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言>
기자는 전 장에서 종의 사역에 대해 언급하고 본 장에서는 그 사역을 근거로 예루살렘의 회복과 영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포로생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고 동시에 새 예루살렘의 건설을 예표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49:14~52:8에는 '시온'이라는 말이 8번이나 나오지만 52:9~59:20에는 '시온'이라는 말이 일체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이스라엘에 한정되지 않고 온 세계로 확대되어 미칠 것을 염두에 둔 의도적인 암시라 생각됩니다. 내용구조는 이스라엘의 회복(1-10절), 시온의 영광(11-17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이스라엘의 회복 (1-10절)
1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종의 고난과 승리를 통해 언약 백성의 회복과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포로 기간이 지나고 예전보다 더 많은 후손을 보유하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는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하며 산고를 겪지 못한 자는 노래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1절). '잉태하지 못한 자. 출산하지 못한 자, 산고를 겪지 못한 자'는 임신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아이를 잉태하거나 낳아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여인을 가리킵니다. 당시 여성에게 있어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아픔과 수치였습니다. 그런 불임 여인이 아이를 낳게 되고 그 자손이 남편을 가진 여인보다 많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장막터를 넓히며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줄을 길게 하며 말뚝을 견고히 하라고 했습니다 (2절). '처소'는 복수입니다. 불임자였던 여인이 많은 아이를 낳게 될 뿐 아니라 그 자손이 미처 생각지 못할 정도로 번성하게 될 것이니 장막을 넓히고 거처들을 많이 만들고 견고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 여인들은 가족의 주거용 장막을 세우며 유지하는 일을 책임졌습니다. 불임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번성케 할 것이니 주거 천막을 넓히고 수를 늘리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좌우로 퍼지며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3절). 자손이 많아져 온 땅에 퍼질 것이며 열방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손의 수도 많아지지만 그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불임한 여인에게 아이를 낳고 자손을 많게 하고 영역을 넓힐 것이니 장막터를 넓히고 처소들을 많이 만들라는 말씀을 주신 때는 여인이 아직 불임상태에 있을 때이기 때문에 확신과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임한 여인은 넓게 보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고, 좁게 보면 바벨론에 사로잡혀 이스라엘 가운데 귀환하여 이스라엘 회복에 쓰임 받을 '남은 자'(שאר, λειμμα, remnant)를 말합니다 (렘23:3, 31:7, 단1:8-9). 본 내용은 바벨론 포로 가운데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데 쓰임 받은 '남은 자'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그 수가 번성하고 이스라엘의 영역이 확장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앞 장에서 종(메시야)의 구속 사역을 통해 신약시대에 구원받은 자의 수가 많을 것을 전망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나 성도 개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이 주실 회복과 번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 말씀은 아직 아이를 가진 상태가 아닌 불임 상태에서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말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는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12:1-4).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진 직후에 하나님이 또 나타나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창13:14-18). 다음에 하나님이 또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으니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로 상속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15:1-7). 아브라함이 85세가 되었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지 10년이 흘렀는데도 아들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자기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창16:1-4).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속으로 자기는 100세가 다되고 아내 사라는 90세가 다 되어 가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겠느냐고 했습니다 (창17:15-19). 하나님이 또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집) 문에 앉아 있었는데 건너편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사람 모양으로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가서 그냥 지나가지 말고 자기가 대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장막으로 들어가아내 사라와 종들에게 급히 요리를 하게 하여 떡과 고기와 우유와 버터를 가져다가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내 사라는 어디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내년 이맘 때에 다시 올 것이니 그 때에 아내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장막 문에서 그 말을 들었습니다.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어 100세가 다 되었고 자기도 90세가 다 되어 생리가 끊어졌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일렀습니다. 어찌하여 아내 사라가 웃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창18:1-14). 그런데 정말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고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 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고 사람의 나이가 90세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처음 약속을 받은 지 25년 만에 아들 이삭을 낳은 것입니다 (창21:1-7).
아브라함과 사라가 100세와 9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어 마른 막대기 같이 되어 사라는 생리가 다 끊어졌는데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누가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도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메세지를 듣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기는 했지만 그의 언행을 보면 아들을 낳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창15:6). 그래서 처음 약속을 받은 후 25년 내내 인본주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처음 약속을 받은 지 약 10년 정도 되었을 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아브라함과 언약식을 합니다. 이른바 횃불언약식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소와 양과 비둘기를 잡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짐승들을 둘로 쪼개어 마주 대하게 놓게 했습니다 (비둘기는 쪼개지 않음). 솔개가 그 위에 내릴 때는 아브라함이 쫓았습니다. 해가 져 어두울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횃불로 그 쪼갠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창15:1-22).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현상이었습니다. '언약'은 쉬운 말로 '계약'입니다. 고대에 근동지방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약을 체결할 때는 당사자들이 쌍방 간에 짐승을 잡아 쪼갠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어느 한편이라도 그 언약을 어기면 그 대가로 죽음이 내려진다는 의미였습니다. 헌데 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간의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이 횃불만 지나가고 언약식에서는 아브람은 지나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지나간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일방적으로 언약을 선언하고 일방적으로 그 언약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편무계약(片務契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방식을 택한 것은 아브라함은 피조물로서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존재이기에 자주 회의를 가질 수 있고 거기에다가 지혜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황과 환경의 지배를 받아 지킬 수 없습니다. 아브람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언약적 축복을 선언하고 확증해 주신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 언약을 이루실 것을 암시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믿은 가질 수 있도록 부단히 섭리를 통해 훈련시켜서 이루십니다.
심리학자 가운데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긍정의 심리학'을 창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원에서 세계적인 학습 이론가 솔로몬 교수의 지도 아래 '개'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개에게 일정한 소리를 들려 준 후에 전기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런 후 동일한 소리만 들려 준 후 전기 자극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개는 낑낑댔습니다. 그리고 개를 방에 두고 절반을 낮은 칸막이로 막았습니다. 개가 충격을 받을 경우 다른 방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낮은 칸막이를 설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동일한 소리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옆 칸으로 넘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넘어가지 않고 낑낑대며 엎드렸습니다. 개는 충분히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경험에 학습되어 극복하려는 시도 조차도 않고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것을 학습된 무기력이 어떤 행동을 하든 소용없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그 생각이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사람도 살아오면서 반복적으로 경험한 것에 의해 사고의 틀이 만들어지고 그 사고의 틀에 의해 사안을 바라보고 그 사고의 틀에 의해 행동을 합니다. 그것을 인지 심리학에서는 '스키마'(Schema)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는 사안은 그 경험을 통해 학습된 스키마에 의해 앞으로도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판단해 버립니다. 그 사고에 틀에 갇혀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기이한 일도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는 분입니다. 예레미야32:27에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고 했고, 마태복음19:26에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눅1:37).
아브라함과 사라가 100세와 90세에 아들을 낳는 일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그렇게 될 것을 소망하면서도 10년이 지나면서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한 목적인 그의 후손을 통해 제사장적 나라를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첫번째 방법으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게 하려는 계획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그 목적을 가지실 때는 그 목적을 이룰 방편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그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절대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건지실 것이고 필요한 것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그 일들을 행하실 것을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창세기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우리가 그 일들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히11:1-2).
4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6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9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10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임여성, 과부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고대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남편에게 버림받아 과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과부는 저주와 재앙으로 여겨 수치의 대상이었고 경제 수단이 없어 궁핍으로 동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놀라지 말고 두려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이전의 수치와 치욕을 잊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4절).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지은 그의 남편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그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5절).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할 이유 곧 이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될 이유를 밝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 주셔서 구속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속자'(גאל, Redeemer)는 룻기서에 나오는 룻과 결혼을 해주고 기업을 되찾아 준 보아스를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 곧 구원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수치에서 건지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버림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에게 함과 같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6절). 신혼의 단꿈에 있어야 할 때부터 버림받아 절망 가운데 있는 아내를 다시 부름같이 불러 수치가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잠시 버렸지만 큰 긍휼로 다시 모을 것이고 잠시 넘치는 분노로 얼굴을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긍휼히 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7-8절). 하나님이 짧은 기간 동안에 싫어 여겨 버렸지만 이제 긍휼로 다시 부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노아 때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노하지 않으며 책망하지 않기로 맹세하신다고 했습니다 (9절). 노아 때에 하나님이 세상의 악함을 보고 물로 심판했으나 그 직후에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려서부터 약하기 때문에 다시는 그같은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그 징표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습니다 (창8:21, 9:13). '무지개'에 해당하는 '케쉐트'(קשת)는 원래 '활'이라는 뜻입니다. 그 용어를 택한 것은 무지개가 모양이 활처럼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활을 쏘지 않고 가만히 걸어 두신다는 의미를 밝히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고 평화의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암시인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재앙 가운데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이 옮겨질지라도 하나님의 자비는 그에게서 떠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비'에 해당하는 '헤세드'(חסד)는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하고 '언약'에 해당하는 '뻬리트'(ברית)는 절대 변하지 않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범죄하여 남편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민족의 침략과 약탈과 유린을 당했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사로잡혀 갔습니다. 수치와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되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귀환시켜 주고 회복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속자(고엘)로서 그렇게 할 능력이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언약백성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그리고 그들에게 한 언약의 말씀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멀리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영적인 이스라엘인 성도들을 부르실 것을 바라보게 하는 예언입니다. 오늘날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자(고엘) 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할 때 잠깐 힘든 가운데 두실지라도 반드시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그의 절대적 사랑과 변하지 않는 약속이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요6:39, 마24:35).
2. 시온의 영광 (11-17절)
11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12 홍보석으로 네 성벽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13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14 너는 공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며 공포도 네게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라
15 보라 그들이 분쟁을 일으킬지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너와 분쟁을 일으키는 자는 너로 말미암아 패망하리라
16 보라 숯불을 불어서 자기가 쓸 만한 연장을 제조하는 장인도 내가 창조하였고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내가 창조하였은즉
17 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모든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공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 단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복된 상황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11절上). 그들은 현재에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며 몹시 불안정하며 좌절감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미래의 소망을 갖지 못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화려한 채색으로 그들의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그들의 기초에 쌓으며 홍보석으로 그들의 성벽에 지으며 석류석으로 그들이 성문을 만들고 그들의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라고 했습니다 (11下-12절). '화려한 채색'은 색색의 접합체로서 건물 벽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려고 벽돌 사이에 붙인다는 것입니다. '청옥'은 사파이어로서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다양한 색이 있어 아름다운 광채가 나는 보석으로서 기초석을 놓는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홍보석'은 루비로서 불꽃 같이 번쩍이는 보석으로서 성벽을 쌓는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석류석'은 크리스탈로서 투명한 유리 같으면서도 붉은 광채가 나는 보석으로서 성문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지경'은 출입문 안쪽 통로를 따라 세워진 낮은 성벽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낮은 성벽도 보석들로 장식된다는 것입니다. 성 전체를 각종 보석으로 짓고 꾸민다는 것입니다. 이는 안정과 풍요와 영광을 상징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자녀에게는 평안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3절). 자녀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말씀과 사역과 목적 등에 대해 배우고 그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의로 설 것이며 그들에게서 학대가 멀어질 것이니 그들이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며 공포도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4절). 하나님의 공의가 지배원리가 되어 학대가 없어지지 공포나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분쟁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니 누구든지 그들과 분쟁을 일으키는 자는 그들로 말미암아 패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5절). 대적이 일어나 분쟁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며 그들은 반드시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숯불을 불어서 자기가 쓸만한 연장을 제조하는 장인도 하나님이 창조했고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16절). 대적자들의 전사와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와 그 무기를 만든 대장장이도 다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 통제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7절上). 하나님이 대적들의 공격을 실패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무기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어나 그들을 송사하는 모든 혀는 그들에게 정죄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얻은 공의라고 했습니다 (17절). 대적자들이 송사를 한다 해도 오히려 그들이 정죄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종들을 통해 얻은 공의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예루살렘 회복과 번영을 약속한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안정과 평안과 부요와 행복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는 구속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요14:27). 그리고 그것은 재림을 통해 완성하실 것입니다 (계21:1-4, 10-27).
<結言>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고 소망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귀환하게 하여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성읍을 풍요하게 하고 자녀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고 대적을 물리쳐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풍요와 평안과 안전과 번영을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언약 백성인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있을 것을 소망해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과 환경만 보고 절망해 있을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