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序言>  

  전 장에서는 우상숭배로 요약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상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본 장부터 59장까지는 회개할 내용을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 장은 이스라엘이 회개할 대표적인 죄악으로 볼 수 있는 거짓 금식과 안식일 경시 풍조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죄에 대한 책망 명령(1-2절), 금식에 대한 지적 (3-12절), 안식일에 대한 준수 촉구 (13-14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죄에 대한 책망 명령 (1-2절)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언약 백성의 허물과 죄에 대해 목소리를 아끼지 말고 나팔 같이 높여 크게 외치라고 했습니다 (1절). '나팔'은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인데 경고나 회집을 위해 붑니다. 그 날팔 소리는 귀를 찢을 듯한 소리입니다. 그처럼 언약 백성의 심각한 영적 상태를 강력하게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 한다고 했습니다 (2절). 이스라엘 백성의 외식을 조롱조로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외관상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열심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와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열심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29:13에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1:12-14에는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에 바리새인들도 율법의 작은 규례까지 철저히 지키면서도 그 율법의 규례가 요구하는 삶은 살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23:2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20:47에 "그들(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신24:17). 우리가 바른 교리를 가지고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고 자기 능력을 나타내고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2. 금식에 대한 지적 (3-12절)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본 단락은 옳지 못한 금식(禁食)에 대해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금식은 재난을 만났을 때나 혹은 원하는 소원이 있을 때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구약시대의 금식은 기간을 정해 놓고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육신을 괴롭게 하므로 자신의 욕망을 죽이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상달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금식은 자기의 욕망을 제어하며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시길 바라는 목적에서 한 것입니다. 금식은 결코 탐욕에 의해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우리가 금식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 주께서 보시지 않고 알아 주지 않으시나이까'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3절上). 하나님께 어떤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혹은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금식을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 응하지 않으므로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원하는 상품을 얻기 위해 값을 지불했으면 하나님이 그 상품을 제공해 주셔야 된다는 생각으로 금식을 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유익을 얻기 위해 은혜의 수단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금식을 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킨다고 했습니다 (3절下). 그들의 금식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지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금식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이 기뻐하는 일을 좇고 일꾼들이나 종들에게 다른 날보다 더 많은 일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금식을 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친다고 했습니다 (4절上). 싸우고 다투므로 금식의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금식 목적이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 위선적인 금식을 하나님이 기쁘시게 여길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금식하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4절下). 그들의 금식 목적이 자기를 괴롭게 하여 자기 목소리를 하나님께 상달하게 하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자기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것 뿐이며 자기를 종교성을 자랑하려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어찌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고 있는다고 해서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으며 하나님께 열납될 날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5절). 하나님이 그들의 금식을 기뻐하지 않고 받지 않는 이유는 마음과 행동의 변화없이 외적인 형식에만 맞추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행동의 변화없이는 머리를 숙이고 베옷을 입고 재 위에 누운채 금식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식을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은 외부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것은 위선으로서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6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의식 준수가 아니라 마음과 행동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 하는 금식의 진정성은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죄성을 제어 하고 죄를 회개하고 잘못된 행동을 태도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없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멍에를 씌우고 그 멍에의 줄에 결박한다는 것입니다. '멍에'는 일하는 소의 목에 거는 기구로서 그것에 줄을 연결하여 쟁기나 수레를 끌게 합니다. 그들은 종들을 부당하거나 지나치게 부린다는 것입니다. 종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마다 석방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들 욕망 때문에 그들을 석방해 주지 않고 부당하게 부린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금식을 한다 하면서도 그런 마음과 행동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금식은 자기의 죄성을 제어하고 죄행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식을 하는 자는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잘못하고 있는 행위들을 고치면서 해야 그 금식이 진정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금식하는 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마음에서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는 것을 제거하고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는 것을 고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금식을 기뻐합니다. 또한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골육을 피해 스스로 숨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7절). 음식이 없거나 입을 것이 없거나 잠잘 곳이 없는 자를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식구나 친척이 그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기에게 손해가 갈 것을 염려하여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한다 하면서 긍휼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는 것은 그 금식의 진정성이 결여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금식을 하는 자는 자기의 죄성을 제어하고 죄의 행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외부적 의식을 행할 때는 하나님이 그 의식을 행하게 하신 목적을 생각하고 그 의식을 행하게 하신 바른 태도를 가지고 행해야 진정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위선적인 것으로 보시고 듣지 않으십니다. 구약의 금식 뿐 아니라 모든 종교행위 곧 하나님이 은혜에 수단으로 주신 모든 신앙적 행위가 같은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도 당시 바리새인들의 금식에 대해 지적했는데 거기에서는 금식을  자기의 종교적 열심이 있는 자로 인정받으려 하거나 추앙받으려는 의도로 하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마태복음6:16-18에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대략 월요일과 목요일 경)에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는데 (눅18:12), 그들 중에는 금식을 종교적 열심히 있는 자로 인정 받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세수나 빗질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굶어서 창백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얼굴에 횟가루를 바르는 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금식을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종교적으로 옳게 보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는 의로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행동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 사람들은 금식을 자기의 욕망을 이루는데 사용했고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자신을 자랑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위선적인 금식이었습니다.  사실 금식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의 수단으로 주신 도구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도 안되고 자기를 자랑하여 높임받으려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같은 행위는 하나님 앞에 지극히 싫어하는 행위입니다 (1:12-14).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로서 십계명중 제 3계명을 어긴 악한 행위입니다 (출20:7).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롬1:23).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6-7절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자기 욕망을 위해 압제했던 종들을 자유하게 하고 양식이나 옷이나 집 등의 생활에 기본적인 절대적 필요를 느끼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적용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면 그들의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그들의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그들의 공의가 그들 앞에 행하고 하나님이 그들 뒤에 호위하고 그들이 부를 때에 응답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8-9절上). '새벽 빛'은 아침에 갑자기 밝아오는 찬란한 빛으로서 번영을 상징합니다. '치유'는 육체적 정신적 상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공의'는 올바름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뒤에 나오는 '네 뒤에 호위하리니'와 연관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응답'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가리키고 '내가 여기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와 동행을 의미합니다.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자는 가난과 질병과 불의와 패배와 영적 곤고가 따르지만 하나님을 따라 사는 자는 번영과 치유와 공의와 보호와 응답과 임재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해 버리고 주린 자에게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 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그들의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그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하나님이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뼈를 견고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0-11절上). 외적으로만 금식할 것이 아니라 약한 자를 억압하고 경멸하고 거짓된 사악한 말을 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난하여 굶주리고 채무로 고통하는 자를 위로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항상 인도하여 어둠처럼 암담한 상황을 낮같이 해결해 주시고 메마른 광야처럼 척박한 상황에서도 영혼을 만족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 때문에 뼈가 떨리는 상황에서 평안과 담대함이 있게 하여 견고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1절下). 황량한 사막이나 가시덤불만 있는 삭막한 광야 같은 삶에서도 물의 고갈함이 없는 물댄 동산이나 물의 다함이 없는 샘같이 풍요와 만족과 안정과 기쁨과 행복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그들은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을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2절). '네게서 날 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으로서 특히 학개, 스가랴,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같은 신실한 사역자들을 가리킵니다. 신실한 신앙을 가진 자들의 후손들을 통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여 파괴된 채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황폐해 있던 예루살렘 성읍을 재건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나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하지 말고 순전하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과 보호와 인도하심이 있어 만족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을 가진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에 사용하십니다.

 


          3. 안식일에 대한 준수 촉구 (13-14절)

 

  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안식일에 자기 발을 금하여 자기 길로 행하지 않고 오락을 구하거나 행하지 않고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고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 존귀한 날이라 하여 존귀하게 여기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3-14절上). 안식일을 자기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날로 존귀하게 여기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할 때는 불안과 파멸이 있지만 자기 욕망을 채우는 데서 더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기쁨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은 곳에 올리고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절). '높은 곳'은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바 높은 곳에 올린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기업'은 언약 백성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바 기본적으로 가나안 땅에서 번영하도록 인도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을 자기 소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과 친교를 위해 희생하면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 그것에서 안전과 평안과 번영을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20:8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거룩하게 지킨다고 하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성회로 모여 제사와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출20:9-10, 민28:9-10).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고 (출20:1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구원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고 (신5:15), 장래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참된 구원과 영생과 안식을 줄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골2:16-17).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세상을 만드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참된 안식을 주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손해가 되겠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출20:11).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이스라엘의 애굽에서 구원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중요시되었지만, 신약시대의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와 성품과 사역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베푸신 구속에 관한 일들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표징으로 삼았듯이 (출31:13), 신약시대의 초대교회 때에도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표징으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축복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영생주신 것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소망, 비전을 두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귀히 여깁니다 (삼상2:30).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신약시대에 주일로 바꾸어 지킵니다 (호2:11, 히4:7, 7:18-19, 마28:1-6, 행2:1-4, 계1:10, 행20:7, 고전16:2, 요19:20-25, The Ante-Nicence Fathers). 구약의 안식일은 지금의 토요일(제 7일, 일곱째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이라고 하는 일요일(제 1일, 첫째날)을 지킵니다. 우리에게 안식교로 알려진 '제칠일 안식일 재림교회(화이트)'에서는 일곱째날인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 '신천지교회(이만희)'와 함께 극성인 '하나님의교회'(장길자)에서도 일곱째날인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안상홍증인회'라고도 합니다. 안상홍은 안식교에서 나와 자신을 보혜사 성령님이라고 주장했고 1985년에 죽었습니다. 그 후 그의 네번째 아내였던 장길자가 자신을 안상홍은 남자 하나님이었고 자신은 여자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단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일곱째 날인 안식일이 아니라 첫째날인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에는 문자적 진술로 일요일(첫째날)로 바꾸어 지키라는 구절이 없지만 역사적 섭리로 날짜를 바꾸어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첫째, 성경의 약속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전의 계명을 폐하고 다른 날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호2:11, 히4:7, 7:18-19).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본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주일에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일요일인 주일을 구속사(救贖史)의 중심으로 여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은 예수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신 날입니다 (마28:1-6). '안식 후 첫날'은 토요일인 안식일 다음날인 일요일인 주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일은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날입니다 (행2:1-4).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했는데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고 유월절 다음날로부터 하면 49일째 되는 날입니다. 유월절이 안식일로서 토요일이니 유월절 다음날은 일요일인 주일입니다. 그 날로부터 49일째인 오순절도 일요일인 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일에 계시를 주셨습니다 (계1:10). '주의 날'은 일요일인 주일을 말합니다. 셋째, 사도들이 모범을 보였습니다. 예수님 제자였던 초대교회 사도들도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를 느끼고 일요일인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행20:7, 고전16:2, 요19:20-25). 사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간 것은 당시 유대교인들이었던 유대인들이 토요일인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때 회당에 들어간 것이지 토요일인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회당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넷째, 교부들도 모범을 보였습니다. 'The Ante-Nicence Fathers'(교부시대부터 AD325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를 보면 사도들의 제자들이었던 교부들도 토요일인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일요일인 주일을 지켰습니다. 1세기 말경 안디옥 교회 감독이었던 교부 신학자 익나티우스(Ignatius, A.D. 35-107년 경)이 주장했고, 2세기 후반 고린도 교회 감독이었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A.D. 170년 경)은 그의 편지에서 주의 날을 지켰다고 했고, 3세기초 교부 신학자 터툴리안(Tertullian, A.D.150-220년 경)은 주의 날을 지키기 위해 일상적인 일을 중단한 크리스찬도 있다고 했습니다. 4세기 초 321년에 로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 주일을 지키는 것을 돕기 위해 일요일을 공식적인 휴일로 선포했습니다.


  오늘날 주일성수 방법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안식일에 대한 준수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유대인을 세 부류로 나눈다면 정통파 유대인(Orthodox Jews)과 보수파 유대인(Conservative Jews)과 개혁파 유대인(Reform Jews)이 있습니다. 자동차로 예를 든다면 정통파 유대인은 안식일에 자동차를 타고 가면 돌을 던지고, 보수파 유대인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일을 위해서는 자동차를 타는 것을 용납하고, 개혁파 유대인은 안식일에 자동차를 타는 일이 하등에 문제 삼지 않습니다. 저는 주일성수에 대한 세가지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첬째, 외부적 방법보다 영적 목적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요4:24). 둘째, 소극적 의미 보다 적극적 의미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마12:11-12). 셋째, 내용을 온전케 하기 위해 방법 차원의 규례도 필요합니다 (마23:23). 주일을 지키기 위해 주일을 첫째로 여기고 주일에 예배와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위해 자기를 위한 모든 일은 금하는 것을 습관화 해야 합니다. 선한 습관은 바른 목적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지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에도 자기 소욕을 채우는 행위를 그치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즐거워 하는 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해 주십니다. 혹시 안식일을 지키느라고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질, 인권,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증거를 나타내어 안식일을 지키므로 손해 본 것보다 더 큰 영적인 위로를 줍니다. 그것들을 극복할만한 영적 즐거움을 줍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얻은 즐거움 보다 더 영적 가치를 느끼게 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킵니다 (느10:31, 13:15-17).

 

<結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목적은 자신의 소욕을 채우는데 있었습니다. 결코 하나님과의 교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소욕을 채우는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번영과 치유와 위로와 임재와 보호와 동행과 인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생활을 자기 소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지 말고 하나님의 기쁘게 해 드리므로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