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신명기24:1-22
<題目> 공동체적 사회생활 지침
<序言>
본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지켜야할 규범과 규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이혼에 관한 규례(1-4절), 사회 질서를 위한 규례(5-9절), 이웃 사랑의 규례(10-22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이혼에 관한 규례 (1-4절)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않으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1절). ‘수치 되는 일’은 이혼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합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요구할 만한 객관적이고도 충분한 사유를 가리키는 말임을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정확히 어떤 사유들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기 쉽지 않습니다. 유대 랍비 힐렐(Hillel)은 남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모든 이유로 이해했습니다. 여기에는 신체의 결함이나 혐오스러움, 심지어 식사 준비를 잘 못하는 것까지 포함한다고 보았습니다. 유대 랍비 삼마이(Shammai)는 간음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부녀의 간음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으므로 (22:22) 이를 이혼 조건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5:32, 19:3에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외에 이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므로 이혼의 조건을 간음으로 보았는데 이를 두고 본문의 ‘수치 되는 일’도 간음으로 보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본 절의 ‘수치 되는 일’을 간음으로 해석한 말이기 보다는 예수님이 자신이 간음을 이혼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난제에 속한 문제입니다.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어 그를 기뻐하지 않으면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쥐어 주고 그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혼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마태복음19:7-8에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자기 욕망이나 분노 때문에 너무 쉽게 아내를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가정 공동체들이 건강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버림을 당한 여자들은 재혼이 어려웠고 그로 인해 버림당한 여자들의 삶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정당한 이혼 사유가 있을 때는 이혼증서 써주고 많은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선언하게 한 것은 남편이 아내를 함부로 버리는 것을 막고 아내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곧 이 규례는 이혼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아닌 이미 퍼져 있는 문란한 풍습을 규제하여 인권유린을 막으려는 제도인 것입니다.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 둘째 남편이 죽은 경우에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니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4절). 합법적으로 이혼한 여자는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혼한 남자가 죽거나 재혼한 남자로부터 합법적으로 이혼을 당한 경우 다시 전남편과 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이혼한 아내가 다른 남자가 재혼한 경우 그 남편이 죽었든지 그 남편과 이혼을 했든지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처음 이혼을 할 때 공개적으로 정당한 사유를 밝히고 합법적인 이혼을 선언했는데, 그를 다시 맞아들인다면 처음 행위가 거짓이 되고 또한 이혼에 관한 규례를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문란한 풍습과 인권유린을 막기 위해 만든 이혼 규례가 무력화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풍조를 따라 쉽게 이혼을 합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배우자가 음행을 한 경우 (마5:32, 19:9), 믿지 않는 배우자가 요구할 경우 (고전7:15), 현실적으로 함께 살 수 없는 경우 (렘29:4-6) 등은 이혼 조건이 됩니다. 그 외에도 지속적인 정신적 학대나 육체적 폭력 등 정상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없는 경우들도 이혼 조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이나 혹은 분노 때문에 이혼을 할 목적으로 그런 조건들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나쁜 목적으로 이혼을 하기 위해 이혼증서를 써 주기만 하면 된다는 규례를 악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세 때 그런 규례를 준 것은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에 나쁜 풍습을 규제하려는 것이지 하나님이 결코 이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5:31-32, 19:3-9). 마태복음19:4-6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고 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비유했습니다. 호세아1:2에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해 음행했다고 한 것입니다 (약4:4).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남편과 아내의 모범을 제시했습니다. 에베소서5:31-32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성도)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교회(성도)는 예수님께 온전히 복종해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서로 하나된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람들처럼 교회(성도)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신앙을 더욱 굳게 해야 합니다.
2. 사회 질서를 위한 규례 (5-9절)
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6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8 너는 나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지켜 행하되 너희는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하라
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아내를 새롭게 맞이한 자가 있으면 그를 군대로 보내지 말고 아무 직무도 맡기지 말고 1년 동안 집에 한가하게 있으면서 아내를 즐겁게 하라고 했습니다 (5절). 신혼생활 중에 있는 남자에게는 병역 의무나 공적 의무를 면제해 주라는 것입니다 (20:7). 결혼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라고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이므로 (창2:24, 마19:5) 국가도 가정의 신성함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년’은 대를 이를 첫 자녀를 낳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간입니다. ‘한가하게’에 해당하는 ‘나피’(נקי)는 ‘면제된’ ‘자유로운’의 뜻입니다. 결혼을 한 후 남편이 징집되거나 공무를 맡으면 남편도 아내 걱정 때문에 전쟁이나 업무에 충실할 수 없고 아내도 남편 걱정 때문에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1년 정도는 집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나 다른 사람을 배려해주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잡음이라고 했습니다 (6절). 당시에는 곡식을 맷돌에 갈아 곡식을 가루로 만든 다음에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맷돌은 가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맷돌을 전당잡을 경우 그 집은 당장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없습니다. 맷돌의 위짝만 전당잡는다 해도 아래짝만으로는 맷돌질을 할 수 없어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맷돌은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전당잡는 것은 기본생활권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사실 정당한 권리라 해도 다른 사람의 생존에 관련된 도구들은 차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존에 필요한 도구까지 전당잡는 것은 긍휼이 없는 잔인한 처사로서 하나님 백성답지 않는 모습입니다. 어느 때나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모범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는 죽여서 악을 제하라고 했습니다 (7절). ‘유인하여’의 기본형 ‘까나브’(גנב)는 ‘속이다’의 뜻입니다. 동족을 속여서 유괴한 자는 죽이라는 것입니다 (출21:16).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이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리를 가진 자들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속여 유괴하는 것은 인격적 권리와 자유를 빼앗는 행위로서 준 살인 행위에 속한 악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는 사형을 시켜서 그 같은 죄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나 자기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나병에 대해 삼가라고 했습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가르치는 대로 힘써 지켜 행하되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한대로 지켜 행하라고 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8-9절). ‘나병’은 문둥병이라고도 하는데 나균에 의해 피부가 탈색되고 눈썹이 빠지고 코나 귀가 결절되기도 하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기도 합니다. 이 질병은 당시 만성 전염병으로서 사망에 이르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모세가 하나님께 받아 제사장들에게 나병에 대한 진단과 처리 등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레13-14장).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제 2년 3-4월 경 하세롯에서 미리암이 모세를 원망하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나이며 여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둥병에 걸렸을 때 7일 동안 진(陣) 밖에 가두었습니다 (민12:14-15). 모세가 이 사건을 언급한 것은 지도자를 원망한 자는 문둥병에 걸린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예외 없이 규례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으로 의심되면 제사장에게 보이고 제사장이 규례에 의해 문둥병으로 판정하면 그가 누구이든 간에 공동체에서 격리키시고 다 나은 다음에 제사장이 나았다는 판정을 하면 그 때 공동체로 들어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격히 하지 않으면 그의 가족에게 전염되고 공동체 전체에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딤후2:17). 우리는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유지와 행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3. 이웃 사랑의 규례 (10-22절)
10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11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12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13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16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 줄 때에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밖에서 서 있고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져 나와 주게 했습니다 (10-11절).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 줄 때는 이자를 받으면 안 되었지만 (23:19), 담보물을 전당잡을 수는 있었습니다. 전당잡을 수 있다고 해서 물건을 함부로 전당잡을 수 없었습니다. 맷돌이나 잠잘 때 덮고 자는 외투나 매일 얻은 품삯 등 채무자의 생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은 전당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 외의 것은 전당을 잡더라도 채권자가 직접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취하지 말고 채무자가 자발적으로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것은 비록 가난하여 남에게 빚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도 함부로 인격이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채무자가 가난한 자이면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질 때에 그 전당물을 그에게 돌려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채무자가 그 옷을 입고 자며 채권자를 축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공의로움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2-13절). 만일 가난한 자가 담보물로 겉옷을 주었다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있어서 겉옷이 하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은 채무자가 밤에 급강하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이불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옷뿐 아니라 맷돌이나 품삯도 마찬가지입니다 (6,15절).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이 이스라엘 동족이든 성에 거하는 객이든 그를 학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품삯은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난하여 그 품삯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죄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4-15절). 가난한 자가 일용 근로 대가로 얻는 품삯은 가난한 자에게 있어서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일용직 근로자에게 품삯 주는 것을 지체한다면 그가 마음이 많이 애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품삯을 아예 주지 않는다면 억울하여 하나님께 호소할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일용직 근로자의 품삯은 반드시 지불하되 지불을 해가 진 이후까지 미루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마20:8, 렘22:13). 야고보서5:4에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6절). 고대 이방국가에서는 중범죄자일 경우 당사자는 물론 그의 자녀와 가족과 친족까지 처형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 3대 멸족이나 연좌제 시행 등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에 은 비록 윤리적으로 모든 공동체 일원에게 있다 할 수 있을지라도 형벌에 있어서는 그 책임을 범죄자 개인에게만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의 잘못 때문에 자녀가 죽이고 자녀의 잘못 때문에 부모를 죽인다면 그들은 억울하여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형벌은 범죄 당사자에게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31:29-30에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겔18:2-4,19,20). 열왕시대에 아마샤는 자기 아버지 요아스를 암살한 범인을 처형할 때 그 자녀들은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습니다 (왕하14:5-6). 우리는 잘못의 직접적 당사자 외에 그와 관련된 사람을 얼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18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이 단락은 이웃 중에서도 특히 객이나 과부나 고아에 대한 규례입니다. 당시 객(나그네)나 과부나 고아는 스스로 자립하기 어려운 극빈층에 속한 자들로서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계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규례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동체에 속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소극적으로 괴롭히지 말아야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배려해야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요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 되었던 상태에서 속량하신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18,22절).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나그네 생활을 했으며 후반기에는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10가지 재앙으로 바로왕을 굴복시키고 애굽에서 건져냈습니다. 그 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당연히 소외된 약한 자들에 대해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객이나 과부나 고아들을 괴롭히지 말고 도리어 배려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7절). 객이나 과부나 고아는 사회적 지위가 없고 경제적으로 열악한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쉽게 송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송사에서 사람들은 그들에 필요한 진술을 해주지 않으며 재판관은 그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17절). 그들은 여벌옷이 없는 자들이고 겉옷은 밤에 이불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엇을 꾼다면 먹을 것이 없어서일 텐데 그것을 꾸어준 대가로 옷을 전당잡는다면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 밭에서 곡식을 벨 때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으면 다시 가서 그것을 가져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19절). 레위기23:22에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했습니다 (19:9). 밭에서 곡식을 벨 때 극빈자들을 위해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밭에서 벤 곡식은 단으로 묶어서 타작마당으로 옮겨서 타작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잊어버리고 온 곡식 단은 가져오지 말고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넷째,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남겨 두라고 했습니다 (20절). 감람나무 열매는 푸른 색 핵과류로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매실처럼 생겼는데 크기가 훨씬 작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소금에 절여 식용으로 사용하는데 기름으로 짜서 식용과 등화용과 약제용으로도 사용합니다. 그 감람나무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나무를 흔들거나 장대로 가지를 쳐서 열매를 떨게 되는데 그렇게 수확을 한 다음 또 다시 열매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남겨 두라고 했습니다 (21절). 레위기19:10에는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했습니다. 포도원에 포도가 다 익어 수확하게 될 때 다 따지 말고 따다가 떨어진 것은 줍지 말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포도를 집중적으로 수확을 한 다음에 익은 것은 다시 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이웃을 배려해야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극빈자들을 배려해야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먹을 것이 없어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는 극빈자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살 수 있도록 먹을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곡식과 감람열매와 포도는 당시 가장 기본적으로 재배하고 먹는 작물들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식물을 제공하여 최소한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제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들을 직접 가져다주면 더 좋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밭에 그냥 남겨두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직접 갖다 주면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을 아는 일원들이 악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직접 갖다 주면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고 가져다주는 사람에게 얽매이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에도 분란이 일어나고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심리적으로 큰 고통을 떠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밭에 그냥 내버려 두게 한 규례는 극빈자를 실제적으로 도와야 할 것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심리적인 배려를 해야 할 것까지 요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정신인 ‘섬김’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지 알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結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을 할 때에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사회적 규례와 이웃에 대한 규례를 제시했습니다. 특히 이웃에 대한 규례에서 극빈자에 대한 규례는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회적 약자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심지어는 심리적인 부분까지 배려하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규례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도 그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바 하나님의 심정으로 약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칭의) 그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성화) 우리에게 선한 행위가 필요합니다. 야고보서2:17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3:17-18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