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신명기15:1-23
<題目> 이스라엘이 준행해야 할 세 규례
<序言>
앞 장에서 십일조에 대한 조항을 말하면서 후반부에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십일조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 같은 극빈자를 긍휼히 여겨야 할 것에 대해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안식년에 이웃의 채무에 대해 면제해 줄 것과 종을 해방시켜 주어야 할 규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안식년 채무 면제 규례(1-11절), 히브리 종 해방 규례 (12-18절), 초태생 규례(19-2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안식년 채무 면제 규례 (1-11절)
구약의 모든 절기는 3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산술역법(算術曆法)에 따른 절기로서 안식일과 월삭과 신년절과 속죄일과 안식년과 희년이 있고, 둘째는 사건에 따른 절기로서 유월절과 무교절과 수전절과 부림절이 있고, 셋째는 농경역법(農耕曆法)에 따른 절기로서 초실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이 있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은 산술역법에 따른 절기에 속합니다. 안식년에 대한 규례는 출애굽기23:10-11과 레위기25:1-7과 신명기15:1-15에 언급된 내용입니다. 안식년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키지 않습니다 (골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년이 가지는 목적과 영적인 교훈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합니다.
‘안식년’(安息年)은 ‘편안히 쉬는 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면제년(免除年)이라고도 합니다 (신31:10). 안식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해로부터 7년째 되는 해입니다. 안식년은 하나님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어 영적 안식을 주실 것이며 종말에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주실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주신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은 느끼게 하기 위해서 2가지 실천적인 규례를 주었습니다. 하나는 농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해 동안 땅도 쉬게 하고 땅 주인도 쉬고 종들도 쉬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안식년에는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면제해주고 독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안식년에는 그 해까지 진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주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안식년 한 해 동안에는 빚 독촉을 하지 말라는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안식년에는 빚진 사람을 빚에 대한 고통에서 자유하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1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3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4-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해로부터 매 7년 끝(6년 가을 이후)에는 면제하라고 했습니다. 채주는 꾸어준 빚을 면제하고 독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언약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는 면제하지 않고 독촉할 수 있지만 형제와 이웃에게는 면제하고 독촉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 가난한 자가 없게 해 주고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나라가 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1-6절). 안식년에 채무를 면제해 주라는 말씀은 안식년에는 그 때까지 진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주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안식년에는 빚 갚을 의무를 면제하여 빚 독촉을 하지 말라는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이든 분명한 것은 공동체 일원 가운데 빚을 진 사람이 있으면 안식년에는 고통에서 자유하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돈이든 물건이든 식량을 꾼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거나 생각지 않는 어려운 상황을 당한 사람일 것입니다. 더욱이 안식년에는 농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빚을 갚을 능력이 더욱 없습니다. 그런데 안식년에 빚을 독촉하게 되면 하나님이 안식년을 주신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더욱 고통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년에는 빚에 대한 압박에서 해방시켜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동체에서 가난한 자들의 고통이 줄어들어 하나님이 주실 안식에 대해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공동체를 부요하게 해 주고 번영하게 해 주어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손을 움켜쥐지 말고 손을 펴서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했습니다.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고 주라고 했습니다. 땅에는 항상 가난한 자들이 있으므로 형제 중에 곤란과 궁핍 가운데 있는 자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손을 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마음에 악한 생각을 가지고 면제년이 가까웠다 생각하여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 그가 하나님께 호소할 것이고 그러면 죄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7-11절). 가난하여 생계가 어려운 불쌍한 이웃에 대해 도와줄 마음을 굳게 닫지 말고 그들이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욕망을 따라 원하는(want) 것을 다 주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나 회복을 위해 필요에 따라 원하는(need) 것을 다 충분하게 주라는 것입니다. 만일 면제년이 되면 꾸어준 것을 아주 돌려받지 못하거나 1년 동안 지체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빌려 주지 않거나 혹은 빌리려는 이웃이 그런 의도를 가진채 빌려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으로 여겨서 빌려주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공동체 구조에 대한 불신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생계 문제로 극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노블레스 오빌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귀족은 책임이 있다’는 뜻의 프랑스어로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거 유럽에서 영주들이 농부들이나 귀족들이 노동자들을 부려먹기만 했더니 자기들도 망하게 된데 대한 인식에서 나온 이론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땡볕’이라는 영화가 있었는 모양입니다. 일제시대에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상황을 영화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징용에 끌려가고 여자들만 남아 소작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주는 땅을 논밭을 빌려주고는 소작료를 내게 했지만 흉년이 들어 소작료를 내기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지주는 아자들에게 소작료를 강요했고 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몹쓸 짓을 했습니다. 독립된 후 점점 민주화가 되어 제도가 바뀌기는 했지만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는 성장 중심의 정책을 쓰든 분배 중심의 정책을 쓰든 결국은 부요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강제로 부요한 사람들의 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결국 부요한 사람들이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부작용이 상쇄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생각하면서 생계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전답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갖다 놓았고 사도들은 그것들을 극빈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행2:44-45).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고아와 과부같은 극빈자들을 명부에 올려놓고 주기적으로 도왔습니다 (행6:1, 딤전5:3). 오늘날 교회적으로도 구제 사역을 해야 하며 성도 개인적으로도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야고보서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했고, 요한일서3:17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어려운 당한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한 자유와 평안과 안식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심리적 빚도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자기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용서’(容恕)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에 대해 변상을 요구하거나 정죄하거나 처벌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심리적으로 보면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 지불해야 할 의무를 사면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 가진 심리적 부담감과 책임감을 면해주므로 자유를 얻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용서를 해야 자신이 상처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계속 발전되는 부정적인 요인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용서를 해야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도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이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잘 수 있어도 때린 사람은 발 뻗고 잘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계속 용서해 주지 않으면 평생 마음에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용서를 해 주어야 마음의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많습니다. 그 상처를 준 사람이 가족이든 교회 목회자나 성도이든 우리도 고통 가운데 있지만 그들도 고통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뉘우쳐도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용서를 빌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서 그 부담을 덜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생각하면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가 살면서 잘못해도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마태복음18:23-35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이 결산하기 위해 빚진 관리들을 불러 빚을 갚도록 했습니다. 10,000달란트(7조원) 빚진 자가 용서를 빌기에 탕감해 주었습니다. 탕감 받은 관리가 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1천만원)을 빚진 동료를 만나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가 용서를 빌었지만 용서하지 않고 고발하여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관리들이 딱하게 생각하여 임금에게 알렸습니다. 임금이 그를 불러 악하다고 책망하고 10,000달란트를 갚으라고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18:35에 보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릴 용서해 주신 것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할 비율은 70만분의1입니다. 죄로 죽어 지옥갈 죄를 용서하여 천국가게 해 준 것에 비하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 큰 은혜를 받은 자는 다른 사람을 마땅히 용서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안식년에 빚진 자를 면제 해 주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10절에 보면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빚진 자를 면제해 주면 하나님이 더 많은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잘못한 자를 용서해 줄 때 하나님도 우릴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6:14-15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라고 했습니다 (18:35, 막11:25, 눅6:37).
2. 히브리 종 해방 규례 (12-18절)
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16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7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
18 그가 여섯 해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종을 해방시켜 주는 제도는 출애굽기21;1-6에도 나와 있습니다. 동족 종을 데리고 있는 경우 7년째 해에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하라고 했습니다 (12절). ‘일곱째 해’는 안식년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종이 된 때로부터 6년이 지난 7년째를 말합니다 (18절, 출21:2). 히브리인들이 종이 되는 경우는 가난과 빚으로 스스로 종이 되는 경우도 있고 (레25:47), 가난과 빚으로 부모에 의해 팔린 경우도 있고 (느5:5), 범죄로 인해 종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습니다 (출21:1-3). 동족 히브리인 가운데 어떤 연유이든 종으로 팔려온 사람이 있으면 6년 후 7년째에는 자유롭게 놓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을 놓아줄 때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하나님이 복 주신대로 그에게 후히 주라고 했습니다 (13-14절). 종을 놓아 보낼 때 가축과 곡식과 과실 등 가진 소유를 여유있게 충분히 주라는 것입니다. 종은 가난이나 빚으로 팔린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이 주인에게 놓임을 받는다 하더라도 자립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생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종으로 전락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으로 일한 대가는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품꾼 한 사람의 1년 임금이 약 10세겔이었기 때문에 종 한 사람이 6년 동안 일한 품삯은 60세겔에 해당하는 일을 해준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종 한 사람의 값이 30세겔이었으므로 그 값을 제외 한다 하도라도 30세겔 이상의 노동력을 제공한 것입니다. 18절에 “그가 여섯 해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실은 종은 낮에만 일한 것이 아니라 밤낮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품꾼들보다 품삯을 배나 더 받을 만큼 품꾼들 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종이 만일 7년째에도 가지 않고 계속 남아서 동거하길 원하면 송곳을 다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영구히 종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여종에게도 해당되었습니다 (16-17절). 종이 자유함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아 있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잘 해 주어서 계속 주인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 종살이를 하는 동안 주인의 배려로 결혼을 했다면 자신을 떠나도 처자는 주인의 소유로서 계속 주인의 종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처자와 함께 살기를 원하여 계속 주인의 종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종이 스스로 종으로 남아 있기를 원할 경우 그 종을 재판장에게 데려가 법적으로 확인한 다음 그의 귀를 집 대문이나 대문기둥에 대고 송곳으로 뚫으라고 했습니다 (출21:5-6). 당시에는 귀를 예속과 복종의 기관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귀에 구멍을 뚫는 것은 주인과 주인의 집에 죽을 때까지 예속된다는 상징을 가진 의식이었습니다. 그 규례는 여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습니다. 7년째에 자유를 준 것도 종의 인권을 존중한 것이지만 7년째에도 남기를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허락해주는 것도 종에 대한 인권을 존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남기를 원하는 종에게 강제로 떠나게 하는 것은 그 종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년째에 떠나든지 남든지 종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하나님이 거기에서 속량해 주신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15절). 종들에게 7년째에 자유를 주고 그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재물을 충분히 주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또한 7년째에도 자유를 포기하고 주인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를 받아주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종이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배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의 근거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으로 있었으나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셨고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많은 보화와 의복과 가축과 함께 나오게 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득이하게 종이 된 자에 대해서 그같은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18절). 우리도 악령들과 죄와 죽음과 내세형벌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 받은 것을 생각하여 우리도 우리에게 예속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고 존중해 주어야 하고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3. 초태생 규례 (19-23절)
19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20 너와 네 가족은 매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21 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으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
22 네 성중에서 먹되 부정한 자나 정한 자가 다 같이 먹기를 노루와 사슴을 먹음 같이 할 것이요
23 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지니라
소와 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부리거나 털을 깎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매년 온 가족이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19-20절). 사람이든 가축이든 곡식이든 처음 것을 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는데 (출13:2,12, 22:29-30), 여기에서는 소나 양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소는 일을 부리고 양은 털을 깎아 소득을 얻습니다. 그런데 소나 양의 처음 난 수컷은 세속적 목적에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온 가족과 함께 소나 양의 처음 난 수컷을 하나님이 지정한 중앙 성소(예루살렘 성전)에서 화목제로 드리고 제사장 몫을 제외한 나머지로 성소 뜰에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레7:15-17, 30-34). 그러나 소나 양이 흠이 있어 절거나 눈이 멀거나 한 것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가축은 정한 자나 부정한 자나 다같이 노루와 사슴 같은 일반 짐승을 잡아먹는 것처럼 잡아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21-22절). 소나 양 가운데 초태생은 제물용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리되 흠이 있는 것은 제물용으로 삼을 수 없으니 식용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려 하실 때 바로왕이 굴복하지 않자 10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그 중에 10번째 재앙이 장자 재앙이었습니다. 사람이든 가축이든 사람의 장자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가 죽음에서 살아남는 방편으로 재앙이 내려올 밤이 되기 전에 어린 양 1년 된 수컷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해 장자를 죽이는 천사가 그 집을 그냥 넘어가므로 이스라엘의 장자가 죽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축의 처음 난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이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에 대해 물으면 출애굽 때의 죽을 가운데서 살린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출13:14-16). 처음난 초태생은 대표성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인다는 의미로 그 대표인 장자만 죽이는 재앙을 내린 것이고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은 살린다는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죽을 가운데서 살린 것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택한 백성을 대표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시므로 모든 택한 백성이 살게 될 것을 예표합니다. 택한 백성이 아담의 범죄로 죽어 형벌을 받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대속적 죽음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롬5:12,15). 소난 양의 처음 난 것을 제물로 드리되 흠있는 것은 드리지 말라고 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제물로서 온전한 대속적 죽음을 죽으실 것을 예표합니다 (고후5:21).
소나 양의 처음 난 것은 제물용으로 드리되 흠 있는 것은 식용으로 사용하게 했는데 식용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그 피를 먹지 말고 물 샅이 땅에 쏟으라고 했습니다 (23절). 피를 먹지 말고 쏟으라는 명령은 12:16,23-24에도 언급된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피에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피와 생명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피를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창9:4, 레17:11, 신12:23). 피를 먹지 못하게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자들의 행위를 따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이방 우상숭배자들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피를 마시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런 사악한 행위를 본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 생명을 존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는 피에 생명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신 생명을 경시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 제사 원리에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 값은 사망(죽음)이었습니다 (롬6:23). 하나님은 죄를 사해주기 위해 자기를 대신할 제물(짐승)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제물의 피를 흘려 제단에 뿌리라고 했습니다. 생명이 피에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피를 흘리는 것은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죽게 된 것은 죄 값을 지불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죄 값을 지불한다는 것은 죄가 속함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짐승을 대신 피 흘려 죽게 함으로 범죄한 자가 죽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히9:22).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희생 제물이 피 흘려 죽게 되므로 범죄한 백성들을 죄가 속해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택한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죽으므로 그를 믿는 자들이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골2:17, 벧전2:24, 1:18-19, 엡1:7).
피 문제에 대해 사도행전15:28-29에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이방교회의 놀라운 선교효과를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割禮)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교리적 문제와 선교적 문제를 야기하는 주장이었습니다. 바울,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변론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교회로 보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공회로 모였는데 거기에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부가적으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해야 할 것을 결정합니다. 그렇게 결정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유대인 출신들은 할례를 받았고 또 할례를 받아야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이방인들은 할례가 외과적 수술인데다 당시 사회에서 불경하게 보이는 모습 때문에 할례 받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의 주장을 들은 예루살렘교회 사도들과 장로들은 할례를 요구하므로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힘들게 하는 멍에를 벗겨 주기 위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공회에서 예루살렘교회 사도인 야고보가 사도행전15:19-20에 보면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결정하고 말 경우 유대교회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할례 멍에를 벗겼으니 이방교회에 좋은 결정이 내려졌지만 유대교회는 전통적으로 할례를 받아왔기 때문에 불평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이 좋게 생각할만한 규례를 정했습니다. 그것이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대체로 유대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철저히 지키는 편이었고 이방교회에서는 그렇치 못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가적인 결정은 할례 문제를 이방교회에 양보하므로 섭섭할 수 있는 유대교회의 마음을 안정시킨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피를 먹는 일에 대해서 초대교회 때는 다소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산 동물의 피를 마시는 것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약용(藥用)으로 사용하거나 음식 안에 공재(共在)된 경우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피 자체로 만든 음식의 경우가 있습니다 (선지국, 순대). 그런 경우는 위의 예루살렘 공회에서 피 문제를 부가적으로 결정하게 된 배경을 생각하면서 각자 양심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結言>
우리는 초태생 규례와 피에 대한 규례를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하여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표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그와 그의 대속을 믿으므로 죄 사함과 칭의와 중생과 양자와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피 흘려 생명을 내어 주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벧전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