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호세아11:1-12

<題目>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序言>

  본장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묘사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 것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해도 한번 주시기로 한 사랑을 변함없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용구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배반(1-7),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8-12)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本論>

       1.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배반 (1-7)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하나님이 사랑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고 했습니다 (1). ‘어렸을 때는 가나안 땅에서 나라를 이루기 전 애굽에 있을 때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족장 요셉 때에 애굽에 들어간 이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압제와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고 어떤 능력도 없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여 아들처럼 여겼습니다. ‘아들은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자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 애굽에서 인도해냈습니다 (23:37-42). 그것은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대로였습니다 (15:16, 26:3, 28:13).

 

  그러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 분향했다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했을 뿐 아니라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고 또한 선지자들을 보내어 당신의 뜻을 전하고 가르치게 했습니다 (왕하17:13, 7:25, 1:4).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을 나타내는 것과는 반대로 바알과 아로새긴 우상에 제사와 분향을 했습니다 (왕상16:31-32, 22:53, 왕하17:16). ‘바알’(Baal)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주신(主神)으로서 풍요와 번영의 신으로 숭배한 우상입니다. ‘아로새긴 우상은 돌이나 나무로 조각한 형상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바알을 비롯하여 아세라 등의 모든 우상을 말합니다. 아마 금송아지 우상도 포함될 것입니다 (Andrew Dearman).

 

  그러나 하나님이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팔로 안았음에도 하나님이 그들을 고치는 줄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3).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 10지파의 대표지파로서 북이스라엘에 대한 별칭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걸을 수 있도록 해주고 팔로 안아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광야에서 율법의 말씀으로 언약백성에 대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치고 능력으로 위협에서 안전하게 지켜주고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번영하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광야 여정에서 인도해주신 것에 대해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라고 표현했습니다 (1:31).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고치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고치는에 해당하는 기본형 라파’(רפא)치료하다’ ‘온전하게 하다의 뜻입니다. 곧 하나님이 그들을 고쳤다는 말은 그들을 징계하여 바로 세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을 치료하여 회복시켰다는 의미입니다 (I healed them KJV, NASV, RSV). 출애굽 직후 광야의 마라에서 물이 써서 먹을 수 없을 때 물을 달게 해주시고 여호와 라파’(יהוה רפא)라고 했습니다 (15:26). 하나님이 고통을 치유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와 들어온 이후에도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고통에서 치유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처럼 그들을 치유해주어도 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저희가 알지에 해당하는 기본형 야다’(ידע)는 지적인 앎이 아니라 관계에서의 경험적인 인식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손길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다고 했습니다 (4). ‘사람의 줄은 사람이 소나 말이나 노새 등의 짐승을 어거하기 위해 코나 입이나 목에 매어 단 노끈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람이 짐승을 어거하여 부리기 위한 고통의 줄이 아니라 사랑의 줄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은 아이를 낳아 아이가 기어 다니게 되면 아이를 고무줄 같은 끈으로 자기에게 묶어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자기 시야에서 벗어나려하면 그 줄을 잡아당겨 아이가 자기 곁으로 돌아오게 했다고 합니다. 그로서 아이는 위험한 길로 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강제와 억압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와 친절과 긍휼로 한 것입니다 (31:3). 또한 그들에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4). 사람이 짐승들의 목에 멍에를 메우는 것은 밭을 갈거나 타작을 하거나 곡식을 빻거나 짐을 나를 때 기구를 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힘든 일을 시키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그 무거운 멍에를 벗기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처럼 무거운 부담과 고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안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다고 했습니다 (4). 사람들은 짐승들에게 먹을 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게 하거나 충분히 먹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을 것을 자유롭게 충분히 먹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물과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이른 비와 늦은 비로 풍요를 얻게 해주었습니다 (7:13).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결같은 사랑과 은혜로 대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거늘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5). 그들이 애굽 땅으로 돌아가지 못 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나왔는데 북이스라엘 백성이 또 다시 애굽으로 들어가 압제를 받는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애굽의 도움을 바라고 애굽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의 압제를 피하기 위해 사신들이 애굽으로 내려가 동맹을 맺기도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의 위협을 받았음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애굽을 의지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앗수르 사람이 그들의 임금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5). 그들이 애굽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앗수르의 통치와 압제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고 앗수르의 잔인한 통치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왕하17:3-6, 18:9-12).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앗수르의 통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할 것이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했습니다 (6). ‘은 전쟁을 하는 군사들의 살상 무기입니다. ‘빗장은 성문을 가로질러 잠그는 장치(Bar)입니다. 칼이 그들의 성읍과 빗장을 쳐 깨뜨린다는 말은 적군이 성문을 깨뜨리고 성읍을 점령할 것을 말합니다. 이는 앗수르 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치고 멸망시킬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계책 때문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된 것은 그들이 애굽과 동맹하여 앗수르의 공격을 막아보려는 계략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이방나라를 의지하여 이방나라에 도움을 구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끝끝내 물러가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7).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대신 인본적인 계획에 집착하여 끝까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비록 선지자들이 그들을 불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해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위해 결단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회개를 촉구했어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육신적으로도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를 따르며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신앙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거부합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실패할 수 없습니다. 시편81:10-12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큰일들을 기억하며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사무엘상12:24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8-12)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2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하나님은 어찌 에브라임을 놓겠으며 이스라엘을 버리겠느냐고 했습니다. 어찌 아드마 같이 놓겠으며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고 했습니다 (8).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대표지파로서 북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이스라엘도 북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놓겠느냐버리겠느냐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내 붙들어 줄 것을 의미합니다. ‘아드마’(Admah)스보임’(Zeboim)은 각각 붉은 흙영양의 뜻을 가지 성읍으로, 이 두 성읍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는 성읍들입니다. 이 두 성읍은 소돔과 고모라가 죄로 멸망할 때 함께 멸망한 성읍들입니다 (10;19, 14;2,8, 29:23). ‘놓겠느냐두겠느냐는 이방나라에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마침내 구해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죄 때문에 멸망시킨 성읍들처럼 완전히 멸망시킬 수는 없지 않느냐고 탄식 섞인 어조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로 말미암는다면 반드시 멸절시켜야 하지만 긍휼을 베풀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주 멸절시킬 수는 없지만 온전케 하기 위해 징계는 하되 다시 회복시킬 것을 결정하게 하는 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이 속에서 돌이키어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한다고 했습니다 (8).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지 않으려는 것은 마음속에서 긍휼이 불붙듯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범죄했을지라도 언약백성인 고로 애정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는 애틋한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잘못한 자식에 대해 고뇌하는 부모의 심정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않으며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게 진노함으로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9). 북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했으나 그들은 언약백성이기 때문에 맹렬한 진노로 아주 멸절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거룩에 해당하는 카도쉬’(קדוש)공의라는 뜻이 있지만 진실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분이지만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고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는 분입니다. ‘하나님에 해당하는 ’(אל)전능자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사람은 대체로 죄행에 대해 분노를 가지면 긍휼을 베풀 수 없습니다.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랑이 없고 끝까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성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행에 대해 분노하셔도 긍휼을 베풀어 더욱 온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차원이 다른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절대적 사랑의 속성이 있고 자기 백성에게 한 언약을 끝까지 지키는 신실한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 떨며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10). ‘사자는 짐승의 왕으로서 그 소리는 먼 곳에 있는 사람과 동물들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큽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하고 확실하여 효과있는 부르심이 될 것을 의미합니다 (25:30, 1:2, 3:8). 장차 하나님이 사자의 우렁찬 소리처럼 분명한 메시지를 내면 사로잡혀갔던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손들이 서쪽에서 떨며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쪽으로부터에 해당하는 기본형 ’(ים)바다라는 뜻으로 지중해를 가리킵니다. 지중해는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쪽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2:18, 8:9, 45:9). 그래서 여기에서 서쪽에서부터 온다는 말은 먼 바다의 여러 섬나라로부터 온다는 말로서 (11:11), 흩어져 있는 여러 나라로부터 돌아온다는 것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떨며온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온다는 의미입니다 (19:16,18, Chrisholm). 하나님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북이스라엘 백성을 부를 때 이른바 도처에 있는 남은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Benson). 그들이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11). ‘는 날개 짓을 하며 신속하게 둥지를 향해 돌아옵니다. 특히 비둘기는 귀소본능이 강해 신속하게 둥지로 돌아옵니다. ‘애굽은 남쪽에 있는 나라이고 앗수르는 동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장차 하나님이 각처에 흩어진 이른바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본토로 부를 때 그들이 서쪽뿐 아니라 남쪽과 동쪽 모든 지역에서 지체하지 않고 신속히 돌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55:6,8, 60:8). 이는 남은 자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돌아올지를 알게 해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1). 하나님이 그들을 마치 새가 둥지로 돌아와 안전히 거하는 것처럼 흩어진 세계 각처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 그곳에 거주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장차 북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11). 이는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의 권위를 강조한 말로서, 북이스라엘의 회복이 확고부동하게 이루어질 예언이라는 의미입니다.

 

  12절의 내용은 히브리어 원문(BHS)에서는 12:1에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에서 11:12에 배열했습니다. 영역본들도 이를 따랐고 우리 한글의 개역판이나 개역개정판에서도 이를 따랐습니다. 사실 내용상으로 보면 12:1에 배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11:8-11은 북이스라엘 백성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끝까지 사랑하여 회복시킬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11:12과 이어지는 12:1-2은 다시금 북이스라엘 백성의 배은 행위에 대한 심판 경고가 주어집니다. 그럼 점을 보면 본 12절은 12장으로 넘어가야 할 내용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하나님을 에워쌌다고 했습니다 (12). ‘에브라임이스라엘은 모두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거짓속임수는 무슨 뜻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신실치 못하게 행동했다는 것은 나타내는 표현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Mays). 아마도 북이스라엘이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을 에워쌌다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강대국을 의지한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혼합주의와 인본주의 행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은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12). ‘유다는 남유다를 가리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남유다 백성들도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 정함이 없었습니다. ‘정함이에 해당하는 기본형 루드’(רוד)걸어 다니다’ ‘서성거리다는 뜻입니다.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KJV) 부정적으로 해석하게도 하지만 (NIV) 이어지는 12:1의 내용으로 보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게 볼 때 유다가 하나님께 정함이 없다는 말은 남유다 백성들도 북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結言>

  북이스라엘 백성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을 배반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여 아주 심판하지 않고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구원하고 성령과 말씀으로 인도했습니다. 비록 범죄할지라도 징계는 할지언정 아주 멸절시키지는 않습니다 (6:13). 오히려 징계를 통해 더욱 온전케 하십니다 (12:8, 1:3-4). 칼빈주의 5대 강령 가운데 궁극적인 구원혹은 성도의 견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여 구원한 성도를 결코 구원을 상실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에 대해 끝까지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벧후3:8). 그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향한 절대적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입은 우리는 자존감을 가지고 바로 살아가야 합니다. 로마서8:34-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했습니다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