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호세아13:1-16
<題目> 이스라엘의 헛된 추구
<序言>
이스라엘은 우상과 왕을 의지했고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데 있었습니다. 본 장에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시도가 헛된 것임을 밝히며 이스라엘이 철저히 멸망하게 될 것을 선언합니다. 내용구조는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1-4절), 북이스라엘의 교만(5-8절), 북이스라엘의 왕 의지(9-11절), 돌이키지 않는 하나님의 심판 의지(12-16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 (1-4절)
1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2 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3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4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다고 했습니다 (1절).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이룬 10지파 중 대표지파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에브라임이 북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에브라임지파 자체를 가리킵니다 (Wood, Garrett). 에브라임지파는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가장 큰 지파로서 다른 지파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지파가 말할 때면 다른 모든 지파들이 경청하고 떨 정도라고 했습니다. 다른 지파들이 에브라임지파에 대해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지파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였습니다. 자만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알숭배에 미혹되었고 자기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지파들까지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민수기 25장에 나온 바알브올 사건으로 수천 명이 죽은 사건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Anderson, Freedman).
그런데 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해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2절上). 에브라임지파는 과거에도 우상을 숭배하는데 앞장섰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는데 호세아 선지자 당시에도 북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에 앞장서서 온 북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건국자인 여로보암 1세도 에브라임지파 출신으로서 (왕상11;26, 대상7:20-27). 북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도록 앞장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은으로 형상을 주조하여 정교하게 바알(Baal)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숭배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장색(匠色) 곧 숙련된 기술자가 만든 것으로서 결코 신(神)으로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헛된 형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사44:9-12). 그런데도 그것을 만들고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행위였습니다 (출20:3-6, 신5:7-10).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2절下). 이는 그들이 바알 우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숭배하게 했을 뿐 아니라 금송아지 우상도 만들어 숭배하게 했음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는 자들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자들에게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라고 한 것입니다.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는 금송아지 우상을 섬길 것을 촉구했다는 의미입니다. 우상에게 입을 맞추는 행위는 우상의 손이나 발이나 어깨 등에 행해졌을 것입니다 (Pusey). 우상에게 입을 맞추는 행위는 극한 존경과 경외를 뜻하는 행위입니다 (왕상19:18, 욥31:27, 시2:12). 그것은 우상에게 절을 하는 의식과 마찬가지로 우상을 신으로 섬긴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행위입니다 (출20:5, 34:14, 신5:9, 수23:16).
그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는 연기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3절). 북이스라엘 백성이 헛된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순식간에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을 비유를 통해 언급한 것입니다. 첫째, 아침 구름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떠 있는 구름은 해가 중천에 이르면 없어지고 맙니다. 둘째, 쉬 사라지는 이슬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밤에 내린 이슬도 아침이 되어 햇볕이 나면 열기에 금방 없어지고 맙니다. 셋째, 타작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타작마당에서 탈곡한 곡식더미를 바람이 불 때에 흩날려서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게 하고 알곡은 바닥에 떨어지게 하여 모읍니다. 곧 쭉정이는 광풍에 체질을 할 때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넷째,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는 위로 올라가면서 바람에 의해 그 형체가 금방 흩어져 없어지고 맙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숭배하는 우상도 그와 같이 허망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북이스라엘 백성들도 결국 허망하게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4절上). ‘하나님’(אלהים)은 전능자임을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여호와’(יהוה)는 존재에 있어서 자존자임을, 언약에 있어서 불변자임을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학대받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나타냈으며 큰 이적과 기사로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에서 구원해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주(主)로 섬겨야 할 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 밖에 다른 신을 알지 말라고 했으며 하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4절下).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영원자존자이시며 언약을 지켜 행하는 불변하신 분이시며 언약백성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사45:5,21). 그래서 참 신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사44:5,6,14,18,21). 우상은 모두 생명과 능력이 전혀 없는 헛된 형상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으며 화나 복은 전혀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알지 말고 하나님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지’에 해당하는 기본형 ‘야다’(ידע)는 ‘알다’라는 뜻인데 이는 지적인 앎이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입니다. 곧 교제를 통한 인격적 인식을 의미합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과 능력이 없는 헛된 우상들을 관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한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반한 죄행으로서 그 대가는 처절했습니다. 우상이 얼마나 헛된 대상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행위인지 알게 해줍니다. 우리는 헛된 우상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우상적 존재는 재물과 쾌락과 자기 자신 등입니다. 그것들이 풍요와 행복을 줄 것 같아서 그것들을 따르지만 그것들을 좇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참된 풍요와 행복을 줄 수 있는 하나님만 신뢰해야 합니다. 시편115:8-9에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고 했습니다 (사12:2).
2. 북이스라엘의 교만 (5-8절)
5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6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7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8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하나님이 광야 마른 땅에서 그들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5절). ‘광야 마른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여년의 여정 길을 말합니다. 그들이 통과한 광야는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없고 온갖 위험이 도사린 곳이었습니다. ‘너를 알았거늘’에 해당하는 기본형 ‘야다’(ידע)는 ‘알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관계에 있어서 사랑으로 인도하고 보호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출19:5-6, 24:1-8). 마실 것과 먹을 것 없는 그들에게 물과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시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해주시고, 불뱀과 전갈과 맹수와 약탈자들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민20:2-13, 신2:7, 8:15).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먹여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잊었다고 했습니다 (6절). 하나님은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흡족하게 먹이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풍요와 번영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을 누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복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함을 누림으로 오히려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다 풍요와 번영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숭배하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는 이미 모세 때에 경고했던 내용입니다 (신8:10-14).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7절). 하나님은 마치 양 떼를 먹이시는 목자처럼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달려드는 사자와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같이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자와 표범은 맹수로서 기다렸다가 대상을 보면 순식간에 공격하여 잔혹하게 잡아먹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그들에게 공격자와 파괴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앗수르 제국을 통해 그들을 멸망시킬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고 했습니다 (8절). 곰은 그 자체가 공격성이 있지만 새끼를 잃은 곰은 더욱 포학하고 잔인합니다 (삼하17:8, 잠17:12). 그런 곰이 그들을 만나 염통 꺼풀을 찢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염통 꺼풀’(סגור לבם)은 심장을 둘러싼 가슴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마치 곰이 달려들어 심장을 비롯한 내장을 둘러싼 가슴 부위를 찢듯이 찢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새끼를 둔 암사자는 심히 배가 고픕니다. 그러기에 먹이를 보면 다 잡아 삼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그들을 잡아 삼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앗수르가 순식간에 공격하여 포학하게 훼파시킬 것을 암시하는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들짐승’은 앞서 곰이나 암사자처럼 비유적으로 사용된 표현인 아니고 실제 들짐승을 가리킵니다. 이는 북이스라엘이 야생 동물에 짓밟힐 것을 의미합니다 (Calvin). 이는 이미 모세에 의해 경고된 내용이었습니다 (레26:2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에서 구원하여 광야에서 인도해주고 가나안 땅에서 풍요와 번영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구원해주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은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주할 것을 주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오직 그것들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줄 알고 하나님만 신뢰해야 합니다. 잠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고 (18:12, 29:23). 베드로전서5:5에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3. 북이스라엘의 왕 의지 (9-11절)
9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10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11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이스라엘은 패망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도와주는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9절). ‘네가 패망하였나니’는 시제가 완료시제인데 이는 예언적 완료(prophetic perfect)에 해당합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이 예언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패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누구에 의해 패망한다는 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장들이 분분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앞 절 7-8절에서 사나운 짐승들로 비유한 앗수르일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앗수르를 통해 패망을 시킬 것이므로 하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Garrett, Calvin, Cheyne). 북이스라엘이 그처럼 패망하게 된 것은 그들을 도와주는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앞 문단을 기준하면 그들이 우상숭배를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샀기 때문이고, 이어지는 다음 문단을 기준하면 왕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샀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편 본 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כי בי בעזרך)를 영어성경 KJV, NKJV에서는 ‘그러나 너의 도움은 나에게 있다’의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but in me [is] thine help. But your help is from Me.). NRSV에서는 ‘누가 너를 돕겠느냐’의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Who can help you?).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에 ‘대적함이니라’는 말이 없고, ‘그러나’에 해당하는 접속사 ‘키’(כי)는 ‘누가’(Who)에 해당하는 ‘미’(מי)에 대한 필사자의 오류라고 보는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본 절 내용은 하나님이 진노하여 북이스라엘을 패망하게 할 때 ‘누가 너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Mays).
하나님은 전에 북이스라엘 백성이 왕과 지도자를 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10절上). 이스라엘은 과거 사무엘 선지자 때에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왕을 세워 달라고 한 적이 했습니다 (삼상8:4-20). 호세아 선지자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로부터 잦은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을 그들 가운데서 구할 강력한 왕이 요구되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왕들과 관리들을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외교정책은 실패하고 도리어 앗수르의 침략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성읍에서 그들을 구원할 자 곧 그들의 왕이 어디 있으며 그들의 재판장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10절下). 하나님 외에 북이스라엘을 구해낼 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북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왕이나 재판장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패망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왕과 관리들을 의지한 결과라는 것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분노하므로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했다고 했습니다 (11절). ‘주고’(אתן)와 ‘폐하였노라’(ואקח)에 해당하는 원어의 시제는 과거형이 아니라 미완료형으로서 현재에 진행되고 있은 상황인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1세 때 창건된 이후 210년(B.C.930-722년) 동안 19명의 왕이 세워지고 폐위되었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이 원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세워지고 폐위되었습니다. 특히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할 때 당시는 모반과 살해에 의해 옹립되고 폐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가 당신의 원하는 바가 아니기에 분노하므로 진노로 옹립과 폐위를 허락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왕과 관리들을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정책은 오히려 멸망을 초래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시46:1-3). 예레미야17:5-7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4. 돌이키지 않는 하나님의 심판 의지 (12-16절)
12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13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14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15 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16 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다고 했습니다 (12절). ‘불의’(עון)와 ‘죄’(חטאה)는 본성에서 비롯된 사악한 의도와 율법에서 벗어난 죄행을 의미합니다. ‘봉함되었고’의 원형 ‘차라르’(צרר)는 ‘죄다’ ‘묶다’ ‘포위하다’의 뜻이며, ‘저장되었나니’의 원형 ‘차판(צפן)은 ’숨다‘ ’저장하다‘ ’보호하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봉함되고 저장되었다는 말은 무언가를 차단하고 숨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곡식으로 말하면 곡식을 추수하고 그것을 저장해두는 것을 의미하고, 보물로 말하면 보물을 보물함에 넣어 자물쇠로 잠그고 그것을 감추어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사악한 범죄 사실을 함에 넣어 숨겨 놓은 것은 그들의 사악한 범죄 사실을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반드시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때가 되면 반드시 그 죄를 물어 징벌하려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13절).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은 여인이 아이를 출산할 때의 고통을 말합니다 (창3;16, 렘30:6). ‘지혜없는 자식’은 어리석은 아이를 말합니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는 말은 여인이 해산할 때가 되었는 데도 태아가 여인의 자궁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임신한 여인에게 해산할 때가 임박하여 진통이 시작되면 태아는 몸을 뒤집어 자궁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만일 태아가 적절한 자세를 취하지 않아 자궁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 여인과 태아 모두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할 때가 임박했음에도 회개하지 않는 상황을 산모와 태아의 비유로 탄식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벌이 임박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그에 합당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 완고하고도 어리석인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라고 했습니다 (14절上). ‘스올’(שאול)은 ‘무덤’ ‘죽음’ ‘지옥’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인데, 여기에서는 죽음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지하세계인 스올로 내려간다고 보았습니다 (창37:35, 민16:30,33. 시31:17, 겔31:17). 본 절은 문법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심판 이후에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문맥의 흐름을 보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 수 있습니다. 12-13절과 15-16절에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간에 14절만 갑자기 회복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곧 13절에서 북이스라엘을 치명적인 상태에 빠진 태아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이어지는 14절에서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스올의 권세와 사망에서 건지기를 거부하고 스올과 사망을 불러 그들에게 임하도록 하겠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Mays). 곧 본 절은 스올의 권세와 사망에서 건질 것이라는 회복에 대한 선언문으로 보기보다는 스올의 권세와 사망에서 건져내야하겠느냐는 의문문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4절中). 이는 앞에 언급한 내용의 의미로 본다면 하나님이 스올과 사망을 불러 재앙과 멸망을 내리도록 하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고 했습니다 (4절下). 이는 후회가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숨길 것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여 징벌을 내리기로 하신 일에 대해 결코 후회함이 없이 반드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결코 돌이키지 않고 반드시 징벌을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렘4:28).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는 분입니다 (민23:19, 롬12:39). 그러면서도 종종 하나님이 후회하여 뜻을 돌이키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창6:7, 신32:36, 삼상15:11,35, 욘3:9),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sm)적인 표현입니다.
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15절上). ‘그’는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며 ‘형제’는 남유다를 비롯한 주변 모든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북이스라엘은 마치 과일이 풍성하게 맺힌 것처럼 여로보암 2세 때에 풍요와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광야에서 동풍이 불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풍’은 동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2-6월 사이에 불어오는 시로코(Siroco)라는 바람입니다. 이 바람은 매우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으로서 모든 식물을 다 말라비틀어지게 합니다 (창41:6, 욘4:8). 동풍은 북이스라엘의 동쪽에 있는 앗수르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동풍을 불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앗수르를 이용하여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라고 했습니다 (15절下). 동풍이 불면 샘이 마르고 풀과 과수가 메마르게 됩니다. 그처럼 앗수르 군대가 침략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보배로운 것들을 약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했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그 어린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고 했습니다 (16절).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로서 북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사마리아 성읍에는 왕실이 있었고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북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배반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자들입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므로 형벌을 당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바알과 금송아지를 숭배했고 강대국을 의지했고 왕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형벌을 당해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는 부서뜨려지고 아이 밴 여인은 배가 잘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앗수르의 침략을 염두에 둔 예고입니다. 앗수르 군대가 사마리아를 점령할 때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심지어는 임신한 여인과 젖먹이 아이들을 비참하게 살육할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결국 앗수르 군대가 B.C.722년에 사마리아를 3년 동안 포위하다가 함락시키고 맙니다 (왕하18:10). 이는 이미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자들에게 경고된 내용이었습니다 (레26:25).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죄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낱낱이 기억하여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대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전도서12:14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렘17:10).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도 마지막 때에 반드시 물을 것입니다. 로마서2:16에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고 했고, 고린도후서5:10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20:12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고 했습니다.
<結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벌이 즉시 내려오지 않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징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욱 담대하게 죄를 범합니다 (전8:11). 그러나 하나님이 죄를 징벌하시는 때가 생각지 못한 때에 반드시 이르게 됩니다 (욥14:17, 신32:33-35, 롬2:4-5).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으면 생각지 않은 때에 하나님의 징벌이 입하게 될 줄 알고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21:34-35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5:3에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