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신명기25:1-19

<題目> 공정성 유지를 위한 규례

<講解> 차용철 목사

 

<序言>

   19~26장은 사회생활에 관한 규례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이미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언급된 내용의 반복이나 확대 발전이었는데 본 장에 나오는 규례들은 대부분 처음으로 언급되는 내용이거나 오래 전부터 통용되어 오던 관습을 율법화한 것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주된 내용은 공동체 생활에서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태형과 보수에 관한 규례(1-4), 계대 혼인에 대한 규례(5-10), 천박한 여인에 관한 규례(11-2) 부정한 도량형기에 관한 규례(13-16), 아말렉 족속 진멸 명령(17-19)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태형과 보수에 관한 규례 (1-4)

 

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하라고 했습니다 (1). 당시에도 재판상의 부정이 많이 저질러졌습니다. 심지어 재판관이 타락하여 돈에 매수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의인에 대해서는 의롭다고 판결하고 악인에 대해서는 악하다고 판결하라는 것입니다.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그를 엎드리게 하고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40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것을 넘겨 지나치게 때리면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한다고 했습니다 (2-3). 범죄자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제 이외에는 태형을 선고할 수 있었습니다 (22:13-19). 그런데 태형을 선고할 경우 죄에 따라 그 수를 선고하고 그 집행은 재판정에서 재판장이 보는 앞에서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선고와 집행의 공정성을 강조한 조치입니다. 그리고 태형을 선고할 경우 40대 이상은 선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태형(笞形)은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넓적한 몽둥이로 엉덩이 볼기짝을 치는 형태였는데, 이스라엘에서는 몽둥이나 가죽채찍으로 어깨나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 그 태형을 40대 이상 선고하지 말라고 한 것은 그 이상 맞게 되면 불구가 되기도 하고 죽기도 하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범죄자라 할지라도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 죄에 대해서는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지은 죄 이상의 형벌을 선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범죄자라할지라도 가혹한 형벌집행으로 평생 원한을 갖고 살게 하면 안 된다는 의미로 지은 죄 이상의 과도한 형벌을 선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한다고 했습니다. ‘경히 여기는 것에 해당하는 기본형 카라’(קלה)경멸하다’ ‘모독하다’ ‘모욕하다’ ‘가볍게 여기다등의 뜻입니다. 이 규례는 범죄자라할지라도 인권만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후대에 유대인들은 태형을 집행할 때 이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40에 하나 감한 39대만 때렸다고 합니다 (Ridderbos). 혹시 계수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40대를 초과할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사용한 채찍이 3가닥으로 된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Maimonides). 유대인들은 3가닥으로 된 채찍을 사용했기 때문에 14번을 칠 경우 42대를 때린 경우가 되기 때문에 13번만 쳐서 39대를 때렸다고 합니다. 후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던 중 5번이나 맞은 매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고후11:24).

 

   그리고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4). 당시 곡식을 타작하여 곡식을 떨 때는 대개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타작마당에 곡식 단을 펴 놓고 평평한 널빤지 아래에 구멍을 뚫어 그곳에 단단한 돌이나 쇠붙이를 박은 타작기를 곡식 위에 놓고 당나귀나 소로 끌게 하는 방법입니다. 또 하나는 타작마당에 곡식 단을 펴놓고 막대기나 도리깨로 두들기는 방법입니다. 만일 타작을 할 때 소를 이용할 경우 입에 망을 씌우지 않으면 소가 곡식을 먹으려 하면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골에서 소로 농사일을 할 때에는 언제나 입에 망을 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격언처럼 말씀한 것으로서 타작을 할 때 일을 위해서 소의 입에 망을 씌울 수밖에 없을지라도 먹을 것을 충분히 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은 시키면서도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그 짐승의 권리를 박탈한 학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부리는 짐승이라 할지라도 학대하지 말고 수고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짐승뿐 아니라 일을 시키는 종이나 품꾼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일을 시키고 급여를 충분히 지불하지 않거나 급여시기를 미루거나 급여를 떼어 먹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서5:4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전도 사역자들에 대해서도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문 구절을 인용하여 제자들을 복음전도로 보내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로부터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0:9-10). 사도 바울도 본문 구절을 인용하여 교회의 사역자들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고전9:8-15, 딤전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할 때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자비량한 것은 복음전도의 효과를 위함이었습니다.

 

 

        2. 계대 혼인에 대한 규례 (5-10)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한 가정에 큰 아들이 결혼을 했으나 아들 없이 죽으면 그의 동생인 둘째 아들이 형의 아내인 형수를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아주라고 했습니다. 그 낳아준 아들 이름을 죽은 형의 이름을 잇게 하여 이스라엘에서 그 계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5-6). 구약시대에는 고엘제도가 있었습니다. ‘고엘’(גאל)은 히브리어 음역으로서 기업 무를 자, 계대를 이어줄 자, 복수해줄 자 등을 의미합니다. 고엘제도에는 기업(基業)무르는법(), 계대혼인법(繼代婚姻法),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 있습니다 (25:25-26, 25:5-6, 24:17-22, 21:23-25, 35:12,19,21, 19:21). 본 단락의 내용은 계대혼인법에 관한 규례입니다. 계대혼인 풍습은 이미 관습으로 시행되어온 것인데 모세 때 율법으로 성문화시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한 후에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의 동생이 그의 아내(형수)를 아내로 맞아 첫 번째 낳은 아들에게 그의 이름을 붙이게 하여 그의 계대를 잇게 한 것입니다. 죽은 형제의 대를 이를 후사를 낳아 주는 이유는 세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형제의 이름을 가속과 지파 내에서 보존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소유지가 다른 가속이나 지파로 이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셋째는 과부의 생계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기 위함입니다. 신명기에서 강조하려는 부분은 세 번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는 홀로 남겨진 과부는 홀로 생계를 이루어가기 힘들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그들이 생계를 위해 고통당하거나 타락하거나 이방 남자와 결혼하는 일 등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약적으로 보면 계대와 땅에 관한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사회적으로 보면 과부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규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죽은 사람의 동생이 죽은 사람의 아내인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그 죽은 사람의 아내가 성문에 있는 장로들에게 나아가 남편의 동생이 계대를 이어주기를 싫어하여 그 의무를 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 죽은 자의 동생을 불러 여부를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계대 이어줄 의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죽은 자의 아내가 그의 신발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라고 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르라고 했습니다 (7-10). ‘성문 장로들은 재판관들을 말합니다. 당시 재판정은 마을 성문 입구에서 열리는 일반법정이 있었고 중앙 성소에서 열리는 고등법정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성문 장로들은 그 일반법정 재판관들을 말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아내는 죽은 자의 동생이 계대를 이을 의무를 거절할 경우 공식적인 재판정에 고발을 하라는 것입니다. 고발이 접수되면 재판관들은 피고를 심문하고 피고의 거절 의도가 분명하면 징벌을 가하라고 했습니다. 그 징벌은 죽은 자의 아내가 그 피고의 신발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땅에 대한 원소유자는 그 땅을 직접 발로 밟으므로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자기의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 때는 자기 땅에 대한 소유권을 양도한다는 의미로 그 땅을 밟던 신발을 매수자에게 주었습니다 (Keil, Delitzsch). 그래서 대를 이를 의무를 거절한 자의 신발을 벗기는 것은 더 이상 형의 대를 이어줄 권리나 형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행위로서 (4:7-8) 모욕을 주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대해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고 하게 한 것은 대를 이어줄 의무를 포기한 집, 땅의 소유권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집이라는 별칭입니다. 고인이 된 형제와 그의 가족에 대한 의무를 거부하므로 가문에 수치를 준 집이라는 의미로서 모욕을 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런 규례는 언약적으로 계대를 잇고 땅의 소유가 다른 가문으로 가는 것을 막는 의미도 있지만, 과부된 여인을 사회적으로 보호하게 하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시편68:5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했습니다 (18:1-8).

 

 

        3. 천박한 여인에 관한 규례 (11-2)

 

11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그의 남편을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12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지니라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 한 사람의 아내가 수세에 몰린 남편을 구하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11-12). 남자의 음낭을 힘껏 쥐어 당기는 여자에게 이처럼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인격적인 모욕이기 때문입니다. 음낭은 신체의 은밀한 부분으로서 그것을 세게 붙잡는 것은 인격적인 모독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후손을 낳는데 치명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음낭은 생식기로서 그것을 세게 붙잡는 것은 언약적 계대를 잇는데 치명상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생명에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음낭은 급소에 해당하기 때문에 세게 붙잡는 것은 생명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4, 부정한 도량형기에 관한 규례 (13-16)

 

13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16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고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온전하고 공정한 추와 되를 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두시는 땅에서 날이 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행하는 악한 자는 하나님께 가증하다고 했습니다 (13-16). ‘저울추는 무게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기구이고 는 양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기구입니다. 그것들을 사용할 때 온전하고 공정한 것으로 하라는 것은 그 같은 도량형 기구들을 정상적인 것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상거래 행위에서 도량형 기구를 속이지 말고 진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속일 도량형 기구를 주머니나 집에 두지 말라는 것은 아예 사용할 기회 자체를 없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상거래 행위뿐 아니라 모든 삶에서 진실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5. 아말렉 족속 진멸 명령 (17-19)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행한 일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길에서 피곤할 때 그들이 뒤에서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17-18). ‘아말렉’(Amalek)은 에서의 손자 아말렉의 후손들입니다 (36:12). 팔레스타인 남쪽 광야에서 시나이 반도를 다니며 약탈을 일삼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뒤 12개월쯤 되었을 때 신 광야를 떠나 사내(호렙)산 근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곳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아시스였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홍해를 건널 때 사용했던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었습니다. 그 직후 아말렉 족속이 전면에서 기습적으로 침공해왔습니다. 3면이 산으로 막혀 도망할 수도 없었으니 싸울 수밖에 없었고 싸우되 그들을 전멸하기 전에는 그칠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여호수아를 비롯한 장정들이 그들과 종일 싸워 물리쳤습니다 (17:8-16).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라는 표현은 광야 행렬에서 지쳐서 뒤쳐진 자들을 습격하여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약탈한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아마도 이는 르비딤에서 지친 이스라엘 백성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살육과 약탈을 하려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할 때 괴롭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방 모든 적군들로부터 안식을 주실 때에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고 했습니다.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19).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나라가 세워지고 군대가 정비되면 잊지 말고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는 것입니다.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족속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말렉 족속을 심판하여 진멸하라는 의미입니다. 아말렉 족속 진멸을 가나안 땅 정복 후로 미룬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힘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선결과제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은 광야에 거했기 때문에 가나안 정복 후에 진멸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7족속을 물리쳐 정복을 해야 할 때였습니다. 여호수아가 다스렸던 가나안정복시대와 사사들이 다스렸던 사사시대 이후 왕이 다스리는 왕정시대가 다가왔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자 사울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신장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에게 명령하여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게 했습니다. 사무엘상15:2-3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군사 21만 명을 소집하여 아말렉 성을 점령하고 아말렉 족속을 진멸했습니다. 물론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은 사로잡고 좋은 소와 양은 살려온 실수를 했지만 말입니다 (삼상15:4-9). 그 후에도 아말렉 족속은 히스기야왕 때 시므온 자손에 의해 진멸당하기도 하고 (대상4:42). 포로기 이후에도 바사(페르시아)에서 모르드개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멸절당하기도 합니다 (3:1, 7:9-10, 8:11-13).

 

<結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목적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안정을 찾으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방해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에도 아말렉 같은 대적이 있습니다. 악령들(고후10:4, 6:12, 벧전5:8), 죄성(벧전2:11, 5:17, 7:15-25, 고전9:27)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날마다 싸워 물리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