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序言>  

  전 장 후반부에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죄악상을 지적했었습니다.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악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자는 불의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회개하는 자들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구조는 의인의 죽음에 대한 태도(1-2절), 이스라엘의 범죄 내용들(3-13절), 구원으로의 초대(14-21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의인의 죽음에 대한 태도 (57:1-2)

 

  1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2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

 

  전 장 마지막 후반부에서(56:9-12)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세워 준 위치에 대한 사명을 잃어버리고 안일과 탐욕과 향락으로 일관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운데는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1절上). '의인'(צדיק)과 '진실한 이'(חסד)는 전 장의 후반부에 나온 타락한 지도자자들과 달리 하나님께 대해 의롭고 신실한 신앙을 가진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데려가는데도 왜 데려가는지 깊이 생각하는 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공동체에 임할 전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미페네이 하라아 네에사프 하차디크, הצדיק נאסף הרעה מפני)고 했습니다 (1절下). '아사프'(אסף)는 '빼앗다' '소집하다' 뜻으로서 죽게 하여 데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רע)는 '악한' '재난' 등의 뜻이 있습니다. '파님'(פנים)은 '...로 부터' '...전에'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페네이 하라아'(הרעה מפני)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 죄악으로부터'이고, 하나는 '재난 전에'입니다. 곧 전자는 하나님이 공동체에 만연한 지도자들의 죄악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데려갔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공동체에 만연한 지도자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다가올 환난을 면해주기 위해 데려갔다는 의미입니다. 한글 개역판에서는 '화액(禍厄: 재앙이나 재난으로 인한 나쁜 운) 전에'로 번역했었습니다.

  또한 선지자는 '그들은 평안(שלום)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고 했습니다 (2절). 이는 사람이 침대에서 편안히 잠든 것을 빗대어 표현한 말입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죄악으로 인해 다가올 환난과 재앙을 경험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고, 이차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적극적인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될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눅16:22, 23:43, 계7:16, 14:13, 21:4, 22:5,12).


  당시 북이스라엘은 물론이거니와 남유다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로 기울어지고 심히 타락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 제국이나 바벨론 제국이 침략하여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무시 무시한 전쟁을 겪게 될 것이 예고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의인은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더 큰 재난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기 전에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분열왕국 초기에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여로보암왕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제사장을 아무나 세우고 절기를 마음대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 집을 멸절시키겠다고 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첫째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도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나답이 왕이 되었습니다. 2년만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여로보암 집안의 생명있는 자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쳐 죽였습니다 (왕상14:10-13, 15:28-29). 그런데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 첫째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들었을 때 한 말씀 열왕기상14:13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비야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인데 여로보암 집안에서 그만 평안히 장사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는 하나님의 뜻을 품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여로보암이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가는 것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듣고도 오히려 길에 세운 장애물을 치워 준 사람입니다 (Bahr, Pulpit). 사람들이 볼 때는 그의 죽음이 여로보암 집안의 멸절의 시작으로 보았지만, 하나님은 여로보암 집에서 그만 의로웠기 때문에 뒤에 그 집안이 비참하게 학살 당하는 것을 보지 않게 질병으로 일찍 데려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칼빈(Calvin)은 루터(Luther)의 죽음과 관련하여 "루터는 도처에 만연한 방탕함과 사악함을 지적하면서 독일에 임할 무서운 재앙을 예고했는데, 그 재앙이 닥치기 직전에 이 세상으로부터 취하여감을 당했다. 그는 무서운 징벌이 임할 것을 두려워 하면서 그 재앙(전쟁)을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했던 사람이다"고 했다고 합니다 (E.J.Young).


  사람들이 의인이 이 세상에서 고난만 당하다가 일찍 죽는 것을 보면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지만 의인은 이 세상에서 고난 가운데 있던 기간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후회되는 날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더 좋은 일을 보지 못한 채 죽는 것에 대해서도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면 모세입니다. 모세는 애굽왕 바로의 아들로 자랐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인도했습니다. 십계명을 받고 성막을 짓고 매번 힘들 때마다 불순종의 모습을 보인 백성들을 믿음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 앞 가데스 바네아에서 백성들이 물이 없음으로 인해 원망할 때 분을 내어 반석을 쳐 물을 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분노하여 의를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느보(비스가) 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민20:2-12, 신34:1-5). 사람들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사실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본문 관점에서 보면 가나안 땅 정복 전투에서 경험할 고통들을 면해주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주님으로부터 많은 상과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화되어 모세와 대화를 나눈 것을 보면 (눅9:28-30)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으므로 가나안 땅이 예표하는 하나님 나라에는 율법의 행위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믿음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냈다는 것에 대한 칭찬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세는 그런 위로 속에서 광야에서 고생한 것도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가 임종을 앞두고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렇게도 들어가기를 원하던 가나안 땅을 한참 바라본 후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었습니다. "슬프냐?" "아닙니다" "그러면 서러우냐?" "아닙니다" "그러면 분하냐?" "아닙니다" "내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냐?"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엎드려 있느냐?" "너무 행복해서입니다" "행복하다니"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 했던 광야가 제게는 가나안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음식을 먹어 보았겠습니까? 어느 누가 하나님께서 손수 내주신 석간수를 마셔 보았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매일 먹고 자던 광야가 제게는 바로 가나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세가 이 세상에서 고생만하다 갔다고 생각하지만 모세는 그 고생이 가장 행복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범죄 내용들 (3-13절)

 

  3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

  4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

  5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6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들 중에 네 몫이 있으니 그것들이 곧 네가 제비 뽑아 얻은 것이라 또한 네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

  7 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거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8 네가 또 네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네가 나를 떠나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또 네가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

  9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

  10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소환하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무당과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3절). 이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영적 음란에 대해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한 신앙을 가진 의로운 자들을 향해 입을 버려 혀를 내밀며 희롱하는 패역과 거짓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4절).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께 대해 거짓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한다고 했습니다 (5절). 각종 무성한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운다는 말은 다산의 신으로 섬겼던 아세라(Asherah) 숭배에 관한 지적으로 여겨집니다. 아세라 신상은 여성의 모습인데 유방이 여러 개 달려 있는 모습으로서 자녀를 많이 낳게 해주는 신으로 여겼습니다.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한다는 말은 자녀의 건강을 위해 섬겼던 몰록(Moloch) 숭배에 관한 지적으로 생각됩니다. 몰록 신상은 황소 머리를 한 남성 좌상에 두 팔을 앞으로 내민 모습인데 자녀의 건강을 위해 숭배했던 우상입니다. 초기에는 그 신상 앞에 불을 피워 놓고 자녀들을 지나게 했는데 후에는 신상 아래에 불을 피워 청동으로 된 팔을 달구어 그 위에 제물로 선정된 어린 아이를 올려 드리기도 했습니다. 인신제사는 가나안 민족, 바벨론 민족, 페니키아 민족, 카르타고 민족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는데 페니키아의 유물 중에는 새까맣게 탄 유아의 유해가 담긴 100개의 항아리들이 있는데 이는 어린 아이 희생제사가 드려졌다는 증거입니다 (Walton, Matthews, Chavalas). 그 인신제사로 인해 지어진 이름이 '애곡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게 힌놈'(הנם גיא, 힌놈 골짜기)으로서 '애곡의 아들들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게 뻰 힌놈'(הנם בן גיא)의 줄임말입니다. 몰록 숭배는 므낫세왕 때 극에 달하여 요시야왕 때 폐지했습니다 (왕하16:3, 21:6, 왕하23:10). 유대인들은 그 후에도 그 곳을 심히 혐오하여 그 곳에 죽은 동물이나 범죄자들의 시체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들로 인한 오염을 막기 위해 그 곳에 화장터 만들어 그 곳에서 불태웠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곳을 자연스럽게 심판의 장소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렘7:32,19:6). 그런 연유로 신약에서는 지옥(地獄)을 표현할 때 그 '게 힌놈'(הנם גיא)을 음역하여 '게엔나'(γεεννα)라고 했습니다 (마5:22,29,30, 10:28, 18:9, 23:15, 막9:43,45,47, 눅12:5, 약3:6).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곳을 비유로 '유황 불 못'으로 묘사했습니다. (την λιμνην του πυροs την καιομενην εν τω θειω; a lake of fire burning with brimstone-KJV. 계19:20). 그것은 유황과 함께(으로) 불타는 못(호수)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골짜기 가운데 매끄로운 돌들 중에 그들의 몫이 있으니 그것들이 바로 그들이 제비 뽑아 얻은 것이라고 했고 그들이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하나님이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고 했습니다 (6절). 그들이 우기에는 넘쳤다가 건기에는 메마른 골짜기(Wadi)에 드러난 반질거리는 바위에서 몰록을 숭배하므로 그같은 곳을 기업으로 여긴다면 그 소원대로 그 곳이 그들의 몫이 될 것이라는 냉소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입니다. 그들이 그 우상에게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드리고 고운 가루와 곡식을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어찌 용납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택한 골짜기가 그들의 기업이 되게 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또한 그들이 높은 산 위에 침상을 베풀었고 거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7절). 이스라엘 백성이 높은 산에서도  우상에게 제사를 하므로 남편 되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로 가는 것을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하나님을 떠나 벗고 올라가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8절). 하나님의 계명이 기록된 기념표를 뒤로 하고 음란하게 우상을 숭배한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들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다고 했으며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않음은 그들의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9-10절). 우상에게 마음을 얻기 위해 가장 귀한 향품까지 더해 드릴 뿐 아니라 새로운 우상을 찾기 위해 이방 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열심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힘들어도 지치지 않고 심지어는 그 곳이 무덤(음부, 지옥)이라 해도 찾아가는 열정을 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열심히 우상을 사모하는지 그 내적 열망을 표현한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골짜기에서 산에서 아세라와 몰록 등의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정성을 다했으며 우상을 찾기 위해 먼 나라나 음부에까지도 피곤해 하지 않고 찾아가는 열정을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우상을 필요로 했는지 가늠하게 해 줍니다. 그들은 자녀를 낳고 자녀를 기르는 것이 그들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라도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것이 인생의 목적과 목표와 가치가 되어 있지 않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특히 육체적 세속적 우상적 욕망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지 않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골3:5, 롬1:23). 진정한 가치가 있지 않는 것에 인생을 올인하면 그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허탄에 빠지며 그 인생 전체가 하나님 앞에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마24:19). 55:1-2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11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

  12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

  13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구를 두려워 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11절上). 세상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어디있기에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12절下).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에 대해 즉시로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행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여 돌이키기를 원하여 긍휼을 베푸시는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곡해하고 악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공의를 보이리라고 했고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에게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12절). 하나님이 그들의 공의를 보인다는 것은 그들이 옳게 생각한 것들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옳게 생각하는 아세라와 몰록 숭배행위를 낱낱이 드러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익한 일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르짖을 때에 그들이 모은 우상들에게 구원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들이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13절上). 그들이 도움을 얻기 위해 숭배한 모든 우상들이 정작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상과 우상숭배자는 결국 바람에 날려 가는 겨처럼 허망하게 됨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13절下).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자가 얻을 복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과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시온산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은 헛된 것으로서 우상을 의지하는 자도 허망하게 됩니다. 오늘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고 지배받는 대상은 모두 우상적 존재입니다. 대표적으로 자신(egoism)과 돈(mammonism)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삼상15:23, 골3:5). 오늘날에는 윗 단원에서 강조했듯이 자녀가 우상적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마24:19).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를 환난과 죽음과 내세에서 구원해주지 못합니다. 환난 때에는 그것이 능히 구원해 주지 못하고 도리어 고통이 되게 합니다 (겔7:19). 그러므로 금생과 내세에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신뢰함이 복인 것입니다. 예레미야17:5-8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3. 구원으로의 초대 (14-21절)

 

  14 그가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16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17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18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9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20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40장부터 화자(話者)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40:3에서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만 밝히다가 57:14에서는 '그가'로만 밝히고 62:10에는 아예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메신저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메시지 자체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언약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4절). 언약 백성이 하나님께도 돌아오는 대로를 건설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언약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것을 암시합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15절). 영원성과 절대성과 초월성을 가지신 하나님이 겸손히 통회하는 자와 함께 하시며 그 마음을 소생시키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통회하고'의 기본형 '따까아'(דכא)는 잘게 부수어 트린 가루를 말하는 바 죄행과 죄성을 인지하여 철저히 부정하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영원히 다투지 않으며 끊임없이 노하지 않을 것은 그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그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16절). 하나님이 언약 백성에 대해 영원히 노하지 않고 통회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고 그것은 언약 백성의 영혼이 피곤할까 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죄대로 대하시면 설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통회하면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시대에 홍수로 심판하고 노아와 그 후손에게 무지개로 언약하신 것도 인간을 죄행대로 심판하면 인류 가운데 남을 자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창9:9-16). 언약 백성에 대해 계속 진노하면 연약성으로 인해 견질 자가 없으므로 통회하기만 하면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노하여 치고 얼굴을 가렸지만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걸로 걸어간다고 했습니다 (17절). 언약 백성이 여전히 통회하지 않고 탐욕의 죄성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를 인도하여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8절). 하나님이 진노하셨지만 선지자를 통해 긍휼을 베풀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계속 부패한 상태로 빠져 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반복되는 죄악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개입하여 통회하는 자들을 구해 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하나님이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19절). 구속받은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기쁨의 찬양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있는 자이든 이방에 흩어져 있는 자이든 하나님이 평강(שלום)을 선포하며 치료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고 했습니다 (20절). 하나님께 통회하며 돌아오는 자에게는 평강이 있으나 끝까지 통회하지 않는 자에게는 평온(שלום)이 없어 내적인 불안과 두려움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21절). 죄성의 욕망을 따라 살면서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평강(שלום)이 없기 때문에 항상 분노와 불안과 공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28:1에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이 범죄했을 때 진노했으나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 스스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직접 개입하여 그들을 살게 하려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을 예언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멀리 택한 백성이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 구원을 얻게 하시겠다는 것을 예언한 것이기도 합니다.   

 

<結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음란하듯이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여 징계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줄 알고 종을 보내어 종의 사역을 통해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에 합당한 반응으로 통회하여 돌아오면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돌아오지 않는 자는 평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은혜 주시겠다는 의지를 보이실 때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됩니다. 55:6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고, 고린도후서6:2에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