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출애굽기25:1-40

<題目> 성막과 기구들 1


<序言>

  출애굽기의 전반부는 하나님이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신 내용이고 (1:1~15:21), 중반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험난한 광야를 거쳐 시내산에 이르게 하여 언약을 맺는 내용이고 (15:22~24:18), 후반부는 하나님이 성막의 제도와 건축에 대한 내용입니다 (25:1~40:33). 본 장은 성막에 대한 계시가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내용구조는 성막 건립을 위한 헌물(1-9절), 언약궤에 대한 양식과 재료(10-16절), 속죄소에 대한 양식과 재료(17-22절), 진설병상에 대한 양식과 재료(23-30절), 등잔대에 대한 양식과 재료(31-40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성막 건립을 위한 헌물 (1-9절)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5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건축할 예물들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드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성막을 건축하고 성막 기구를 제조하는 데에 필요한 예물들은 대부분 애굽에서 애굽인들에게 받아 가지고 나온 것들입니다 (3:21-22, 12:36). 그러므로 자신들에게 있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고 그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들인 줄 알고 드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형편을 따라 드릴 수 있게 했습니다. 예물 중에는 금과 은과 놋과 보석처럼 값비싼 것들도 있고 실과 털과 가죽과 기름 등 값싼 것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형편을 따라 자기들에게 있는 것을 드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셋째, 기쁜 마음으로 드리게 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막을 위해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기를 원합니다 (고후9:7).

 


       2. 언약궤에 대한 양식과 재료 (10-16절)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12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언약궤는 증거궤 혹은 법궤라고 하기도 합니다. 언약궤는 2.5×1.5×1.5규빗(1.2×1.2×0.7m)의 크기로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어 순금(정금)으로 입히게 했습니다. 위로 돌아가면서 테를 두르고 양편에 두 고리를 만들어 채(봉)을 꿰어 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 안에는 증거판(율법판)을 속에 넣어 두게 했습니다. 언약궤가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예수님의 본질을 알게 하는 표징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사람들 중 일부는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요7:27).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의 사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가 어떤 분인지, 누구인지 알기 위함입니다 (빌3:8-9).

 

  첫째,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었습니다 (10절). '조각목'은 싯딤나무(Shittim wood)인데 아카시아나무(acacia wood)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 나무는 시내산 아래에 있는 나무로서 가구를 만들만한 유일한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내구력이 강한 단단한 나무이지만 가구를 만들면 갈라지고 비틀어지는 성향이 있어서 좋은 목재는 아닙니다. 화목(火木)으로나 쓸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나무입니다 (신10:3).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연약한 인성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연약성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예언했습니다 (사53:2-3). 시편 기자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예언했습니다 (시118:22).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애굽에서 망명생활을 했으며 나사렛 한 촌에서 자랐습니다.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사셨으며 침 뱉음과 능욕을 당하고 가시관과 창과 못에 찔려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연약성을 체휼하기 위함입니다 (히4:15).

 

  둘째, 언약궤는 순금(정금)으로 입혔습니다 (11절).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짠 다음 순금으로 입혔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순금은 어디서 왔는지 그가 누구인지 그의 출처와 본질을 알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셨으나 본질은 하나님이십니다. 미가 선지자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그의 근본은 태초에 만고에니라"고 했습니다 (미5:2). 요한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요1:2-3). 바울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니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했고 (빌2: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했습니다 (골1:15-16). 예수님께서도 당시 유대인들과의 자기 증명에 관한 변론에서 자신을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던 자라고 선언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요8:51-58).

 

  ②복음 사역의 방법을 제시해 주는 표징입니다.

 

  언약궤는 그 재료(조각목과 순금)와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모세의 주 율법판과 만나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각목에 순금을 입힌 것은 그가 누구인지를 선포하는 표호입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육체로 오셨음을,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야 합니다. 오직 그에게 죄사하는 권세와 구원과 영생이 있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진행할 때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이었던 이 언약궤가 가장 중심에서 갔듯이, 우리의 생활 중심이 오직 하나님이 현존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전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보잘 것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출3:2-3, 고전1:27-2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생활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할 때 존귀해집니다. 진정한 존재의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첫째, 언약궤는 채(봉)으로 메고 가야 했습니다 (13-14절). 언약궤는 레위 자손 중 고핫 자손으로 하여금 어깨에 메고 가도록 했습니다 (민4:15). 수레에 싣거나 짐승으로 끌고 가게 하면 안됩니다. 힘들어도 사람이 메고 가야 합니다. 사무엘하6:6-7에 보면 언약궤를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아비나답 집에 20년 동안 있다가 다윗성으로 옮겨 오는 사건이 있습니다. 언약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 하여금 끌게 하고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 마당에 왔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흔들리는 언약궤를 붙잡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상15:13). 웃사가 언약궤를 붙잡으려는 것이 큰 잘못이지만 언약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 방법이 쉽고 사람들이 보기에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식없는 수레나 이성과 영혼이 없는 소에 의해 섬김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으로 복음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인격입니다. 바른 관계성입니다. 우리의 물질, 건강, 지식, 명예, 은사가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둘째, 채는 언약궤의 고리에서 빼지 않아야 했습니다 (15절). 채를 언약궤에서 빼지 말고 항상 꿰어 두게 한 것은 하나님이 언제 이동을 명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동하면 즉시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군사적으로 말하면 항재전장의 정신, 임전태세의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을 시사합니다. 영국의 싸스, 미국의 네이비 씰이나 그린베레나 델타포스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 사역하는 것,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은 영적 전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교의신학에서도 교회의 성격 중에 '전투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영적 전쟁의 승패는 다수에 있지 않습니다. 적은 무리라도 기드온 300명 용사와 같은 항재전장의 정신을 가진 정예군이 필요합니다 (삿7:4-6). 신명기20:5-6에는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행치 않는 자,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막지 못한 자, 여자와 결혼하고 그 여자를 취하지 못한 자, 두려워 하는 마음에 겁내는 자는 돌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후서2:4에서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대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는 전투 정신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5:8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약궤를 빼앗기고 성소가 불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사는 참된 목적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③예수님의 직분을 알게 하는 표징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언약궤를 만들고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실 증거판(율법판, 돌판)을 두라고 했습니다 (16절). 열왕기상8:9과 역대하5:10을 보면 언약궤 안에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증거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9:4에는 만나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모세의 두 돌 비석(율법판)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원래 세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언약궤를 빼앗겼을 때 (삼상4:17) 두가지 물건은 없어지고 두 돌판만 남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설득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 하나님은 언약궤를 스스로 지켰습니다. 언약궤가 이동되는 곳마다 재앙을 내려서 유다로 돌아오게 했고 유다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언약궤 뚜껑을 열어 보았다가 7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상5:1-8, 6:19). 그런 분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블레셋에서 두 종류나 잃어버렸다는 것은 오히려 이해하기 힘듭니다. 언약궤 안에는 처음부터 두 율법판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나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처음부터 언약궤 안에 두라고 하지 않고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출16:33-34, 민17:10-11).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세 종류가 다 안에 있었다고 한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사실 여부의 관심보다는 언약궤와 관련하여 보관되었던 물건들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관심과 그것들이 무엇을 예표하느냐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궤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대로 세 종류의 물관들이 언약궤와 관련이 있고 그것들이 예표하고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과 관련된 표호들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왕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16절에서 말한 대로 두 돌판인 율법판(증거판)이 있었습니다. 두 율법판은 모세가 두번째 받은 돌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율법판을 받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왔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금 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두 율법판을 던져서 깨트렸습니다 (출32:19). 그리고 다시 산에 올라가 전과 같으 내용의 두 율법판을 다시 받아 언약궤 안에 넣은 것입니다 (신10:2). 율법은 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율법의 정죄에 의해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의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율법의 정죄와 그 형벌을 이기시고 죄사하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민수기17:8-11에 보면, 고라당을 중심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며 쳤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12지파의 족장들의 지팡이를 언약궤 앞에 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아론의 이름이 적힌 지팡이에만 싹이 났습니다. 그럼으로서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의 족장인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백성들이 죄를 지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므로 백성이 죄 사함을 얻도록 중보 역할을 하는 직분입니다. 7월 15일 대속죄일에 속죄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뚜껑인 속죄소 위에 뿌리므로 이스라엘 백성과 화목하게 했습니다. 그 대제사장의 진정한 실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6:20).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없이할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시킬 수 있습니다 (요14:6, 행4:12, 고후5:18).

 

  셋째, 예수님의 선지자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출애굽기16:33-3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원어서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이슬 같은 만나를 내려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표징을 삼게 하려고 항아리에 한 오멜의 만나를 담아 언약궤 앞에 보관하도록 했습니다. 그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고전10:3-4).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요6:33).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늘로서 내린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요6:49-50). 예수님은 하늘로서 와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었습니다. 또한 자신과 말씀과 표적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 관한 모든 진리를 나타내어 우리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언약궤를 생각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에 대해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모든 은혜에 감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영적인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서 그 직책을 가진 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벧전2:9, 계1:6).

 


       3. 속죄소에 대한 양식과 재료 (17-22절)

 

  17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속죄소(贖罪所)는 시은소(施恩所)고 하기도 합니다. 속죄소는 순금(정금)으로 2.5×1.5규빗(1×0.7m)의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속죄소는 언약궤의 뚜껑 역할을 하도록 언약궤 위에 올려 놓았는데 그 위에는 순금으로으로 그룹(천사 형상)을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①예수님의 대속의 성격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21절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언약궤의 사역만 있고 속죄소의 사역이 없었다면 이 은혜의 보좌는 한낱 소름끼치는 무서운 심판의 보좌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증거판(율법판)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율법판은 죄를 드러내어 정죄합니다. 죄성을 들춰 내어 더욱 반항심을 갖게 하여 죄를 더하게 하기도 합니다. 율법은 그것을 어기는 자에게 죽음을 선고합니다 (롬6:23). 그러나 하나님은 죄가 사람에게서 제거되고 사망의 법은 율법의 심판과 정죄에서 피할 수 있는 방도로 속죄소로 언약궤를 덮게 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여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게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죄값으로 이 율법의 선고에 의해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피흘림이 없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레17:11, 히9:2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무시무시한 공의의 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덮게 한 것입니다.

 

  ②예수님의 대속의 결과를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1년에 1번씩 있는 대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씻기 위해 휘장 안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번제단에서 취한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 위에 1번 뿌리고 그 앞에 7번 뿌렸습니다. 번제단에서 죽은 흠없는 생축의 피가 속죄소에 뿌려지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사 사(赦)해졌습니다 (히9:7). 첫째,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어 그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히브리서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를 흘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함받게 했습니다 (엡1:7). 그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흰 눈같이 희게 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도말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과가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옮겨졌습니다. 둘째,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한 것입니다 (갈3:13). 다시는 그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권세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롬8:33-34). 셋째,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어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했습니다 (요일4:10). 에베소서3:12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마27:51). 그래서 22절에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③구속사역에 대한 천사들의 경탄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18-20절에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고 했습니다. 속죄소 위에는 그룹 천사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천사는 직책에 따라 스랍, 그룹, 가브리엘, 미가엘이 나옵니다. 그 중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천사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룹이 하나님의 위엄을 수호하는 직책을 갖고 있지만 (창3:24), 속죄소 위의 그룹은 속죄소 사역에 수종 드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룹들은 빈속한 순종을 위해 날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또한 서로 유기적인 협력을 위해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에 있지만 (마18:10),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직접 도왔습니다 (마4:11, 28:2). 천사는 오늘날 성도의 구원 사역을 돕기도 합니다. 히브리서1:14에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수종들면서 예수님의 구속과 성도의 구원을 보면서 놀라고 감탄합니다. 베드로전서1:12에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43:19-20).

 

  주님은 우리의 죄를 없이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고후5:18).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직책 곧 복음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고후9:16, 롬1:14, 행20:23-24). 또한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는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엡4:32, 마18:33, 마7:1-5, 6:14-15, 18:21, 약2:13). 속죄소가 언약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4. 진설병상에 대한 양식과 재료 (23-30절)

 

  23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24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르고

  25 그 주위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

  26 그것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 위 네 모퉁이에 달되

  27 턱 곁에 붙이라 이는 상을 멜 채를 꿸 곳이며

  28 또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라 상을 이것으로 멜 것이니라

  29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순금으로 만들며

  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진설병상(陳說餠床)은 떡을 차려 놓은 상입니다. 크기는 2×1×1.5규빗(1×0.5×0.75m)이고 재료는 분향단이나 언약궤와 동일하게 조각목으로 만든 후 순금(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상 사면에 테를 두르고 상 위에 놓은 떡이 떨어지지 않도록 상 언저리를 돌아가면서 손바닥 넓이만한 떡을 만들었습니다. 또 이동시키기에 편리하도록 금고리 넷을 양 면에 부착하고 채(봉)을 꿰어 두게 했습니다. 물론 그 채도 조각목으로 만든 다음 금을 입힌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담을 수 있는 대접과 분향하는 데에 사용하는 숟가락과 떡에 바르는 유향을 담은 병(甁)과 전제를 드릴 때에 포도주를 따라 드리는 잔을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레24:7, 29절). 사실 성소의 모든 기구와 그 부속물을 모두 순금으로 만들었고 성소 사면도 모두 순금으로 입혔습니다.

 

  ①예수님께서 영적 양식의 제공자임을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진설병상(陳說餠床) 위에는 항상 진설병(陳說餠,떡)을 항상 두었습니다 (30절). 사실 진설병상도 중요하지만 그 위에 올려진 진설병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진설병상은 진설병을 올려 놓기 위한 기구이기 때문입니다. 진설병상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순금으로 입힌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예표하고 있기도 하지만 진설병은 그 자신임을 더욱 잘 나타내 줍니다. 요한복음6:35,48,58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떡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일용할 영식에 대한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그 떡을 먹는 자는 생명을 부여받게 되고 생명을 유지하므로 영원히 주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늘로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도 주리고 죽었지만 그것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먹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요6:48-51, 고전10:1-5). 신약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이것을 알게 해주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요6:1-35). 진설병은 제사 후에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1:6에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떡을 이미 먹으므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먹어야 그 생명의 풍성함이 유지됩니다. 그 생명의 떡(예수님)을 먹는 방법은 첫째, 그를 믿는 것입니다. 둘째, 그와 교통하며 연합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로 인하여 사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요6:53-58).

 

  ②예수님의 희생을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진설병은 곱게 간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발라 익힌 것입니다. 익히는 방법은 화덕에 굽기도 하고 번철에 부치기도 하고 솥에 삼기도 합니다 (레2:1-10). 이 고운 가루는 곡식 열매가 찧음을 받으면서 빻아지고 부서져서 만들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의 제물로 바쳐질 것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큰 고난으로 제물로 올려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에 노출되어 잘 구워진 떡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거절과 핍박을 통해 제물이 되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부서지는 듯한 경험과 갈보리 산상에서의 타는 듯한 경험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과 영생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진설병은 2줄로 6개씩 12개가 올려졌습니다 (레24:6). 그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거둔 곡식을 모두 바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치므로 생명의 떡이 되어줄 것처럼 이스라엘도 자신들을 온전히 바치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제물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로마서12:1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연단받은 인격과 변화된 생활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한 쪽은 익지 않은 제물을 원하지 않습니다 (호7:8). 생각과 말과 생활이 온전히 하나님께로만 향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③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신명기8:3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로서 내린 양식 곧 만나를 먹게 한 것은 사람이 육신의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항상 제공받아야 합니다. 한편 그 떡에는 누룩과 꿀이 들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레2:11, 고전5:6, 눅12:1, 막8:15, 마16:12). 누룩과 꿀은 죄성과 외식 곧 인본주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갈5:9, 고전5:6, 눅12:1, 막8:15, 마16:12).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인본주의가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고전1:17, 렘6:16, 출20:25, 요4:24). 순수한 복음을 받기를 원하며 순수한 말씀을 받기를 원합니다 (고전5:7-8). 진설병은 매 안식일마다 새로 갈고 물리게 했는데 그 물린 떡은 제사장과 그 후손들이 거룩한 회막 뜰에서 먹었습니다 (레24:8-9). 우리는 매 주일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특히 죄성과 인본주의가 섞이지 않은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갓난 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을 얻어 먹으려 해야 합니다 (벧전2:2).

 

  진설병은 제사장들이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고 했습니다 (레24:9, 6:16). 그 시간은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교제하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설병이야말로 교제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교제의 기초는 진설병이어야 합니다. 모든 교제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은 구원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그를 위한 희생과 고난이 화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과 그로 인한 은혜를 나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교제만이 참된 교회(εκκλησια)를 이룰 것입니다.    

 


       5. 등잔대에 대한 양식과 재료 (31-40절)

 

  31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32 가지 여섯을 등잔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다른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오고 다른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오게 하며

  33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며

  34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35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게 하고

  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결하여 전부를 순금으로 쳐 만들고

  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38 그 불 집게와 불 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지니

  39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성막(聖幕)은 100×50×5규빗(50×25×2.5m)으로 포장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동쪽에 20규빗(10m)되는 출입문이 있고 출입문을 지나 뜰로 들어가면 번제단이 있고 그 뒤에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붕이 있는 천막이 있었는데 그 천막의 앞쪽을 성소라하고 안쪽을 지성소라 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왼쪽에 등잔대가 있었고 오른쪽에 진설병상(떡상)이 있었고 안쪽 가운데에는 분향단(향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휘장이 처져 있었고 그 휘장 뒤 지성소에는 언약궤(속죄소,그룹)가 있었습니다. 성소 안 왼쪽에 있었던 기구는 등잔대였습니다 (25:31-40, 37:17-24). ‘등잔대’(燈盞臺)는 줄여서 ‘등대’라고하기도 하는데 신약시대에는 ‘촛대’라고하기도 했습니다. 모양은 밑판에 붙은 줄기가 4마디로 되어 있었는데 마디마다 살구꽃 형상의 잔과 꽃받침과 꽃이 있었고 맨 끝에는 등잔이 있었습니다. 가운데 줄기에서 양쪽으로 3줄기가 가운데 줄기와 동일한 모양으로 있었습니다. 곧 가운데 줄기까지 합하면 모두 7가지로 되어 있었고 그 끝에는 모두 7등잔이 있었습니다. 그 등잔에는 순결한 감람유 기름을 두게 했고 저녁에서 아침까지 항상 불을 밝혀 놓게 했습니다 (레24:2-3, 출27:20-21, 삼상3:3). 등잔대의 역할은 성소에 불을 밝혀 제사장들이 진설병 사역과 분향단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불을 밝히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①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알게 하는 표징입니다.


  등잔대는 기구이지만 인격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고 했습니다 (37:17). 브살렐이 등잔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이 한 부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에 해당되는 각 단어마다 3인칭 단수로 기록했습니다. 영어성경(KJV)에서도 이를 따라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에서 각 단어마다 앞에 its를 사용하지 않고 인칭대명사 his를 사용했습니다 (his shaft, and his branch, his bowls, his knops, and his flowers, -KJV). 이는 등잔대가 기구(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예표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격임을 암시하는 3인칭을 사용한 것입니다. 등잔대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등잔대의 원줄기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요한복음12:46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고 했습니다. 등잔대는 구속론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33절에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고 했습니다 (37:19) ‘살구꽃 형상’(משקדים)은 아몬드(almond)꽃 모양을 말하는데 아몬드 꽃은 부활을 상징하는 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등잔대의 가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성도들)를 예표합니다 (엡1:23). 요한계시록1:20에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했습니다. 이 ‘촛대’의 원형은 ‘등잔대’입니다. 등잔대의 가지들인 교회(성도들)은 원줄기인 예수 그리스도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15:5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엡5:31-32, 요10:28, 롬8:35-39). 등잔대는 교회론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탄생시킨 교회(성도들)을 예표하기도 한 것입니다.


  ②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존재 가치를 알게 해주는 표징입니다.


  등잔대는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31절에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라고 했습니다 (37:17). 36-39절에 “~전부를 순금으로 쳐 만들고 ~그 불 집게와 불 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지니,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고 했습니다 (37:22-24). 등잔대에는 부속기구인 불집게와 불똥그릇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등잔대’는 불을 켜는 기구라면 ‘불집게’는 등잔대 끝에 있는 등잔의 타버린 심지를 자르거나 정리하는데 사용하는 부속기구이고 ‘불똥그릇’은 타버린 심지를 자르거나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들을 담는 부속기구입니다. 그 등잔대와 불집게와 불똥그릇은 제조 재료가 순금 1달란트였습니다. ‘순금’은 불순물이 전혀 섞여있지 않은 정금을 말합니다. ‘1달란트’는 약 34kg입니다. 골드바 1kg짜리 34개 분량입니다. 골드바 1kg짜리를 현시가로 2천만 원으로 본다면 34개는 6억8천만 원으로서 약 7억 원어치의 가치입니다.


  등잔대는 그 존재 자체가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기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요3:16, 빌2:6).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버렸지만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벧전2:4). 그에 따라 교회(성도들)도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이사야43:4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1:12-13에 보면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 환상을 보면서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라고 했는데, 요한계시록1:20에 보면 그 일곱 금촛대에 대해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했습니다. 이 ‘촛대’는 ‘등잔대’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그 ‘7촛대’는 요한 당시 소아시아(터키)에 있던 7교회를 가리킵니다. 소아시아 7교회는 요한계시록2~3장에 나와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잘한 것도 있지만 잘못한 것도 많았습니다. 처음사랑을 잃은 교회도 있었고 생명력을 잃은 교회도 있었고 신앙이 미지근한 교회도 있었고 심지어는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을 하게 하는 이단의 교훈을 받아들인 교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회개하지 않으면 입의 검으로 싸우거나 몇을 침상에 던지거나 촛대를 옮기겠다고 한 교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촛대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아가야(그리스)에 있었던 고린도교회는 서로 파당이 갈려져 있었고 은사문제로 혼란이 있었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이 있었고 서로 송사하고 이혼하고 음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로 계신다고 했고 (고전11:3),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고전3:16). 교회들이 부족함 투성이었지만 그 교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보배로운 존재로 보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했기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했기 때문이고 성령으로 임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적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유기적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위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여전히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고 구원하고 목적을 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말씀과 성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과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③성도의 연단된 인격을 요구하는 표징입니다.


  등잔대는 단조로 만들었습니다. 31절에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라고 했고, 36에도 “~전부를 순금으로 쳐 만들고”라고 했습니다 (37:17,22). ‘쳐서’ 만들었다는 것은 망치질을 해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등잔대는 제조 방법이 망치로 쳐서 만든 것입니다. 금속으로 물건을 만드는 방법에는 주조와 단조가 있습니다. 주조는 형틀을 만들어 그곳에 불에 녹인 액체 금속을 부어서 형체가 나오게 하는 방법이고, 단조는 금속덩이를 불에 달구어 망치로 두드려서 형체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등잔대의 제조 방법은 단조입니다. 등잔대는 순금 덩어리를 조각을 내어 불에 달군 다음 망치로 쳐서 납작하게 늘여서 밑받침과 줄기와 가지와 잔과 꽃받침과 꽃과 등잔을 만들어 서로 이은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그처럼 아름다운 등잔대를 만드는 것은 공교한 금세공 기술로서 고도의 연금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망치로 치는 단조의 방법은 상징적으로 고난과 시련에 비할 수 있습니다. 등잔대 원줄기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고난을 받으므로 구속을 완성시켰습니다. 영적으로 사탄의 시험을 받았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 같은 단절을 느꼈습니다. 심리적으로 제자들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십자가 아래서 오열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싶은 마음을 느꼈습니다. 육체적으로 온갖 조롱과 모욕과 능욕을 당하고 한번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쓴 채 누름을 당했고 십자가를 형틀을 졌고 십자가 형틀에 손과 발이 못 박힌 채 6시간 동안 매달려 있다가 운명하셨습니다. 그 고난의 죽음으로 구속을 완성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로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임이 증명되었습니다. 히브리서5:8-9에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했고, 히브리서12:2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존귀한 분이지만 고난을 통해 더욱 존귀하게 되신 분입니다. 교회도 존재 자체가 보배롭지만 고난을 통해 더욱 보배롭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정결케 되고 연단되어 세상에서 진정한 빛을 발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도 고난을 통해 정결케 되고 연단되어 세상에서 빛 역할을 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 욥도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었고 바울도 고난을 통해 훌륭한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욥23:10, 약5:11, 빌3:10). 우리도 고난을 통해 더욱 온전하게 되어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게 됩니다. 시련과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 정결케 되고 연단되고 성장합니다.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께 상을 얻게 됩니다. 베드로전서1:7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4:12-13).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소망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로마서5:3-4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인내하여 연단되기를 원하십니다. 야고보서1:3-4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 참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2:19에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고 했습니다. ‘아름다우나’(χαρις)는 ‘은혜’라는 말입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히브리서10:36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계13:10, 14:12). 환난과 고난과 시련의 때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덕목은 첫째도 인내요 둘째도 인내요 셋째도 인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만들어져 갈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자격을 이룰 것을 기대하면서 고난당한 것에 비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상을 얻을 것을 소망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④성도에게 사명을 일깨워 주는 표징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마태복음5:14-16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산 위의 동네를 비추며 등경 위에서 온 집안을 비추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죄악의 길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과 생명의 길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등대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말(斗) 아래 있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2:15-16에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 했고, 3:3에는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했듯이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해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나타내야 합니다. 모든 말과 행실과 삶과 인격과 예전을 통해 복음을 제시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열정과 희생을 본받아 등잔대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등잔대의 역할을 위해 첫째, 원가지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인격적 연단을 즐거워 해야 합니다. 셋째, 전도의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넷째, 희생적인 헌신을 각오해야 합니다.


  ⑤성령께서 교회에 임재해 계실 것을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성소 안에 있는 등대는 매 가지 끝에는 등잔이 있습니다. 이 7등잔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등잔대의 등잔 불은 항상 꺼지지 않아야 했습니다. 성령은 교회에 항상 임재해 있습니다. 한편 33-34절에 보면 등잔대의 매 가지의 마디마다 살구꽃 형상의 잔과 꽃받침과 꽃이 있고 끝에는 살구꽃 향상의 잔이 있었습니다. 살구꽃 형상은 아몬드꽃 형상을 말합니다. 아몬드 꽃의 의미는 '깨어 있다'는 것이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시편 127편에서 '경성: 깨어 있다'라는 단어가 바로 이 sheked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등대를 구성하는 잔의 형상과 무늬가 바로 살구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항상 깨어 임재해 계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⑥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조명해 주실 것을 예표하는 표징입니다.


  등잔은 등잔대의 모습을 비추어 주어 등잔대를 보게 해 줍니다. 등잔이 상징하는 성령께서는 등잔대가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성경의 별명인 보혜사(παρακλητοs)는 '대언자, 변호자, 증거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름처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해 주고 변호해 주는 사역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성품과 사역을 알게 하고 그가 말한 모든 진귀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시인하게 하고 고백하게 합니다 (마16:16-17참조). 고린도전서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⑦성령께서 성도에게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실 것을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등잔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등잔대의 맞은 편에 있는 진설병상과 그 위에 있는 진설병을 비춰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진설병을 진설하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진설병을 응식으로 먹는 일을 도와 줍니다. 이 진설병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동시에 (요14:6) 하나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마4:4).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요14:6). 그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진리되는 모든 말씀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요6:48-59, 14:26, 16:13). 요한복음16:13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진리 안에서(εν τη αληδεια) 역사하기도 하지만 진리 안으로(ειs την αληδεια) 인도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λογοs)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말씀을 적용(ρημα)하도록 도와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의지와 그 말씀을 지킬 때에 은혜를 느끼도록 감동시키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영적인 필요한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도록 역사합니다 (벧후1:19-21, 계2:7).


  ⑧성령께서 성도의 기도 사역을 도우실 것을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등잔의 또 하나의 역할을 등대의 좌편(지성소 휘장 앞)에 위치한 분향단을 비춥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분향단 사역을 할 때 도움을 받습니다. 분향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예표하는 동시에(롬8:34)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시141:2). 요한계시록5:8에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기도하고자 하는 열의를 갖도록 감동시키시며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리고 기도응답에 대한 감동과 확신을 얻도록 도와 주십니다.


<結言>

  우리는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벧전2:9, 계5:10).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말씀을 이해하게 하고 기도를 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행4:24, 행1:8).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아무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전 생활에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 분이 역사할 수 있도록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제사장이 금 집게로 불똥을 떼어 내듯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거역하고 소멸하던 불순종의 죄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뜻과 의지와 행동과 육체의 모든 의지가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