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요나1:1-17
<題目> 요나의 불순종
<序言>
요나는 이사야, 미가, 호세아, 아모스 등과 같이 B.C.8C 선지자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대의 다른 선지자들과 예언의 대상과 문제와 주제와 내용전개 등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선지자들이 주로 언약백성인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언한데 비해 요나는 이방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본장은 요나가 그 과정의 기초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왜곡된 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는 요나(1-3절). 재앙의 원인자로 뽑히는 요나(4-10절), 재앙의 원인자임을 고백하는 요나(11-12절), 바다에 던져지는 요나(13-16절), 큰 물고기에 삼켜지는 요나(17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本論>
1.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는 요나 (1-3절)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1절). ‘아밋대’(Amittai)는 스블론지파의 땅 나사렛에서 동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가드헤벨(Gath-hepher) 사람입니다 (왕하14:25). ‘요나’(Jonah)는 아밋대의 아들로서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2세(JeroboamⅡ, B.C.793-753) 때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비둘기’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엘리야 선지자가 살려준 사렙다(사르밧) 과부의 아들로서 엘리야 선지자가 예후를 북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붓기 위해 보냈던 소년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왕상17:17-24, 왕하9:1-6). 그는 앗수르를 향해 예언을 한 선지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당시 니느웨는 역병이 2번이나 창궐했고 (B.C.765,753년), 일식 현상이 있었기 때문에 (B.C.763년)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때가 그들이 회개 메시지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적기로 여기시고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요나 선지자로 하여금 그들에게 멸망과 회개촉구 메시지를 전하게 하려고 그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데 그것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였습니다 (2절).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체하지 말고 일어나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은 받았습니다. ‘니느웨’(Nineveh)는 앗수르(Assyria) 제국의 수도로서 성읍도 컸으며 인구수도 많았습니다. 도성의 크기는 둘레가 걸어서 3일이나 걸릴 정도로서 100km나 되었고 (3:3), 인구수는 어린아이만 해서 12만 명에 이를 정도로 전체 60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4:11). 그 위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티그리스강 상류 강변 동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모술 맞은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하나님 말씀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외치게 한 것은 그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느니웨의 악이 심히 창궐하여 하나님이 심판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우상숭배가 극심하고 교만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이었다고 합니다 (사10:13, 나3:1,10,19, 습2:15).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3절上). ‘욥바’(Joppa)는 지중해변 항구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다시스’(Tarchish)는 스페인의 서남부 항구도시로서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잠31:14, 사23:1,14, 겔27:12). 욥바와 다시스는 방향으로 볼 때 하나님이 가라고 한 니느웨의 정반대 방향입니다. 니느웨는 동쪽이고 욥바와 다시스는 서쪽입니다. 거리도 굉장히 멉니다. 북이스라엘서 니느웨는 동쪽으로 700km 떨어진 곳이고 다시스는 서쪽으로 3,000km나 떨어진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세계관으로 볼 때 니느웨는 동쪽 끝이고 다시스는 서쪽 끝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려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정반대 방향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도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편재성(遍在性)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요나는 심리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싫어서 하나님이 명령한 곳의 반대방향으로 그리고 멀리 도망치려 한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 앗수르는 원래 이방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서 제외된 자들이기에 그들이 구원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방 나라로서 우상을 숭배한 나라이며 정복한 피지배국에 대해서도 우상을 강요하는 나라였습니다. 둘째, 앗수르가 원래 완악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회개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앗수르는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약탈하고 강포를 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죽이고 포로를 다루는데 잔인했습니다. 셋째, 앗수르는 적국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자신에게 위험이 닥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적국이었습니다. 넷째, 앗수르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선지자로서의 자기 위신이 깎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와 인애가 많으신 분으로서 만일 그들이 회개를 할 경우에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선지자적 권위가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4:2). 요나는 선지자로서 당시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예언했을 때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져야만 선지자의 권위가 세워졌습니다. 요나는 죄인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 뜻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안위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해 욥바로 내려갔는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어서 다시스로 가는 배의 값을 주고 그 배를 탔습니다. 그는 도망치려는 일이 순조롭게 되는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길이 순조롭게 열렸다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뜻과는 반대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신 것도 우리로 세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은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대상들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세리로서 유대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로인하여 그는 유대인들에게 심한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성령님은 그로 하여금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감동시켰고 그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복음전도 사역의 대상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는 대상에게는 복음 전하기를 꺼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음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20:9에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고 했고, 고린도전서9:16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 했고, 사도행전20:24에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목사였던 리챠드 빅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일생동안 병과 쇠약에 시달렸는데 죽음의 문턱에서 서성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든지, 당신이 하시고자 할 때는 언제든지" 그의 헌신적인 복종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하나님 뜻대로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찾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말씀으로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 무어라 기록되었는지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성경의 원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은 성경의 전체 원리가 어떠한 것인지 찾아야 합니다. 둘째, 성령님의 감동으로 찾아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마음을 기울여 그 뜻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마음에 감동되는 것이 모두 성령님의 감동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발람의 기도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든다고 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뜻은 아닙니다 (민22:20). 그러므로 성경 혹은 성경원리와 교차 검증을 해야 합니다. 셋째, 양심을 통해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양심이 무어라 말하는지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벧전3:21, 행23:1). 하지만 이도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양심은 환경과 교육 등의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 없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양심도 절대시하지 말고 이도 앞의 내용들로 교차 검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넷째, 섭리를 통해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환경과 사람과 사건에 대해 어떻게 섭리하시는지 보면서 그 섭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길이 열린다고 해서 다 하나님이 원하는 뜻인 것은 아닙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기 위해 욥바로 갔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절).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로 갈 때에도 그 길이 잘 열릴 수 있기 때문에 이도 앞의 내용들로 교차 검증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재앙의 원인자로 뽑히는 요나 (4-10절)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요나 선지자가 탄 다시스로 향하는 배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났고 그로 인하여 그 배는 거의 깨지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4절). 하나님이 큰 바람을 일으켜 배가 파선되게 된 것입니다. 이 ‘큰 폭풍’은 지중해에서 자주 일어나는 ‘유리굴로’라고 하는 폭풍으로 여겨집니다 (행27:14). 세상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폭풍을 이용하여 요나의 길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시148:8). 배가 큰 폭풍으로 거친 파도에 침몰하려 하자 사공(선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의 신을 부르며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의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5절上). 각자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부르짖었으며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있는 각종 수하물들을 바다로 내어던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요나 선지자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5절下). 요나는 배 밑층으로 내려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밑층’에 해당하는 ‘예레카’(ירכה)는 후미진 구석을 의미하는데 (삿19:1, 삼상24:4), KJV에서는 ‘모서리’로 (sides), NKJV에서는 ‘가장 낮은 부분’으로 (lowest parts), NIV에서는 ‘갑판 아래’로 (below deck) 번역했습니다. 요나는 배가 폭풍으로 파선 위기에 처할 때 배의 아래층으로 내려가 잠을 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배를 탈 때부터 그리로 가서 잤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피하고자 하는 심리 상태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양심의 가책을 잊기 위해 일부러 잠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 때 선장이 그에게 가서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고 했습니다. 이런 판국에 잠을 자고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6절). 배가 파선 위기에 빠지자 모든 선원들이 각각 자기들의 신들에게 부르짖었습니다. 어느 신이 참 신인지 상관없이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이 모든 신에게 간구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선장이 보기에 그렇게 모두가 배의 통제를 위해 구하는데 요나는 혼자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요나도 그 부르짖음에 동참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에게도 요나가 섬기는 신에게 함께 부르짖으라고 한 것입니다. 선장이 요나에게 하나님께 구하면 혹시 그가 망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각자 모두가 자기 신에게 구할 때 어느 신이 응답해 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혔다고 했습니다 (7절). 배가 대풍으로 인해 침몰 위기에 빠지자 선원들이 각기 자기들의 신들에게 부르짖었지만 대풍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선장이 모든 선원들과 승객들을 갑판으로 모이게 했을 것이고 요나도 배 밑층에서 갑판으로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배에 탄 누군가의 죄 때문에 그가 섬기는 신이 진노하여 재앙을 내린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찾아내어 그 신에게 바쳐야만 재앙이 그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를 통해 재앙의 원인자를 찾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떤 일을 결정하려할 때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제비뽑기를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비’에 해당하는 ‘고랄’(גורל)이 ‘자갈’(돌)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볼 때 아마도 돌이나 나무막대에 자기 이름을 적은 다음 그것을 갑판 위에 던져서 이름 적힌 부분이 위로 향한 것에 해당하는 사람을 지목하는 방식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아니면 하나의 돌이나 나무막대의 한쪽에 어떤 표식을 하고 한 사람씩 그것을 던져 표시된 면이 나오는 사람을 지목하는 방식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방식이었든지 결국 제비뽑기에서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요나가 재앙의 원인자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제비뽑기에서 요나가 걸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였습니다 잠언16:33에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제비뽑기에서 요나 선지자가 지목되자 무리는 요나가 무슨 죄를 지어서 그가 섬기는 신이 이 큰 재앙을 내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8절). 무리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재앙의 원인자가 요나임을 알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어떤 신이 재앙을 내린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온 것인지 물었습니다. 곧 요나가 어떤 신을 섬기며 그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요나의 직업과 국적과 민족 등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당시 이 배는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무역선으로서 베니게(Phoenicia) 상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방 사람들이 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보기엔 요나의 행색이 특이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9절). ‘히브리’(עברי)는 ‘아바르’(עבר)에서 온 말로서 ‘건너온 자’ ‘이주해온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아브라함 때부터 사용되었던 말인데 가나안 원주민들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온 아브라함에 대해 사용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이 발생한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던 갈대아 우르에서 온 것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창14:13). 이는 점차 다른 민족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들과 구분하는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창39:14, 출1;16, 삼상4:6).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은 그 용어를 자신들을 이방 민족과 구분하는 용어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출21:2).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을 다른 민족에게 소개할 때 히브리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요나도 자신을 히브리인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을 밝혔습니다. 우주의 유일한 신으로서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요나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인데 그 하나님이 재앙을 내린 것이라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에게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밝혔습니다 (10절上). 재앙은 요나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내린 것인데 그 이유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임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앗수르의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이 명한 말씀을 선포하라고 했으나 자신이 그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해 이 배를 탔기 때문임을 설명한 것입니다.
무리는 요나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재앙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한 요나가 그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여 도망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재앙을 내린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두려워하면서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고 했습니다 (10절下). 무리들은 자신들이 당한 재앙이 바다와 육지를 주관하는 하늘의 하나님의 심판인 것을 알고 몹시 큰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면서 요나에게 어찌 그 하나님께 죄를 지어 이 큰 재앙을 당하게 하느냐고 질책한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폭풍을 만나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명을 떠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부정하고 거절하고 도망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게 되면 육체적인 고통이 따릅니다. 물론 정신적인 불안과 영적인 곤고도 따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징계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여 바로 세우기 위함이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94:12, 히12:7-11). 그러므로 환난과 역경과 고난과 고통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징계로 알고 속히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면서 배 밑층으로 내려가 잠을 청했습니다. 이것을 심리용어로 ‘요나 콤플렉스’(Jonah complex)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 어두운 곳을 찾아 숨으려는 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심리를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 밑층에서 잠을 잤을 때 배가 폭풍이 일어나 파선 위기에 있었고 선장이 자신을 깨워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했고 무리가 제비뽑기를 요구할 때 자신이 뽑혔고 무리가 자기에게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지었는지 물었습니다. 요나에게는 그런 상황이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섭리였습니다. 발람에게 있어서는 당나귀가 앞으로 가려하지 않고 왜 때리느냐고 할 때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섭리였습니다 (민22:21-30). 요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간섭인 줄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9-12절). 우리는 그런 섭리가 나타날 때 자신이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인 줄 알고 돌이켜야 합니다.
3. 재앙의 원인자임을 고백하는 요나 (11-12절)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무리가 요나 선지자와 대화중 심히 두려워하고 있을 때 바다는 점점 흉용해졌습니다 (11절上). 점점 거세지는 폭풍으로 인해 무리가 빨리 어떤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나에게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11절下). 그들은 폭풍의 원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요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요나에게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그를 어떻게 해야 폭풍이 그칠 수 있겠는지 그 방책을 물은 것입니다.
그때 요나 선지자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대답했습니다 (12절). 요나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폭풍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징벌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사실 그럴 때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 가장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자기에게 징벌을 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자신이 죄 값으로 죽게 되면 하나님이 더 이상 배가 곤란을 겪지 않게 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장과 선원들과 승객들이 자기 때문에 다 죽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자신을 바다에 던지게 한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스스로 자기 때문에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위기와 고통이 있을 때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법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사회공동체가 고통을 겪을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책임을 느끼고 교회공동체가 고통을 겪을 때 목회자들이 책임을 느끼고 가정공동체가 고통을 겪을 때 믿음의 호주가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결국 ‘내’가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도록 해야 합니다.
4. 바다에 던져지는 요나 (13-16절)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무리는 요나 선지자를 바다에 던지기를 주저하고 여전히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바다가 그들을 향해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13절). 무리는 요나가 폭풍의 원인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요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기보다는 어떻게든지 배를 항구로 대어 거기에 내리게 하려 한 것 같습니다. 자기들을 위해 죽음을 자청한 요나를 비정하게 바다에 던져 죽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배에 재앙의 원인자만 없으면 하나님이 배를 파선시키려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요나를 항구에서 내리게 하려 한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써 노를 저었지만 폭풍은 더욱 심해져 도저히 흉용한 파도를 헤쳐나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의도를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리는 폭풍이 더욱 심해지자 자신들의 노력으로 배를 항구에 댈 수 없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완전히 좌절되자 자기들의 의지를 포기하고 요나의 제시대로 하려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14-15절上).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라는 말은 제발 요나 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 일 때문에 자신들 전체를 죽게 하지 말아달라는 호소입니다.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말은 자신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져 죽게 하는 죄를 자신들에게 묻지 말아달라는 호소입니다. 이는 자신들에게는 요나를 바다에 던져 죽게한 책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는 말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분으로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곧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한 것이니 그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무리가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쳤습니다 (15절). 무리가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그렇게 요동치던 바다가 한 순간 잔잔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바다에 폭풍을 일게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하며 하나님이 바다에 폭풍을 일게 한 이유가 요나를 징벌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상황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16절上). ‘두려워하여’라는 표현이 10절에도 나오는데 그 때는 무리가 요나의 말을 듣고 자기들에게 죽음이 닥칠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것은 공포의 의미입니다. 여기에서는 요나를 바다에 던짐으로써 바다가 평온해진 것을 목격하고 하나님께 대해 놀라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요나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정말로 바다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대해 경탄하는 두려움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은 경외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했다고 했습니다 (16절下). 그들이 배에서 제물을 드리고 서원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제물을 드리고’가 ‘동물의 육체’ ‘제물’ ‘동물을 죽이다’ ‘제사를 드리다’ 등의 뜻을 가진 ‘제바흐’(명.זבח)와 ‘자바’(동.זבח)의 반복으로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리는 제사행위를 말하는데 당시에 짐승이 배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배에서 짐승을 잡아 제사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이방인들도 제물은 신전에서 드렸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산당이나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무리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했다는 말은 그들이 육지로 들어가면 제물을 드리기로 서원했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히브리어를 아람어로 번역한 탈굼역(Targum)에서는 이 부분을 ‘(그들이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희생을 드리기로 약속했다’로 번역했습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그들이 배에서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항구에 도착하여 육지로 들어가면 제물을 드리기로 서원을 하고 육지에 들어가 제물을 드린 것일 것입니다. 한편 구약 해석서인 미드라쉬(Midrash)에는 그들이 우상을 바다에 버리고 욥바로 돌아간 다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의 이방인 뜰에서 제사를 드리고 이스라엘의 종교로 개종했음을 뜻한다고까지 해석했습니다.
5. 큰 물고기에 삼켜지는 요나 (17절)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17절). 이 구절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2장 1절에 배치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무리들은 요나 선지자가 바다에 던져졌기 때문에 그가 죽은 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그 물고기로 하여금 삼키게 했고 3일 후에 다시 토해내게 했습니다 (2:10). 그것은 요나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회개시켜 니느웨에서 말씀을 선포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 ‘큰 물고기’는 정확히 어떤 물고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래라고 하기도 하지만 고래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지중해에는 고래가 거의 없으며 고래는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목구멍이 좁아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상어라고 하는데 고래보다는 가능성이 있어보이기는 합니다. 지중해에는 몸길이가 7~8m 정도나 되는 큰 상어가 상당수 서식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사람을 통째로 한 번에 집어삼킬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지중해에 서식하는 가장 큰 상어는 백상아리(Carcharodon carcharias)로 불리는 상어인데 그것은 몸길이가 11m나 되고 그것은 바다거북이나 바다사자 같은 것도 한 번에 삼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큰 물고기가 상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가 이 큰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3일을 있었다고 했습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씹지 않고 통째로 삼켰다하더라도 요나가 그 물고기 뱃속에서 어떻게 3일 동안 살아있을 수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것은 물고기의 소화액으로 인해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은 오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기 위해 행하신 기적일 것입니다. 마태복음12:40에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 선지자가 바다에 던졌을 때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가 그를 삼키게 하고 3일 동안 그 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3일 후에 물고기로 하여금 그를 육지에 토하게 하여 아주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2:10). 하나님이 요나에게 환난을 겪게 한 것은 그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회개시켜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사람은 사명을 다하기까지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영국이 자랑하는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은 밀림에서 사역을 하다가 사자에게 어깨를 물리기도 하고 말라리아 질병에 27번이나 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달성할 때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하면서 죽는 날까지 사명에 매진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사명이 있는 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으며 담대히 사명에 매진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4:17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43:2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고 했고, 시편23:4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고 했습니다.
<結言>
요나 선지자의 삶은 장차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예언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마12:40, 눅11:29-32, 마28:5-6).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과 상황에 있든지 우리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추구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했고, 빌립보서1:20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고 했습니다.