던 자여 남을 구원한다고 하더니 자기 자신도 구원할 수 없구나" (마27:39-44, 막15:29-32, 눅23:35-37). 예수님은 자신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핍박자들과 모욕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당장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겠다고 조롱하지만 진정 그리스도라면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아야 하는데 그 때 견뎌야 하는 영적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습니다 (마27:46, 막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시편22:1 인용으로서 '엘리 엘리'는 히브리어 음역(音譯, transliteration)이고 '라마 사박다니'는 순수 아람어입니다. 시편22:1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택한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죄값으로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택한 백성의 죄값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의 위치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이 예수님께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려 돕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대속을 이루므로 택한 백성의 죄값을 치르므로 그들을 구원하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을 압니다. 하지만 택한 백성의 모든 죄가 자기에게 씌워져 죽는 상황이 하나님에게서 아주 떨어져 하나님이 아주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님이 신음하며 부르짖는 부르짖음을 아주 들어주지도 않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영적인 절망감과 두려움이 밀려왔을 것이고 그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총체적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왜 그런 고난의 죽음을 죽어야 했습니까? 우리는 이제 주의 고난으로 구원의 은혜를 얻었으니 이제 주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빌립보서1:29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을 양보하지 않고 그가 주신 말씀을 지키고 그가 맡기신 사명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2. 종의 고난 (4-6절)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חלי)를 지고 우리의 슬픔'(מכאב)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4절). '그'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구원자를 가리키고, '우리'는 선지자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경건한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했다는 것은 그가 우리가 당해야 할 질고와 슬픔을 대신 당할 것을 말합니다. 곧 그의 고난과 죽음이 대속(대리적 속죄)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구약의 희생제사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 죄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롬6:23). 생명이 피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피 흘려 죽어야 했습니다 (레17:11). 그래서 죄값으로 죽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희생 제물을 성막으로 끌고 와 그 짐승에게 안수하며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그 죄가 그 짐승에게 전가되어 그 짐승에게 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짐승을 피 흘려 죽게 하면 그 죄인의 죄값이 치러져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짐승이 죄인의 죄를 전가받아 대신 죽으므로 죄인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처럼 여호와의 종인 구원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죄를 대신 지고 그들이 당해야할 고난과 죽음을 대신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한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은 그가 하나님께 잘못을 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인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인 원인론적 죄관(罪觀)입니다. 욥기에서 논쟁이 된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며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5절). '찔림'과 '상함'은 고통스러운 격한 고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찔림'에 해당하는 기본형 '할랄'(חלל)은 '구멍을 뚫다'는 뜻이 있고, '상함'에 해당하는 기본형 '따카아'(דכא)는 '부스러뜨리다' '다져서 조각을 내다'의 뜻이 있습니다. '허물'과 '죄악'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을 어긴 죄를 의미합니다. 구원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한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고난 당하고 죽으신 것은 하나님 백성을 죄와 그 결과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 백성의 죄값으로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속적 고난과 죽음을 당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백성이 받아야 할 징계와 채찍을 대신 받으므로 하나님 백성이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징계'와 '채찍'은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고 '평화'와 '나음'은 회복과 구원을 의미합니다. '평화'(שלום)는 하나님과의 화목과 두려움에 대한 평안의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나음'(רפא)은 죽을 병에 걸려 죽게 된 상태에 있는 자가 나아서 살게 된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구원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므로 하나님 백성이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죽음과 내세에 대한 두려움에서 평안을 얻고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고 했습니다 (6절). 여기에서 세 가지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양 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양은 주변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풀 있는 곳에만 집중하며 그 곳으로만 가려는 고집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놀라기를 잘하며 놀라면 아무 방향으로나 내 달리는 경향이 있어 길을 잘 잃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죄악으로 치달아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광야로 헤매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 백성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악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킬 것이란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지만 스스로는 그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에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로 결정하고 그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들의 죄를 여호와의 종인 구원자에게 담당하도록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 스스로 죄와 그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자에게 그 죄를 전가시켜 그 죄값을 담당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죄를 없애고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죄를 지어 죽는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박해하는 무리에 함께 동참하여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저주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면서 마음이 심히 아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종교 지도자들로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한 대제장들, 기적을 베풀 때는 앞다투어 따르다가 대제사장들의 돈에 매수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유대인들, 자신에게 아무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유대 백성들의 민란을 두려워 하여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내린 빌라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예수님을 돈 몇 푼에 끌려 예수님을 밀고한 가룟유다, 다 버릴지라도 자신을 예수님을 버리리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으나 예수님이 붙잡혀 가 가야바 대제사장 뜰에서 심문을 받을 때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 이나 부인한 베드로,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들이 인간적인 관계를 저버리고 배반한 것에 대한 아픔이라 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구원하러 온 대상자들인 그들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들의 죄를 없애고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대신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고 있는 것인데 그 속죄의 대상자들이 그것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가장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까? 무엇 때문에 가장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100만 명에 가까운 무속인들이겠습니까? 교회를 공격하는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겠습니까? 민중들은 아사 직전에 있는데 자신들의 권세욕만 가지고 억압하는 독재자들이겠습니까? 민생 현안을 다루는 법안들은 오랫동안 계루되어 있는데 여전히 자신들의 정치적 이권을 위해서만 싸우고 있는 정치인들이겠습니까? 사회를 어지럽히는 조폭이나 사기꾼들이나 창녀들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 우리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는 우리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는 우리 때문입니다 (마28:20, 요14:16). 성령님이 우리를 돕는다는 것을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사는 우리 때문입니다 (롬8:26).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성령님의 가책을 거부하고 범죄하며 사는 우리 때문입니다 (살전5:19).  

 


          3. 배척에 대한 종의 태도 (7-9절)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않았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7절). '그'는 여호와의 동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그는 대적들의 간계와 모함과 강제에 의해 괴로움을 당할 것이지만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양을 많이 기릅니다. 양을 길러서 털을 얻기도 하고 고기를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양의 특성이 털을 깎을 때이든 죽일 때이든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앞에 놓인 부당한 수난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항변이나 저항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자발적으로 그 길을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8절). 그가 고난과 죽음을 다하는 것에 대해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의 죄 때문에 고난과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곧 그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면서도 항변이나 저항이나 거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그 길을 간 것은 자기가 구원해야 할 하나님 백성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않았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자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9절). 그는 저항하지 않고 항변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진실만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무죄하지만 악인들처럼 장사지내게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부자에 의해 좋은 장사를 지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1:29, 히4:15, 마27:57-60).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을 때에 어린 양처럼 그 상황을 전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전서2:22-23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대신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면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같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거나 대항하거나 저주하거나 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습니다. 언약 백성을 죄와 죄의 결과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 죄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롬6:23, 레17:11) 그 죄를 담당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인간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공의 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그 인성과 신성을 가진 유일한 자가 자기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맡긴 택한 백성을 죄와 그 결과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 자신이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택한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이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을 많이 가르쳤습니다 (요3:14, 12:32-33, 마26:24).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붙잡힐 줄 알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잡아 죽이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가 배반하여 밀고할 것도 알았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정치적인 판단으로 십자가형을 구형할 것도 알았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을 원치 않았다면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가룟 유다의 배반을 막을 수도 있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힐 때 천군천사를 불러 잡으러 온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을 물리칠 수도 있었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병들을 물리치고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중에서도 못 박는 무리에 대해 원망하거나 저주하거나 대항하거나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낸 목적이 창세 전에 택한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이었고 그 구원 사역의 유일한 방법이 고난을 받아 죽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26:39, 요17:1).


  우리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라면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과 저주와 반항을 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손해와 고난의 길일지라도 말입니다.  

  


          4. 종의 승귀 (10-12절)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며 또 그의 손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0절). 여호와의 종 곧 구원자는 고난과 죽음으로 자기 생명을 속건제물로 드리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하여 그의 후손이 많아지고 그들이 장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거의 차이없이 범죄했을 때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사인데 속죄제에 비해 속건제는 제물이 동일하며(수양) 배상에 강조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자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므로 그를 믿는 자들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희생제물이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그가 희생제물이 되어 주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고 했고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고 했습니다 (11절). 여호와의 종인 구원자가 자기의 희생으로 택함 받은 백성들이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 것을 보고 자기의 공적 사역에 대해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이 자기가 지진 지식으로 사람들을 의롭게 한다는 것은 자기의 경험과 사역으로 택함 받은 백성들을 구원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택함 받은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여 고난과 죽음으로 그들을 구원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고,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종 구원자는 승리자로서 존귀한 자나 강한 자들과 함께 분깃과 전리품을 나누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승리의 주도자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자발적으로 자기를 희생하여 택함 받은 백성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고 중보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속죄 제사를 드리므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없이했습니다 (히9:26). 그로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증명했고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요17:1,4). 이제 우리는 그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으니 그를 위해 살아서 그와 함께 승리의 전리품을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結言>

  빌립보서3:10-11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주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의 부활의 권능에도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